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봉창 의사가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날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어찌하여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모르는 자를 임시정부 건물에 출입하도록 놔두고 있습니까?
이봉창을 두고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원들 사이에서는 언쟁이 일었다.
국무원들은 김구 선생에게 어찌 일본인의 행색을 한 건달 이봉창을 임시정부청사에 출입하도록 두냐고 따졌다.
그들은 기노시타 쇼죠라는 일본 이름을 쓰고 일본 옷을 입고 다니는, 봉급을 타면 술에 취해 사치와 호사를 즐기는 건달 이봉창을 무시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이봉창을 여러 차례 면담한 끝에 이봉창이 단순한 건달이 아님을 알게 됐다.

왼쪽부터 이봉창 의사. 김구 선생, 윤봉길 의사 / 독립기념관
이봉창은 "제 나이 이제 서른하나,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스스로 나서 일왕을 암살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것이다. 그의 굳은 의지를 확인한 김구는 이봉창을 한인애국단의 1호 단원으로 임명하고 거사를 준비했다.거사 준비에는 꼬박 1년이 걸렸다.
김구 선생이 자금과 수류탄을 준비하는 동안 이봉창은 일본인들의 철공소에서 일하며 술과 음식으로 일본 경찰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는 속수무책 건달 행세를 하며 일본 영사관까지 자유롭게 출입했다.

당시 일왕 히로히토가 타고 있던 마차 / 연합뉴스
1년 후 수류탄을 챙겨 일본으로 건너간 이봉창은 완벽한 일본인 행세를 했다.
그러던 중 일왕 히로히토가 신년 관병식 행사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거사를 계획했다.
86년 전 오늘인 1932년 1월 8일, 선생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를 겨냥해 수류탄을 던졌다.
말이 다치고 궁내대신의 마차가 뒤집어졌지만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봉창 의사가 용수를 쓴 채 일본 법정으로 끌려들어가는 모습 / 연합뉴스
이봉창은 그 자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른 뒤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일본의 수도인 동경에서 일왕을 공격한 그의 대담한 행동은 전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한국 독립 운동의 강인함과 한국인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것이다.
당시 일본과 맞서고 있던 중국은 이봉창의 거사 실패를 매우 안타까워하며 보도하기도 했다.
또한 침체기를 맞고 있던 상하이 임시 정부와 독립운동 전선은 그의 의거로 인해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됐다.
출 처 : http://www.insight.co.kr/newsRead.php?ArtNo=134113 인용
---------------------------------------------------------------
아래는 3년전 2015년의 기사 내용입니다.
[광복 70주년 특별인터뷰] 이세웅 이봉창의사 종손자
이세웅 이봉창의사 종손자
이봉창 의사께서 제게 남기신 유산은 불의에 꺾이지 않는 정신력과 올곧은 의지를 갖게 해주신 것입니다.

(보훈뉴스=정의진 기자) 본지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셨던 순국선열, 애국지사들의 후손들을 찾아 그 분들의 곧은 삶과 평생을 지켜온 고귀한 유산에 대해 독자들께 1년에 걸쳐 전해드린다. 지난 11월 호 조경환 조명하의사 장손자에 이어 두 번째로 이봉창 의사님의 종손자인 이세웅님을 모셨다.
이번 추모식이 정말 오랜만에 참석하는 행사라 들었습니다.
