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목사는 쉬보를 처음 봤을 때 ‘평범한 불법체류자’라고 생각했다. 조선족교회에 있기 때문에 중국동포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는 게 그의 주임무라 할 수 있는데, 중국어를 모르는 최목사는 쉬보의 하소연을 여느 불법체류 외국인의 “갈 곳 없으니 나를 좀 살려달라”는 말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중국동포에게 통역을 부탁해 사연을 들어본즉 이 청년은 자신이 ‘중국 민주화운동가’란다. 더구나 “중국으로 가게 되면 감옥에서 15년은 족히 살게 될 것”이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런단 말인가. 이때부터 최목사의 ‘쉬보 탐색전’이 시작됐다.
최목사는 우선 “너를 곤경에 빠뜨린 그 책을 한번 보자”고 했다. 원고지 몇 장 정도일 것이라 생각했던 책은 A4용지로 무려 535쪽에 달했다. 그것도 타이핑을 한 게 아니라 작은 글씨로 직접 쓴 것이었다. 목차를 보니 16개의 장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고, 내용 곳곳에 각종 자료를 스크랩한 것도 보였다. 언뜻 봐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것이 정말 네가 쓴 것이냐”고 물으니 직접 글을 써보였다. 필체가 같았다. 쉬보가 쓴 책이 틀림없었다.
중국동포를 불러 책을 보여주고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돌아온 답은 “큰 일 낼 책”이라는 것이었다. ‘우연찮게 참 대단한 사람을 만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최목사는 그를 ‘쉬보 선생’이라고 불렀다. 낱장으로 된 원고를 책으로 묶으니 백과사전 한 권 정도의 두께였다. 그것을 5권 복사해 두었다.
‘홍색 파쇼’는 중국 공산당의 허위와 기만을 고발한 책이다. 중국 공산당이 인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사실을 왜곡·과장한 것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쉬보는 중국 공산당이 건국 이전 일본군과 맞서 싸우면서 이룬 전과(戰果)를 과장한 것을 든다.
“중국 공산당은 일본군과 싸워 50만 명 이상을 죽였다고 선전합니다. 그러나 내가 공산당의 여러 기록을 정리해본 바에 의하면 당시 홍군(紅軍: 1930∼40년대 중국 공산당이 지도했던 군대)은 약 4만명을 죽였을 뿐입니다. 항일전쟁 당시 실제로 주축이 됐던 부대는 국민당 부대였습니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다고 사실을 왜곡해선 안 되죠.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저는 중국정부에 가장 크게 실망했습니다.”
“전과가 과장됐다 하더라도 싸우지 않은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쉬보는 “거짓말을 일삼는 정권에겐 희망이 없다”고 대답했다. 더구나 ‘인민’을 앞세우는 사회주의국가가 그런 식으로 인민을 우롱하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공산당은 종국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재앙을 가져다줄 것”이라면서 “중국 민주화운동을 통해 이런 왜곡을 바로잡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인민의 이익을 지켜낼 것”이라 말했다.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투쟁’
쉬보의 법적인 나이는 33세다. 외국인등록증과 여권, UNHCR의 난민인정서 등에도 1970년 12월2일생으로 돼 있다. 그러나 실제 그가 태어난 해는 1961년. 여기엔 사연이 있다. 쉬보는 중국 남서부에 위치한 구이저우(貴州)성 구이양(貴陽)시에서 태어났다. 구이양시는 ‘녹색도시’란 애칭대로 자연풍광이 빼어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다’는 찬사를 받는 곳. 그곳에서 그는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모두 의사이며, 누나도 의사, 매형도 의사다. 큰형은 행정공무원으로 한국의 서기관급에 해당하며 형수도 공무원이다. 그래서 가정형편은 유복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형제가 모두 대학을 나왔지만 혼자 전문학교를 나와 한국의 농협과 비슷한 궁샤오사(供銷社)에 근무하던 쉬보는 뒤늦게야 대학진학을 결심한다. 그러나 25세 이상은 입학이 불가능한 규정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할 수 없이 호적을 고쳐 나이를 열 살이나 낮춰 구이저우 차이징(財經)대학교에 입학했다. 1988년이었다.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1987년이 ‘누구나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가했던’ 해라면, 중국 대학생들에겐 1989년이 바로 그런 해다. 구이양시 역시 그런 흐름에 예외는 아니어서 연일 집회가 열렸고 쉬보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른바 주동자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열심히 시위대를 쫓아다니는 평범한 학생들 중 하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쉬보는 시민들 앞에서 육성으로 즉석 연설을 하며 박수를 받던 그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탱크와 군화발에 시위가 진압되고 1만2000여 명의 학생이 구속됐다. 다른 학생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쉬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992년 학교를 졸업했다.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다 샐러리맨으로 살기는 싫어 부모의 도움을 얻어 자동차부품판매회사를 차렸다. 회사를 운영하며 쉬보는 중국사회의 부패상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자유경쟁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고 선전하지만 실제론 자유경쟁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 있지 않습니다. 사업을 하려면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어야 하고 어떻게든 공무원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부패를 척결한다고 떠들지만 실제 가장 큰 부패는 공산당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도서관을 오가며 중국정부가 발간한 각종 문헌을 검토했다. 신문·잡지를 빠짐없이 읽고 중요한 내용을 기록해두었다. 이렇게 1년 동안 집필한 끝에 1998년 5월, 원고 맨 앞장에 ‘홍색 파쇼’란 제목을 붙였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혼자 힘으로 이뤄낸 성과물이다.
원고를 마무리하긴 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책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가 막막했다. 그러던 중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듣다가 홍콩에 반(反)공산당 잡지인 ‘개방(開放)’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7월에 여행 삼아 홍콩으로 가 ‘개방’ 편집장 진중(金鐘)을 만나 원고를 보여주며 출판을 의뢰했다. 진중은 그에게 “베이징에 있는 쉬원리 선생과 상의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쉬원리를 만났고, 이때 ‘홍색 파쇼’ 원고 복사본을 전했다. 얼마 후 가택수색을 당하면서 이 책은 중국 공안당국의 손에 들어갔고, 결국 쉬보로 하여금 대한민국에서 ‘투쟁’하게끔 만들었다. 쉬원리를 만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느냐는 질문에 쉬보는 “중국 민주화운동의 큰 지도자를 만나게 돼 영광이었고 지금도 그를 존경한다”고 답했다.
현재 쉬보는 월세 20만원짜리 반지하 단칸방에서 살고 있다. 눅눅한 습기가 느껴지는 그의 방에 들어서면 컴퓨터와 팩스, 그리고 자신의 각오를 적어 놓은 글귀가 눈에 띈다. 책장 옆엔 한국어 낱말을 적은 쪽지를 가지런하게 붙여놓았다. 그는 요즘 모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중이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 중국 민주화운동을 하겠다는 계획을 수정하고, 중국 민주화운동의 해외 근거지를 한국에서 확보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