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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각종 질병을 치유하시고 마귀를 쫓으시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사람들은 그 권능에 놀라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던 분이 때가 이르자 침묵을 지키고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할 말은 많습니다. 몇 마디만 말해도 무죄는 입증될 것이며, 그가 가진 권능의 극히 작은 부분만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온 세상을 부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분은 침묵하고 계십니다. 왜입니까? 형벌에서 벗어나지 않고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온 세상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가장 위대한 일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막 15:5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취할 자세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 1:3)
사람에게 자세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자세, 공부하는 자세, 예배드리는 자세 등등,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의 자세가 그의 운명을 좌우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그 사람은 자세가 틀려 먹었어'라고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자세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데살로니가 교회의 하나님을 향한 자세는 대단히 훌륭했기 때문에, 이것이 모든 거듭난 사람들이 마땅히 취할 자세라고 보아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자세 중 가장 중요하고 첫째가 되는 자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인데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가 아름답고 훌륭했습니다. 살전 2:13에 보면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말씀을 받는 자세가 훌륭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는 우리의 마음 중심으로 받고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주의 종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능력이 있고 생명이 있어도 그 말씀을 단순한 사람의 교훈 정도로 받는다든지 믿음으로 받지 않는 자에게는 근본적으로 속사람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받고 전심으로 믿는 자 속에서 생명으로 역사하는 법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약 1:23에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때 영적으로 거듭나고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벧전 1:23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올바른 자세는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다"(히 11:6)고 했습니다.
크리스찬이 되는 첫 단계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고 믿음으로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잘못 보도되기 쉬운 신문은 그대로 의심없이 보고 믿으면서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하면서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제자들이 목숨을 버리고 순교하면서까지 전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공리이다(God is the great axion)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학에 있어 공리는 이론 체계의 연역의 기초가 되어서 공리 자체는 다른 명제로부터 증명되지 않는 명제입니다. 증명할 필요가 없는 대 전제이므로 그대로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주의 대 공리로 인정하고 먼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나중에 그것이 지식으로 변하고 체험으로 바뀌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무엇이나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들고 과학적으로 증명 되지 않는 것은 비과학적이라며 안믿으려고 합니다. 아름다운 카네이숀 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그 질과 원소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꽃의 진리라든가 그 아름다움은 과학적 세계에서는 증명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정이나 사랑, 존경, 책임, 시와 같은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학적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공리를 둬서 믿음으로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사가 있습니다. 포도주가 되는 것은 포도나무를 통해서 수분이 올라와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것을 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물이 포도나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 뿐입니다. 물이 포도나무를 통해서 포도주가 되는 것은 이상하지 않고 물이 직접 포도주가 된 것은 이상합니까? 시계가 평상시에는 한 시간에 60분씩 돌아가지만 특별한 때에는 주인이 단번에 24시간, 48시간도 돌려 놓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거나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못믿겠다는 사람은 10년을 교회에 다녀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수학의 공리와 같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믿고 그대로 행할 때에 이해가 되고 지식이 되고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밀가루를 그냥 두어서는 음식이 안됩니다. 물을 넣어서 반죽을 하고 익혀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귀한 진리의 말씀이라도 그 말씀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말씀과 무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믿음을 합할 때 그 속에서 역사가 일어 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살전 1: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은 우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선 자들이었습니다. 우상이란 육신의 소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신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 죄악된 자아를 버리고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를 보면 무신론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우상 숭배는 제일 큰 죄로 여기고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는 새겨서 깎아 만든 우상도 우상이지만 하나님보다 더 믿고 의지하고 가치를 두는 모든 것을 강력하게 금지했습니다. 즉 하나님 외의 다른 것에 가치와 의미를 두는 것은 우상입니다. 숭배나 예배란 말의 영어 Worship은 worthship, 곧 가치를 두고 인정한다는 말의 뜻을 가진 복합 명사로 풀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가치를 하나님께 두지 않고 물질이나 쾌락이나 애정이나 사업에 둔다면 그것들이 그 사람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사업에 궁극적인 가치를 둔 사람은 그 사업이 파산될 때 투신 자살하게 되고, 애정에 궁극적인 가치를 두면 그것이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지고 파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찬은 이 세상 모든 것은 있어도 없는 것같이 생각하여 집착을 버리고 언제나 하나님께만 신뢰를 두고 궁극적인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찬이 하나님으로 만족한다면 그는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강물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사랑의 잎이를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사랑에 전생애를 맡기고 뛰어들어야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으면서도 우상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귀중히 여기고 더 귀한 가치를 두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것에 더 귀한 가치를 두는 것은 우상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이듯이 우리 또한 우리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하나님께만 두는 삶, 곧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킨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살전 1:1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 니가인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우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섰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거할 곳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사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돌아선 자는 거기 머물고 다시 멀리 떠나지 않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만 있으면 진액이 올라와 꽃피고 열매를 맺듯이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여 그 안에 거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능력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우리 소원의 뿌리가 넘치도록 만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짐을 풀고 맡기는 생활을 하십시오. 근심, 걱정 모두를 맡겨 버리십시오. 우리 신앙 생활은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버리므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어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거하는 생활을 하시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 오늘 본문 말씀 중에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 1: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섬기고 예배하는 대상이지 식모나 머슴을 부려먹듯이 부려먹거나 이용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하나님 제일주의로 섬기며 살면 영원하고 참된 만족과 기쁨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영어에 예배라는 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Worship과 Service입니다. Service는 예배 하는 뜻도 있고 봉사한다. 섬긴다 하는 뜻도 있습니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며 말아야 합니다. 한편 본문의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섬기는 자세가 고귀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다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믿음의 역사'. 참된 믿음과 살아있는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역사가 나타납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해야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납니다.
둘째, '사랑의 수고'.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한 헌신적인 수고로 나타 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지 않고는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셋째, '소망의 인내'. 영생의 소망이 확실한 사람은 고난과 시련이 와도 견디게 됩니다. 일찍이 믿음의 선조들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영생의 소망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 믿음은 시작(과거)이요, 사랑은 과정(현재)이요, 소망은 완성 (미래)입니다.
넷째, '하나님 보시는 앞에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봉사는 눈가림만 하는 거짓이나 위선이 되기 쉽고 바라고 기대했던 대가가 돌아오지 않을 때 낙심하게 되고 또 칭찬듣고나면 교만해지기 쉽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은 진실하고 충성되어 하나님 앞에서 장차 큰 상급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되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이 모든 것을 신실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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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존재 목회자님, 케빈 형제님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