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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10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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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는 자를 수 없다, 을미개혁(1895)
1895년 을미사변 직후 성립한 김홍집(金弘集)내각이 실시한 일련의 개혁운동이 바로 을미개혁 이다.
요대목에서 잠깐 을미개혁(乙未改革)에 대하여 알고 갑시다
을미개혁은 1895년(고종 32년) 김홍집 친일 내각에 의해 추진된 제3차 갑오개혁을 일컫습니다.
아관파천으로 중단되기까지 우리 사회의 근대화를 꾀했던 급진적인 개혁 정책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단발령 실시:
가장 파격적이었던 조치로, 고종이 먼저 머리카락을 자르며 백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이는 유교적 가치관을 지닌 유생들의 거센 반발(위정척사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태양력 채택:
건양(建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전통적인 음력 대신 서양식 태양력을 공식 도입했습니다.
종두법 시행:
전염병 예방을 위해 근대적인 의학 기술인 종두법을 전국적으로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체사 설치:
근대적인 우편 제도를 시행하여 통신 체계를 정비했습니다.
소학교 설치:
서울과 지방에 소학교를 세워 근대적인 교육 기회를 확대하려 했습니다.
군제 개편:
중앙군인 친위대와 지방군인 진위대를 설치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을미사변의 영향: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직후, 일본의 영향력이 극대화된 상태에서 추진되었습니다.
중단:
개혁의 급진성과 을미사변에 대한 분노, 특히 단발령에 대한 전국적인 반발로 인해 을미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기는 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을미개혁은 중단되었습니다.
의의:
신분제 폐지에 이어 생활 양식 전반을 근대적으로 바꾸려 했던 시도였습니다.
한계:
일본의 강요에 의해 추진된 측면이 강했으며, 당시 민중의 정서와 관습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요대목에서 아관파천 이 나오는데 한번 알아보고 갑시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은 1896년 2월 11일, 조선의 고종 임금이 일본군과 친일 내각의 감시를 피해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그로 인한 역사적 영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배경: 을미사변과 단발령
을미사변 (1895):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된 후, 고종은 신변에 극심한 위협을 느꼈습니다.
친일 내각의 압박:
김홍집 등 친일 내각은 단발령을 강제 집행하고, 고종을 사실상 궁중에 연금하며 압박했습니다.
춘생문 사건의 실패:
앞서 고종을 탈출시키려던 시도가 한 차례 실패하며 경비가 더욱 삼엄해졌습니다.
탈출:
고종과 왕세자는 궁녀가 타는 가마에 몸을 숨겨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나와 정동에 있던 러시아(아관)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친일파 처단: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자마자 친일 내각 총리대신 김홍집 등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체포령을 내렸고,
이 과정에서 김홍집, 어윤중 등이 살해되며 친일 정권이 붕괴되었습니다.
자주권의 훼손:
러시아 공사관에서 약 1년간 머무르며 정무를 보게 됨에 따라,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격히 커졌습니다.
이권 침탈:
러시아를 비롯해 미국, 프랑스 등 열강들이 광산 채굴권, 삼림 채벌권, 철도 부설권 등 각종 경제적 이권을 본격적으로 가져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독립 협회 창립:
국가의 치욕적인 상황을 타개하고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기 위해 독립 협회가 창립되었으며, 이는 만민 공동회 개최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사후 조치:
대한제국 선포
고종은 1897년 2월,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했습니다.
이후 연호를 '광무'라 정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황제 중심의 자주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알리려 노력했습니다.
역사적 의의:
아관파천은 외세의 힘을 빌려 국권을 지키려 했던 고육지책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외세의 내정 간섭과 경제적 수탈을 가속화시킨 아픈 역사의 한 단면으로 평가받습니다.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당한 후 친일세력에 둘러싸인 고종(高宗)은 밤이 되면 자객이 무서워 잠을 잘 수 없었고,
낮에는 독살이 무서워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주로 자신의 얼굴을 닮은, 둥글둥글한 삶은 계란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자신의 정치 자문이었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사라지자 대화상대가 없어진 고종은 고독하기 짝이 없었다
일본은 친일파로 이루어진 조정을 다시 만들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리고 친일 내각을 통해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개혁 작업을 서둘러 추진했다.
