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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짜빈동 전투 관련 증언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제3권(2003.7.19) p.247-270 에 의하면
□주요 증언 내용
짜빈동 전투의 배경 및 경과
짜빈동을 공격한 적부대의 성격
□세부 증언 내용
질문1:파월 기간과 직책은?
답변1:1966년 10월에 파월 되어 11월 3일 청룡부대 정보참모에 보직되었으며, 이어서 1967년 8월 16일 제3대대장에 보직되어 1968년 5월까지 비룡 작전, 괴룡 작전, 용진 작전 등에 참가했다.
질문2:정보참모로 재임 중이던 1967년 2월 14일 있었던 짜빈동 전투의 배경은?
답변2:최초 깜란에 상륙하였던 청룡부대가 뚜이호아를 거쳐 1966년 8월, 추라이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 지역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국경선인 북위 17도선으로부터 남쪽으로 280㎞지점이며, 사이공으로부터는 북쪽으로 540㎞ 지점이었으며, 전술책임지역의 면적은 약 460㎢에 달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특히 이 지역은 많은 수의 베트공 고위 지휘관과 북베트남 고위 관리들을 배출한 곳으로, 남베트남의 어느 지역보다도 베트공의 세력이 장기간에 걸쳐 구축된 견고한 곳이었다. 또한 월맹군은 베트남 중부지역의 서쪽 산악지대에 형성되어 있는 호치민 루트와 짜봉강(Song Tra Bong) 및 바딴간(Ba Tan Gan)반도, 그리고 짜꾹강(Song Tra Khuc)을 이용한 해상침투로를 상호 연결시킬 경우, 남베트남의 2/3 지점을 분할하여 전략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개념에서 월맹정규군은 추라이 일대의 전력을 증강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첫 번째 목표로 짜빈동(Tra Binh Dong:BS590833)(4)마을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제11중대를 선정하였던 것이다.
질문3:당시 여단에서 짜빈동이 기습될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는지?
답변3:당시의 추라이 및 꽝응아이 지역은 월맹의 정규군이 호치민 루트를 통해 비교적 용이하게 증원되고, 철수할 수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 일대의 지역은 월맹 정규군이 “적이 언제, 어느 곳이라도 기습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의 정보판단이었다.
때문에 중대장의 입장에서는 적의 징후가 있을 때 “나의 기지가 목표일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여단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기지라도 기습당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짜빈동 기지를 대상으로 선정하여 대비한 것은 없었다.
질문4:적들이 짜빈동을 목표로 선정한 이유는 짜빈동에 어떤 특별한 약점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또한 이 때문에 여단에서도 짜빈동 지역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답변4:1967년 1월말, 당시 추라이(Chu Lai)지역에는 월맹군 1개사단이 잠입해 있었으며, 이들의 지도를 받아 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베트공들은 언제 어느 지역이라도 기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 같은 예로 1967년 1월 10일 짜빈박(Tra Binh Bac:BS548865) 마을 일대에서 기습당한 제3대대 전술지휘소 요원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당시 Tra Binh Bac 마을 일대는 아군이 자유롭게 통행하던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제3대대 전술지휘소 요원들도 1개소대 정도의 엄호병력만을 대동한 채 평상시와 같이 도보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대본부의 이동은 무전기 안테나가 10여개 이상이 되기 때문에 적들이 안테나 숫자만 파악하면 대대의 지휘부라는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있던 적들에게 아주 양호한 표적을 제공해준 셈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이 적들은 아군의 취약점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언제 어느 지역이라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3대대 지휘부가 기습을 받았던 Tra Binh Bac 마을의 동남쪽의 5㎞ 지점의 1번 도로 변에 위치하고 있던 제11중대의 방석(당시는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기지를 방석이라고 불렀다. 공중에서 부대 주둔지를 내려다보면 방석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은 대양에 떠 있는 섬과도 같은 미약한 존재였다.
1967년 2월 중순 당시 여단에서는 전 부대에 적의 기습가능성을 경고하고, 방석의 자체방어대책을 철저히 강구하도록 경고하고 있었으며, 제11중대 방석에 대하여 특별한 경고를 준 것은 없었다. 결론적으로 당시 여건으로 볼 때 추라이 지역에 있는 어떤 방석(기지)도 적으로부터 기습의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었으며, 11중대 방석이 특별히 어떤 취약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질문5:작전간 여단에서 조치한 사항은?
답변5:가장 중요한 것이 화력지원이다. 그런데 적이 워낙 강력하다보니 FSCC에서도 손을 들어 버렸다. 승패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그래도 정보참모인 내가 비교적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를 보아가며, 연결되는 통로는 물론 농로까지도 모두 핀을 꽃아 가며 빈틈없이 사격을 퍼부었다.
105㎜와 155㎜는 물론이고, 미군화력까지 동원할 수 있는 화력은 모두 동원하여 때렸다. 기지 주변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살아 남지 못할 만큼 때렸다. 결국 “짜빈동 전투는 포병의 화력지원이 승리를 뒷받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당시 울타리에 바짝 붙은 병력을 제외하고, 후속부대들은 포병화력에 의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질문6:진내 사격의 문제가 토의되었다는데?
답변6:이 같이 사격을 집중하면서도 워낙 대규모의 적이 공격을 계속하다보니 필연적으로 일부지역이 돌파될 수 밖에 없었다. 위기 상황이었다. 이때 “어차피 안될 바에야 진내사격으로 적 부대를 격멸하자!”는 안이 제기 되었다.
그러나 당시 제11중대의 진지는 아군의 사격에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유개화된 시설이 아니었다. 따라서 진내사격으로 적을 격멸하자는 안은 “적과 아군을 동시에 쓸어버리자”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당시 의견들은 진내사격을 하자는 쪽이 더 많았다. 그러나 나는 단호히 반대했다. 당시 반대의견을 낸 소수 인원 중에 내가 가장 선임 계급자였다. 당시 진내사격에 대비하라는 지시는 아마 중대에도 하달되었을 것임으로 당시 중대장이었던 정경진 대위에게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질문7:짜빈동을 공격한 적 부대는 월맹 정규군이었나요?
답변7:당시 추라이 일대에는 월맹 정규군 1개 사단이 은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짜빈동을 직접적으로 공격한 부대는 월맹 정규군이 아닌 베트공으로 판단했다. 나는 다음의 두 가지를 그 근거로 본다.
첫째 짜빈동을 공격하는 적 부대는 아군을 포로로 잡아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요한 작전을 수행하기에 앞서 포로를 획득하여 상대편의 정보와 분위기를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은 전투를 본업으로 하는 정규군에게는 상식에 속한다. 이때 만약 적들이 포로를 획득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얼마든지 획득할 수 있는 기회였다. 따라서 “그들은 포로 획득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짜빈동을 공격하였던 부대들은 전투를 본업으로 하는 정규군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 짜빈동을 공격한 적 부대가 월맹 정규군이 아니었다는 두 번째 근거로 전투가 있었던 날 새벽, 나는 여단장과 참모장을 수행하여 현지를 방문하였다. 현지에 가서 확인해 보니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시체의 숫자가 예상보다 너무 적었다는 것이다. 여단에서 출발 할 때의 예상은 어마어마한 숫자의 시체가 누워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눈앞에 보이는 시체의 숫자는 불과 몇십 구에 불과하였다.
시체를 관찰해 보니 체격들은 무척 좋았다. 정규군의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 또한 신발들이 제각각 이었다. 슬리퍼를 신은 인원, 자동차 타이어로 만든 신을 신은 인원, 그리고 맨발인 병사도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이 들이 베트공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는데, 적어도 이들이 정규군이었다면 어느 정도 통일된 복장을 갖추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월맹의 정규군들은 게급장이 유난히 눈에 띠는 북한군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 문제는 당시 해병대 전사편찬위원을
질문8:짜빈동 전투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교훈은?
