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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대사전
[ 삼위일체대축일 ]
한자 : 三位一體大祝日
라틴어 : Sollemnitas Sanctissimae Trinitatis
[관련단어] :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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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을 교리로서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의 세 위격(位格)으로 되어 있다는 삼위일체를 특별히 기념하는 날로 성신강림 대축일 후 첫 번째 일요일에 지켜진다.
4세기경 삼위일체 이단설을 주장하던 아리우스파에 대한 교회의 반박에 그 기원이 있으며, 리에즈(Liege)의 주교 스테파노(Stephanus, 재위 : 903-920)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몇몇 지역에서는 대림절 직전의 일요일에 기념되기도 하였다.
특별히 영국에서 널리 지켜졌는데 이는, 성심강림 대축일 후 첫 일요일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축성(祝聖)된 성 토마스 베케트(St. Thomas Becket, 1118-1170)가 바로 그 날을 영국에서 삼위일체를 기념하는 축일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334년 교황 요한(Joannes) 22세에 의해서 비로소 공식적으로 이날이 교회에 도입되어, 1910년 교황 성 비오(St. Pius) 10세에 의해 대축일로 선포되었고, 전세계 모든 교회가 의무적으로 이날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의 미사와 성무일도의 전례문은, 프랑스의 어떤 지방에서 작성된 것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1334년에 비로소 교황청에 의해 인가되었다.
• 삼위일체 대축일은, 유일하신 하느님은 3위,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신다는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에서 유래하였다.
하느님의 유일한 생명이 이 삼위에서 전개된다.
성부는 자신 안에서 자기와 본질이 같은 영원의 '말씀'이신 성자를 낳고 이 2위에서 창조되지 아니한 영원한 사랑이신 성령이 발생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본질의 일체성(一體性)은 알 수 있으나 3개의 하느님의 위격의 차이는 파악할 수 없으며 다만 신앙으로써만 인간은 하느님의 삼위일체의 생명의 신비를 인정해야 한다.
바로 이 삼위일체의 신앙이 그리스도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한다.
무한하신 하느님은 유일하시나, 고독하신 목석과 같은 분이 아니시며, 받아들이고 내어주시는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하신 위격이시다.
그는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고 사랑이 넘쳐 그 사랑을 피조물에게 나누고자 하셨다.
'나'라는 인간은 언제나 '너'라는 자와의 관계에서 살고 있으므로 하느님과 남을 사랑하는 것이 최대의 계명이라는 것과 인간 인격의 최고 완성은 삼위일체의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이 이날 모든 신자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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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 성인록 ▷
< 삼위일체 대축일(삼위일체론의 신학적 기점) >
........ (안젤라 | 2010.05.30 Ud.)
△ 삼위일체 경배-
The Adoration of the Trinity - DURER, Albrecht
1511.Oil on lindenwood, 135 x 123,4 cm.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 삼위일체대축일 ]
Santissima Trinità
(celebrazione mobile) - Solennità
▶ 삼위일체 三位一體
라틴어 Trinitas
영어 Trinity
삼위일체는 하나의 실체(實體) 안에 세 위격(位格)으로서 존재하는 하느님적 신비를 지칭한다.
하느님의 육화(肉化)와 은총(恩寵)과 함께 그리스도의 3대 신비를 형성하는 이 삼위일체 신비는
내재적 삼위일체(內在的 三位一體, Trinitas immanens)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救世徑輪的 三位一體, Trinitas oeconomica)로 구별되어 파악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구체적 인간 역사와의 관계를 고려치 않고 영원으로부터 내재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하고,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인간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한다.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이 삼위일체임을 제시하기 위해서 성서로부터 출발한다.
성서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계시사(啓示史) 안에서 증언되는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러한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별개의 실재가 아니라, 바로 이 내재적 삼위일체의 계시이다.
