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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4 묵상글 ( 부활 제2주간 화요일. - 한마음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올해 강론글 : 아직 /
* 어제 강론글 말미에 오늘 강론글 못 올릴 수도 있다하셔서
2025년 강론글을 우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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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4. 부활 제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년 강론글
2025.04.29 03:40
부활 2주 화요일 - 한마음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오늘 사도행전은 유의미한 말을 전해줍니다.
자기 소유를 자기 것으로 하지 않음에 관해.
우리는 가난과 관련하여 아예 소유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사람은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래야 하고 많이 소유하지 않음이 필요하고 중요하기에
주님께서도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렇지만 소유 자체가 문제이고 죄인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아무것도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필요한 것을 소유하되 자기 것으로 소유치 않는 것이 중요하고,
소유욕 없이 소유하는 것 또는 소유욕이 없기에 가난한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 것인데 하느님께서 주셔서 내가 소유하게 된 것,
곧 하느님이 거저 주시는 은총을 누리는 것이 가난이고,
이럴 때 오늘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라고 하듯
하느님 것이 다 내 것이고 내 것이 다 하느님 것입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소유 없이(Sine Proprio) 소유하는 것인데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형제들은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말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정교하게 얘기하면
무엇을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마음 곧 욕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자기 의지도 자기 것으로 하지 말라고 하고,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하는 것 또는 하려는 것을 악이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을 때
오늘 사도행전이 얘기하듯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습니다.
유심히 보셨는지 모르지만
사도행전은 한마음을 무척 강조하여 요 며칠 한마음의 사도들을 봤습니다.
어제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동료들은 그 말을 듣고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아뢰었다.”
그제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그러나 한마음은 참 아름답지만 그렇게 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한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앞서 봤듯이
자기 것 특히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모두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해야 할까요?
하나를 이루려는 마음과
하나를 이루시는 성령이
같이 작용하는 공동체를 꿈꾸는 것은 꿈쟁이들에게나 가능한 것일까요?
이런 꿈쟁이가 되는 것은 허무맹랑한 것일까요?
우리가 허무맹랑한 꿈쟁이가 되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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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4. 부활 제2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에고의 관심사로부터의 해방!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예수님께서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을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관상과 해방, 그리고 활동
에고의 관심사로부터의 해방
2026년 4월 13일 월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해방으로 부르신 대상이 바로 부풀려진 에고의 의도와 욕망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해방시키셨을까요? 그 무엇이란 오늘날 우리가 '에고' 혹은 '거짓된 자아(옛 사람)'라고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을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과정을 훨씬 더 명확하게 설명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심리학적 언어를 사용하실 수 없었기에,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신학 연구는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준비하지 못했던 훨씬 더 급진적이고 요구가 많은 예수님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메시지를 왜곡하여, 본래는 자아의 변화를 중심으로 해야 할 것을 '육체적 자아'로부터의 자유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책감 대부분을 몸에 집중시켰고, 몸을 억압하고 벌하며, 지나친 즐거움이나 자유, 기쁨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물론 육체와 관련된 문제들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 생각에 서방 교회에서는 '에고'가 거의 아무런 제재 없이 방치되었습니다. 우리는 에고가 통제 불능 상태로 커져 가도록 허용하면서도, 겉으로는 순결하고 절제하며 탐욕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보이려 애써 왔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참으로 말씀하신 본질적인 가르침에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대신 우리는 주님께서 결코 말씀하지 않으신 것들에 지나치게 집착해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참되게 쇄신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권력에 관하여 가르치신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교회와 세상의 권력 구조를 쇄신하는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속적 지배 권력, 곧 남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남을 지배하는 것"이라 부르시며,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을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마태 20,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남을 지배하는 권력을 종교의 본질로 여기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교회 안에 상층, 중간, 하층 관리 체계가 있는 중앙 사무실을 의도하신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사제로서 저는 "하층 관리"에 속하지만, 우리조차도 평신도들이 단순히 수동적인 추종자가 되기를 기대해 왔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대와는 너무나도 배치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사람들에게 내적 권위를 주심으로써 참된 힘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에고라는 자아로부터의 해방은 곧 형상과 외형의 세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마몬"이라 부르시며,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외형과 권력, 명예와 소유의 게임에 몰두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이는 매우 단호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미지와 체면에 집착하는 정도와, 내적 삶을 얼마나—혹은 얼마나 적게—체험했는지 사이에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는 경고를 통해 우리를 부정적 사고와 대립적 태도로부터 해방시키심으로써, 자아적 자아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그분께서 이 해방을 표현하신 말씀은 "용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약 3분의 2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대립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어떤 수준에서든 원한이나 치유되지 않은 부정적 에너지를 간직한 채, 그것을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변형시키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40년 넘게 취약한 이들과 공동체를 돌보며 간호사로 일해 오면서 하느님 은총에 의해 겸손을 배우고 있습니다. 