"연호를 사용한다.
우편제도를 실시한다.
여러 곳에 소학교를 세운다.
종두법을 실시한다."
새 내각은 내외의 비난 속에서도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개혁안들을 발표했다
(종두법 - 어린아이와 송아지에게 우두를 접종하고 채취)
새 내각의 개혁정책 중 가장 획기적인 것은 '태양력의 사용'이었다.
음력 1895년 11월17일을 양력 1896년 1월1일로 삼아 음력을 폐지한 것이었다.
이로써 수천 년 동안 지켜지던 음력이 1896년을 기점으로 폐지되고 양력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양력 시행과 함께 역시 수천 년 동안 제대로 사용해 보지 않았던 연호 사용을 결의해 '건양'이라는 연호가 태양력과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상당히 헷갈렸겠다.
일본은 꼭두각시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빌어 개혁을 계속하여 조선의 사회체제를 일본과 동일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이것은 일본이 훗날 조선을 침략했을 때를 대비한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계산이었다.
그러던 1895년 말, 전국을 뒤흔든 조치가 내려졌다. 바로 단발령이었다.
단발령은 상투를 잘라 머리를 짧게 하라는 명령이었고, 머리가 짧으면 위생적이고 편리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긴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정약용도 어머니가 9세 때 돌아가셔서
긴 머리에 이와 서캐가 득실득실 거렸다고 하지?ㅎㅎ)
고종(高宗)은 자신과 왕세자의 상투부터 자른 다음 양복을 입었다.
하지만 단발령(斷髮令)에 대한 반발은 엄청났다.
유교의 가르침에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말이 있다.
이는 '신체와 모발과 피부는 부모로 부터 받은 것이다'라는 뜻이다.
유교 윤리가 깊이 뿌리 내려 있던 조선사회에서는 자신의 몸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머리털을 자르는 것은 큰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많은 백성들은 상투를 자르지 않기 위해 멀리 도망가거나 상투를 자를 때 안타까워 통곡을 했다고 한다.
"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는 자를 수 없습니다."
명망있는 선비 최익현(崔益鉉)이 단발령에 반대하며 나서자 그의 말은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그때 당시 지방 상인들이 한양으로 물건을 팔러 오지 않아서 한양의 물가는 폭등했고, 상투가 보이면 무조건 달려가서 잘라야 하니 이때 당시 순경을 뽑는 조건이 달리기였다고 한다
단발령(斷髮令)이 전국적인 저항을 불러 일으켰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사진관 - 단발령이 실시되자 사람들은 상투가 잘리기 전에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사진관으로 몰려가 사진을 찍는 특이한 유행이 생겨났다.)
♡ 을미의병(乙未義兵) ♡
단발령(斷髮令) 발표가 있을 무렵, 명성황후의 시해사건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동안 조선조정에서는 명성황후의 죽음을 비밀에 부쳐 왔었지만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전해진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크게 분노하여 곳곳에서 상소가 잇따르고 관직에서 물러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급기야 그 분노가 폭발해 유생들이 근왕창의(勤王倡義)를 내걸고 친일내각의 타도를 목표로 항일 의병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항일 의병 운동은 제천의 유인석, 춘천의 이소응 등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유인석(柳麟錫)이 이끈 제천 의병은 가장 규모가 커서 다른 지역의 의병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때 일어난 의병운동은 일본의 침략을 막아 나라와 민족을 지키려는 민족 운동의 한 흐름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여기서 아직도 조선이 전근대적인 사고에 젖어 헤어나지 못함을 알 수 있는 사례가 있다.
유생들의 의병이란 것이 얼마나 웃기는고 하니, 유건을 쓰고 도포를 펄럭이면서 죽창을 들었으며,
전장에서도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따져 서로 읍(揖)하고 길을 비켜주는 등 싸움에 임하는 정신 상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또 의병들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유인석(柳麟錫)의 의병부대에서 가장 용감했던 포수 출신 선봉장 김백선이 서울로 진격하자고 유인석에게 칼을 빼들고 대들었다가 "
어디서 상놈이 양반에게 대들어?"하며 불경죄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진짜 꼴통들!