▶ 삼위일체론의 신학적 기점
삼위일체는 있을 수 있고 생각될 수 있는 지복(至福)의 신비임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신심생활과 교의신학에서도 삼위일체론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고,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의 신비성을 깨닫지 못한 채 단지 그리스도 교화한 유일신론자들처럼 생활하는 것같이 보인다.
삼위일체 교리를 대할 때,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며, 사람들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으며 이 신비가 왜 계시되었는지 질문하게 된다.
사변적 삼위일체 교리가 신자들로 하여금 이 신비에 대한 신심을 촉진하기보다는 소원감을 느끼게 하는데 한 몫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삼위일체 신비에 대해 사변적 고찰을 시도하는 전통적 입장과
대조적으로 역사(歷史) 안에서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하느님의 행업(行業)을 삼위일체의 본질로 파악하여
이 신비를 구원의 신비로 제시하려는 현대 신학자들의 취지와 입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전통적 삼위일체론과 현대 신학의 삼위일체론의 기본입장이 요약 소개될 필요가 있다.
▷ ①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계발되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심화된 이른바
’심리학적 삼위일체론’(心理學的 三位一體論, De Trinitate psychologica)은 사계에서 고전적이고 전통적 삼위일체론으로 간주되고 있다.
•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라는 성서적 진리를 자신의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모상이 원형을 반영한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모상의 본질을 구명해서 원형이신 하느님의 내적 신비를 일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하느님 본질의 단일성과 세 위격들의 구별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유비(類比)를 인간영혼(anima)속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기억(mens), 인식(notitia), 사랑(amor)이 영혼의 세 가지 속성으로 파악되고, 이들이 삼위일체의 내재성을 특정하게 이해토록 하는 유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억하고 인식하고 사랑하는 영혼의 유비속에서 본질적으로 하나인 실재의 세 현실적 요소들로서의 위격들을 본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기억이 성부에, 인식이 성자에, 사랑이 성령에 해당된다고 설명된 것이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 실제로 구별되면서 하나의 하느님 본질과 하나가 되는 자립적 관계(自立的 關係)라고 규정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아우구스티노를 따라 인간 정신생활의 성취 속에서 하나의 하느님 안에서의 세 위격의 현존을 파악하는 유비를 보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발출(發出, processus)의 성격을 순수정신의 내재적 행위로 규정한다.
이 발출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의 두 기능, 인식(認識, cognitio)과 의지(意志, voluntas)가 하느님의 발출에 상응하는 유비로 등장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 안에서 말씀[知性]과 사랑[愛志]의 두 발출 이외에 다른 발출은 가능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발출의 성격을 지성과 의지의 성취양식을 분석하는 가운데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는 지성의 발출이 유사성(類似性, similitudo)의 근거에 입각하여 발생하기에 출생(出生, generatio)이라고 규정한다.
출산자는 자신과 유사한 것을 출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지의 발출은 유사성의 이유 때문에서가 아니라 원하는 상대자에로 이끌리는 성향(inclinatio in rem volitam)에 입각해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에게 있어서 말씀을 산출하는 지성작용은 유사성의 산출과 같아서 ’출생’이라고 지칭할 수 있고,
하느님에게서의 의지작용은 유사성의 출산행위가 아니라 성향적 발출행위이기에 ’기출’로 표현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의 내적 신비를 구명하는데 기여하였다.
이 신학의 기본 통찰들은 학설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공적 가르침을 부연해서 해설한다고 볼 수 있다.
▷ ② 현대 신학적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의 내적 본질 구명에 역점을 두는 전통적 삼위일체론과는 달리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계시되는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실상을 파악하려는 데 중점 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여기서는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일방성이 지양되고,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이 강조되면서 인간과 조물 일반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행업이 바로 내재적 삼위일체의 본질로 파악되고 있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이 인간 역사로부터 분리된 신적 실재에 대한 사변적 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하느님의 역사에 관한 실천적이고 생동적 사유가 된다.