간호사로서 우리는 환자와 가족이 겪는 기쁨과 고통을 함께 살아갑니다. 그 치유의 거룩한 공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돌보는 이와 돌봄을 받는 이 모두의 삶을 변화시키십니다. 건강과 고통은 인종, 종교, 민족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려움의 순간마다 위대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하신 아버지 앞에서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는 능력은, 제가 간호사이자 봉사하는 지도자로서 가장 소중하게 간직해 온 기술이자 은총입니다.
—Barbara A.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Jesus as Liberator,” ONEING 13, no. 2, A Living Tradition (CAC Publishing, 2025), 54–55. Available in print or PDF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nnie Quick, untitled (detail), 2025, photo, Albuquerque.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맨발로 땅에 닿아 서 있는 것은 고요한 수도자의 몸짓을 의미합니다. 즉각적인 반응은 그 힘을 잃고, 대신 관상적 응답이 솟아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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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편이십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어제 우리가 들었던 니코데모와의 대화의 연속입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영', '숨결', '바람'은 같은 단어(רוּחַ: ruach)로 표현됩니다. 이는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신비로운 실재들입니다. 우주를 형성하는 본질적인 네 원소—불, 공기, 흙, 물—중에서 오직 흙만이 고정된 형태를 가지지만, 결국 그 흙의 형태조차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변하기 쉬운 원소는 공기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이를 "붙잡아 두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붙잡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고정되지 않은 것, 알려지지 않은 것과도 충분히 잘 살아갑니다. 사실 고정성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단지 마음속의 생각일 뿐입니다.
코헬렛서 11장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람의 길을 네가 알 수 없고 임산부의 배 속에 든 몸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듯 그렇게 모든 것을 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너는 알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 구절을 반향하는 듯합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성령께서는 바람, 숨결, 영과 같이 자유롭고 신비롭게 역사하십니다.
앨런 와츠(Alan Watts)라는 영성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유형의 마음은 삶의 변덕스러움, 붙잡을 수 없음, 그리고 신비로움에 두려움을 느끼며, 구원을 영원히 고정되고 확실한 상태로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은 자발성, 놀라움, 신비의 요소가 대부분 제거되어 있는 마음입니다."
사실 이런 마음은 성령 하느님께서 주도하시며 신비롭게 이끌어 가시는 우리 삶의 역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런 마음은 어떤 것이 순전히 '나'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즉 거저 주어진 것이라면 그것마저도 거부하려는 경향을 지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닫힌 창을 열어, 성령께서 우리가 스스로 가둔 좁은 굴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역사의 주인이신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에 의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노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당신이 불고 싶은 데로 불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끊임없는 시행착오의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는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반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아무 의미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성령을 통해 주도하시는 역사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받아들이라고 우리에게 간곡히 부탁해 오십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민수기에 나오는 구리 뱀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사실 광야에서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배려와 인도로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하자 하느님께서 불 뱀들을 보내 그들이 물려 죽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해 하느님께 자기들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불 뱀들을 없애 주시는 것이 아니라 불 뱀에 물려도 살아날 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하느님께서 그 불 뱀들을 치워 주시면 되었을 것을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구리 뱀을 만들어 매달아 놓게 하시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구리 뱀에 물려도 죽지 않고 살게 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그 불 뱀들은 그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어떤 걸림돌들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여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삶의 자세를 대변하는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그 험난한 여정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자기들을 사랑과 배려로 이끌어 주시는 현실을 외면하고, 그 여정에서 오는 시련들만을 현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 있는 이러한 시행착오들, 즉 실패와 여둠의 과정, 그리고 관계 맺음 안에서의 다양한 갈등들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불 뱀들이 여전히 존재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라고요.