단발령(斷髮令)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조선의 수도 서울의 인구가 30~40만 정도일 때, 다른 나라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아보자!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의 인구는 550만이었다.
그곳 런던에는 이미 지하철이 다니고 있었고, 거리는 말할 것도 없이 자동차로 넘쳐났다.
주식시장은 주식매매로 활기가 넘쳤고, 사무실에서는 타자기로 서류들을 만들면서 전화 받느라고 바빴다.
기차역에서는 기차가 한 시간 단위로 출발했고, 역마다 승객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또한 독일에서는 벤츠를, 미국에서는 포드를, 아르헨티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렸는데 조선은 자신들 밖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캄캄 무소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조정은 일본 주도의 개혁이 몰아치고 이에 백성들은 일본에 항거하고 일어났는데,
고종(高宗)은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아버지도 없고, 아내도 없다.
그들이 모든 일을 다 해줬는데 말이다.
이젠 혼자서 홀로서기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될때가 되었다.
그때 고종(高宗)이 꺼내든 반전의 카드가 있었다.
작금의 어수선한 상황을 일거에 뒤집을 요량으로 카드 하나를 집어들기 시작했다.
과연 그 반전의 카드는 무엇이었을까?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10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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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년(丙申年)의 남자, 아관파천 (1896)카리스마 아빠는 정계에서 은퇴했고, 기 센 아내는 죽임을 당했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알아서 다해주고 자신은 도장만 찍으면 되었는데, 이제 40대의 한 아이(?)만 홀로 남게 되었다.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고종(高宗)은 어떤 수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했을까?
고종(高宗)은 두려웠다. 을미사변 때 일본 낭인들이 들어와서 자기 옷을 찢고, 아들을 칼로 후려치고, 아내를 죽여 불태우는 모습을 보았다.
아! 까딱하면 나도 저렇게 죽을 수 있겠구나!
무서워서 잠을 못 잔 고종, 자신의 안전을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외국 용병들을 사서 호위하게 한다.
이렇게 벌벌 떨고 있는 고종(高宗)에게 접근하는 세력이 있었다. 러시아였다.
"두려워 마시오. 우리한테 오시오. 우리가 당신을 보호해 주겠소."
이 말은 고종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명성황후도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는데, 그 러시아가 직접 자기를 보호해주겠다고 제안해오니 감지덕지(感之德之)였다.
흉악한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은 이것밖에 없다! 마침내 고종(高宗)은 결단을 내렸다.
신이 난 러시아는 재깍 군함 2척을 조선에 보냈으며, 100여 명의 해군을 상륙시킨 다음 왕을 보호하기 위해 서울에 진주토록 했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공사관)
1896년 2월 11일 새벽, 어둠을 틈타 고종(高宗)은 세자와 함께 일본의 눈을 피해 궁녀의 가마를 탄 채 아관으로 향했다
(아관파천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기 위해 뚫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비밀 통로)
러시아를 한자로 '아라사' 또는 '노서아(露西亞)'라고 표기하는데,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이라는 뜻이며, 파천(播遷)은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던 일을 말한다
계획대로 아관으로 옮겨간 고종(高宗)은 이듬해 2월 20일까지 380여 일을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렀다.
한 나라의 국왕이 자기네 나라 주재 외국 공관에 머물면서 자그마치 1년을 버티었으니...
아, 도대체 망신스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아관파천은 고종(高宗) 나름의 정치 승부수였다.
고종의 입장에서 홀로서기의 첫 작품치고는 대박인 것이다.
왜냐하면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통해 일본의 압박이 엄청나게 거세어진 상황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높여 러시아를 일본과 동등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견제하겠다는 발상.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과 팽팽한 기(氣) 싸움을 벌이게 만들고, 그 안에서 버티겠다는 발상은 분명히 탁월한 정치 감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정치 감각이 어떤 목표를 향해 발휘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고종(高宗)의 아관 행보는 과연 조선의 백성을 위한 것이었을까?