저희 유족들은 다 생업에 매진하다 보니 매년 추모식에는 유족 대표로 한 명만이 참석해 왔습니다. 80년 중반까지는 이세창 큰형님이 참석해 오셨고, 이후 작년까지 약 30년 동안 이세현 동생이 참석해오다 뜻하지 않는 일이 생겨 제가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83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에서, 이세웅 이봉창의사 종손자가 헌화하기 위해 단상에 들어서고 있다
이봉창 의사의 종손자로서 그 분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며, 간직하고 있는 유산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부친과 형님들께 전해듣기로, 종조부님은 낙천적인 분이셨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 사진은 가족들을 위해 찍은 사진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거사를 논의했던 백범 김구 선생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거사 직후 비장한 결의를 담은 사진 대신 환한 미소를 담은 유가족용 사진을 신문사에 보냈다고 합니다. 역설적으로 이 사진은 신문(호외)에 실려 많은 동포들의 기억 속에 임시정부의 활약과 더불어 죽음마저도 초월한 열혈남아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종조부님의 사진을 볼 때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 날, 가족과 동지들을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쓰셨던 그 분의 의기가 느껴져, 평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종조부님을 욕되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종조부님께서 남기신 유산은 “불의에 꺾이지 않았던 정신력, 옳다고 생각하면 망설이지 않고 행동하셨던 의지" 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그 분의 애국애족정신을 잊지 않고자 매년 일정기간을 정해 국내외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희망자들이 모이면 찾아가서 기술을 교육시키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몽골 교민들을 대상으로 한 직업교육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유족분들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가족분들은 잘 계시는지요?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넉넉하진 않지만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다만 작년 12월에 앞서 말씀드렸던 동생이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중인 관계로 가족들의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입니다. 특히 동생 세현은 결혼을 하지 않아 가족이 없는 관계로 막내인 여동생(이정희, 서울 거주)이 입원해 있는 요양병원(경기도 고양시 일산 소재)을 오가며 돌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종로구 소재 작업장(금속세공)에서 이세웅(61)씨가 일을 하고 있다
이봉창 의사님이 미혼인 관계로 형님인 이범태 옹의 후손들이 유지를 이어 활동해 오셨는데, 유족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없었습니까?
아버님(이실, 이봉창의사의 형인 이범태 옹의 장남)이 돌아가신 후부터는 정부 지원도 끊겼고, 광복회 역시 점점 사이가 멀어지며 약간의 혜택(쌀이라던가 생필품 지원)도 없어졌습니다. 특히 아버님 역시 40대 때 뇌출혈로 쓰러져 8년간 투병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때가 제가 17살 때 였으니 약 70년 초로 기억이 되는데요 오랜 아버님의 투병 생활로 어머님도 심신이 지친 있으신데다 정부와 독립유공자유관단체의 지원마저 끊겨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큰 형님은 군(당시 육군 상사)에 계셨고, 작은 형님 역시 월남에 가 있어서 이봉창 의사님을 기리는 기념사업에는 유족들이 거의 참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저 역시 어머님과 가족의 생계를 우선시 해야 하는 처지여서 학업보다는 기술(금속 세공)을 배워 취업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천직으로 생각하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봉창 의사와 같이 후손을 남기지 않아 방계 후손들이 그 유지를 잇는 경우 정부의 지원은 단 한가지, 매년 8월 15일 날아오는 광복절 초대장입니다. 70년대에는 저 역시 학비지원이 있었던 것을 보면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지원제도(원호처)가 지금보다도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순국선열의 직계비속은 물론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독립운동가의 가족 역시 그 만큼의 수난을 겪는 것었던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거기에 따른 최소한의 보상과 예우는 국가의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희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들었습니다. 