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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10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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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내빈,대한제국의설립(1897~1910)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친일개화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고, 상황이 이렇게 변하자 홍종우(김옥균의 암살자)는 국내에서 발을 붙일 수 없어 청으로 망명했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 친일 개화파들이 실각하고 친러정권이 들어선 후에야 홍종우(洪鍾宇)는 귀국해 다시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홍종우는 고종의 명에 따라 친일 개화파들을 조정에서 완전히 축출했다.
홍종우는(洪鍾宇) 고종에게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하고 황제칭호식을 거행할 것을 건의했다.
대한제국(大韓帝國) 설립 이후 각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한 인물은 홍종우, 길영수, 이기동, 이용익 등이었다.
이들은 사상적 기반이나 현실적 처지로 인해 봉건적 사회구조에 거부감을 가진 인물들이었으며, 황실을 정점으로 일부 보수관료, 재야 유생, 농민, 보부상 등과 제휴한 신흥세력이었다.
이들은 근대화 지상주의에 몰입하여 외래 사조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개화파나, 기득권과 체제유지에 급급했던 보수 꼴통 관료들과는 구분되는 제3의 세력이었다.
이들은 고종황제를 도와 근대국가로 이행하기 위한 경제, 사법, 군사, 치안 등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했다.
홍종우, 길영수, 이기동의 이름을 한데 묶은 '홍길동'이라는 호칭이 세간에 회자(膾炙)될 정도로 당시 이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홍종우(洪鍾宇)가 활약하던 대한제국 당시가 거의 확실히 신분차별이 철폐되었을 때이다.
홍종우는 별 볼일 없는 가문에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고,
길영수(吉永洙)는 백정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과천 군수를 지냈으며,
후에 보부상들을 규합해 조직한 어용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기동(李基東) 역시 하급 군인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연대장, 군부 포공국장 등을 거쳐 농상공부 협판, 법부 협판을 역임했다.
이용익(李容翊) 또한 상민 출신으로 보부상을 하다가 금광에서 금을 채취하는 바람에 부호가 되었고,
후에 단천부사, 남병사 등의 직책을 역임했으며, 광산, 철도, 화폐분야에서 활약했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러시아공사관에서의 불편한 생활을 1년동안 지속한 고종(高宗)은 1897년 2월 20일 거처를 경운궁(慶運宮)으로 옮겼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와 광해군이 잠시 머물렀지만,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궁궐로서 거의 활용되지 않아 궁궐의 격은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일제 감시가 심한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옮기는 것보다 러시아 등 서양 세력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경운궁(慶運宮)은 고종이 새로운 뜻을 펼치기에는 유리한 공간이었다
드디어 1897년 8월 16일 고종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하기로 결정하고
왕 노릇한지 34년만에 황제가 되었다..
새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했다.
겉으로는 아주 그럴 듯해 보였지만,
이건 완전히 껍데기 포장만 바꾸고
속 알맹이는 빈,
즉 외화내빈(外華內貧) 이었다.
가만히 러시아 공사관에서 할 일 없어 생각해보니 '내가 내 돈 들여서 황제칭호식을 하고 황제를 칭한다는데
어느 놈이 뭐라 그래?' 그리 생각한 것일까?
(거 말 되네, 남 보기에도 좀 낫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왕이 X팔리게 있었으니 만회를 해보려는 심산인게지?)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이미 건설해 놓은 환구단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왕과 황제의 위상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은 왕(王)은 토지와 곡식의 신인 사직단(社稷檀)에 제사를 지내지만, 황제는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점이다.
고종(高宗)은 황제가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내는 제단인 환구단을 둥글게 조성했다.
현재 웨스턴 조선호텔 자리에 위치했던 환구단 건물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대신 부속 건물인 황궁우(皇穹宇)만 남아 있다(회원님들 가보셨지요ㅎㅎ)
고종(高宗)은 황제가 축하연회 때 백관이 모여 지금까지 '천세'를 부르던 것을 '만세(萬歲)'로 바꿔 부르도록 했다. '
고종실록'에는 당시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
왕태자가 배참(陪參)했다.
예를 끝내자 의정부 심순택이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고유제를 지냈으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壇)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심순택이 나아가 12장문의 곤면을 성상께 입혀드리고 씌워드렸다.