답변8:첫째로 정보판단의 중요성을 들 수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적의 대부대가 짜빈동 기지를 기습할 것이라는 내용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전반적인 적 상황과 당시의 징후를 분석한 결과 어느 곳으로라도 적의 기습이 있을 것임을 예측하고 예하부대에 부단히 경고하여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도록 하였던 것이다.
둘째 지원화력의 적절한 이용이다. 전투에서 적절한 화력의 운용은 전투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중대의 관측 장교로부터 화력지원협조, 그리고 여단본부에 이르기까지 지원부서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적의 후속부대를 차단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셋째 진내사격은 아군의 대피시설이 확실히 강구되어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지시설은 평소에 진내사격이 가능하도록 진지의 유개화 등 대비시설을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질문9:기타 기억에 남는 일은?
답변9:짜빈동 전투가 끝나자, 전투결과를 취재하기 위하여 사이공에 있는 세계 굴지의 언론사 취재진 30여명이 C-46 수송기에 가득타고 왔다. 한국군의 전과 홍보와 아울러 국위선양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청룡부대의 대외 홍보능력이 취약하여 좋은 기회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전투가 끝나고 대대적인 포상이 이루어졌다. 중대장과 소대장이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기타의 인원들도 적절한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유독 대대장 조형남 중령은 표창장 하나도 받지를 못했다. 짜빈동 전투에 앞서 지난 1월 10일 짜빈박 마을에서 있었던 대대 지휘소 피습 사건의 문책이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실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고 하지 않는가? 짜빈박은 그 자체로 처벌을 하거나 조치하고, 짜빈동은 짜빈동 자체로 조치해야 한다고 본다. 짜빈동에서 중대장이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대대장의 지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따라서 어떤 식으로라도 대대장에 대한 응분의 조치가 있어야 했다고 보는 것이다.
□주요 증언 내용
짜빈동 전투의 배경 및 경과
짜빈동 전투시 제11중대의 상황 및 조치
□세부 증언 내용
질문1:파월기간과 직책 및 경험하신 작전은?
답변1:해병대 사령부 000으로 근무 중에 파월을 자원하여 1966년 10월 월남에 도착하였으며, 11월 1일 제11중대장으로 보직되어 1967년 4월 14일까지 근무하면서 용안작전, 짜봉전투, 투망작전, 짜빈동전투에 참가하였다.
질문2:중대 기지인 짜빈동의 지리적 배경은?
답변2:짜빈동 마을(Tra Binh Dong 4:BS590833)은 꽝응아이(Quang Ngai) 성(省)의 선띤(Son Tinh) 군(郡)에 속하는 마을로, 꽝응아이(Quang Ngai) 시(市) 북쪽 12㎞지점에 위치하며, 또한 중대의 기지는 여단본부로부터는 서남쪽으로 약 6㎞, 제3대대 본부로부터는 남쪽으로 약 7㎞ 정도 떨어진 표고 약 30m 정도의 구릉에 위치하여 기지는 둘레가 800m, 남북 300m, 동서 200m 쯤 되는 계란형 모양의 기지였다.
중대기지의 동쪽에는 1번 도로와 철로가 있고, 남쪽에는 527번 도로가 있으며, 기지 바로 서쪽과 남쪽에는 논으로 형성되어 있다. 특히 중대기지 서북쪽 1.5㎞ 정도에는 숲으로 뒤덮인 속칭 ‘돌산’이 있는데, 중대 기지로부터 이 돌산으로 향하는 지형은 조그만 둑들이 나열된 것처럼 기폭이 심하여 아군에게는 사계가 아주 불량한 반면에 적에게는 은폐, 엄폐에 아주 양호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를 가장 주요한 접근로로 생각하고 평소에도 항상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질문3:기지의 전술적 가치는?
답변3:물론 도상으로 보아도 퍽 중요하게 느껴진다. Tra Binh Dong은 남서쪽에서 여단지역에 들어오는 첫 번째의 관문이다. 따라서 우리 중대만 무너뜨리면 바로 1번 도로를 중심으로 위치하고 있는 여단본부, 포병대대, 제2중대로 향할 수 있고, 더 나아가 Chu Lai와 Quang Ngai 시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이라고 할 수 있다.
질문4:기지 주변의 적정은?
답변4:전투상보에 나와 있는 그대로인데, 특히 우리 중대 부근 마을은 월남 정부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실상 완전한 적지였다. 그러니까 주민의 대부분이 베트공 또는 그들의 동조자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기지 바로 남쪽의 Tra Binh Dong(4) 마을은 우리가 그 마을 우물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주민들과 접촉이 잦아 상당히 친밀해졌다.
내가 중대장으로 오기 전에는 ‘부비트랩’ 폭발사고가 잦았는데, 내가 부임하여 이것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주민들의 동태를 관찰한 결과 주민들의 소행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니까 그들이 낮에 일하는 채 하고 논밭에 엎드려 있는 것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비트랩을 매설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일하는 것을 은밀히 주시하였다가 돌아간 후 확인해 보면 틀림없이 부비트랩이 매설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중대원들이 주민들이 일하였던 곳은 피하니까 부비트랩 폭발사고는 줄어들었다.
전투 당일인 14일 낮에는 2월 16일부터 실시할 예정이었던 거룡작전을 위한 첩보수집의 일환으로 “월맹군 제2사단의 사단사령부를 찾으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헬리콥터를 타고 기지 남서쪽 일대를 정찰하였는데, 결국 찾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때 적들은 이미 기지 가까이에 이동하여 매복하고 있었으니, 발견될 리가 없었다.
또 한가지는 정찰 후 기지에 복귀하니, 기지 주변으로 수천 명이나 될 듯한 주민들이 서에서 동으로(즉 1번 도로 쪽). 피난민과 같은 차림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상히 여겨 그들에게 물어보니 “작전지역(17일부터 거룡작전 계획)에서 물러나라고 하여 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제는 정반대로 다시 동에서 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다시 물어보니 “피난 갈 필요가 없다고 돌아가라 해서 간다”는 것이었다.
나 혼자만이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이들이 이날 밤 공격한 적이 아니었느냐? 이들이 피난민을 가장하고 이동하는 채 하면서 기지주변의 지형을 익히고, 이동하는 연습이 아니었느냐?”고 생각했다.
질문5:적의 기습공격 가능성에 대해 상급부대에서 접수한 첩보는?
답변5:“크리스마스 및 신정 휴전기간에 많은 병력과 중장비를 증강시킨 적들이 침투해 올 것이다”는 정보를 여단으로부터 입수하였다. 또한 며칠 전 여단장께서 중대기지를 방문하여 “제11중대 서쪽 산악지대에 월맹 정규군 6개 대대가 집결하고 있으며, 제11중대를 공격하려는 징후가 있다”는 말씀을 하였으며, “소대단위 정찰을 철저히 하며, 적의 동태를 철저히 파악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1967년에 접어들어 중대 전술기지 주변에서 월맹 정규군 베트공 중위를 생포한 바 있고, 정찰 중에는 적과 조우하여 접전 끝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체코식 저격용 소총을 노획했으며, 소대의 정찰대가 적 중대 이상의 매복대와 조우하는 사례가 발생함으로써, 적이 증강되었음을 입증하고 있었다.
이 같이 심상치 않은 징후에 따라 대대에 나가있던 제1소대가 10여일 전에 복귀되었으며, 2월 13일에는 제1중대 제3소대(정정상 소위)가 증원되었다. 또한 참모장 및 대대장이 중대기지를 방문하여 방어태세를 확인한바 있었으며, 강기천 해병대 사령관께서 내일(2월 15일) 여단을 방문한다는 무전 연락도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분위기는 증강되어 가는 적의 공격징후와 앞으로 3일 후(2월 17일)에 있을 한․미․월 3국의 협조된 작전인 거룡작전 등 모든 상황이 초 긴장감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질문6:기지 방어력 보강을 위한 조치는?