전통적 삼위일체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양자택일적 입장을 정립하고자 시도하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와 위르겐 몰트만 J rgen Moltmann, 1926-)의 삼위일체론적 기점은 범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라너는 삼위일체를 구원신비로 이해하려는 취지로써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그는 구원이 하느님의 자기전달(Selbst-mitteilung Gottes)인 은총 안에서 성취되는데,
이 은총이 삼위일체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로서 당신을 자신 안에 폐쇄시키지 않고 외부로 건네준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외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 수취자(受取者)가 요청된다.
이 수취자가 바로 정신과 육신의 합일체인 인간이다.
라너에 따르면,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참으로 인간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에 상응해서 초월적(정신)이고 역사적(육신) 양식으로 발생한다.
인간의 역사성에서 비롯하는 전 인류사는 하느님의 계시사(啓示史)와 구세사와 공존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하느님이 자기전달을 통하여 인간과 세계의 근원으로 작용하면, 구체적 인간 역사가 바로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현현이자 인간에 의한 수용의 역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제공이 인간에 의해 전적으로 수용될 경우에 신인(神人)그리스도의 출현이 발생한다고 라너는 본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절정인 그리스도의 육화를 ’행해진 진리’라고도 라너는 부른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초월적으로 작용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다가온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수용하도록 하는 힘이 바로 성령이라고 규정된다.
여기서 성령의 고유성이 사랑(Liebe)이라는 통찰이 생겨난다. 또한 라너는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진리로 발생하는 한, 역사를 지니며 역사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자기전달이 사랑으로 발생하는 한, 이는 절대 미래를 지향하는 초월 안에서의 역사의 재현이라고 본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역전시킬 수 없이 나타나는 구체적 역사로서의 역사와 완성된 최후 미래를 지향하는 초월은 구별되면서 나름대로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한 분 하느님이 자기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가운데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 머무르는 한, 그 분을 성부라고 부른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인간의 초월성을 주도하는 원리로 전달하는 한, 그 하느님을 성령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의 이 자기전달은 역사 안에서 현현되는데 이 분이 곧 성부의 육화된 말씀, 성자라고 불린다."
한 분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세 측면이 동일시되거나 온전히 분리되지 않으면서 온전히 주어진다고 라너는 보고 있다.
그리고 말씀(진리)과 성령(사랑)의 두 파견은
인간과 세계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전달 속에서 상호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두 소인(素因, Moment)들로 파악된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은 초월적으로 성령 안에서, 그리고 역사적으로 성자 안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너는 이 이중 파견이 바로 하느님 자체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강조한다.
하느님 성부가 자기전달을 통해서 당신을 전달하고, 다른 편으로는 ’진술된 것’과 ’수용된 것’과의 실질적인 구별을 이룩한다.
그리고 전달된 것이 ’전달자’로서의 하느님과 ’전달된 것’으로서의 하느님 사이에 실제적 구별을 지양하지 않는 한에서,
바로 하느님의 ’본질’로 표시될 수 있다고 라너는 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내재적 삼위일체가 인간의 충만으로서 전달됨으로써 구원이 성취된다고 보고 있다.
라너는 성자와 성령의 파견과 발출을
하느님의 (내재적이고 구세경륜적) 자기 전달의 발생으로 규정함으로써 삼위일체 신학을 구원의 신비로 이해한 것이다.
☞ 몰트만 역시 라너처럼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을 강조하면서
삼위일체를 정관적으로 사유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이해하려고 한다.
그는 삼위일체를 궁지에 처한 조물들의 자유를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역사의 압축으로 보면서 십자가의 신학이 삼위일체론이며, 삼위일체론은 십자가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와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것을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한다.
아들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인간을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죽음에로 건네지면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에서 그의 아버지되심의 죽음을 고통 당한다는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아들의 버림받은 상태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가장 깊이 분리되어 있으며, 동시에 아들의 양도 속에서 가장 깊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진술된다.
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희생의 성령으로서 버림받은 인간들에게 와서 새 생명의 가능성과 힘을 선사하는 절대적이고 무제한적 사랑이라는 것이다.