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왕후 민씨를 황후로, 왕세자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심순택이 백관을 거느리고 국궁, 삼무도, 삼고두, 산호만세, 산호만세(山呼萬世), 재산호만세(再山呼萬世)를 창했다."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칭한 것은 삼한의 옛 영토와 역사를 계승하자는 의미였다
1897년 10월 황제국임을 선포한 고종은 민영환, 이용익을 앞세워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근본으로 해 새것을 참작 한다)'에 입각해 본격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이 개혁을 광무 연간에 추진했다고 해서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부른다.
1897년 11월 미루었던 민비의 장례를 치르면서 민비의 시호를 '명성황후(明成皇后)'라 하였는데, 국장을 호화롭게 치르느라 돈이 모자라자, 가장 쉽게 경비를 조달하는 방법을 다시 썼다.
민씨네들이 경비가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써오던 수법으로, 나라가 망하거나 말거나 또 벼슬을 왕창 판 것이다.
(이룬~ 뜨그랄)
1899년 8월 17일 고종은 대한제국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9개 조항을 발표했다.
'대한국 국제'의 핵심내용은 육해군의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관리 임면권, 조약체결권 등 주요 권한을 모두 황제에게 집중시킨 것이다
고종(高宗)은 새롭게 군제를 개편하여 원수부를 창설하면서 헌병, 군악대 등을 설치하여 완전 신식군대로 탈바꿈시켰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고종황제의 군복 입은 모습은 대원수 복장으로 프러시아식 군복을 착용한 것이다.
고종은 대내외에 황제이자, 군사통수권자로서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여보떼요~~ 방향을 잘 잡으세욧!
이맘때 프랑스는 황제를 처형시킨 시민혁명이 일어나 이미 근대화로 나아가고 있었거든요?)
고종(高宗)은 경제개혁을 위해 미국인 측량사를 초청해 근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고, 토지 소유증서인 지계(地契)를 발급했으며, 식산흥업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상공업 진흥정책도 광무개혁(光武改革)의 큰 성과였다.
기예학교, 상공학교, 외국어학교 등이 설립되고 황실 스스로 방직, 제지, 유리 공장 등을 설립해 산업 발전의 기반을 조성했다.
또한 광무개혁(光武改革) 기간에는 각 지역간의 거리를 단축시켜 장벽을 무너뜨리는 교통, 통신시설도 개선해 우편, 전보망이 전국적으로 확충되었고,
서울, 인천, 평양, 개성 등지에 전화가 개설되었다.
외국인에게 특허되어 그 자본과 기술에 의존하기는 했지만,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등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서울에 발전소가 건설되어 전등이 켜지고 전차가 운행되었다
광무개혁(光武改革)은 상공업 발전과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의 확립을 통해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발전을 꾀했다는 점에서는 그 의의가 있지만,
황제권 강화를 핵심에 두고 구본 신참(舊本新參)적인 개혁을 추진했기에 한계 또한 분명히 나타났다.
(이고이~ 이고이 왕권 강화는 아버지 닮았군 그래!)
광무개혁(光武改革)이 추진되고 있을 때 전국의 주요광산이 외국인들 손에서 독점적으로 경영되었고, 철도부설권이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등 열강들의 이권 침탈이 가속화되어 우리의 자주성이 많이 훼손되었다
특히 일본은 조선과 무역을 하면서 막대한 양의 곡물을 실어가는 바람에 곡식의 가격이 올라 영세농민과 도시빈민은 굶어죽을 지경에 도달했고, 수많은 유량민이 양산되었다
하여간 고종(高宗)은 매번 🍾신 짓만 골라 해서 조선의 명줄을 재촉하고 있었다.
1897년에 설립된 대한제국은 1910년 일제에 병할될 때까지 겨우 13년간 존속하게 된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1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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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우다
1896년 7월, 독립협회(獨立協會) 창립 총회를 열기 위해 조정의 대신, 학자, 재야 인사 등이 광화문에 모였다.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웁시다.
그리고 그 곳을 공원으로 만들어 자주 독립의 뜻을 전합시다."
당시 서대문 근처에는 청나라에서 온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영은문(迎恩門)과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모화관(募華館)이 있었다.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는 왕세자가 모화관까지 나가 맞이했으며, 청나라로 다시 돌아갈 때는 모화관 문 밖에서 정중하게 보냈다
그런데 '영은문(迎恩門)'이란 이름이 참 얄궂다.
"영(迎)'은 맞이한다.
마음으로 따른다는 뜻이고,
"은(恩)'은 은혜를 가리킨다.
즉 은혜에 감읍하며 맞이한다는 의미이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셨으니 정말 황공하고 감사합니다.
