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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시선 원문보기 글쓴이: 카페지기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살벌하고 처절한 생의 어떤 상황에서도 크리스천에게는 어떤 여유, 어떤 공간이 있어야한다. 그것을 신앙적 유머 혹은, 품성의 해학적 매력이라 해도 좋다. 아무리 긴장되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그가 말하면 모두들 영혼 속까지 웃음의 문이 열린다. 구린내로 모두들 상을 찡그린 분위기에서 맛있는 멸치젓 냄새 같다고 할 사람, 따사로운 햇볕같이 만나기만 하면 모두들 행복을 느끼는 밝고 포근한 자매, 자기 자신은 항상 담백하고 욕심이 없다.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시 133:1
기억되는 사람 디모데후서 4장 9-21절
오늘 본문인 디모데후서 4장 9절-21절에 보면 18명의 사람 이름이 나옵니다. 그 18명을 제외한 글을 보내는 바울과, 글을 받는 디모데까지 포함하면 12절밖에 안되는 본문 속에 등장인물이 20명이나 됩니다. 바울은 이 때 로마의 감옥에 두 번째 갇혀 있었고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딤후 4:6-8).
딤후 4: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이 때 바울은 혈기 왕성하고 당당하고 대담한 모습이 아닌 인생의 겨울을 느끼는 황혼기였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보고 싶어 빨리 오라고 했고, 자기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마가도 데려오라고 했고, 자기가 입던 겉옷도 겨울 전에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8명의 이름을 열거하며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고… 기억되는대로 그 사람들을 평가했습니다.
10절에 나오는 '데마(Demas)'라는 사람은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골 4:14, 몬 24).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지 않고(딤후 4:8)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의 안전과 자유 그리고 편안함을 찾아서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 '그레스게(Crescens)'는 갈라디아로 갔고, '디도(Titus)'는 달마니아로 갔다고 했는데 데마의 경우와는 다르게 이들 두 사람에게서는 배신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11절에 보면 '누가(Luke)'가 나옵니다. 그는 사랑받는 의사였고(골 4:14), 바울이 로마 감옥에 처음 투옥되었을 때도 함께 있었으며(골 4:14, 몬 24) 바울의 전도 여행에 의사로서 큰 도움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현재 바울과 같이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11절에 디모데에게 '마가(Mark)'를 찾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he is helpful to me in my ministry). '나의 목회에, 나의 선교에 유익한 사람'이라고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사도행전 15장 36-40절에 보면 한 때 마가를 유익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행 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그래서 전도여행을 떠날 때 마가는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가가 달라지고 변했는지 바울의 일(ministry)에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2절에 보면 '두기고(Tychicus)'가 나옵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였습니다(행 20:4). 바울의 일을 돕는 성실한 두기고는 주로 편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엡 6:21-22, 골 4:7-9). 바울이 여기저기에서 글을 쓰면 그것을 전달하는 배달부 역할을 했습니다. 추측컨대 디모데가 로마로 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기고를 대신 에베소로 보낸 것 같습니다. 두기고는 그만큼 신뢰받고 일한 사람이었습니다.
14절에는 구리장색 '알렉산더(Alexander)'가 나옵니다. 그 당시에 '알렉산더'라는 이름은 보편적인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구리장색' 다시 말해서 손으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인 그 알렉산더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알렉산더를 평가하기를 '자신의 말을 대적함으로 해를 많이 끼친 사람'이라고 평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할 때 차라리 데마는 등을 돌리고 떠난 사람이었지만, 알렉산더는 눈 앞에 있으면서 훼방을 놓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힘들게 한 사람이었으면 디모데에게 '알렉산더를 주의하라'고까지 부탁했습니다.
바울은 개인적으로 보복하려는 생각은 없이 시편 62편 12절 말씀을 인용하여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라고 답답한 심정을 표현하였습니다. 참조: 롬 12:19, 원수 갚는 것은 믿는 자들이 친히 할 일이 아니다.
19절에 '브리스가(Priscilla)'와 '아굴라(Aquila)'가 나옵니다(브리스가는 '부리스길라'라고 번역되기도 했음-행 18:2). 사도행전 18장 1-4절까지의 내용으로 보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본도(Pontus)의 유대인으로서 글라우디오 황제가 내린 유대인 추방령에 의해서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온 부부였는데 거기서 바울을 만나서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직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으로 바울과 같은 직업이어서 바울이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줄곧 같이 일했습니다.
