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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는 참으로 섬기는 사람, 성품은 신앙을 위해 섬기는 사람이 되는 성사”
서품 50주년 금경축 맞은 부산교구 서공석(세례자 요한) 신부
의사의 꿈 접고 오롯이 사제의 길 걸어온 세월 부산교구 원로 사제 서공석(徐公錫, 세례자 요한) 신부는 올해로 유학 중이던 1964년 12월 23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은 지 꼭 50년이 된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광주 대건신학대학 교수로 부임해 6년 동안 사제 양성을 위해 헌신한 뒤 부산교구 총대리, 부산메리놀병원장, 서강대학교 교수, 부산교구 사직동 본당 주임을 거쳐 만 70세 되던 해에 현직에서 물러나 부산시 금정구 남산동에 있는 은퇴사제관인 선목사제관에서 살고 있다. 은퇴한 후에도 왕성한 저술 활동과 강의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교구 차원의 공식적인 금경축 축하의 자리는 지난 봄 성 목요일 성유축성 미사 때 있었지만 대건신학대학 출신의 제자 사제와 평신도들이 오는 11월 14일 부산메리놀병원에서 별도의 금경축 축하식 및 논문 봉정식을 갖는다. 큰 가르침을 준 스승의 은혜를 잊을 수 없어서다. “성품(聖品)성사를 받고 50년만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누구나 서품 50주년은 맞게 됩니다. 자랑스러운 일이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성품을 받고 50년이나 살아남았다면 그것은 먼저 하느님이 하신 일이지만, 그 하느님의 일은 많은 분들이 저를 가르쳐주고 돌보아주고 사랑해주신 일들 안에 살아있었습니다. 저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을 비롯하여 저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과 제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은혜로웠던 많은 분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사랑이 곧 하느님의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로웠다는 심경입니다.” 서 신부는 1934년 8월 1일 대구에서 아버지 고 서정호(徐廷浩) 님과 어머니 고 정지자(鄭智子) 님 사이의 4남 4녀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8대 째 천주교 신앙을 지켜오며 순교자도 여러 명 탄생한 자랑스러운 달성 서씨(達城 徐氏) 가문의 후예다. 대구대교구를 조선의 제2 교구로 유치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민족지도자 서상돈(徐相敦. 1850년 10월 17일~1913년 6월 30일) 선생이 증조부다. 대구 덕산초등학교 6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 가 경남중학교와 부산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의학부 예과를 마치고 진로를 바꿔 사제의 꿈을 안고 1955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으로 적을 옮겼다. 1961년 프랑스로 유학길에 올라 파리 가톨릭대학 신학대학 신학 석사와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 신학부 교의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독일 뮌스터대학 신학부 수학을 마치고 1969년 2월 귀국했다. “서울 대학교 문리대 의예과에 진학한 것은 제가 원했던 일이었고, 저의 부모님께서도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제가 8남매의 장남이기에 의사가 되어 안정된 생활로 집안을 지켜줄 것을 원하신 것이지요. 의예과 공부도 적성에 맞았습니다. 그러나 뭔가 좀 더 보람 있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의학 공부를 마친 후 신부가 되는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당시 경향잡지를 발간하던 고 윤형중(尹亨重) 신부님을 찾아뵙고, 그 말씀을 드렸더니 의학과 신학을 한 사람이 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학문이 모두 인간의 일생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함께 하면 어느 것에도 충실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신학도 공부할 분야가 많아서 일생을 바쳐서 해도 다 하지 못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의학 공부를 접고, 서울의 신학대학, 당시는 성신대학이라 불리던 한국 유일의 신학교에 가게 되었고, 오늘까지 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신학교는 유럽 중세적 언어에 머물지 않고, 섬기는 자세로 복음 전하는 사람 양성하는 곳 서 신부는 2001년 <교회의 심장 : 한국천주교희 신학교 교육의 오늘과 내일>이란 저서를 낼만큼 신학교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사제다. 오늘의 한국천주교회 신학교와 신학교 교육에 대한 생각도 분명하다. “원론적인 말씀을 드리면 신학교는 내일의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일할 사람들을 양성하는 곳이니,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유럽 중세적 언어에 머물지 않고, 현대인이 기쁜 소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 오늘의 인간 감수성에서 섬기는 사람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곳입니다. 