이렇게 들어 올려진 예수 그리스도(구세주)를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통해,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이 주도하시는 역사 속으로 초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에 있는 다양한 시행착오들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시행착오들은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들이며, 이런 것들은 오히려 우리를 긍정적으로 변화하도록 하는 자극제들이며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 속으로 들어설 수 있는 초대의 한 부분임을 우리는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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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4.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부활과 관련된 성경의 용어들은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살다, 다시 살다”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서다, 다시 일어서다” 입니다. 곧 ‘부활’과 ‘들어 높여짐’입니다.
지난 부활 팔일 축제 동안의 “말씀전례”에서는 첫 번째 뜻,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드러내주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두 번째 뜻인 “들어 높여지다, 영광스럽게 되다”라는 뜻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놀라운 사실, 아니 억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을 전합니다. 곧 분명 누명을 쓰고 죽은 실패인데도 오히려 승리라 하고, 또 분명 죽었음에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고 하며,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리하여 드높여졌다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아래’로 내려갔으나 ‘위’로 올라가는 역전의 대전환이라는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여기서, ‘위’(ano) 혹은 ‘아래’(kato)라는 말은 “위”란 산을 오른다든지, 로켓을 타고 우주 위로 올라가는 물리적인 위치나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위’와 ‘아래’라는 말을 쓸 때, 이는 ‘두 가지 질서(방식)’을 가리킵니다. 곧 ‘아래’는 자기중심적인 ‘나’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요, ‘위’의 질서는 사랑의 ‘성령’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지상에 묶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여쭙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요한 3,9)
이는 어디선가 이미 들은 낯익은 질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천사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처럼, 이 질문은 우리가 전 인격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곧 성모님처럼 ‘피앗’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물며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이는 우리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이유가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에 대한 고집 때문에 새로 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영으로부터 곧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믿음(피앗)으로 응답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역전의 대전환이 있고,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모든 것을 새롭게 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눈’으로 봅니다. 곧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워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하소서!
오늘 저희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주님!
당신은 패배하셨지만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으셨지만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추락하셨지만 드높이 들어 올려 지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내려갈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추락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제 안에 숨겨져 있는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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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4.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제는 힘과 권력으로 유지되는 평화를 이야기했습니다. 먹구름이 걷히면 태양을 볼 수 있듯이, 복음은 또 다른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Pax Christi,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단순한 정치적 질서로 이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행복하다.” 복음이 말하는 평화는 군사력이나 권력의 균형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에 기반한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에는 황금률이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놀라운 사실은 이 가르침이 기독교만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동양의 고전에서도 같은 정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지혜는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같은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인류 문명의 깊은 곳에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윤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류 문명이 지금까지 발전해 온 것은 단순히 힘 때문만이 아닙니다. 인류는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조금씩 더 나은 질서를 만들어 왔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를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설명했습니다. 인류는 위기를 겪을 때마다 새로운 지혜를 만들어 왔습니다. 동양의 고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역천자망 순천자흥.(逆天者亡 順天者興)”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망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흥한다는 뜻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탐욕과 폭력으로 세워진 질서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의와 협력의 질서는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인류 문명은 생물학적 욕구를 넘어 문화와 예술, 철학과 종교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찾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단순한 힘의 경쟁이 아니라 지혜의 축적 과정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인류 문명은 또 한 번 큰 변화를 맞이할 것입니다.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이 발전하고 우주 탐사가 확대되면서 인간의 활동 영역은 더욱 넓어질 것입니다.