"일본에 협력한 조정의 친일 인사들을 모두 잡아 죽여라."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친일파 대신인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장박의 5 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쫓아내고 친러파로 새로운 조정을 구성했는데 이때 등장한 인물들이 박정양, 이범진, 이완용 등이었다.
총리 대신 김홍집(金弘集)은 변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가지 말라는 일본군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종(高宗)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
"저 인간이 우리 상투를 자르게 한 공범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공범이다!"
순검과 군중들이 그의 모습을 발견한 후 김홍집(金弘集)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시신으로 변했다
권력을 잡은 친러파는 가장 먼저 의병 운동의 계기가 되었던 단발령(斷髮令)을 철회해 민심을 가라앉히고,
을미의병(乙未義兵)에게도 해산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고종(高宗)은 러시아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조선에 만족할 만한 군대가 만들어질 때까지 러시아 군대가 조선의 국왕을 보호해 주시오.
그러기 위해서 러시아 교관이 직접 조선의 군대와 경찰을 훈련시켜 주시오.
그리고 철도를 놓을 수 있는 기술자들을 보내주고, 300만원을 조선에 빌려 주시오."
이를 계기로 조선은 러시아 군대에게 왕의 안전을 맡기고, 끊임없이 러시아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종(高宗)이 일부 개혁 사항들에 대해 무효선언을 하며, 친미반일파와 친러인물들로 새 내각을 꾸리자, 일본은 닭 쫓던 개 꼴이 되고 말았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보람도, 명성황후를 시해한 대가도 찾을 길이 없어지고 만 것이었다
러시아는 고종이 제발로 걸어 들어와 공사관에 주저앉는 상황이 전개되자, 이를 계기로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조선군의 군사훈련과 조직을 지휘했으며, 재정고문까지 꿰차고 앉았다.
뭐가 예뻐서 러시아가 조선을 돕겠는가? 러시아 또한 일본과 마찬가지로 임금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조선에서의 이권 침탈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쉽게 달성하고자 한 것뿐이었다.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정권을 유지하기는 참 쉽다. 전화 한 통만 걸면 바로 오니까..
하지만 그 대가로 지불하는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아관파천에는 얼마만큼의 대가가 치루어졌는지 한번 알아보자!
당시 일본은 러시아라는 대제국을 상대할 실력이 되지 않자 싸움 대신 흥정을 벌였다.
"조선을 둘로 나누어 대동강과 원산만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가 차지하고 남쪽은 일본이 차지하면 안 될까?"
이에 대해 만주를 손에 넣고 조선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던 러시아는 일본의 제안을 한 마디로 거절했다.
사실 러시아가 군침을 삼키고 노리던 곳은 만주였지, 별 볼일 없는 조선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일단 만주를 챙기면 조선이야 고삐에 끌려온 소새끼같이 그냥 딸려 올텐데 미쳤다고 니네들하고 미리 분할 약속을 하냐?'라고 통박을 굴리면서 만주공략에 진력했던 것이었다.
만약 당시 러시아가 얼씨구 하고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한반도는 19세기 말에 이미 두 조각으로 잘라졌을 것이다.
(한반도 분할을? 이룬~뜨그랄!)
이 병신년부터(자꾸 욕 생각이 나는건 저만이 아니겠져?) 열강의 이권 침탈은 절정에 이르렀다.
최혜국 대우(最惠國待遇, 조약을 체결한 나라가 상대국에 대하여 가장 유리한 혜택을 받는 나라와 동등한 대우를 하는 일)라는 조항 아래 프랑스는 광산채굴권을, 미국은 금광채굴권을, 일본은 철도부설권을 가져갔다.
어쨌든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공짜로(?) 1년이나 버티고 있으면서 친정(親政)을 시도했으나 친정은 커녕 친러파인 이범진이나 김홍륙이 권력을 틀어쥐고 제 마음대로 하는 꼴이나 보았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러시아에 크게 기대했던 고종(高宗)은 엄청 실망했고, 맨날 애꿎은 담배만 축내다 드디어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버틴 지 만 1년만에 비빈들과 궁녀들을 이끌고 경운궁(慶運宮)으로 환궁했다.