성품은 인간의 품위를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위해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참으로 섬기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신학교가 될 것을 바랍니다.” 서 신부는 1974년 대구대교구에서 서울과 광주 두 곳뿐이던 대신학교 외에 제3의 대신학교를 설립할 때의 긴박했던 상황을 들려준다. 당시 대건신학대학 교수 신부들은 이미 있는 두 신학대학에 교수들을 더 충원해 내실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제3의 대신학교 설립을 반대했다. 그러나 대구대교구는 신학대학을 개설하였고, 그때부터 교구마다 신학대학을 설립해 지금은 전국에 일곱 개나 된다. “대건신학대학 이사 주교들(대구, 광주, 전주, 부산, 마산, 안동, 청주 교구장)의 회의에서 제3의 신학대학 개설을 추진하던 어떤 주교님은 신학대학이 여러 곳이 되면 신학교육 수준이 저하될 것이라는 대건신학대학 교수의 발언에 신학교에서 교육을 많이 시킬 필요 없다는 말씀과 더불어 ‘신부는 수단 입을 줄 알고, 미사드릴 줄 알고, 순명할 줄 알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사 주교님들은 아무도 그 말씀에 반론을 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을 지지하고 수용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곡학아세(曲學阿世)의 현장이었습니다. 사안을 관계되는 사람들과 함께 토의하지 못하고 신분의 우열로 결정하려는 것은 유럽 중세적인 행태이지요.” 신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해서 모두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없고, 성품을 받기 전에는 언제라도 진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서 신부의 생각이다. 신학교에 들어갔으니 신부가 되는 것이 성공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입학생의 3분의 1 정도만 사제 서품을 받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다른 분야로 진출하는 사람들도 소중한 존재라고 한다. 그만큼 신학이 우리 사회 안에 보급되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서 신부는 신학교를 떠난 제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제가 대건신학대학에 재직하는 동안 중도에 다른 분야로 진출하여 활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실하고 가정이나 직장에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 본인들을 위해서나 신학교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살았던 사람들에게나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저는 신학교를 떠나 다른 분야로 진출한 사람들이 옛날 함께 공부하여 신부가 된 사람들에게 옛날의 우정을 잊지 말고 가까이 접촉해 넓은 세상의 일을 이해하고,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는 일이 없게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헌신으로 제국적 ․ 봉건적 유적 청산해야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의 분명한 메시지이기도 지난 여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의 분명한 메시지는 우리 교회 안에 남아있는 제국적이고 봉건적인 유적(遺蹟)의 청산이라고 한다. 이는 바로 서 신부의 오랜 염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청산은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면서 사랑과 헌신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최근 사회적 이슈에 따라 교회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의견이 나오고 심지어 갈등 현상까지 빚어지는 문제의 해결도 자비와 사랑과 헌신의 자세를 보일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었지요. ‘여러분 가운데서 제일 큰 사람은 제일 어린 사람처럼 되고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합니다.(중략)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섬기는 사람으로 처신합니다.’(루가 22,26-27). 4세기 그리스도 신앙공동체가 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어 조직되고 제도화되기 시작할 때, 눈에 보이는 것이 제국의 조직과 제도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겪은 것이 유럽 중세의 봉건 제도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조직과 제도 안에 제국적이고 봉건적 유적들이 많이 남았습니다. 이번 교황님의 말씀과 행보에는 그런 유적들을 청산하고자 하는 의지가 돋보였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조직되면서부터 몸담았던 사회에서 얻은 유산입니다. 