답변6:중대는 1966년 11월 21일 여단본부 외곽경계부대로 투입되는 제9중대와 교대하여 Tra Binh Dong 기지를 인수하였으며, 지속적으로 진지를 보강해 왔다. 특히 1967년에 접어 들어 적의 기습공격의 가능성이 증가되면서부터 “1967년 1월말까지 외부의 지원 없이 48시간 이상 지탱 가능하도록 진지를 보강하라!”는 여단의 지시에 따라 기지 방어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때 주요 화기호를 유개화하고, 기존에 구축되어 있던 교통호에 추가하여 외곽의 개인호와 취침호가 연결될 수 있도록 보완하였으며, 분대로부터 소대를 경유하여 중대 전체가 상호 연결되는 진지를 구축하였다, 특히 각 조별 진지의 후방에 취침호를 만들어 상황 발생시 즉각 비상배치가 가능하도록 조치하였다.
주둔지 외곽의 철조망은 울타리형(유자) 2중과 윤형 5중으로 했고, 전술철조망으로 보강했으며, 제일 외곽에는 조명지뢰를 설치했다. 또한 여단으로부터 상황발생 일주일전에 대인지뢰를 획득하여 매설했다. 그런데 최초 여단에서는 대인지뢰의 재고량이 부족하다며, 보급에 난색을 표했으나, 필요성을 역설하여 겨우 수령할 수 있었는데,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는 대인지뢰의 효과를 크게 보았다.
질문7:소대 배치 특히 제1중대 제3소대 배치는?
답변7:당시 기지내의 병력은 중대의 건재 3개 소총소대와 화기소대 외에 배속부대로 제1중대 제1소대, 4.2인치 박격포 1개소대, 81㎜ 박격포 1개반, 106㎜무반동총 1개분대를 등으로 총병력 294명이었다.
이 병력으로 북쪽에 제3소대, 남서쪽 제1소대, 남동쪽 제2소대를 배치하였으며, 주요화기를 중앙에 배치하여 전지역에 대한 지원이 가능하도록 배치하였다. 그리고 증원된 제1중대 제3소대를 예비로 하여 최초 각 소대 후방에 1개분대씩 배치했으나, 1차 공격 후 배치를 조정하여, 적의 주 접근로이고 최초 공격방향인 제3소대 후방에 집중 배치하였다. 또한 화기소대의 기관총은 각 소대에 배속하였고 106㎜는 중대에서 통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적의 주접근로에는 병력이 이중으로 배치되어 큰 효과를 보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제1중대 제3소대를 제2선에 배치하지 않고, 제1선에 배치하여 좀 더 조밀한 방어편성을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질문8:주요 간부의 편성은?
답변8:당시 중대장은 본인, 부중대장 양백수 대위, 화기소대장 김기홍 중위, 제1소대장 신원배 소위, 제2소대장 김성부 소위, 제3소대장 이수현 소위, 60㎜ 박격포 반장 김상열 중사 등이었다.
또한 배속부대장은 제1중대 제3소대장 정정상 소위, 105㎜ 포병 관측장교 김세창 중위, 중포중대 제2소대 FDC 반장 김세기 대위, 중포중대 제2소대장 이정국 중위 등이었다.
질문9:교육훈련은?
답변9:나는 특히 정신교육을 중요시하였고, 비상배치훈련, 사격훈련, 역습훈련 등을 계획에 따라 꾸준히 반복적으로 실시하였다. 특히 적의 공격이 주로 야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전을 고려하여 훈련은 주로 야간에 실시하였다.
또한 매일 야간에는 비상배치훈련을 실시하였으며, 적의 기습 당일에는 3일 후에 실시될 거룡작전에 대비하여 중대전체가 사격훈련을 실시하였다. 한편 사격군기는 주야를 막론하고 항상 중요하지만, 야간전투에서는 특히 중요하기 때문에 사격군기를 특별히 강조하였다.
질문10:전투 당일(1967년 2월 14일)의 기상과 조명은?
답변10: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마저 불어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안개가 많이 끼고 비가 좀 내렸는데, 조명효과는 감소되었지만 그래도 주변이 희미하게 보이는 정도였다.
질문11:당일 야간에 조치한 사항은?
답변11:해가 기울자 소대장을 집합시켜 적의 동향이 이상하니 방어 태세에 완벽을 기하고 청음초를 잘 운영하여 적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도록 순찰 근무 강화를 지시했다.
또한 금일 저녁에 적이 공격하여 올지 모르며, 앞으로 있을 거룡작전에 지금까지 연마하여온 전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자는 다짐을 하면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한 캔의 맥주를 여섯 명이 한 모금씩 나누어 마시고 헤어졌다.
이어서 나는 곧 하사관들을 집합시켜 순찰근무강화 요령을 지시하였는데, 이때 하늘에 새까맣게 몰렸던 먹구름은 어느덧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며,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 같은 기상을 감안하여 관측이 불량하고 청음이 곤란하므로 재차 각 소대에 청음초 근무를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질문12:2월 14일 야간의 상황과 조치 사항은?
답변12:이날, 즉 1967년 2월 14일 23:20경이었다. 제3소대 정면에 나가있던 청음초로부터 “인기척이 있다. 전방 10m 거리에 움직이는 물체가 있는데, 적들인 것 같다”는 내용의 보고가 들어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요란한 폭음과 함께 철조망의 일부가 절단되었다. 이에 따라 청음초를 철수시키도록 지시하면서 81㎜ 박격포 조명탄을 공중에 올렸다.
그때 제3소대 정면에서 적 1개소대 병력이 접근해 있는 것을 관측하고, 사격 명령을 하달하였다. 포병사격을 즉시 요청하여 적의 후방을 제압하였다. 이때 적은 소대병력 이상으로 판단되었으나 이상하게도 계속 응사하지 않았으며, 후속부대의 공격도 없었다. 그리고 적 시체가 철조망에 걸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차후 공격을 위한 기만전술이거나 또는 공격준비를 하기 위하여 접근하다가 우군의 청음초에 조기 발견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날씨는 더욱 악화되어 5m 전방도 관측할 수 없었다. 적의 재차 공격에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실탄을 재분배한 후 요란사격을 증가시켰으며,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나 적은 조용하기만 하였다.
질문13:2월 15일 새벽의 상황과 조치 사항은?
답변13:날이 바뀌어 1967년 2월 15일이 되고, 새벽 4시가 조금 지나자 제3소대 정면 제1분대의 청음초 조정남․도성용 일병이 철조망 밖에서 “월남인 특유의 체취(體臭)가 나고, 물체가 움직이는 소음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청음초를 철수시키고, 전 중대를 비상배치 시킨 후 조명탄을 올리자 적의 대병력이 공격해 오는 것을 관측할 수 있었다.
적색 5성 신호탄이 치솟았다. 중대의 전 화력은 적을 향해 쏟아졌다. 적이 응사하기 시작했다. 중대기지 사방으로 적의 기관총 사격이 집중되면서 진 내에는 무수한 적의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굉장한 폭음이 나면서 제3소대 전방의 철조망이 하늘로 날아 올랐다. 제3소대 정면의 철조망이 파괴되자, 적들은 이 지역을 통하여 굉음을 지르면서 큰 파도와 같이 까맣게 밀려오고 있었다.
또한 남쪽에 있는 제1소대 정면의 철조망도 20여 m가 파괴되면서 적들이 파죽지세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각 소대장들에게 “해병의 명예와 전통을 위해서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라. 죽음으로 진지를 사수하라. 우리는 지지 않는다. 안심하고 싸워라!”고 외치며, 대원을 독려하였다.
제3소대 통신은 이미 마비되었고, 드디어 육박전이 전개되었다. 제1중대 제3소대는 제2방어선에서 맹렬한 사격을 가했으며, 제3소대는 계속 육박전으로 적을 견제하면서 제1소대와 제2소대에 합류되었다. 적은 60미리 진지까지 침투했으며, 다시 OP 바로 밑까지 침투해 왔고, 제2방어선에서 육방전과 수류탄 투척으로 치열한 백병전을 치르고 있었다.
