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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4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루카 4,16-30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면 마음이 가난하단 증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당신 소명을 밝히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 이사야의 당신께 대한 예언을 읽으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영이 내리면 분명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잡힌 이들을 해방시키며 은혜로운 해가 선포됩니다.
그런데 그 기쁜 소식은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란 재물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아가 죽어 겸손하게 된 이들이란 뜻입니다.
2011년 제가 유학을 다녀와 오산 성당에서 처음으로 본당신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마흔이 되어 처음으로 본당신부를 하게 되었으니 그 열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레지오 훈화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한 커다란 교리실에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신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을 창문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레지오 회합치고는 인원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구성원을 보니 연령회장님도 있고 사목회 위원들도 있어서 그야말로 짬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다 성당에서 굵직한 봉사를 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모두 놀라는 분위기였습니다. 뭐 하는 집단이냐고 물으니 ‘울뜨레야’를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보긴 했는데 그것이 무슨 단체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열심히 하시라고 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사조직 같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저도 꾸르실료를 다녀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꾸르실료 이후를 울뜨레야라고 합니다.
저는 그 단체 분위기가 왠지 내가 다녀오지 않으면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본당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분들이 다 받았다는 꾸르실료 교육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3박 4일의 일정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비밀이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갓 박사학위를 따고 들어온 저로서는 그 가르침이란 것이 매우 유치해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빡빡한 일정 안에서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저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해 주셨던 분들에게 죄송하기는 하였습니다.
어쨌거나 그 교육을 받으니 사목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꾸르실리스따들도 저를 인정해주는 분위기였습니다. 그거면 된 것입니다.
그 교육에 보니 신자들은 사제에게 순종해야 하는 내용도 있어서 사목하기 좋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 교육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며 예수님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는 배울 게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자신들을 무시하는 처사에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이 교만이 부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끌어줄 사람을 찾고 그런 사람을 찾기 위해 더 알려고 노력합니다.
교만한 사람에겐 그래서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에게 전해집니다.
그런데 5년 뒤 제가 꾸르실료 회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성관으로 발령을 받게 됩니다.
그 이후 6년간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교육을 보며 많은 분들이 그 짧은 시간에 회개하고 변화하고 새로운 봉사자로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때는 그렇게 부정적이었는지 모릅니다.
복음은 진정 와서 봐야 합니다.
그래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 번 체험하는 것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꾸르실료 교육만큼 우리 신앙을 빠르게 성장시키는 교육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조금은 겸손해졌습니다.
지도신부를 맡았으니 모르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꾸르실료에 관한 모든 책을 읽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저를 변하게 만들었던 것은 신학교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성체는 은총이고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 은총과 진리가 한 데 버무려지면 사람이 새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꾸르실료 교육안에 그 은총과 진리가 가득함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게 됩니다.
이 교육이 복음이고 새로운 자녀를 탄생시키는 매우 좋은 교회의 모델이 될 수 있음을.
그 이후 저는 꾸르실료 재교육도 만들고 교육 내용도 나름대로 수정하며 더 나은 꾸르실료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조금은 새로워진 교육으로 많은 분들이 새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더 많은 분이 교육받으면 좋겠지만, 사정상 선택된 몇 분들만 받게 되는 것이 마음 아플 뿐입니다.
이 교육이 분명 기름 부어진 교육이었는데 마음이 가난하지 못할 때는 저에게 복음이 되지 못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겸손이 지혜입니다.
지혜를 많이 쌓아서 어린이처럼 겸손해지면 복음이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할 믿음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다른 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하는 사람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인 가난한 이들의 삶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4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1코린토 2,1-5
루카 4,16-30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웃의 어깨에 날개를
오래전 경미한 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사고 여파로 잠깐 의식을 잃었더랬지요. 깨어보니 응급실이었습니다.
머리가 쪼개지는 듯이 아팠습니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고, 또 제 몸 이곳저곳도 살펴봤는데,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제 입에는 호스가 끼어있었는데, 식도를 통해 위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다 산소마스크가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양팔에는 링거병이 각각 하나씩 달려있었습니다.