몰트만은 십자가 사건을 종말론적 삼위일체 사건으로,
생명을 창조하는 사랑의 현재적 성령 가운데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사랑받는 아들 사이에 발생한 사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몰트만은 하느님의 역사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인간의 모든 역사를 그 속에 내포하고 있어서 역사의 역사라고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죄와 죽음의 성격을 지니는 인간의 모든 역사가 하느님의 역사인 삼위일체안에 통합된다는 통찰이 파생된다.
그래서 인간고난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고통이 아닌 고통이 없고,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과 기쁨에로 통합되지 않는 삶이나 기쁨도 없다는 것이다.
몰트만에게서 삼위일체가 고통에 찬 조물의 역사와 관련된 실재임이 적나라하게 기술되고 있다.
몰트만이 삼위일체론을 하느님과 조물 일반, 특히 자유로운 조물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원리’로 제시한 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하느님 이해뿐만 아니라 신앙의 쇄신 자체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창조 이래의 역사과정은 성령 안에서 부활한 성자를 통하여 조물, 특히 인간을 향하는 하느님 성부로부터의 구원역사이자,
성령에 의해 이끌린 인간과 세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로 인도되는 귀환역사로 이해될 수 있다.
구체적 경위는 신비로 머무르지만,
인간과 세계의 완성된 구원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될 삼위일체적 하느님의 완성된 역사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삼위일체 신비는 내포하고 있다. (沈相泰)
-가톨릭 대사전에서-
♬Jesus Joy of Mans Desiring-Johann Sebastian Bach
The St.Philip’s(libera)Boys’Choir
J.S. Bach: Jesu, Joy of Man's Desiring ☞
https://youtu.be/d4XVaAb7A6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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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 성인록 ▷
< [이콘]구약성서의 삼위일체 >
........ (안젤라 | 2010.05.30 Ud.)
[이콘] 구약성서의 삼위일체.안드레이 루블레프. 111.76x140.97cm.1411년경.모스크바 트레챠코프미술관
△ 전체적으로 볼때 성부의 무릎과 성령의 무릎이 마주 보고 있는데
이는 커다란 잔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희생의 잔을 중심으로 삼위가 둘러 있으며,
비가시적인 틀을 이루고 있는데 그틀은 하느님의 신성이 내재한 단일성을 표시하며,
천상의 만돌라(님부스,신성한 빛과 영광,하늘을 의미)를 암시한다.
성자는 잔의 한가운데에 있다.
성자는 두 손가락으로 강생을 통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희생양이 되시는 당신의 사명을 암시하고 계시며,
왼쪽의 성부는 축복하시는 손짓으로 성자를 격려하고 계신다.
그 반대편의 성령은 식탁 아래의 열린 사각형을 가리키며
이 거룩한 희생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 사각형은 동서남북의 모든 창조된 세상을 상징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집으로 가는 좁은 길, 즉 고통의 길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삼위는 똑같은 권위를 지녔음을 나타내는 권위의 지팡이를 들고 계시며,
모두 천주성을 뜻하는 푸른빛의 옷을 입고 계신다.
★삼위일체는 모든 종교적 체험.모든 신학. 모든 사회적 행위의 원천이다.
우리가 존재의 충만함, 모든 현존하는 것의 목적과 그 의미를 탐구할 때 발전하게 되는 것은 바로 하느님 즉 삼위일체이다.
그자체의 충만함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안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에로 들어가는 것이며, 피조물인 인간의 신화를 선취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신적인 생명,삼위일체의 지고한 생명에로 참여하는 것이고, 베드로 성인의 말처럼 "신적인 본성에 참여하는자"가 되는 것이다.★
이 화면의 그림은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이콘으로 러시아의 안드레이 루블레프의 1425년 작이다.
1551년 스토슬라브 교회회의에서는 삼위일체을 그릴때는 이 루블레프의 유형을 따르도록 규정하였다.