어떤 미래학자들은 인류가 지구를 넘어 다른 행성으로 확장할 가능성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드웨어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황금률입니다. 인간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윤리를 지켜 나간다면 인류는 앞으로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인류는 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전쟁도 있었고 문명의 붕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인류는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역사는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지나온 과거의 기록이고 미래는 현재의 삶이 도착할 집입니다. 인류는 지금도 그 집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힘의 평화(Pax Romana)와 권력의 평화(Pax Americana)를 넘어 인류가 사랑의 평화(Pax Christi)를 이루는 공동체로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독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도들은 공동체를 이루었고,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으며, 모두가 부족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바르나바는 자기의 것을 팔아 공동체를 위해 봉헌하였지만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사도들이 처한 환경이 더욱 좋아진 것도 아닙니다. 아직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감시하고 있었고, 박해의 칼날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능력이 갑자기 향상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능력도 재산도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들이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 그들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행복은 내가 바라보는 대로 주어집니다. 원망과 미움,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면 그만큼 나는 불행할 수 있습니다. 감사와 찬미, 희망과 겸손의 바람이 불면 나는 그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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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4.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때로 뜨겁게, 때로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이제 벚꽃 나무는 한국의 대표 수종으로 자리 잡은 듯합니다. 제가 사목하는 태안에도 군데 군데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명품 벚꽃길들이 숨어 있습니다. 시장 보고 오는 길에 화사한 꽃길 사이를 달리는데 혼자 보기가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달콤한 봄비가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만개한 벚꽃이었는데, 이제 떠날 때가 되었는지 화사한 꽃비가 내립니다. 온천지가 완연한 봄기운으로 기지개를 활짝 폅니다. 불어오는 바람도 이젠 예전같이 매서운 칼바람이 아니라 훈훈하고 따뜻한 봄바람입니다.
꽃비도 맞고 봄비도 맞으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비가 되어 내리는구나! 세상 방방곡곡 그 어떤 지역,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골고루 풍성하게 내리는구나!”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영적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니코데모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니코데모의 내면에는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어렴풋이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인식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강한 주님 체험이 부족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나 바오로 사도가 경험했던 그 강렬한 하느님 자비 체험, 골수로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온몸으로 느꼈던 절절한 은총 체험이 니코데모에게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저 머리와 이성으로만 자꾸 이해하려 하니 이런저런 의구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말씀에 묻고 또 묻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8)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요한 3,9)
참으로 묘한 것이 바람입니다. 물론 기압골이나 대기 상태, 지형이나 태풍의 영향에 따라 이리 불고 저리 부는 것이 바람입니다. 느낌은 있으나 절대로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바람의 존재 여부에 대해 의심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 성령으로부터 새롭게 탄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백번 깨어나도 성령의 그 감미로운 바람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 강렬하고 뜨거운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례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묘하고 신비스러운 성령의 바람이 스쳐 지나갑니다. 때로 뜨겁게, 때로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하느님의 영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임하십니다. 그 결과 육으로만 살아가던 한 인간 안에 참된 내적인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이 고스란히 한 인간 안에 실현됩니다.
“나는 그들 안에 다른 마음을 넣어 주고, 그들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어, 그들이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그대로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11, 19-20)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인간 측의 신앙 고백은 어찌 보면 하나의 도전이고 모험입니다. 많은 사람이 오직 육에 따라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물질과 육체의 쾌락만을 최고로 여기고 추구하는 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무조건적인 하느님 사랑, 대가 없는 예수님 사랑, 거저 주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의 중요성을 설파해야 되는 신앙인의 삶이 꽤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이 부활 신앙이 사라져버린 그리스도교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확신 갖고 믿음 갖고 온 몸과 마음으로 수용하고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우리들 삶의 원리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 부활은 당신과 함께 다시 시작하자는 우리 각자를 향한 강렬한 초대입니다. 새 인생을 출발하자는 초대, 영적인 삶, 위로부터의 삶을 다시 살아보자는 예수님의 간절한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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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4. 부활 제2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3,7ㄱ.8–15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덧붙이십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 너는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대 바실리오는
성령의 활동을 ‘바람’에 비유한 이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의 계산과 통제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묵상하게 합니다.
성령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방향으로 이끄시는 숨결입니다.