그런데 러시아는 고종(高宗)을 1년간이나 거저 먹여주고 재워 주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
고종이 1년간 러시아공사관에서 개기면서 밀린 밥값과 숙박료를 러시아는 압록강, 두만강, 울릉도의 삼림 벌채권과 함경도 경원 및 강릉의 산 채굴권으로 받아갔다.
또한 부산 쪽에 자국 선박들의 남하를 위해 중간 연료기지로 쓰기 위해 해서 절영도(絶影島)까지 조차(組借)해갔다.
고종(高宗)은 결국 1년 동안 남의 집에서 쪽팔리는 멍청이 짓만 하다가 도로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절영도 - 지금의 영도)
♡ 러시아 통역관 김홍륙(金鴻陸) ♡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입김이 막강해지자 거기에 편승해서 한 건 하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유명한 인물이 있다.
함경도 경흥 출신의 김홍륙(金鴻陸)은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민하여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가 서울로 부임할 때 통역관으로 따라왔다가 고종(高宗)의 요청으로 궁중에 남아서 조선 조정과 러시아 공사관 간의 통역을 담당했다.
러시아 세력에 크게 기대를 걸고 있던 고종(高宗)은 그에게 러시아와의 외교교섭을 일임했고,
그 바람에 김홍륙(金鴻陸)은 시종원 시종이 되었다가 비서원승, 학부협판, 귀족원경의 지위까지 올랐다.
고종(高宗)은 김홍륙의 말이라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어 백관들의 임명은 김홍륙에게 달렸다고 할 정도였다.
1897년이 되자 김홍륙(金鴻陸)은 정2품으로 승진했다.
일개 통역관이 정승 수준까지 치고 올라온 것이었다.
이처럼 김홍륙(金鴻陸)이 독주하자 자연히 견제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공사 웨베르가 귀국하고, 신임 공사 마추닌이 부임하면서 조선에 대한 내정 불간섭 정책을 취하자 김홍륙(金鴻陸)은 그만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1898년 4월 일본과 러시아간에 '로젠-니시협정'이 체결되면서 러시아 세력이 약화되고 친러시파에 대한 제거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그 전까지 김홍륙(金鴻陸)의 발가락이라도 빨라면 주저없이 빨던 것들이 일제히 김홍륙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게 권력이란 것이다. ㅠㅠ)
결국 고종(高宗)은 김홍륙을 탐관과 통역의 잘못을 이유로 태 100대에다 흑산도로 종신유배를 명했다.
하루아침에 길에 나앉은 김홍륙은 유배지로 떠나면서 고종을 살해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평소 친분이 있었던 황실의 주방 담당 주사 공흥식에게 돈을 왕창 질러 아편 한 봉을 같이 건네면서 음식을 만들 때 넣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공흥식은 다시 서양요리사인 김종화를
은 1,000원으로 매수했고, 김종화는 돈 값을 하느라고 고종(高宗)의 생일 잔치 때 디저트로 나가는 커피에 아편을 왕창 타 넣어 고종에게 바쳤다
폼을 잡고 커피잔을 치켜든 고종황제 (이때는 대한제국 시절)가 점잖게 커피를 한 모금 넘기기가 무섭게 뱃속에 든 것이 모조리 입으로 쏟아져 나왔다.
황태자(순종)가 이상하게 여겨 한 모금 넘기자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대신들과 궁인들도 커피를 맛보고 모조리 구토를 하거나 복통을 일으키자 궁궐은 난리가 났다.
곧바로 주방 책임자와 커피 만진 놈들이 모조리 잡혀왔고, 고문이 가해지자 김홍륙(金鴻陸)이 흉수라고 줄줄이 불었다.
유배지로 가고 있던 김홍륙(金鴻陸)은 다시 잡혀 서울로 올라왔고, 다음 날 재판도 받지 못하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멍청한 서양음식 요리사 김종화가 커피에 아편을 탈 때 너무 많이 처넣는 바람에 고종(高宗)은 멀쩡하게 살아나고 대신 김홍륙(金鴻陸)을 비롯한 여러 놈들이 다치고 만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