(만돌라: 그리스도의 성변화와 지옥의 정복-지옥의 영혼을 구하는 일과 같은 신적인 계시의 원천을 표현하고자 사용되는 하나의 방법이다.)
▷ 구약성서의 삼위일체
삼위일체 -성부,성자,성령- 는 시간에 있어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다.
성자는 니케아 신경에 따르면 온 세계 이전에 성부로 부터 낳음을 받았다.
더군다나 성령은 성부로 부터 발출했다.
삼위일체의 이콘이 표현하고자 추구하는 것이 이 영원성이다.
성서의 삼위일체의 하느님과 우리와의 첫 만남은 창세1,26의 창조설화에서 발견되는데,
성부께서는 "우리자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신다.
두번째 만남은 마므레의 떡갈나무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세명의 천상 방문객들이 나타나 아들 이사악의 탄생에 관해 소식을 전해 준 18장에서 나타난다.
동방교회에 있어서 이 삼위일체의 첫 현시는 오순절, 바로 그날에 충만하게 드러날 약속의 시작이다.
옛계약은 새 계약의 예표이며, 그 새 계약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완성 된다.
만약, 주의 세례 축일에,거룩한 삼위일체의 현시를 외적인 감각만으로도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세례자 요한은 성부의 목소리를 듣고, 성자를 보고, 비둘기 형상으로 강림하는 성령을 보았을 것이다.
오늘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 회복된 성령의 은총이 인간 전 존재에 주어진 빛으로서 인간을 신화(deification)시키고 있다.
※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화사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는 지는 해를 향하여 석양을 바라보며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함이 마땅하나이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여,
그러므로 세상은 주님께 영광을 바치나이다.
- 만과의 ’화사한 빛’성가 중
출처:이콘-신비의 미.편저 장긍선 신부
◆ 삼위일체대축일 ◆
한자 三位一體大祝日
라틴어 Sollemnitas Sanctissimae Trinitatis
• 믿을 교리로서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의 세 위격(位格)으로 되어 있다는 삼위일체를 특별히 기념하는 날로 성신강림 대축일 후 첫 번째 일요일에 지켜진다.
4세기경 삼위일체 이단설을 주장하던 아리우스파에 대한 교회의 반박에 그 기원이 있으며,
리에즈(Liege)의 주교 스테파노(Stephanus, 재위 : 903-920)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몇몇 지역에서는 대림절 직전의 일요일에 기념되기도 하였다.
특별히 영국에서 널리 지켜졌는데 이는, 성심강림 대축일 후 첫 일요일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축성(祝聖)된 성 토마스 베케트(St. Thomas Becket, 1118-1170)가 바로 그 날을 영국에서 삼위일체를 기념하는 축일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334년 교황 요한(Joannes) 22세에 의해서 비로소 공식적으로 이날이 교회에 도입되어,
1910년 교황 성 비오(St. Pius) 10세에 의해 대축일로 선포되었고,
전세계 모든 교회가 의무적으로 이날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의 미사와 성무일도의 전례문은, 프랑스의 어떤 지방에서 작성된 것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1334년에 비로소 교황청에 의해 인가되었다.
삼위일체 대축일은, 유일하신 하느님은 3위,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신다는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에서 유래하였다.
하느님의 유일한 생명이 이 삼위에서 전개된다.
성부는 자신 안에서 자기와 본질이 같은 영원의 '말씀'이신 성자를 낳고
이 2위에서 창조되지 아니한 영원한 사랑이신 성령이 발생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본질의 일체성(一體性)은 알 수 있으나
3개의 하느님의 위격의 차이는 파악할 수 없으며
다만 신앙으로써만 인간은 하느님의 삼위일체의 생명의 신비를 인정해야 한다.
바로 이 삼위일체의 신앙이 그리스도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한다.
무한하신 하느님은 유일하시나, 고독하신 목석과 같은 분이 아니시며,
받아들이고 내어주시는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하신 위격이시다.