오늘 복음은 또 말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즉 ‘위로부터 태어남’은
내가 나를 새로 만드는 자기개발이 아니라,
십자가에 들어 올려진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 안에서 새 생명을 받는 은총입니다.
2주 친절/선행 주간에
이 복음은 우리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 성령의 바람이 지나가면,
사람은 남을 판단하기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얻게 됩니다.
• 십자가를 바라볼수록,
우리는 ‘옳음의 칼’이 아니라 자비의 손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 친절은 감정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새 마음의 습관이며,
• 선행은 그 습관이
매일의 선택으로 굳어지는 삶의 증언입니다.
바실리오는 우리를 이렇게 이끌어 줍니다.
성령을 ‘설명’하려 들기보다,
성령께 마음을 ‘열어’ 드리라고.
바람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바람이 지나간 자리의 변화는 분명하듯,
성령이 지나간 자리에는
친절과 선행이라는 열매가 남습니다.
성령이신 주님,
제가 바람을 통제하려 하지 않게 하시고
당신께 마음을 열게 하소서.
십자가에 들어 올려진 주님을 바라보며
친절과 선행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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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4.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23:55 추가.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7ㄱ.8-15)>
1) 이 대화에서, 핵심 가르침만 발췌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말고는 인간을 하늘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이가 없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예수님은 여러 구세주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하게 참된 종교라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만이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고, 증언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바오로 사도는 아버지 하느님과 메시아 예수님을 향한 우리 신앙의 유일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찾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믿든 누구를 믿든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라는 말씀은, “내 말은 진리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이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이 한 말이라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증언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보고, 직접 들은 것에 대한 증언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베드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라면,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사도 4,8-10).”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떤 장애자를 고쳐 준 일은(사도 3,6-8),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한 사람들은 자기들 눈으로 직접 본 그 일마저도 안 믿었습니다.
3) 12절의 ‘세상일’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들, 그리고 사람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일들을 가리킵니다.
‘하늘 일’은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라는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이 인간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을 믿어라.
그러면 인간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도
믿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라는 말씀은, “나의 십자가는 구원의 표지가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일은, 민수기 21장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예수님 자신이 곧 구원의 표지라는 뜻입니다.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님만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좁은 뜻으로는 “십자가의 목적은 영원한 생명이다.”이고, 넓은 뜻으로는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 세상의 여러 가지 사상들이나 이론들에 현혹되지 말고 예수님 말씀만 믿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의 목적과 이유는 단 하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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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4. 부활 제2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23:55 추가
요한 3,7ㄱ.8-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시기에 벌어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후에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정말 원 없이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회고했다고 하지요. “내 인생에서 행복했던 날은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다.” 한편 미국의 작가인 헬렌 켈러는 앞을 볼 수 없고 귀도 들리지 않는 시각 청각 중복 장애우입니다. 남들은 한 가지만 힘들어도 불편하고 힘든 장애를 두 가지나 갖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싶은데, 그녀는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인생에서 행복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
모든 것을 가지고 누린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말하고, 기본적인 것조차 누리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이 두 사람의 극단적인 대비를 통해 중요한 삶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행복은 상황이나 조건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점을 말이지요.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중요한 한 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과 삶을 물질과 숫자로 판단하는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가치와 목적으로 바라보는 ‘하늘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위로부터 태어나야’함을, 그래야만 진정 자유로운 상태로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세상 일’만 신경 써서는, ‘세상의 관점’으로만 삶을 바라봐서는 그러기가 참 어렵지요. 모든 걸 눈에 보이는 물질과 숫자로만 판단하다보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영적이고 본질적인 가치는 알아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느님께 대한 참되고 굳건한 믿음을 지닐 수 없기에 그분 나라에 들어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먼저 그분을 온전히 믿고 따라야만 비로소 알아볼 수 있고 깨닫게 되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다고 하십니다. 모세가 장대에 매달은 구리뱀을 통해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를 심판하고자 하셨다면 굳이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당신 외아들이 우리 고집과 완고함 때문에 죽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만 계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라는 표징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믿으며, 우리를 좋은 길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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