그런 뜻을 알리기 위해 이 문을 세운 것이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황당한 사대주의(事大主義)라 할 수 있다.
그 영은문(迎恩門)을 무너뜨리고 세운 것이 독립문이다.
그렇다면 독립문(獨立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고.........!
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獨立門)을 만드는 데 앞장섰던 사람은 서재필(徐載弼)이었다.
서재필(徐載弼)은 독립문을 프랑스에 있는 개선문처럼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개선문을 그대로 만들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크기를 줄이기로 했다.
독립협회 간부들은 공사비를 모으기 위해 신문을 통해 이 사실을 알리고 사람들에게서 모금을 하기 시작했다.
모금운동은 순조로와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벼슬아치와 양반들도 모금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조선 왕실에서도 큰 돈을 내주었다.
전국의 각계 각층에서 돈이 모아지자 1896년 11월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개선문을 본떠서 서재필(徐載弼)이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도를 그렸고, 공사를 시작한 지 1년 만인 1897년 말에 독립문이 완공되었으며, 총공사비는 당시 화폐로 3,825원이 소요되었다
독립협회는 모화관(募華館) 건물을 수리해 그 곳을 '독립관'이라고 이름 붙였고, 독립관은 독립협회 회원들이 수시로 회의를 열거나 대중 계몽 강연회 등을 여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1897년에 세워진 독립문(獨立門)은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공원 안에 있다.
원래 독립문이 세워진 곳은 이곳으로부터 남동쪽으로 70미터 떨어진 길 가운데였으나, 1979년 성산대로 공사를 하면서 오늘날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주로 화강암을 사용한 독립문(獨立門)의 중앙에는 아치형의 홍예문이 있고, 홍예문 가운데에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이화(李花, 자두나무 꽃) 모양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위쪽에는 '독립문'이 한글로 새겨져 있고, 반대편 같은 위치에는 '獨立門'이란 한자가 새겨져 있다
문 안쪽의 왼쪽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층계가 있고 옥상은 돌난간으로 둘러져 있다.
독립문 (獨立門)앞에는 영은문의 주춧돌로 사용되었던 돌기둥 2개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독립문에 새겨진 한글, 한문 현판을 쓴 인물은 당대의 명필가로 유명했던 이완용이었다.
독립문 현판까지 쓴 이 인간이 나중에 어떻게 나라를 팔아 먹었을까?
지금부터 독립문을 세운 단체를 만나보자!
이름은 독립협회(獨立協會)이다.
♡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 ♡
황제 주도로 개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황제를 돕기도 하고 때로는 견제도 했던 단체가 구한말에 등장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단체라 할 수 있는 독립협회이다.
독립협회(獨立協會)는 1896년 아관파천 때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면서역사의 중심부에 등장했다.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회원들이 구성된 계기는 신문이었다.
독립신문을 만든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를 세운 것이다.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은 지금도 '신문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1896년 정부의 지원을 받는 정부 기관지인 을 창간한 서재필(徐載弼)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미국으로 갔고, 갑오개혁 때 사면되어 10여년만에 조선인 최초의 미국인 의사가 되어 돌아왔다.
독립협회는 자유 민권, 자강 개혁, 자주 국권이라는 세 가지 슬로건을 내걸었다.
자유민권(自由民權)은 민주주의로 이어지고, 자강개혁(自彊改革)은 경제적인 체제 즉 자본주의와 맥락이 닿았고, 자주국권(自主國權)은 민족주의로 연결 될 수 있다.
(어쩌구리? 제법인데........)
독립협회에서는 어떤 인물들이 활동했는지 알아보자!
독립협회의 임원으로는 군부대신을 지낸 안경수가 회장이 되고, 서재필(徐載弼)은 미국 시민권자라 임원을 맡을 수 없어 고문을 맡았으며, 이완용(李完用)이 위원장이 되었다.
엥? 이완용?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으로서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역적 중의 역적인 이완용(李完用)이 독립협회 창단 멤버였다.
물론 서재필(徐載弼)이 중심이었지만 독립협회에서 전면에 내세운 인물은 이완용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꽃다발을 바치면서, 당신이야말로 동양의 평화를 위해 애쓰는 영웅입니다, 하고 찬사를 바쳤던 사람들이 바로 독립협회 회원들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 소식 듣고 지하에서 노발대발 뛰어오시겠지?)
그렇다고 독립협회, 이 나쁜 인간들!
이 친일 모리배들! 이라고 욕하기는 좀 이르다.
