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8군 무대-2, 그룹사운드 50년】
미8군쇼 출입 연예인들은 아마추어일 경우 매일 오전에 나와 연습을 해야 했다. 기성 연예인들은 보통 오후 4시에 회사로 출근한 후,그날 일정에 따라 각 부대에서 보내온 차량에 승차해 전국 300여 개의 클럽으로 향했다.
미8군 영내의 클럽은 장교/하사관/사병의 계급별로 구분되고,인종적으로는 백인/흑인,규모로는 서비스 클럽/일반 클럽으로 구분되었다. 서비스 클럽은 공연 전용의 규모가 큰 고급 극장으로 술은 판매하지 않았고,일반 클럽은 규모가 작았고 술도 팔았다.
미8군 쇼는 단지 음악만이 아니라 무용,코미디,마술 등도 공연되는 모듬 쇼 형태였는데,출연진의 규모에 따라 14인 이상의 빅쇼와 8인 이하의 스몰쇼로 나뉘었다.
빅쇼는 10인조 이상의 빅밴드,서너 명의 가수,서너 명의 무희 등이 출연하는 대규모 쇼였다. 빅밴드는 풀 멤버 밴드라고 부르는데, 기타.베이스.드럼.피아노 외에 관현악 파트가 추가된 대형 악단이었다. 스몰쇼는 7인조 내외의 Combo밴드, 한두 명의 가수,한두 명의 무희가 출연했으며, 이때 캄보는 기타.베이스.드럼.피아노.트럼펫.트롬본.색소폰 정도로 구성되었다.
대우는 쇼의 경우 최고 165달러에서 최저 72달러,밴드는 60달러에서 30달러,그리고 가수는 12달러에서 8달러였다.
(1966년 기준) 각 개인의 월수입은 1964년에 평균 16,700원(최저 13,000원 최고 55,000원)
당시 쌀 한가마니(80kg)가 3,680원이었다.
이들의 보수가 후했던 것은 미군들이 그들을 '음악인'으로서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연주인들이 부대에 오면 환영하고 악기를 날라주었고 열심히 들었으며,연주를 잘하면 열광적으로 환호해주었다. 당시 한국의 유흥업소에서 생음악은 분위기 조성용이라고 홀대받고 무시당했던 것을 고려하면 미군 클럽의 분위기는 무척 좋은 편이었다.
미8군 쇼단에 대한 심사는 엄격했다.
1년에 두 번 오디션이 있었는데,오디션 준비는 소속 회사에서 제공하는 릴테이프 녹음기로 미군 라디오 방송을 녹음해서 채보한 악보를 가지고 소속 회사의 연습실에서 연습하는 식으로 했다. 오디션은 준비 기간까지 제작비와 인건비만도 60만원(1964년 기준)에 달하는 회사의 큰 행사였다.
따라서 예행 연습은 필수였다.
일곱 명의 심사위원은 주한 미 문관들에서 차출된 사람들로,적어도 본국에서 음대를 졸업했거나 성악기,현악기 등 전반적으로 음악을 통달한 실력자들이었다.
급수는 AA.A.B.C였는데 C급이면 탈락을 의미하므로 오디션 지원자들은 생계의 터전을 잃지 않기 위해 죽어라 연습했다.
심사위원들은 음악과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많은 것을 요구했다.
"밴드 멤버와 가수,코러스 라인 등이 골고루 배열되어야 한다.
마스터를 주축으로 음율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가수의 영어 발음이 정확해야 한다.
가수의 감정 표현이 맵시 있고 부드러워야 한다.
새로운 스탭이 또 소개되어야 한다.
의상.조명이 선명해야 한다.
쇼맨십이 좋아야 한다.재미있어야 한다."
당시 한국의 대중음악인들은 모든 면에서 수준 높은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노력했고,그 과정에서 그 시대의 새로운 유행음악들을 본토 수준으로 연주해냈다.
그 댓가로 후한 보수를 받았고, 또한 음악인들로서 존중받았다.
이런 풍토 속에서 대중음악인들은 미국 대중음악을 하나의 교과서처럼 받아들이게 됐다.
한국 대중음악인들은 미8군 무대에서 갈고 닦은 기량으로 한국의 대중음악계에 데뷔하게 된다.
박춘석,이봉조,김인배,여대영 씨 등은 미8군에서 재즈를 배우고 이후에 작곡가 또는 밴드마스터로 활약을 한다.
한명숙,현미,최희준,패티김,펄시스터스 등은 미8군 쇼단에서 노래를 부르던 가수들로 후에 한국 가요계의 분위기를 바꾼 주역이 된다. 이들보다 나이가 어렸던 신중현,조용필,김홍탁,윤항기 등은 미8군에서 배운 음악을 록밴드 형태로 한국 무대에 들고 나와 한국 록음악의 선구자가 된다. 70년대 통기타 음악의 스타가 된 이필원(뚜와에 무아)
이주원,임창제,오세은,쉐그린,조동진, 조영남 등도 미8군 무대에서 록밴드 혹은 가수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그렇다면 오디션에서 떨어진 음악인들은 어디에서 연주하고 생계를 해결했을까?
미8군무대가 메이저리그라면 마이너리그에 해당하는 기지촌 무대가 따로 있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