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인다
한 동자승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를 본 노스님이 잠을 깨웠다.
“이놈! 절에서 낮잠이라니.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마지못해 잠에서 깨어난 동자승이 무척 서럽게 울어댔다.
“왜 우느냐?”
“꿈을 꾸었어요.”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뇨.”
“그럼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뇨.”
“도대체 무슨 꿈을 꾸었기에 그리 슬피 우는 것이냐?”
“그건··· 달, 달한, 달콤한 꿈을 꾸었어요.”
『금강경』에서는 설한다. 인생은 한바탕 꿈[夢]이며, 이 세상은
가상현실[幻]일 뿐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설사 그렇다 해도 꿈을 깨고 싶지 않다. 오히려 달콤한 꿈꾸기를 갈망한다
심지어 ‘꿈★은 이루어진다.’면서꿈꾸기를 더욱 부추긴다.
하지만 사바의 꿈속에 있는 한, 길몽과 흉몽은 무한히 반복된다.
더 이상 악몽을 꾸고 싶지 않다면, 꿈 깨는 것이 상책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마음 편하면 지금 이곳이 극락이지, 극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실재하는 것은 오직 눈앞에 펼쳐진 이 세상뿐이며, 지옥이니 천당이니
하는 것은 모두 허상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이 있다.
똑같은 물이건만 아귀는 피고름으로 보고, 물고기는 집으로 보고, 사람은 물로 보며,
천신은 옥쟁반으로 본다. 보는 이의 안목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다.
이 세상이 진짜 있다고 보면, 지옥이나 천당도 진짜 있다.
이 세상이 가상현실이라고 깨치면, 극락도 가상현실로 존재한다.
이 몸이 ‘나’라고 보면, 절대 윤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몸이 ‘아바타’라고 보는 것이 해탈자의 안목이다.
중생은 몸과 마음이 ‘진짜 나’라고 보아 윤회게임에 몰두하고,
보살은 몸과 마음이 ‘아바타’라고 보아 해탈게임을 즐길 뿐이다.
중생은 내가 있어(有我) 윤회게임 몰두하고
보살은 내가 없어(無我) 해탈게임 즐긴다네
-월호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