사계가 좋은 제1소대 정면에는 신원배 소위의 놀랄만한 사격지휘로 적을 계속 제압하고 있었으며, 제2소대는 기관총 사격만 받고 있을뿐 적이 침투하지 못했다. 이때에 제1소대와 제2소대지역 그리고 OP를 중심으로 중대본부지역에 적의 박격포와 대전차 직사포탄이 집중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잠시동안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대대장으로부터 무전으로 “해병의 명예와 전통을 위하여 끝까지 싸워라, 그리고 반격 부대가 여단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으며 상공에는 ‘스쿠피(AC-47)’가 대기하고 있다” 는 격려를 받을 때는 눈물이 앞을 가리었다. 그러나 기상조건으로 ‘스쿠피’보다는 포병사격이 효과적일 것으로 판단되어 1개대대 병력을 살상할 수 있다는 ‘스쿠피’를 사용하지 못했다.
진 내에 침투한 적은 200여 명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싸우기를 두 시간 청룡은 기대 이상으로 잘 싸우고 있었다. 나는 도리어 역습을 결심했다. 제1소대 1개분대를 좌측으로 제2소대 1개분대를 우측으로 기동시켜 진 내의 적을 압축포위하고, 제1중대 제3소대 요원과 그리고 제3소대 요원의 일부를 특공대로 편성하여 화기 소대장이 지휘하도록 하여 OP로부터 중앙으로 돌격하도록 하였다.
이때 여단장으로부터 격려문이 날려왔다. “전세는 아군에게 절대로 유리하고, 승리는 제11중대의 것이다. 최후까지 침착한 전투 지휘와 용감성을 발휘하여, 1명의 적이라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소탕하라, 우리의 관심은 제11중대에 집중되어 있고, 반격부대를 위시하여 모든 지원은 완벽하다. 국가의 명예와 해병의 용맹성을 과시하라!”는 내용이었다.
성난 청룡 앞에 적은 비참하게 죽어갔다. 교통호에는 적의 시체가 쌓여있고, 승리의 함성은 하늘에 메아리쳤다. 도주하는 적에게 젯트기가 폭탄의 선물을 안겨 주었고, 땅속에 묻어 버렸다. 장렬하게 전사한 해병과 부상병 후송을 서둘러야했다. 일초, 일각을 다투고 있는 중상자부터 후송되었다. 무전기에서는 성급하게 전과를 묻고 있었다. 그러나 후송을 끝내고 인원파악이 완료된 후에야 나는 전과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질문14:적의 병력을 어떻게 보았는가?
답변14:최초에는 1~2개중대로 보았으나 잠시 후 제1소대 쪽에 1개대대, 제3소대 쪽에 1개대대로 판단했고, 기타 후속부대와 지원화기부대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적의 의도는 2개의 공격제대가 남과 북에서 협공으로 기지를 양분하여 각개격파 하려는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제2소대 쪽에 침투하지 않는 것은 화력으로 아군의 병력과 화력을 고착시키려는 것으로 추정했다.
질문15:역습 상황은?
답변15:날이 밝아지는데, 제1소대와 제2소대는 적을 성공적으로 저지했고, 돌파 당한 제3소대 쪽도 잠시동안 적의 기세가 주춤했다. 나는 이때를 역습의 호기로 잡았는데, 그 순간 적도 새로운 돌격을 준비한 것 같았다.
이 같은 시기에 아군이 먼저 적을 강타한 것이 효과가 컸던 것 같다. 그때 내 계획은 제1소대와 제2소대에서 각 1개분대씩을 뽑아 돌파구의 입구를 차단함으로써 적을 양분시킨 다음 섬멸하려 했다. 역습이 시작되자 적은 교통호를 따라 이리저리 몰려 다녔는데, 여기에 3.5인치 RKT를 퍼부으니 적이 모조리 죽어갔다. 3.5인치 RKT의 위력이 대단했던 것 같다.
질문16:증원부대인 제6중대는 언제까지 어디를 수색했습니까?
답변16: 그 이튿날까지 주로 기지 주변을 수색했던 것 같다.
질문17:다른 말씀하실 것은?
답변17:전투를 지휘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 중대원의 사기가 적보다 훨씬 높았던 것 같다. 움직이는 행동이나 활동이 우리가 훨씬 활발했고 이것이 육안으로도 인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기겠구나 하는 승리의 자신감이 생겼다.
또한 교육, 훈련 등 모든 전투준비가 내가 바라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했고, 대원들도 우리 진지에서 한번 싸워 보았으면 좋겠다. “올 테면 와 보라”하는 생각들이었다. “전투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질문18:당시 야간매복을 실시하지 않았는데, 특별한 이유는?
답변18:전투가 끝난 후 주월사 전투 평가단이 두 가지를 지적하였는데, 첫째는 대민 선무공작이요, 둘째가 바로 매복문제였다.
대민 선무공작의 문제점에 대하여, Chu Lai는 호치민의 고향이며, 베트공 간부들 중에도 이 지역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주민들이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주민들의 기질이 드셀 뿐만 아니라 적성이 강하여 잘 먹혀들지를 않았다. 특히 바로 이웃에 있는 Tra Binh Dong(4) 마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해왔으나 효과는 크지 않았다. 따라서 중대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매복의 문제도 우리 중대 기지가 너무 적지 속에 있기 때문에 매복대를 내 보내는 것은 소규모 부대를 바로 사지에 보내는 것이고, 또한 기지 방어력이 약화됨으로써 오히려 각개격파 당할 우려가 크다고 판단했다. 더욱이나 주민들이 우리의 행동을 주시할 것으로 보고, 기지방어력을 약화시킬 수 없었다.
또한 구정 휴전기간에 소대 정찰대가 중대 전술기지 서쪽 1㎞ 정도에 위치한 정글지역에서 적 1개 중대 규모 이상의 부대와 접촉하였으며, 농민을 가장한 수많은 적이 주위에 산재되어 있음을 관측하였다. 그리고 상급부대로부터 전파되는 적정과 실제 중대가 접촉하고 있는 적정이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대부대의 적이 1㎞의 거리를 두고 사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매복대 운용이 어떤 의미를 갖겠는가?
만약에 매복대를 내 보내었다면, 대양(大洋)에 조약돌 하나를 던지는 효과를 보았을 것이나, 중대의 중요한 전투력이 각개격파 당하는 결과를 가져 왔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잘못된 점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청음초 운용이 적합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 같은 신념은 확고하다.
질문19:최초 3.5인치 RKT의 운용은?
답변19:2문은 제1소대 돌파구, 2문은 제3소대 돌파구의 적을 제압토록 하였다.
질문20:항공기와 포격의 선택시 고려사항은?
답변20:대대장이 “야포를 계속 사용하겠는가, 아니면 항공기의 공중폭격을 이용하겠는가?”를 중대장이 결심토록 하였던 바 나는 항공지원 사용은 각종 곡사화기 사용에 제한을 줄 것이고, 날씨마저 불량하여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아 야포를 계속 사용하기로 결심하였다.
만일 아군의 전황이 불리하게 되어 적이 중대를 유린하게 될 경우 항공기에 의한 무차별 진 내 사격을 요청하여 적과 같이 전부 죽을 것을 각오하고 항공기를 공중 대기하도록 하였다.
질문21:정찰대 운용은?
답변21:여단장도 전투직전에 정찰대를 돌산너머로 보내지 말도록 나에게 유의를 시켰다.
질문22:증원부대 투입 시간 지연에 대하여?
답변22:나의 기억으로는 항공기의 Air Strike 직후에 증원부대가 도착한 것으로 안다. 제6중대 투입은 사실상 전장 정리에 의미를 두었을 것이다.
질문23:교통호 구축 문제에 대하여?
답변23:일부에서는 부채꼴 모양의 교통호를 구축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였으나, 이것이 가지는 결점도 있는 것이고, 특히 인접분대와의 협조 보급품, 탄약분배 등을 실시하는데 불리하다.
질문24:적이 아군에 대한 정보의 정확성에 대하여?