그는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고 사랑이 넘쳐 그 사랑을 피조물에게 나누고자 하셨다. '
나'라는 인간은 언제나 '너'라는 자와의 관계에서 살고 있으므로
하느님과 남을 사랑하는 것이 최대의 계명이라는 것과
인간 인격의 최고 완성은 삼위일체의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이
이날 모든 신자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Sanctus - St Philip's Boys Choir
Sanctus 쌍투스 ☞
https://youtu.be/hAiECJf5Ouo
ㅡㅡTㅡ ♥ㅡTㅡㅡ
2-3. 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 성인록 ▷
< [이콘]신약성서의 삼위일체
........ (안젤라 | 2010.05.30 Ud.)
[이콘]신약성서의 삼위일체.그리스 이콘. 50x41cm. 19세기초
△ 여기에 제시된 이콘은 독생자 그리스도가 구름 위에 앉아서 그의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리고 있다.
그의 왼손은 그와 성부 사이에 떠있는 지구의 위에 얹혀 있다.
그 오른편에 흰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성부는 그의 왼손으로 홀을 들고 계신다
그리고 중앙 상단에는 육각의 별 안에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가 보인다.
러시아의 모스크바 교회 회의에서는 서방에서 묘사하는 것 처럼 성부를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을 금했다.
따라서 화면의 것과 같은 그림은 상당히 후대에, 그리고 숱한 진통 끝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 거룩하신 주여.
당신은 높은 곳에서 겸손한 자들을 굽어 보소서.
모든 것을 살펴 보시는 당신의 눈은 만물을 살피시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과 마음을 주님 앞에 굽히고 기도하나이다.
당신은 당신의 거룩한 곳에서 당신의 보이지 않는 손을 펴시어 우리를 강복하소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와 다음 세상에서의 온갖 복을 주옵소서.
주님은 선하시고 자애로우시나이다.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이시여.
불쌍히 여기심과 구원하심이 당신께 달렸사오니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 이제와 항상 영광이 있어지이다.
-주일 조과 중
출처:이콘-신비의 미. 편저 장긍선신부
[ 삼위일체대축일 ]
Santissima Trinità
(celebrazione mobile) - Solennità
• ’삼위일체 대축일’은 오랜 역사 과정을 거쳐 800년경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1334년 교황 요한 22세 때에 로마 전례력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때부터 로마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 대축일로 정하여 지내고 있다.
이스라엘은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구약성서 안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명확한 계시를 찾으려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이스라엘은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과 맺은 계약으로써 하느님을 세상 안에 현존하시며 인간과 대화하시는 분으로 이해하였다.
신약성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때부터 초대 교회가 하느님의 내재적 신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음을 보여 준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초대 교회는 이 말씀을,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시어 당신 오른편에 앉히시고 모든 창조물 위에 세우셨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며 그분께서 하느님과 동등한 본질을 지닌 분이심을 밝히는 말씀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세례는 한 분이신 하느님과 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고백에서 삼위일체께 대한 고백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 나게 하는 세례의 핵심적인 특징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데에 있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세례 때에 고백하게 되는 성부와 성자께 대한 믿음은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점차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가 된다.
교회는 예수님의 삶과 업적을, 결정적으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아버지의 업적이자 삶으로 이해하였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 감사송
<삼위일체의 신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독생 성자와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위로서 하나가 아니시고 삼위일체이신 본체로서 하나이시나이다.
주님의 계시로 주님의 영광에 대하여 저희가 믿는 진리는 성자와 성령께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위로는 각각이시요 본체로는 하나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와 대천사와 케루빔과 세라핌도 주님을 끊임없이 찬송하며 소리 맞춰 노래하나이다.
♬Laudate Dominum
ⓐ[가톨릭 합창단] Laudate Dominum - W.A.Mozart - 명동성당☞
https://youtu.be/8tii6k8Nz4U
ⓑ주를 찬양하라(Laudate Dominum)/ W.A.Mozart - 로마연합교회 ☞
https://youtu.be/GqTzrGp2n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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