거사 이후 이진구 증조부님은 물론 형님이신 이범태 조부님도 일제 치하에서는 도피생활의 연속이었고, 가족과 함께 생활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봉창 의사의 결정과 행동에 대해서 다들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특히 이진구 증조부님은 이 의사의 거사를 심정적으로 지원하셨고, 유해라도 해방된 조국에 들여오자는 백범 김구선생의 요청에 망설임 없이 전 재산을 팔아 그 일에 기부하셨다 들었습니다. 보상에 대해 물으셨는데 굳이 대답을 하자면 종조부님이 어떠한 보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저희 역시 같은 마음입니다. 정부가 나서서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효창공원에 모셔주신 것과 동상을 세워주셔서 많은 이들이 그 분을 참배할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 유족을 대표해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종로구 소재 작업장에서 이세웅씨가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끝으로 정부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저희 유족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봉창 의사님의 이름을 빌어 뭔가를 바랬던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후손의 도리라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동생이 몸이 아파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한 독립유공자단체에서 생활보호대상자 신청과 더불어 이를 알려 도움을 주려는 제의가 있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한 동생이 혹 종조부님의 명예에 조금이라도 누를 끼칠 까 염려해서 거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는 제 생활도 넉넉한 편이 아니라 모르는 채 했지만 이제 나서지 않으면 더 이상 동생을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아 이렇게 인터뷰의 형식을 빌어 나오게 됐습니다. 동생은 유족 대표로 지난 30여년 동안 묵묵히 이봉창 의사의 정신을 이어왔습니다. 특히 이봉창 의사와 같이 미혼으로 가족을 남기지 못해 방계 유족이 대를 잇고 정신을 계승한다면 그 유족 대표 한 명 만큼은 국가가 관심을 가지고 돌봐주셨으면 합니다. 일제 치하에서 이 의사님이 의거 이후 증조부님은 물론이고 할아버님과 아버님 역시 말 못할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83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에서, 막내 여동생인 이정희(47)씨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세웅(61), 이봉창 의사 종손자
기자 후기
현재 이세웅 종손자의 동생인 이세현씨(58세, 미혼)는 현재 경기 일산 소재 한 요양병원에서 뇌출혈로 입원하여 투병중이다. 기자는 해당기관인 국가보훈처 서울지방보훈청을 비롯하여 백범기념관, 매헌기념관, 그리고 각 기념사업회 및 유관단체, 언론인 등을 차례로 만나보았다. 특히 보훈처(서울청 보훈선양팀, 복지과)는 늦은 시간까지 함께 대책을 논의하며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였지만 현 보훈법 체계에서는 의료지원이 불가함을 확인했다. 또 순국선열유족회를 비롯하여 관련 독립유공자단체들 역시 안타까운 현실을 공감하였지만 행동으로 이어지기에는 현실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은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과 희생정신을 되새기며 그분들을 의기를 기리는 행위이다. 남겨진 유족들을 돕는 이유에 있어서, 왜 그래야 되는지? 조국광복을 위해 그들이 한 일은 무엇인지? 라고 반대로 묻는다면 ‘순국선열들이 그러한 행동을 하기까지는 조국과 민족을 너무나 사랑했고, 조국이 해방되면 남겨진 유족들을 국가가 당연히 나서서 지켜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라고 선열들을 대신해 대답하고 싶다.
덧붙여 국가 보훈은 국가가 지급 책임을 가지는 아주 특별한 성격의 보험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고귀한 희생에 대한 당연한 예우이며 남겨진 가족들이 명예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최소한의 장치이다. 한 명의 항일독립투사가 나오기까지 그 이면에는 그 가족들에게 수많은 시련과 고통이 존재했다. 만약 그 선정과 절차가 복잡하다면 국가의 위난이 닥쳤을 때 누가 가족을 외면하고 목숨을 바칠 것인가? 애국심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가 책임감을 가지고 남겨진 이들을 보살피는 것이 당연시 될 때 자생적으로 발생되며 또한 유지될 것이다.
* 이봉창 의사 가계도 (제적등본 참조)
1) 이진구(鎭球, 44년 사망) _이범태(範泰, 장남), 이봉창(奉昌, 1901년생, 미혼),
2) 이범태(範泰, 해방이후 사망) _이은임(銀任, 장녀, 09년생), 이실(李實, 22년생), 이성실(成實, 28년생), 이성순(聖順, 31년생)
3) 이실(實, 70년 초 사망) _이세창(世昌, 장남, 45년생), 이세철(世哲, 47년생), 이세웅(世雄, 55년생, 서울 서대문), 이세현(世顯,58년생, 경기 고양), 이정희(貞姬, 69년생, 서울 마포)
출 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fromage&logNo=220250689393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