로마서 16장 3-4절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복음을 위해 수고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롬 16: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롬 16: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로마서 16장 4절에서는 바울을 위해 목을 내놓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돕다가는 죽을 위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는 단순히 바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예수를 위한 신앙에서 나온 헌신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런 협조자가 있음을 언제나 좋아하고 마음에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위해서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도우려는 이들 부부의 신앙이야말로 모든 성도들에게 귀한 본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번 신앙의 사람이 되어 목회자를 돕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9절에 나오는 또 한 사람은 '오네시보로(Onesiphorus)'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배신하여 떠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바울 곁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특별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감옥에 갇히면, 아무리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라고 해도 부끄럽게 여기거나 더 이상 감옥에 갇힌 사람과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었을텐데도 오네시보로는 바울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6절에 보면 바울은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여"라고 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떄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기쁘도록 오네시보로는 도왔습니다. 그리고 쇠사슬에 매여있는 바울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부름을 받고 전하는 사람 편에 서고, 복음을 위해 부름 받고 전하는 사람이 기쁨으로 일하게 하며 근심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기본 자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하고, 근심으로 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아마 모든 목회자들이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오네시보로 같은 교인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질 것입니다.
여러분, 오네시보로 같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고 항상 곁에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20절과 21절에 보면 '에라스도(Erastus)와 드로비모(trophimus), 우불로(Eubulus), 부데(Pudens), 리노(Linus), 글라우디아(Claudia)'라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들 모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바울을 돕고 항상 바울과 함께 한 맘된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20절의 '드로비모(Trophimus)'는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행하다가 병까지 들었던 사람입니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으면서 병들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우리는 단지 사도행전 20장 4절, 21장 29절에서만 드로비모의 기록을 볼 수가 있지만 이 두 구절과 본문의 내용만 보아도 드로비모는 자기의 힘이 닿는 데까지 바울의 전도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던 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병이 나서 밀레도에 떨어져 있기까지 바울의 말없는 보조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여행을 갔을 때도 성내에서 그와 함께 행동했던 것은 어찌보면 이방인과 동행하기를 싫어하는 다른 유대인들의 습관도 아랑곳하지 않는, 미련스럽기까지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는 누명을 씌워 로마 군인들에게 잡아 넘겼기 때문입니다. 드로비모는 말없는, 드러남 없는, 그리고 자신의 몸까지 희생하며 복음 전파에 동참한 큰 일꾼이었습니다.
짧은 12절에 나오는 사람들만 살펴보아도 바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분류해 보면
1. 배신자가 있습니다(데마).
등을 돌리고 떠난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기독교 역사에 사도 바울처럼 능력있게 복음을 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바울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능력의 사람, 귀신 들린 자도 기도하면 귀신이 쫓겨가고, 옥에 갇혀서도 찬송할 때 옥토가 흔들리고 차꼬가 풀리는 그런 능력있는 사도 바울에게도 등을 돌리고 떠난 사람이 있었습니다(딤후 1:15, 4:10). 데마라는 사람만 등을 돌리고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이 등을 돌리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사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믿다가 등을 돌리고 세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 아플 때가 많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종교를, 불교 천주교 이단의 무리에 빠져 지내는 사람들을 보게되면 가슴이 아픔니다.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에게도 그런 사람이 존재했습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도 그런 사람이 존재했습니다. 가롯유다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마산시민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한 사람도 주님을 섬기다가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고 오히려 그런 자들을 하나님께오 인도해 올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충만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해를 끼친 사람이 있습니다(알렉산더).
입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고, 복음 전하는 것을 훼방하고,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 "아무개를 조심하라, 그 사람 조심하지 않으면 괜히 다쳐."라고 전해줄 만큼 해를 준 사람이 있습니다.
3. 나중에 유익한 자로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가).
마가처럼 한 떄는 유익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으나 나중에는 유익한 자로 필요한 자로 바뀐 사람이 있습니다.
4. 드러나지 않게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함께 일한 사람이 있습니다.
5. 최고. 최선의 동역자가 있습니다.
함께 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위해 생명을 걸고,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해 도와 주었던 동역자, 협조자들이 있었습니다.
6. 보고 싶어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빨리 와라. 보고 싶으니까 빨리 와라"고 고백할 정도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고 자기 죽음을 앞두고 인생의 겨울을 앞두고 디모데후서 끝 부분에 이런 사람들의 이름과 그 사람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십니까?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이름 석 자를 적어 놓고 그 옆에 글을 쓰라고 한다면 거기에 뭐라고 글을 쓰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사람이십니까? 여러분의 이름을 목회자가 기억할 때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 것 같습니까? 물론 설교하는 저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 어떤 사람일지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이름 석자를 대면서 '이 사람 조심해야 돼'라고 경고할 대상은 아닐까요?
사도 바울이 '내게 이런 사람이 있었고, 저런 사람도 있었다'고 했는데, 저의 짧은 목회 기간 동안에도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행 13:22). 하나님도 같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배를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창 4장). 가인도 예배를 드렸고, 아벨도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를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십니까?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지금 스스로가 어디에 속하는지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마가가 처음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자기마음대로 돌아가 버린 사람이었지만 나중에 변화하여 바울이 마가를 데려오라고 할 정도의 유익한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힘든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절제하는 수고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고 없이는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 “000 하나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간사람” 이렇게 기록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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