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마태오 25,14-30
생각하는 것보다 더 받았다.
저희 성당 옆에는 수녀원에서 하는 노인 요양원이 있고 대부분은 많은 장애를 지니신 분들입니다.
제가 한 달에 한 번씩 미사를 드려드리는데 알아들으시는 분이 거의 없으십니다.
본래 지난주에 미사를 했어야 했지만 눈병으로 한 주 연기를 해서 오늘 미사를 드려드리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제 저녁 성경공부 강의를 마치고 오늘 오전에 일본으로 떠나는 동기 신부와의 마지막 모임이 있다는 것이 늦게야 생각이 났습니다.
수원에 가서 모임을 하고 내려오면 매우 늦을 것이고, 그래서 눈병이 아직 낫지 않아서 미사를 더 연기해야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은 눈병은 거의 나아가고 있었지만, 오전에 피곤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본당 수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예비신자 한 분이 교통사고가 나서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할 일도 많은데다 피곤했지만, 요양원 어르신들에게 미사를 해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는데다, 또 수녀님이 은근히 같이 가자고 하시는 것 같아서 병자방문 준비를 하고 나갔습니다.
가는 도중 예비신자교리 봉사자분이 그 분은 근래에 들어서 집에 우환이 많아서 남편이 성당 나가는 것을 매우 반대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매님은 너무 소극적이라 말도 잘 안하시는 편이고 우울증 증세도 있는 분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바쁘게 사는 지는 신자분들도 익히 잘 아십니다.
그래서인지, 그리고 저의 잘못이겠지만, 봉사자분도 제가 예비신자 병자 방문 가는 줄 모르고 병원에 예약이 되어 있어서 가는 줄로만 알았다고 합니다.
사실 그만큼 신자 한명 한명에게 신경 쓰지 못하고 사는 것이 저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병실에 들어섰는데 얼굴도 익숙하지 못한 한 자매님이 일어서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수줍게 인사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바로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제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저는 얼굴도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몸은 크게 다치시지는 않고 타박상으로 마무리 될 듯 싶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또 남편이 교통사고가 났었고, 아들이 희귀병에 걸렸었는지 등을 울고 웃으시면서 열심히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봉사자들은 돌아오면서 그 자매가 그렇게 행복하게 또 목소리도 크게 말씀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들 하셨습니다.
자매님은 지난 주 교중 미사 때 제가 미사 때 평화의 인사를 가장 처음으로 악수하면서 해 주셨던 것을 가슴에 새기고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저는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그 분은 자신의 손을 처음으로 제가 잡아주었다는 것이 매우 큰 기쁨이셨던 것입니다.
물론 기도하고 안수를 해 드리는 내내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 정도의 교통사고는 바쁘다는 핑계로 오려고 하지 않았겠지만, 오늘 우연찮게 방문해 보면서 사제라는 존재의 힘을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제라는 존재가 신자들에게 이만큼 큰 기쁨을 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저조차도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방문하려고 했을 것이고, 악수 한 번 해 주는 것도 신자 한 분에게 이렇게 기억에 남는 일이 된다면 모든 분들의 손을 잡아드렸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하느님이 주신 능력이 매우 작다고만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게을러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양원 어르신들이 한 달에 한 번 제 얼굴을 보기 위해 기다리셨지만 이 번 달은 이렇게 지나버리게 한 것에 대해 더욱 미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탈렌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종에겐 다섯 탈렌트, 어떤 종에겐 두 탈렌트 , 어떤 종에겐 한 탈렌트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탈렌트의 차이를 심리적인 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많이 주셨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적게 주셨다고 불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주셨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열심히 활용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반면, 적게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불만으로 노력도 안 하고 게을러지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 한 탈렌트만 받아서 불만으로 가득차서 그것을 땅에 묻어놓기만 했던 사람은 주인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주인을 무서운 짠돌이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짠돌이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다른 종들보다 적게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재산을 불려드릴 필요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자연적으로 게을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받았습니다.
나의 미소가 자살하려는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나의 작은 관심이 아무도 고치지 못하는 우울증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여 게을러지는지, 게으르기 위해서 적게 받았다고 믿으려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받은 능력은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믿지 못하면 자연적으로 게을러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섯 탈렌트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한 탈렌트밖에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까?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마태오 25,14-30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맞춤형 선물은 무엇입니까?
나이 탓인지 자주 슬슬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기쁘고 보람된 순간들도 떠오르지만, 부족하고 부끄러운 순간들이 더 많이 떠올라 가슴을 칩니다.
그러나 동시에 과분할 정도로 흘러넘치는 다양한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더 빨리 불러가실 수도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큰 자비를 베푸셔서, 우여곡절 속에서도 오늘까지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한없이 부족하지만, 이런저런 탈렌트를 선물로 주셔서 이웃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니, 사방이 온통 감사꺼리로 충만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주시고, 그 위에 그리스도인으로, 수도자로 불러주시고 다양한 탈렌트를 선물로 주신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그저 내 한목숨 지탱하라고, 나 하나 호의호식하면서 즐기라고 불러주신 것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탈렌트가 무엇인지 잘 살펴보고, 최대한 계발해서, 이웃과 교회,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고 기여하라고, 결국 적극적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최종적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라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주신 것이 아닐까요?
오늘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탈렌트는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맞춤형 선물은 무엇인가? 어느 정도인가? 어떻게 계발할 것인가?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어떻게 하느님께 봉헌할 것인가?
여차하면 드러누워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제일 절친 같은 소파와 안락의자, 티비나 모니터와 과감히 결별하고, 부단히 일어서야겠습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시간을 하늘나라를 위해 어떻게 하면 창의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겠습니다.
하늘나라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나른한 꿈이나 공상을 통해서 절대로 획득할 수 없습니다.
잠에서 과감히 깨어나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매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시간과 기회, 재능과 에너지를 활용해서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봉사함을 통해서, 우리 앞에 하늘나라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 탓입니다>
2023. 09. 02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마태오 25,14-30 (탈렌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믿음 맡기셨으니
믿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사랑 맡기셨으니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의로움 맡기셨으니
의롭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착함 맡기셨으니
착하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고움 맡기셨으니
곱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부드러움 맡기셨으니
부드럽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
맑음 맡기셨으니
맑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밝음 맡기셨으니
밝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올곧음 맡기셨으니
올곧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굳셈 맡기셨으니
굳세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기쁨 맡기셨으니
기쁘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당신께서
희망 맡기셨으니
희망하지 않는다면
내 탓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