그것은 교황님 한 분의 노력으로 청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원론적인 측면에서 시동을 건 청산이고, 프란시스코 교황님이 이번 방한 중에 하신 말씀이나 행보는 과거 유적의 청산 의지였다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교회의 조직이고 2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고착된 교회의 제도들입니다. 한두 사람의 기발한 생각이나 결심으로 단시일 안에 개혁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청산은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면서 사랑과 헌신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남긴 과제는 과거의 제국적, 봉건 사회적 유산을 사랑과 헌신으로 청산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교황님은 그 과거의 청산을 ‘볼 눈이 있는 사람은 보고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들으라.’(마태 13,16 참조)는 식으로 호소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현실도 그런 유적의 청산이 절실하다고 서 신부는 생각한다. 명령하고. 비난하고, 성토하고, 상처주면서 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의 실천으로 스스로 십자가를 지면서 실현되어야 하는 과거 유적의 청산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제국적 혹은 봉건적 사고는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아직도 로마 제국적이고 유럽 중세의 봉건적 유적을 소중히 생각하여 마치 그것이 복음인양 착각하는 행태들이 있습니다.” 사회 현실에 대해 신앙인들도 그 사회의 일원이기에 각자의 의견이 있을 수 있고, 해결을 위한 견해를 달리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고 개선을 강구하는 데 있어서는 자비와 사랑과 헌신이 보여야 한다는 일관된 생각이다. 그렇지 않고 갈등을 유발하는 사람들 안에는 아직 ‘그리스도 승리하고, 다스리고, 명령한다.’는 유럽 중세의 성가가 노래하는 전근대적 유산이 살아 숨 쉬며 활개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신앙 언어’는 신앙 공동체가 발생시킨 전례와 교의, 계명과 법 및 복장까지 모두를 일컫는 말 서 신부의 수많은 저서와 논문 가운데 ‘신앙 언어’에 관한 내용이 가장 많다. 신학적이고 역사적이며 오늘의 교회가 바로 알아듣고 실천해야 할 내용들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워낙 방대해 많은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 “저의 모든 글이 ‘신앙 언어’와 관련 있습니다. ‘신앙 언어’의 현대화는 현대 역사 비평적 신학이 추구하는 바입니다. 언어라는 단어는 인간 의사 전달의 모든 수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신 앙언어’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경전(經典)을 비롯하여 신앙공동체가 발생시킨 전례(典例)와 교의(敎義), 계명(誡命) 혹은 법 및 복장(服裝)까지 모두를 일컫는 말입니다. 언어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고 한 시대,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통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어는 시대적으로 또 지역적으로 채색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같은 체험이라도 시대와 지역이 다르면,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는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서 신부는 ‘동무’라는 정다운 우리 단어가 남북 분단 이후 북한에서 공산당원을 지칭하는 단어가 된 사례를 들었다. 또 그리스도 신안공동체가 4세기 로마제국과 비잔틴 제국, 중세를 거치면서 제국의 문물과 화려함, 봉건제도의 영향을 받아 조직과 제도에 반영한 사실도 설명했다. 13세기 제4차 라테란공의회(1215년)가 결의한 개인고백 고해성사에 관해서도 자세히 밝혔다. 교회도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인류 공동체이기에 조직과 제도에 시대적 영향을 받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역사 비평적 신학이 발생한 것은 19세기 역사학이 고증(考證)이라는 역사 비평적 방법을 도입하면서 된 일입니다. 신학도 역사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 하는 학문 혹은 언어입니다. 따라서 신앙언어, 곧 경전(經典)들과 교의(敎義)언어들에도 역사 비평적 방법을 도입하여 그것들이 발생할 당시에 지니고 있던 의미 혹은 전달하고자 한 체험을 찾아서 오늘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결국 역사 비평적 신학은 이미 발생한 신앙 언어를 검토하여 그것이 원초에 지녔던 인간 체험 혹은 의미를 밝히고, 오늘 우리의 여건에서 그 체험을 살려내는 작업이라고 한다. 교회와 신학을 사랑하는 노(노) 사제의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글 최홍운 alsemffp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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