독립협회가 친일적 성격이 강한 것은 맞지만, 그 친일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앞잡이를 섰던 그런 친일(親日)과는 다르다.
독립협회에는 당시 아시아의 선진 근대화 국가였던 일본을 모델로 삼아 우리나라를 개혁하자는 주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독립협회 사람들은 급진개화파와 연결 된다. 급진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서재필(徐載弼)이 독립협회를 세우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중에 이완용(李完用)처럼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의미의 친일로 변절한 사람도 있다.
이토 히로부미한테 꽃다발을 바쳤느니 어쨌느니 하는 것은 독립협회가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 하고 싶어서이다.
그럼, 독립협회가 계몽활동을 하게 된 배경을 알아보고, 독립협회의 활동을 하나씩 알아보자.
위로부터의 개혁인 갑신정변은 기층 민중의 지지(支持)를 얻지 못했다.
민중은 급진개화파를 지지하기는 커녕 그들을 후원한다고 여긴 일본공사관을 공격하기도 했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사람들의 주장이 민중의 삶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터인데도 민중이 그들을 지지하지 않은 이유는이 개혁이 그들만의 개혁이기 때문이었다.
잔소리 말고 나를 따르라! 우리가 신분제를 폐지해 줄테니까 무조건 따라오기만 해! 하지만 기층 민중은 따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갑오, 을미개혁의 여파는 더 더욱 컸다.
위생이나 그밖의 좋은 의미에서 단발령(斷髮令)을 시행했는데도, 엄청난 저항만 터져 나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엘리트들은 하향식 개혁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다.
아!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먼저 민중의 의식을 깨우쳐야겠구나!
그래서 독립협회는 계몽운동(啓蒙運動)을 벌였다.
개혁과 개화에 대한 민중의 의식을 높여야만 운동이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처럼 독립협회는 비로소 "민(民)'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다.
갑신정변이나 갑오, 을미개혁에서는 그런 것들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버해서 생각하면 안 될것이 독립협회도 분명 소수의 엘리트가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기층 민중과 함께 대등한 입장에서 개혁을 진행했을까? 아니다. 그들에게 민중은 어디까지나 계몽(啓蒙)의 대상이었다.
민중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끌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통해 계몽활동을 벌인 것이었다
1898년 독립협회는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했고, 그 결과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열렸다.
만민공동회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시민들이 모인 정치 집회라고 보면 된다.
전근대 사회에서 정부를 비판할 때는 상소라는 방법을 썼다.
그런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는 기층민들이 함께 모여 집회를 열였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민란이 아닌 이상, 이런 집회 문화는 없었다는 얘기이다.
사람들이 종로 종각 앞에 모여 시국을 논하는 놀라운 장면이 벌어졌다.
이 만민공동회를(萬民共同會) 통해 안창호, 이승만 등이 대중정치가로 등장하게 된다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통해 독립협회가 한 일들을 보면,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저지시키고, 한러은행을 폐쇄시켰으며, 일본의 월미도 석탄 창고도 문을 닫게 만들었다.
독립협회의 이 같은 활동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강화도 조약 이후로 외세의 이권 요구가 있었을 때 집권세력이 한 번이라도 거부한 적이 있었는가?
그들이 이권을 달라고 하면 굴욕적으로 내주기만 했었던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런데 지금 열강들의 이권 요구를 독립협회가 탁탁 막아내고 있었으니 이런 힘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민(民)'이었다.
전에는 소수 엘리트들이 밀실에서 속닥속닥했다면, 이제는 기층 민중이 광장에 모여 '아니올시다'라고 얘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는.........
사실 이쯤에서 집권층들은 알아챘어야 했다.
아! 기층 민중을 믿고 그들과 함께 한다면 이 난세를 헤쳐 나갈 수 있겠구나 하는 것들을...그랬다면 우리의 근대사는
또 다른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달라질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아니지, 집권세력이 '민(民)'의 힘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민(民)의 힘을 알았기 때문에 거꾸로 '민(民)'을 눌러야겠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목표는 딱 하나! 정권유지이기 때문이다. '민(民)'의 힘이 커지면 다시 한 번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난리가 벌어질지 몰라 하는 불안감이 그들에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으니말이다.
♡ 백정(白丁)이 일장연설을 하던 날 ♡
독립협회와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상인들의 협조 아래 철시 투쟁을 전개하고 계속 집회를 가지면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자, 당황환 정부는 독립협회와 타협을 했다.