답변24:중대기지 1㎞까지만 접근해서 쌍안경으로 관측했다면, 그 정도의 첩보는 적이 능히 수집 가능하다. 적이 계획된 공격에 그 정도의 준비는 가능하였을 것이다.
질문25:본 전투가 청룡부대 작전에 미친 영향은?
답변25:첫째 짜빈동 전투 후에 Chu Lai 및 Quang Ngai 지역에서는 더 이상 적의 저항이 없었으며, 청룡부대가 호이안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계기가 조성되었다. 둘째 한국군이 가지고 싸웠던 M1 소총은 적의 AK 소총보다 성능이 떨어짐을 실감하게 되어 주월한국군의 장비 현대화를 미국측에 강력하게 요청하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주월 미 해병보다 주월한국군이 먼저 M16 소총으로 정비케 되었다. 셋째 한국전쟁 당시 해병대가 종전의 작전에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별명을 얻었던 반면, 짜빈동 전투로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별명을 또 하나 추가(외국신문의 기사) 하게된 사실 등을 들 수 있겠다.
질문26:본 작전의 성공요인을 다시 한번 요약한다면?
답변26:첫째, 적에 대한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판단이었다. 여단에서는 적이 크리스마스와 구정의 휴전기간을 이용하여 여단의 전술책임지역 내에서 전력을 정비하고, 아군진지를 기습할 것에 대비하여 2월 4일에는 제11중대를 완전한 병력으로 충원하였고, 2월 13일에는 제1중대 제3소대를 증원시켜, 충분한 방어력을 확보하였다.
둘째, 고도의 사기를 유지하고 있었고, 확고한 지휘계통이 확립되어 있었다. 평소에 정신교육과 일상생활을 통해 전 중대원이 인화단결과 전우애로 굳게 뭉쳐 있었다. 이에 따라 전 중대원은 각급 지휘자의 지휘하에 끝까지 자기 위치를 사수하였고, 분대장, 소대장, 지원부대장은 중대장의 명령을 철저히 이행하였다.
셋째, 정확한 상황판단과 적절한 즉각조치를 들 수 있다. 적의 기습 당일인 2월 14일 23:00에 청음초가 적의 행동을 조기에 발견함으로써, 81㎜ 조명탄을 계속 발사했으며, 여단 포병대대에서 105㎜ 야포로 적의 접근로와 예상 집결지를 맹타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적의 행동에 많은 지장을 주게 되었고, 적의 공격시간이 늦어짐으로 인해 야간작전 시간이 짧아져 아군방어에 유리하였다.
넷째, 적시 적절한 지원화력의 운용이었다. 적의 예상 침투로와 후방 집결지에 대하여 신속 정확하게 화력을 퍼부어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강요하였다.
다섯째, 과감한 공격정신과 근접전투가 승리의 요인이 되었다. 여유 만만한 자세로 적을 철조망 가까이 유도하여 야간사격 효과를 증진시켰으며, 특히 전 장병이 백병전에서 임전무퇴의 공격정신으로 최후의 일각까지 사력을 다하여 적을 제압하였다.
이상과 같은 성공요인과 작전 간 상황을 종합하여 도출할 수 있는 전훈은 첫째, 지속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숙지해야 한다. 둘째, 고도의 사격군기를 유지하고, 확고한 지휘계통을 확립해야한다. 셋째, 적시 적절한 지원화기의 운용으로 큰 전과를 올려야 한다. 넷째, 예비진지도 주진지와 같은 요령으로 구축되어야 한다. 다섯째, 적의 박격포 사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완벽한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한다. 여섯째, 백병전에서는 소총과 대검 이외에도 야전삽과 곡괭이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일곱째, 베트공이 풍기는 월남인 특유의 냄새로써, 적의 접근을 사전에 알 수 있었다. 여덟째, 육박전과 야간 사격시 일정한 장소에서 계속 사격할 경우 사격진지의 위치가 폭로되기 때문에 수시로 사격진지를 바꿔야 한다. 아홉째, 근접전투에서 3.5인치 로케트포와 수류탄은 매우 유용한 무기였다.
□주요 증언 내용
짜빈동 전투시 제1차 공격 상황과 조치
짜빈동 전투시 제2차 공격 상황과 조치
□세부 증언 내용
질문1:파월기간과 직책 및 경험하신 작전은?
답변1:파월을 자원하여 1966년, 파월되었으며, 제11중대 제1소대장으로 근무하였다. 소대장 재임 중 용안작전과 투망작전 및 짜빈동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어서 1970년 9월에 2차로 파병되어 10월 8일부터 1971년 3월 6일까지 제1중대장으로 근무하였으며, 중대장 재임 중 황룡8호 작전으로부터 황룡13호 작전까지 참가하였다.
질문2:짜빈동 전투시의 상황은?
답변2:당시 나는 제11중대 제1소대장으로 중대 기지의 남서쪽을 담당하고 있었다.
질문3:2월 14일 23:20에 1차 공격이 있었는데, 제1소대의 상황은?
답변3:그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는데, 적의 제1차 공격은 제3소대 정면에서 단 한차례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담당하고 있던 제1소대 정면에는 공격이 없었는데, 이 같은 적들의 공격 양상은 우리를 교란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이제까지의 적의 징후와 기상 등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또 다른 공격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완전한 전투준비태세를 갖춘 상태 하에서 모두 군화를 벗지 않고 옷도 입은 채로 가면 상태로 비상대기 하였다.
질문4:2월 15일 새벽 2차 공격의 상황과 조치는?
답변4:그때가 04:10경이었다. 적의 공격은 1차 공격과 마찬가지로 제3소대 정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적의 포탄과 사격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는데, 얼마 후 조명탄 아래 우리 소대 앞을 보니 숫자를 셀 수조차도 없는 적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조명탄이 뜨자 적은 땅 바닥에 엎드렸는데, 일시에 지면이 새까맣게 됨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소대정면에 수백 명은 족히 되는 적이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대원들이 사기를 돋구어 주면서 크레모아를 거침없이 폭파시켰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수십 명의 적이 쓰러지면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는 아군의 사기를 높였고, 적의 일진은 격퇴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적의 제2진에 의한 공격이 계속되었으며, 아군의 총구는 계속 불을 뿜어 접근해오는 적들과 함께 도주하는 적들을 조준 섬멸하였다. 아군의 총탄세례 앞에 일단 후퇴한 적은 철조망 후방의 바위 뒤에 대전차 유탄포를 설치하고 계속해서 불을 토하여 아군의 벙커와 OP에 명중시키고 있었다. 이를 방치할 경우, 아군의 피해가 심각할 것임은 말할 나위 없었다.
나는 즉시 특공대로 제압할 것을 결심하고, 특공대를 조직하였다. 선임하사 김용길 중사, 그리고 이진 병장과 조용화 상병이 제일 먼저 따라 나섰다. 비오듯 쏟아지는 탄우를 뚫고 포복을 시작하여, 수류탄의 투척거리까지 접근한 뒤 완전히 섬멸하자 적의 공용화기는 침묵을 지켰다. 즉시 바위 밑으로 포복으로 접근하여 대전차 유탄포 3문을 노획하여 들어왔다.
적은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으로 우리 소대를 공격하였으나 결국 소대의 방어선을 뚫지 못한 채 수많은 시체만을 남기고 도주하였다. 뻥 뚫린 철조망으로 또 많은 적병이 밀려올 것 같은 마음이었으나, 대낮같이 밝은 조명탄 불빛 속에 전방을 향해 총구를 조준하고 있는 대원들을 볼 때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통신기를 통하여 들려오는 중대장의 음성이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다.
“적은 3소대 진지를 돌파하였으며, 지금 육박전이 전개되었다. 제1소대와 제2소대는 1개분대씩을 반격부대로 차출하여 즉시 적을 격멸하라” 이 같은 중대장의 반격 명령에 따라 나는 우일선 분대인 제1분대를 인솔하여 4.2인치 박격포 진지를 향해 반격을 개시했다. 적의 포탄은 여기저기서 터져 파편이 날아오르고 있었고, 중대 OP까지 접근한 적은 수류탄과 자동화기로 저항하면서 아우성과 함께 몰려오고 있었다.
