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론 사람아
(시집 『우리들의 양식』, 1974)
[작품해설]
이 시는 ‘너’로 의인화된 봄을 기다리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을 노래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봄’은 어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 온갖 어러움과 역경을 이겨내야만 오는 간절한 기다림의 대상이다. 따라서 그것은 화자가 처한 현실 세계에는 부재하지만, 언젠가는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어떤 절대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화자는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 기다림마져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고 하여 이 작품을 자연의 순환 원리에 따른 당위적인 자연 현상으로서의 봄의 도래를 노래한 것처럼 판단하게 한다. 그러나 ‘너는 더디게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라는 시행을 통해 그것이 자연 현상을 넘어선 특별한 의미까지 획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화자가 처한 현실은 어떠한가? 화자가 기다리는 대상이 ‘봄’이라면, 그것은 마땅히 ‘봄’이 도래하기 이전인 ‘겨울’이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진술되지 않은 대신, ‘바람’이 ‘다급한 사연 듣고’ 봄을 ‘흔드러 깨우’러 갈 만큼 절망적이고,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아무 것도 알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대로 제시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화자가 갈망하는 ‘봄’은 민주나 자유 같은 보다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주는 가치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확연히 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쉽게 오지 않는다. 그래서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봄’이 도래할 것을 더 이상 꿈꾸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듯 암울하고 비판적이지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는 확신은 화자로 하여금 고통을 견디게 하는 버팀목이 되어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슬기롭게 인내하며 오늘을 살아가게 한다.
폭력과 억압 속에서 민중의 피를 먹고 자라나는 민주주의처럼 봄은 겨울 속에서 겨울을 무너쯔리며 오는 것이다. 물론 자연의 순환 원리에 의거하면 봄은 겨울을 이릴 수밖에 없으며, 겨울이 길고 고통스러울수록 봄은 더욱 아름답고 눈부신 법이다. 그런데 봄이 오는 길목에는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나 시련이 놓여 있기 마련이다. 그런 탓에 화자를 도외시할 때도 있지만, 더딘 발걸음일리자도 반드시 봄은 돌아온다고 믿는 화자의 건강하고 낙관적인 역사 의식은 결국 봄을 자시의 친근한 대상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너’, 먼데서 이리고 돌아온 사람‘으러 지칭하게 할 수 있으며, 봄을 기다리며 견뎌 왔던 그 인고의 세월은 화자로 하여금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볼 만큼 그에게 벅찬 감동을 안겨다 주며 ’봄‘과 하나가 되게 한다.
[작가소개]
이성부(李盛夫)
1942년 광주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1959년 광주고등학교 재학 시절 『전남일보』 신춘 문예에서 시 당선
1961년 『현대문학』 에 시 「백주」, 「열차」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우리들의 양식(糧食)」 당선
1967년 김광협, 이탄, 최하림, 권오윤 등과 『시학』 동인
1969년 제15회 현대문학상 수상
1977년 제4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시집 : 『이성부시집』(1969), 『우리들의 양식』(1974), 『백제행』(1977), 『전야』(1981), 『빈 산 뒤에 두고』(1989), 『야간 산행』(1996), 『저 바위도 입을 열어』(1998),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