평소 몸에 뭐든 다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해 시계나 반지도 끼지 않던 저였는데, 호스며 산소마스크며 링거병이며 주렁주렁 매달려있으니, 정말 답답해 죽을 맛이었습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간호사 선생님은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며 경고를 줬습니다.
한 이틀 그렇게 답답하게 지냈는데, 정말 생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다행히 사흘째 되는 날 상태가 호전되어 그 모든 장치들을 떼어낼 수 있었는데, 그 때 느꼈던 해방감이란 정말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억압으로 해방된다는 것, 부자유스러움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 사슬을 끊는다는 것, 종살이에서 풀려난다는 것, 감옥에서 출옥한다는 것, 그것은 곧 또 다른 천국체험입니다.
또 다른 출애굽입니다.
또 다른 탄생의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명백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 그분의 존재, 그분의 정체성, 그분의 실존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해방자’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 가운데 정말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은 우리 영혼이 치렁치렁 달고 다니던 죄의 사슬을 끊어주신 해방자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힘겹게 지고 다니던 멍에를 끌러주신 해방자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해방자셨습니다.
그분은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해방자셨습니다.
인권, 인권 부르짖는데, 인권이란 무엇입니까?
한 인간이 자유로울 권리가 인권입니다.
한 인간이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권입니다.
한 인간이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권입니다.
참된 해방감, 그것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내 마음이 편해지는 동시에 상대방도 무장해제를 하지요.
그렇게 될 때 상대방의 내면이 들여다보입니다.
그가 아픈지, 혹은 슬픈지, 그가 기쁜지 혹은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나’의 치부가 보이고 부끄러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나를 여는 작업과 더불어 내 부끄러움을 던져버릴 수 있고, 마침내 열린 마음과 창을 통해 우리는 고통과 근심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왕권은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작은 사랑의 실천들이 모여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 갑니다.
병고나 죄, 고통의 사슬에 묶인 이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맛보게 해줌을 통해서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조금씩 완성되어 갑니다.
부당하게 갇혀있는 이웃, 억울하게 묶여있는 이웃,
사랑의 결핍으로 울고 있는 이웃들을 외면하는 세상은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이웃이 좀 더 성장하도록, 이웃이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이웃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다는 것은 그를 놓아주는 것,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것, 그를 다양한 유형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강론>
(2023. 9. 4. 월)(루카 4,16-30)
<구원과 해방의 완성을 향해서 끝까지 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6-21)”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해방 선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원래 ‘구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그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선포’는 말로만 ‘선언’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선포되는 순간 효력이 즉시 생기는, 즉 선포하신 그 일이 곧바로 이루어지는 ‘주님의 말씀’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해방되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다고 무조건 자동적으로 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인간들 쪽에서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참여해야 이루어집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고, 안 믿었으니까 예수님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감옥의 문을 열어 주었는데도 그냥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면서, 감방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감방에서 나가지 않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은 구원도 아니고 해방도 아닙니다.
스스로 원하고, 스스로 구원과 해방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되고 해방이 됩니다.
<나자렛에서 거부당하신 일을 십자가 수난의 예고편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실패하려고, 또는 일부러 거부당하려고 나자렛에 가신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그렇게 해석한다면,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이려고 한 나자렛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가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하느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한 것은
예수님께서 바라신 것과는 반대되는 선택을 한 것이고, 그것은 그들 자신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만들어 놓으신 시나리오대로 한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구원과 해방을 얻어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완전한’ 구원과 해방은 아니고, 지금은 시작 단계, 또는 진행 중인 단계일 뿐입니다.
구원과 해방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그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신앙생활을 중단한다면, 또는 한눈을 팔거나 옆길로 빠진다면, 완성에 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미 얻은 은총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린 것들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지 말고 잊어버려야 하고,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끝까지 전력을 다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끝까지 갈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가 아니라...)
신앙생활은 ‘대충 적당히’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야 하는 생활입니다.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 것’, 그것이 바로 ‘순교 정신’입니다.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만이 순교 정신이 아니라......
신앙인들은 인간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항상 박해와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박해시대 때에는 우리 교회의 신앙이 더 순수해지고 단단해졌는데, ‘유혹의 시대’ 때에는 너무 쉽게 타락했고, 박해 때보다 더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아마도, 지금 이 시대도 그런 ‘유혹의 시대’일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더욱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