내가 지휘하는 제1소대 제1분대는 중앙에서 반격하고, 제2소대의 반격부대가 중대장의 무전망에 의한 지휘를 받으며 돌격해 들어갔다. 적을 포위망에 압축하고,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불을 뿜는 3.5인치 RKT 포탄에 기세가 꺾인 적들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패퇴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먼동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승리가 찾아 온 것이다. 즐비하게 쓰러진 적들의 시체와 함께 많은 무기가 흩어져 있었다. 제11중대가 적 1개 연대와의 격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질문5:특공대 활동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면?
답변5:제1소대 정면으로 진출한 적은 소대의 맹렬한 화력으로 더 이상의 진출이 어려워지자, 소대 앞(철조망 외곽) 바위 뒤에 공용화기들을 거치 하고 맹렬한 사격을 가하면서 중대를 위협하였다.
나는 적의 공용화기 진지를 공격하게 위하여 특공대를 편성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선임하사 김용길 하사와 이진 병장, 조용화 상병, 이렇게 넷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소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포복으로 접근하여 문제의 공용화기 진지를 격파하였다. 비록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만, 그때 나는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살아서 되돌아온다는 것은 생각지 못할 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
질문6:전투를 마치고 느낀 소감은?
답변6:내가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적의 소총이 우리 M1보다 성능 면에서 훨씬 우수하다는 것이었다. 적의 사격은 마치 우리가 LMG를 사격하는 소리와 같았다. 그때 우리는 M16 소총은 교육용 밖에 없었고, 우리의 소총은 M1과 CAR 소총이었다.
질문7:월남전쟁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 및 소감은?
답변7:첫째는 죽기를 각오하고 적을 상대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어려운 역경에 봉착할 때 지휘관이 앞장을 서게 되면 부하들이 용기 백배하게 되어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평소 전기전술을 연마하고, 지휘관의 명령에 따르면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을 부여할 수 있었다. 넷째는 “지휘관은 공명심에 너무 치우치지 말고, 오직 부하와 전투의 승리에만 전념한다”는 신뢰를 부하들에게 심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주요 증언 내용
짜빈동 제11중대 기지의 상황
짜빈동 전투시 적의 제2차 공격 상황
□세부 증언 내용
질문1:월남에서 수행한 임무와 참가한 작전은?
답변1:제11중대 제2소대장으로 용안작전과 짜봉전투, 투망작전, 그리고 짜빈동 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질문2:짜빈동 제11중대기지의 지형적 특징은?
답변2:짜빈동의 제11중대 기지는 표고 약 30m 정도의 구릉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기지의 크기는 둘레가 800m, 남북 300m, 동서 200m 쯤 되는 계란형 모양의 기지였다. 당시 제3소대가 북쪽에 제1소대 남서쪽, 제2소대가 동남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 중 제1소대 정면은 바로 마을이기 때문에 사계가 좋았다. 또한 그 마을에는 주민 몇 가구가 살았는데, 우리가 닭을 사다 먹은 기억이 난다. 반면 제3소대와 제2소대 좌측 정면에는 돌산이 있어 큰 바위들이 많고, 적이 그 뒤에 붙으면 어떻게 하지를 못할 정도였다. 결국 사계가 아주 좋지 않았다. 중대장도 항상 적이 오면 이쪽으로 올 것이라 생각하고 여기를 경계하도록 강조하였다.
질문3:돌산의 위치는?
답변3:중대기지 서북쪽 1.5㎞ 지점에 있었다. 중대가 사격연습을 할 적에는 106㎜를 그 바위를 목표로 사격하곤 하였다.
질문4:기지 주변에 대한 매복과 정찰은?
답변4:전투 전 매복과 정찰을 많이 하였다. 그래서 적과 몇 차례 접적한 적도 있었다.
질문5:2월 15일 새벽에 있었던 2차 공격시 최초의 상황은?
답변5:새벽 04:10경 제3소대 쪽으로 먼저 들어왔고, 이어서 얼마 후 제1소대 쪽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사방에서 포탄이 날고 사격이 비오듯하였다.
질문6:전투 경과는?
답변6:포탄과 사격이 비오듯해서 전혀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다 제3소대 쪽이 뚫려 우리소대의 제2분대를 그곳으로 지원토록 하였으며, 그쪽에 신경을 집중하였다. 포탄이 쏟아져 유선도 끊어지고, 무전기도 파괴되고, 앞에 적이 나타나면 죽이고, 크레모아를 누르고, 수류탄을 던지고, 하여튼 아무 정신이 없었다. 극도로 혼란한 와중에서 어떻게 전투를 지휘하고, 싸웠는지도 모르겠다.
날이 밝아지면서 전투가 거의 끝나고, 일부는 도주하는 적을 쫓아가고, 외부 인사들이 오고 하는데, 나는 허탈감에서 멍하게 소대 본부가 있는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중대장이 전과를 확인하여 보고하라는데, 확인도 되지 않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나는 우선 전사상자를 확인하고 처리하는데 급급했다.
질문7:전투상보에 수록된 시(詩)는 어떻게 쓴 것인가?
답변7:이 시는 당시 희생된 부하들에게 바치기 위하여 쓴 시로 당시 청룡 방송국에서 방송도 하였다. 나는 글을 좀 썼는데, 청룡시인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전장에서 낙도 없고 마음이 거칠어져 자주 글을 써서 방송으로 내보내곤 하였다.
질문8:그 외에 하실 말씀은?
답변8:내 기억으로는 당시 적이 중대 본부까지 돌파하여 너무나 다급해지니까 진내사격을 한 것 같은데, 내가 소대에 있었기 때문에 확실히 모르겠다. 제2소대도 2명이 죽었는데, 1명은 포탄에 다리가 맞은 것 같았다.
너무나 혼란한 와중이라 중대장으로부터 지시 받은 일도 없는 것 같고, 또한 보고할 수도 없었다. 오직 즉각 조치와 고함지르고 싸우는 것밖에는 몰랐다. 나는 평소에 대원들을 퍽 아끼는 편이었다. 모든 지휘관이 그러하겠지만…
그래서 희생을 가능한 한 줄이려 했고, 작전을 떠날 때도 나는 대원들을 모두 집합시킨 후 몸이 불편한 사람, 꿈이 나빴던 사람, 고향에서 걱정스런 편지가 온 사람은 항상 제외시켰다. 이런 사람은 정신이 전투에 집중되지 않아 실수를 범할 확률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소대장 8개월간 손실이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또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짜빈동 전투가 있기 얼마 전에 소대매복을 나갔는데, 논에 주민이 벼를 베고 있었다. 우리는 무심코 지나 자리를 잡고 어둠이 깃들 때쯤이 되자 갑자기 치열한 적의 사격이 날아왔다. 그러니까 벼를 베는 농부들이 모두 베트공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손실은 없었지만 고전을 하였다. 기타 전투상보와 전투수기, 공적서를 보니까 기억이 새로워지는데, 별로 차이는 없는 것 같다.
□주요 증언 내용
짜빈동 지역의 지형적 특징
짜빈동 전투시 화력 지원
□세부 증언 내용
질문1:짜빈동 지역에 배치된 배경과 수행하신 직책은?
답변1:나는 제9중대 FO로 있으면서 이곳의 짜빈동 기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1966년 11월 21일 제9중대가 여단 경비중대로 이동하게되자, 나 역시 타 지역으로 이동하여 짜빈동 지역을 떠났다가 제11중대 FO로 보직되면서 다시 짜빈동 지역에 머물게 되어 지형에 대하여는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다.
질문2:짜빈동 기지의 지형적 특징은?
답변2:중대기지는 표고 약 30m 정도의 구릉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기지의 크기는 둘레가 800m, 남북 300m, 동서 200m 쯤 되는 계란형 모양의 기지였다. 그런데 기지내의 남쪽 봉우리에서는 제3소대가 배치된 북쪽을 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북쪽 봉우리가 높았다.