일단 부담스러운 서재필(徐載弼)을 날리고 온건파인 윤치호(尹致昊)계로 독립협회의 주동자들을 교체했다.
대신 정부도 양보카드를 하나 내놓아 보수적인 내각을 물리고, 박정양(朴定陽)이 개혁 내각을 수립하게 한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온건파로 교체되면서 1898년 10월 관민공동회를 개최했다.
박정양(朴定陽)내각의 관리들이 참여했다고 해서 관민공동회라고 하는 것이지 이는 곧 만민공동회였다.
이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에서 아주 상징적인 장면이 하나 등장했다.
백정 박성춘(朴晟春)이 연설을 한 것이었다
백정 출신이 고위관료들 앞으로 나아가, 나는 무지한 백정(白丁)이올시다. 그렇지만 나라에 충성할 줄은 압니다.
우리가 앞으로 이렇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가?
양반들이 백정(白丁) 앞에 앉아 그가 한 이야기를 귀담아 듣다니,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에서 독립협회는 헌의6조(獻議六條)를 채택하게 되었다
헌의6조의 내용을 정치면에서 살펴보면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지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1조에 관리와 백성들이 합심하여 전제 황권을 굳건히 한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건 립서비스일 뿐!
그 다음의 조항들을 보면 왕이 할 일이 별로 없다
중추원이나 내각이 합동하여 서명 날인하지 않으면 조약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든지 하는 식으로 왕의 권위를 깎아 버렸다는 것을 우리는 헌의 6조(獻議六條)를 통해 알 수 있다.
다만 왕의 위신을 살려주기 위해 1조를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경제면에서 헌의6조(獻議六條)는 재정의 일원화를 주장했다.
아관파천 때 무효화했던 사안을 다시 내세웠다.
사회면에서는 피고의 인권을 존중하라는 말이 나온다.
인권(人權)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우리 역사에 최초로 등장하게 되었으니,
만약 세종대왕에게 인권이 뭔지 아시냐고 물어보면 그게 대체 뭔 말이냐고 되물으셨을 것이다.
인권(人權)은 서구 문물의 상징이다. 근대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확대되면서 만들어진 말이 인권이었다.
헌의6조(獻議六條)의 채택을 바탕으로 독립협회에서는 의회 설립 운동이 전개되어 지금의 의회와 같은 중추원 관제가 선포되었다.
의회 설립운동은 곧 참정권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의원들의 구성방식은 왕이 추천한 25인, 민간 추천 25인으로 정해졌고, 여기서 민간은 곧 독립협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에는 항상 걸림돌이 있게 마련, 박정양 개혁 내각이 들어오고 독립협회의 세력이 커지자 불리함을 느낀 보수파들이 고종에게 음모론을 퍼뜨렸다.
공화제 음모론, 즉 독립협회가 박정양(朴定陽)을 대통령으로, 윤치호(尹致昊)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제를 꾸미고 있다고 음해를 하기 시작했다.
주견이라는 것이 별로 없는 고종은 즉각 독립협회 해산령을 내리고 간부들을 체포하도록 했다.
이러한 고종의 해산령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종로에 운집하여 42일간 철야 시위를 하자 , 정부는 대부분 보부상들로 구성돈 황국협회 회원들을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지지하는 시민들을 공격하게 했다
요대목에서 헌의6조(獻議六條) 에 대하여 한번 알고 갑시다
헌의6조(獻議六條)는 1898년 대한제국기 독립협회가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통해 고종 황제에게 건의하여 재가받은 개혁안입니다.
이 건의안은 외세의 이권 침탈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고,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며 백성의 참여를 보장하는 입헌 군주제적 지향점을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사상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헌의6조의 핵심 내용*
조항 핵심 주제 상세 설명
제1조 국권 수호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합심하여 황제권을 공고히 할 것.
제2조 이권 수호 외국과의 이권 조약(광산, 철도, 차관 등)은 각 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해야 함.
제3조 재정 투명성 국가 재정은 탁지부(度支部)에서 전담하여 관리하고 예산과 결산을 공포할 것.
제4조 인권 보장 중대한 범죄는 공판(공개 재판)을 거쳐 피고의 인권을 존중하며 자백을 강요하지 말 것.
제5조 인사 혁신 칙임관(고위 관직)을 임명할 때 황제가 독단하지 않고 정부 과반수의 동의를 얻을 것.
제6조 법치 행정 정해진 규칙(장정)을 실천하여 법질서를 바로잡을 것.
