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녀에게
문병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난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돗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을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 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시집 『죽순 밭에서』, 1977)
[어휘풀이]
-노둣돌 : 말을 올르내릴 때 발돋움으로 쓰려고 대문 앞에 놓은 큰 돌. 하마석(下馬石)
[작품해설]
문병란은 민족과 민중의 삶과 현실에 주목하면서 거기서 얻어지는 정서를 간명하고도 직정적(直情的)으로 노래하는 시인이다. 이 시는 그의 1970년대 대표작으로, 전래 설화인 ‘견우직녀 이야기’를 창작 모티프로 하여, 현재의 이별을 극복하고자하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 작품이다.
서정주의 「견우의 노래」와 동일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견우의 노래」가 사랑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남녀의 애절한 감정을 노래한 순수 서정시인데 비해, 이 작품은 그리 간단히 설명되자 않는다. 그거슨 ‘직녀’가 ‘견우’의 단순한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작품이 발표된 1970년대와 관련지어 정치 ⸱ 사회적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상징성을 갖기 때문이다. 또한 「견우의 노래」의 경우, 아무리 이별이 고통스럽다 하더하도 ‘칠월 칠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김없이 돌아오게 마련이기에 시간만 흐르면 ‘직녀’와 재회할 수 있는 다소 낭만적인 상황 설절인 데 반해, 이 작품은 재회가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극한 상황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시는 전 26행의 단연시이지마, 시상의 흐름에 따라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3행까지의 첫째 단락은 ‘직녀’와의 오랜 이별로 인해 슬픔 역시 매우 크다는 ‘견우’의 고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화자인 ‘견우’는 ‘이별이 너무 길다 / 슬픔이 너무 길다’라는 말을 반복, 강조함으로써 이별의 시간이 상당히 오래도록 계속되어 왔음을 알려 주고 있다. 설화 속의 두 사람은 헤어져 있는 고통이 아무리 심핟라도 ‘칠월 칠석’이 돌아오기만하면 반드시 만날 수 있던 것에 비해, 이 작품에서는 ‘암소가 몇 번이고 새끼를 쳤’을 만큼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경과된 시간을 구체적으로 진술하지는 않았으나, 문맥으로 보아 그들에게 허락된 ‘칠월 칠석’이라는 특정의 시간도 이미 제 기능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을 이어 주던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대단히 불리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우’는 여전히 재회의 날을 소망하고 있다. ‘오작교’ 대신 ‘사슴과 가슴으로 노돗돌을 놓’고서라도 ‘직녀’를 만나고 싶은 그는 심지어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ㅁ만나야 하’겠다는 진술을 통해 ‘직녀’에 대한 그리움이 매우 간절하다는 것과 ‘지금’이 대단히 급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데 그만큼 절실하고 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재회건만, 그것이 실로 기약할 수 없는 기대감으로 그칠지 모른다는 데 두 사람의 슬픔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실 감고 풀기’와 ‘베 짜고 풀기’를 거듭하는 ‘직녀’의 행위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고 있는 ‘견우’는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라고 탄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첫째 단락에서는 ‘직녀’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과 재회를 기다리는 고통을 진술한 데 이어, 14행부터의 둘째 단락에서는 위급한 상황이 가히 충격적인 진술로써 현실화되고 있다.
‘직녀’가 처해 있는 상황은 대단히 비극적이다. ‘사방이 막혀 버린’ 그 곳은 곧 탈출과 변화가 불가능한 ‘죽음의 땅’으로 ‘직녀’는 그 곳에서 ‘견우’에게 애타게 손짓하면 재회를 기다린다. 16.17행의 진술 내용은 그 ‘죽음의 땅’에서 벌어질 수 있는 참혹한 상황으로, 재회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자, ‘직녀’가 처해 있는 긴박한 상황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라는 시행은 육체적 여성미와 정신적 여성성 및 물리적인 생명 등을 표상한다. 이 시는 이러한 시어들을 통해 여성으로서 또는 인가으로소 모든 것을 상실한다 해도 사랑만을 포기할 수 없다는 ‘직녀’의 강인한 의지를 드러내 준다. 이러한 의지에 의해 마침내 두 사람은 ‘칼날 위라도 딛고 건나가고, ’말라붙은 은사수 눈물로‘ 녹일 수 있게 된다. 이렇듯 화자는, 비록 현실적 고통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재회에 대한 소망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닌, 반드시 성취해야 할 필연적인 운명 같은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렇게 본다면, 화자가 재회를 소망하는 ’직녀‘는 결국 ’견우‘에게 있어 단순한 ’연인‘의 의미를 넘어 가장 소중한 의미를 갖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그 소중한 것이 현재 결요되어 있을 뿐아니라, 자칫 영원히 소실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위기 속에서,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는 시인의 절실한 현실 인식과 신념을 연정시(戀情詩) 형식으로 노래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련이 아무리 가혹하더라도 소중한 존재에 대한 희ᅟᅡᆼ과 그리움은 결코 버릴 수 없다는 ’견우‘의 의지는 인간의 가장 소중한 가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되찾기 위한 시인의 현실 참여적 태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작가소개]
문병란(文柄蘭)
1935년 전라남도 화순 출생
조서대학교 국문과 졸업
1962년 『현대문학』에서 시 「가로수」 등을 발표하며 등단
1985년 제2회 요산문학상 수상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 역임
시집 : 『문병란시집』(1970), 『정당성』(1973), 『죽순 밭에서』(1977), 『호롱불의 역사』(시문집1978), 『저 미치게 푸른 하늘』(1979), 『벼들의 속삭임』(1980), 『땅의 연가』(1981), 『뻘밭』(1983), 『새벽의 서』(1983), 『동소산의 머슴새』(1984), 『무등산』(1986), 『어둠속에 던진 돌멩이 하나』(1986), 『5월의 연가』(1987), 『못다 핀 그날의 꽃들이여』(1989), 『화염병 파편 뒹구는 거리에서 나는 운다』(1989), 『양키여 양키여』(1989), 『견우와 직녀』(1991), 『겨울 슾에서』(1994), 『무등산에 올라 부르는 백두산의 노래』(1994), 『새벽의 차이코프스키』(1997), 『직녀에세』(1997), 『인연서설』(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