또한 북쪽 봉우리의 정면은 급경사였기 때문에 우리가 순찰을 다닐 때 제3소대 진지는 봉우리 정상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양쪽 통로를 이용하였다. 또한 적들도 바로 올라올 수 없었기 때문에 2월 14일 공격을 개시한 적은 봉우리 양쪽으로 침투하였는데, 제1소대 쪽(남서쪽)의 통로가 주 접근로였다.
반면 동쪽은 숲이고, 남쪽은 유일하게 주민 13~14호 살고 있었다. 여기를 제외하고는 주변 마을은 모두 폐허와 같이 되고 사람이 살지 않았다.
질문3:적이 지휘소로 사용하였다는 돌산의 위치는?
답변3:적이 포진지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이 그 곳 밖에 없기 때문에 쌍안경으로 항상 관측하고, 직접 정찰을 나가 보기도 하였다. 바위가 기다랗게 되어 있는데, 기지 서북쪽 1.5㎞ 지점으로 도상으로는 이 지점(BS576845)이다.
질문4:기지의 진지 구축은?
답변4:철조망은 7~8중이었던 것 같다. 특히 말하고 싶은 것은 이 기지는 앞서 주둔하였던 제9중대가 구축하였는데, 진지가 거의 완벽할 정도로 구축되어 있었다. 이것이 전승의 주요한 요인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질문5:적정에 대하여 생각나는 것은?
답변5:그때 “1개 연대가 철로 변에 배치되어 있었다”는 후문이다. 따라서 아마 이것은 적이 제11중대를 격파한 다음 여단본부와 포병부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리고 전투 5~6일전쯤 1번 도로의 교량을 적의 공병이 폭파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다.
질문6:그날 비가 내렸다는데 날씨는?
답변6:가랑비가 내리고 안개가 끼어 시계가 좋지 않았다. 조명이 떠도 밝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충분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질문7:간부들에 대한 교육은?
답변7:우리 관측반 요원을 교육시키면서 간부들을 함께 교육시켰다. 특히 81㎜ 반장이 포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걱정하여 많은 교육을 시킨 것이 기억된다. 또한 포병대대 이갑석 대대장이 화력유도 절차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였다.
이갑석 중령은 포에 대해서는 귀신이라 할 정도로 잘 알았고, 화력을 요청하면 절대 그대로 해주지를 않고, 줄이기 100하면 50만 하고 다시 50을 해주는 신중을 기하였고, 아군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질문8:적의 1차 공격 때의 화력지원은?
답변8:그때는 적이 오래 공격하지를 않아 포사격을 많이 하지 않았다. 또한 적이 철조망도 뚫지를 못했다.
질문9:화력계획은?
답변9:전투상보에는 화집점이 몇 개밖에 없지만, 그것은 기지 바로 주변의 것이고, 사실은 그 외에도 훨씬 더 많았다. 화집점에 대한 좌표와 제원은 항상 수첩에 적어 두고 평소에 제원기록 사격을 하여 첫발에 명중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 두었다.
그리고 내가 화집점을 수첩에 기록해 둔 것은 지난번 용안작전 때 경험한 것이다. 그때는 화집점 좌표를 상황판에 붉은 구리스펜으로 기록해 두었는데, 막상 상황이 벌어져 좌표를 읽으려 플래시로 비춰보니 글씨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다급하니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뒤부터는 그 때의 일을 경험 삼아 항상 수첩에 화집점을 기록해 두고 있었다.
질문10:탄막은 계획되지 않았는가?
답변10:사실상 탄막은 계획하지 않았다. 화집점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하였고, 예상 접근로에는 화집점을 보강하였을 뿐이다.
질문11:기타 포병 운용에 대한 것은?
답변11:이 전투에서 여단의 전 포병이 동원되었는데, 105㎜ 3개 포대, 155㎜ 1개 포대, 4.2ʺ 중대까지 모두 참가하였다. 나는 여러 개의 포대를 유도할 수 없기 때문에 1개 포대만 잡고 주요 요소에 사격을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포대는 대대장이 잡고, 주로 후속부대 차단을 위한 사격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조명은 4.2ʺ 조명이 효과가 좋기 때문에 4.2ʺ를 많이 활용하였다.
질문12:기상이 나빠 조명 효과가 좋지 않았을 때 조치는?
답변12:비와 안개로 효과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보일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질문13:항공기와 포병을 동시에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답변13:처음에 항공기가 왔으나 바로 기지 상공에 떠 있지 못하고 기지에서 서쪽으로 멀리 떠서 몇 개의 조명만 떨어뜨리고 기지 근처에는 있지 않았다. 그것이 아마 수 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질문14:적의 주공방향은?
답변14:제3소대 쪽의 서북방이었다.
질문15:대박격포 사격 및 섬광관측에 의한 위치추정은?
답변15:평소에 돌산 뒤를 적 예상 박격포 진지로 추정하여 수첩에 MEMO하여 두었기 때문에 섬광 관측에 의하여 위치를 추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록이 좀 잘못된 것 같다. 정글이 울창한데 어떻게 섬광을 관측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날아오는 소리나 불발탄이 박힌 방향 등으로 방향을 추정할 수는 있다.
질문16:적이 퇴각시 화력운용은?
답변16:날이 밝아지면서 적이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는 것이 개미떼처럼 보였는데, 먼저 나는 고장난 106㎜를 수리하여 사격하도록 하였다. 나는 보병으로 부중대장까지 마치고 포병으로 전과하였고, 전에 106㎜ 소대장을 한 적이 있어 106㎜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2소대 쪽에 적이 많이 있다고 하기에 그쪽으로 화력을 집중하는 순간 적탄이 무수히 쏟아졌다. 내가 부서진 OP에서 도주하는 적에 대하여 포격을 가하였고, 그때 Gunship(무장헬기)이 날아와서 많은 사격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Gunship(무장헬기)이 날아오기 전에 포를 유도하다 부상을 당하였다.
질문17:증원부대 도착시간은?
답변17:Gunship(무장헬기)의 기총 소사가 끝날 때 증원부대가 도착한 것 같은데, 증원부대를 수송한 헬리콥터로 부상자를 후송하였다.
질문18:제3소대의 활약은?
답변18:모두 편파적인 평가를 하는 것 같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편견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화기소대장 김기홍 중위가 많은 활약을 하였다.
질문19:또 다른 말씀은?
답변19:당시 4.2ʺ 소대가 기지 외곽의 진지를 맡고 있었다. 중대의 책임지역이 넓기 때문에 40m 정도를 할당받은 것 같다. 그리고 중대의 ANGLICO 요원은 나와 아주 친했다. 이름이 Jim Polta와 John Houghton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전사의 기록은 잘못된 것 같다. 그리고 당시 적 대대장이 1명이 죽었는데, 기지 남쪽 마을에 내가 귀여워하던 띤(Tinh)이라는 소년의 누나가 알려 주었다. 그 대대장이 마을에서 지휘하다 죽었던 것 같다.
질문20:진내사격 여부는?
답변20:진내사격을 실시한 적 없다. 일부는 적의 포와 아군의 포를 구별하지 못해 착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다.
질문21:진지구축은 제9중대와 제11중대 어느 중대가 한 것인지?
답변21:제9중대가 거의 완료한 것으로 안다. 그 이후 제11중대가 보강하였을 것이다. 진지 작업은 계속한 것으로 기억된다. 제11중대가 그 진지로 들어오게 된 것은 제9중대가 용안작전시 Phuoc Loc 전투에서 승리한 후 바로 여단 예비로 빠졌기 때문이었다(여단 본부 외곽경계 임무 수행).
□주요 증언 내용
짜빈동 전투시 적의 제1차 공격 상황
짜빈동 전투시 적의 제2차 공격 상황
□세부 증언 내용
질문1:짜빈동 전투시 수행한 임무는?