*주요 특징 및 의의*
전제 군주제의 제한
제2조와 제5조는 황제 개인의 독단적인 권한 행사를 견제하고 있습니다.
이는 왕권이 무소불위의 권력이 아니라, 제도적 절차를 거쳐야 함을 명시한 입헌 군주제로의 이행 시도로 평가받습니다.
재정의 일원화
당시 왕실 재정(내장원)과 국가 재정(탁지부)이 분리되어 방만하게 운영되던 문제를 지적하며, 재정을 탁지부로 일원화하여 투명성을 높이려 했습니다.
민권 의식의 성장
근대적인 재판 절차와 인권 보호를 주장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결과와 한계
고종은 처음에 이 6조를 수용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보수 세력이 독립협회가 공화정을 세우려 한다"는 익명서(가짜 뉴스)를 퍼뜨리자 태도를 바꿨습니다.
결국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고,
헌의6조는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채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고종은 대한국 국제'를 선포하며 황제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는 전제 정치로 회귀하게 됩니다.
황국협회(皇國協會)는 그간 내지 행상을 독점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냈었는데, 데모하는 시민들을 박살내면 이를 허가해 주겠다는 정부의 제의를 받은 것이었다.
수천 명의 보부상(褓負商)들이 몽둥이를 들고 종로로 집결한 뒤, 운집해 있던 군중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보부상들은 전국적으로 행상을 하면서 자기 신변을 지키기위해 물미장(勿尾杖)을 들고 다녔기 때문에 몽둥이 휘두르는 데는 모두 도사였다.
시민들은 보부상(褓負商)들에게 직사하게 얻어맞고 해산했다
이 싸움에서 양측 모두 사상자가 생겼고, 다음 날이 되자 복수하기 위해 몽둥이를 든 한양 백성들이 모조리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게 전개되자 고종은 보부상 지휘자들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고, 독립협회의 해산령도 취소했다.
한편 윤치호 등 독립협회 지도부들은 시민들이 난동을 부리자 그 책임이 자신들에게 넘어올까 두려워 해산과 자제를 종용했다.
이때 최정식, 이승만 등 소장 강경파들은 이 기회에 폭력시위를 확산시켜 무정부 상태로 만든 다음 정권을 탈취할 계획을 세우다 체포되어 최정식은 교수형을 당하고 이승만(李承晩)은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가 사면되었다.
이 바람에 독립협회는 창설된 지 3년만에 해산되었고 그해 12월 마저 폐간되었다.
(이궁~ 이승만을 이때 딴 세상으로 보냈어야 하는디...홍종우가 살려줬다지?)
독립협회(獨立協會)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독립협회는 열강들의 이권침탈을 저지하였으며, 국민의 생명권과 재산권을 보호하고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회득하는 등 자유민권의 신장에는 기여했다.
즉 우리의 힘으로 국권을 지켜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근대적 민족주의 운동이었고 민주 운동이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활동이었다.
하지만 독립협회(獨立協會)에서 주장하는 자유민권, 자주 국권, 자강개혁 등 3대 사상에 대한 모순점도 있다.
이들이 말하는 자유 민권(自由民權)은 오늘날의 국민국가들처럼 모든 민중이 평등한 표를 가지고 참정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트 지식인들과 부유층 지주 등에 한정되는 민권이었다.
이들은 학문이 얕은 일반 민중들의 정치참여는 사회에 혼란을 가중한다고 보아 일반 민중의 정치 참여는 배제하였다.
또한 자주국권(自主國權)에 관해서는 외국세력에 대하여 우리의 이권을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지만, 독립협회의 자주 국권은 오직 러시아와 청나라에 대한 이권만 거부했을 뿐, 일본이나 미국 등에 대한 이권 할양은 묵인하는 등 일부에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이를 찬성하는 모순점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한 자강개혁(自彊改革)에 있어서는 동학이나 의병들처럼 무력을 통한 국권 수호 활동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이었고,
서양 국가들처럼 의회를 개설하고 군주의 전제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이 대두되자,
일부 정부 관료들이 독립협회를 탈퇴하는 등 지도부의 지도력 부족 현상이 나타나는 한계가 보였다.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활동을 지켜 보는 동안, 우리의 입맛은 또 다시 씁쓸해진다.
정말 좋은 마지막 기회, 기층민과 함께 부국강병을 꾀할 수 있는 기회가 정권 유지라는 일념 앞에서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그후 진행되었던 외세의 균형을 이용한 황제의 독단 개혁은 어떤 결말을 가져오게 되었는가?
바로 조선의 멸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