답변1:북쪽 정면을 담당하고 있는 제3소대 제1분대장이었다.
질문2:지형 및 배치에 대하여?
답변2:제1, 2, 3소대가 전면에 배치되고, 4.2ʺ 소대도 몇 개의 진지를 맡고 있었다. 우리 분대 좌측에 바위가 있고, 제1분대와 제2분대 사이에 LMG가 있었다(2분대장은 정원석 하사이고 현재 사단 봉사참모실 소속으로 제3연대 PX 책임자로 나가 있다. 그리고 LMG 반장은 강경희 하사였다).
우리 제1분대의 정면은 적이 접근하기에 가장 용이한 접근로인데다가 정면이 너무 넓기 때문에 평소에 중대장에게 정면을 좁혀 달라고 건의하였다(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제3소대 정면은 약간 급경사인데다 철조망 외곽부터 하향 능선이 계속되다 다시 상향 능선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진지에서 사격을 하면 사각지대가 생기는 사계가 나쁜 묘한 지형이었다. 그러니까 진지 바로 앞은 관측도 잘 되지 않고 하향 사격도 곤란하였다. 중대본부에서도 물론 관측이 되지 않았다.
질문3:2월 14일 최초 접전시의 상황은?
답변3:그날의 날씨는 비도 아니고 안개도 아니고 이슬처럼 내리는 시계가 아주 불량한 날씨였다. 이때 제3소대 제1분대는 소대 우일선 분대로서 우측에 1조(조장 상병 이학현) 중앙에 2조(조장 일병 조정남) 좌측에 3조(조장 일병 정수철)를 각각 배치하고, 분대장인 나는 제2조에 위치하여 분대를 지휘하였다.
14일 23:20경, 청음초가 적의 접근을 인지하고 보고가 들어왔는데, 잇달아 거대한 폭음 소리가 났다. 폭음소리에 이어 곧 바로 60㎜ 조명이 뜨고 전방상황을 확인하여 보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정수철 상병을 데리고 확인하러 나가보니, 철조망이 뚫리고 30~40명의 적이 도주하는 것이 보여 이를 보고한 다음 휴대한 M2 CAR 소총으로 사격을 하려 했으나 사격이 되지 않았다. 당황하고 긴장하여 잠겨진 자물쇠를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즉각 진지로 복귀하여 상황을 보고하였더니 적의 도주로에 포격이 가해졌다. 동시에 모든 소화기가 불을 뿜었다.
상황이 끝난 다음 소대장 이수현 소위로부터 특별 경계의 명을 받아 전 분대원에게 소대장 지시를 하달하고, 1개 청음초를 증가시켜 분대전방 60m 위치에 있는 철조망 주위에 근무를 시키고 특별경계에 임하도록 하였다.
질문4:2월 15일 새벽, 2차 접전시의 상황은?
답변4:15일 3:30경 사수 도성용 일병과 2조 조장 조정남 일병이 보슬비를 맞으며 청음초 근무에 임하고 있었다. 이때 4:10경 철조망 전방에 이상한 검은 물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월남인 특유의 체취가 감각되고 또 사방에서 수풀 스치는 소리가 들리자 도성용 일병은 계속 동태를 살피고, 조 정남 일병이 상황을 보고해 왔다.
이어 적의 치열한 포격 및 사격과 동시에 LMG 반장 강경희 하사가 전사하고, 청음초는 철수하였다(내 예측은 청음초가 원위치에 있지 않고, 철조망 안쪽으로 조금 들어와 있었던 것 같다. 철수시간이 굉장히 빨랐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런 판단을 하였다). 나는 즉시 소대에 보고하려 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보고를 받지 않았다. 이후 한번도 소대와 연락을 하지 못하였고, 소대장도 보지 못하였다.
지금 기억으로는 적이 10분 이내에 우리의 진지 부근까지 들어온 것 같고, 20분도 못되어 적이 진지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적보다 외곽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적이 밀려들면서 제2분대와 제3분대가 적에게 밀려서 우리 제1분대 쪽으로 밀리고, 우리 분대의 바위를 경계로 제3소대는 우리 분대의 일부만 진지를 지키고 있는 형편이었다.
나는 부상을 당하고 압박붕대를 맨 채 인접한 제2소대의 오승환 하사에게 두 차례나 구원을 간절히 요청하였다. 육박전 과정에서 어떻게 싸웠는지도 모르겠고 전투가 어느 정도 끝났을 때 나는 내 진지에서 지도, 콤파스 등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향도하사 정승일 하사에게 인계하고, 헬기를 타고 후송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소대장을 한번도 보지를 못하였고 통화도 한 바 없다.
질문5:진지 구축 요령은?
답변5:화기 진지는 유개호로 구축하였고, 개인호는 무개호와 유개호가 섞여 있었다. 취침호는 분대에 2~3개씩 조단위로 구축되었다. 교통호도 외곽 것은 모두 원형으로 연결되고 거기서 내곽으로 연결되었다.
질문6:기타 다른 이야기는?
답변6:전투 후 내가 을지무공훈장을 받았지만 사실 부끄럽게 생각한다. 오히려 전사한 제1분대원들이 받아야 할 것이다. 정말 분대원들은 용감하게 싸웠다. 중대 진지는 여단에서 모두들 모범진지로 선정하였던 만큼 아주 잘 구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철조망 외곽에 Target 같은 것도 세워두고 사격훈련을 하였고 위장진지 같은 것도 만들었다.
□주요 증언 내용
짜빈동전투시 제1중대 제3소대의 상황
전투 종료 후의 상황
□세부 증언 내용
질문1:소대의 배치는?
답변1:최초 숙영을 위해서 각 소대 후방(2선)에 1개 분대씩 개인천막을 치고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밤 11시 적의 1차 공격이 있은 후 주로 3소대 후방을 중심으로 숙영장소(배치)를 다소 조정하였다.
질문2:2차 공격 때 상황은?
답변2:그날 저녁은 옷을 입은 채로 그냥 누워서 3시경에 잠이 잠깐 들었는데 갑자기 무수한 예광탄이 날고, 기지의 곳곳에는 포탄이 작렬하였다. RKT 사격소리 뒤에는 프로펠러 소리도 들렸다.
교통호 밖에서는 고개도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교통호와 토끼 굴이 좋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얼마 후 11중대 3소대가 밀려나면서, 적과 아군이 뒤섞여 육박전이 벌어졌다. 적이 풀로 위장을 했기 때문에 풀밭에 엎드리면 조명 아래서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진지 외곽에도 적이 새까맣게 엎드렸는데 적이 대부대인 것 같았다.
적과 아군이 뒤섞인 극도의 혼란한 와중에서 어떻게 지휘를 했는지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통신장비도 적의 포탄에 파괴되고 통신병도 그때에 전사하였다. 날이 밝아지면서 적은 도주하기 시작하였고 Gunship(무장헬기)이 날아오고 아군도 사방에서 나타나니 적도 당황한 것 같았다.
질문3:전투가 끝난 후의 상황에 대하여?
답변3:적이 퇴각하고 미군 제3상륙군 사령관이 흩어진 적 시체를 보고 자기도 지금까지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이렇게 시체가 지저분하게 죽은 것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 아마 포에 의하여 몸의 각 부분이 따로따로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한 말인 것 같다.
질문4:증원부대 도착에 대하여?
답변4:아마 7시경인 것 같다. 2~3대씩 날아온 것 같다.
질문5:언제 기지를 떠났는지?
답변5:우리 소대는 그날 헬기로 떠났고 11중대는 며칠 후에 여단 예비로 이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질문6:비가 왔는데 조명 효과는?
답변6:약간 흐렸지만 잘 보였다.
질문7:기타 다른 이야기는?
답변7:그날 여단지역의 모든 포(미 175m까지)가 동원된 것으로 안다. 포병의 화력으로 적의 후속부대를 차단함으로써 아군 방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질문8:진내 사격은?
답변8:내 생각으로는 진내 사격도 실시한 것 같은데, 확실히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