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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 7. 솔로몬 1: 8. 아사 1: 9 웃시야 1: 10. 히스기야
마 1: 7. 솔로몬 -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
1] 솔로몬(<영> Solomon <히> 쉘로모 - 평화, 평강 <헬> 솔로몬)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둘째 아들(삼하 12: 24 참조, 대상 3: 5).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 제3대 임금으로 즉위하여 B. C 970-930년까지 통치했다. 나단을 통한 예언에서 솔로몬은 여디디야(여호와께 사랑을 입음)로 불렸는데, 왕의 공식 명칭이다.
다윗이 노경에 접어들자, 그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하여 왕자들을 중심으로 두 개의 파벌이 조성되었다. 다윗의 아들 가운데서 연장자였던 아도니야는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 장관 요압과 함께 엔느로겔에서 즉위를 선언하였다(왕상 1: 5-10).
반대파는 선지자 나단과 다윗의 시위대장 브나야, 제사장 사독, 그리고 밧세바를 포함하여 솔로몬을 후원하였다. 다윗의 총애를 받았던 이들은 다윗의 승낙을 얻어서 솔로몬이 왕위 계승자임을 선언하는 즉위식을 거행하였다(1: 11-49).
사울이나 다윗의 즉위식과는 달리 솔로몬의 왕위를 확증하는 데 있어서 기름부음이나 백성들의 갈채가 아니라 전임자였던 다윗 왕의 언질이 결정적이었다. 왕이 된 솔로몬은 부왕의 제국을 강화했다. 기존 지파간의 경계를 무시하고, 유다를 제외한 전국을 열두 구역으로 나누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여 각 구역마다 일 년에 한 달씩 성전과 중앙 정부를 돕는 책임이 맡겨졌다. (4: 7-28). 당대 국가들의 관습처럼 포로를 대규모 건축 사업에 투입시켰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까지도 징발하였다(5: 13-18 참조. 12: 4).
재위 제 11년에 부왕 다윗이 준비하였던 건축 자재로 7년에 걸친 성전 건축을 완성시켰다. (7: 1-8). 예루살렘을 요새화하였으며,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지점들에 해당하는 므깃도, 하솔, 게셀 등도 요새화하였다. (9: 15).
솔로몬 제국은 교역에 치중하여 에시온게벨을 큰 항구와 광업을 중심지로 개발하였다. 그 배들은 당시 알려진 세상의 가장 먼 곳까지 항해하며 무역을 하였다. 그러한 선단들이 한번 왕복하는 데만도 3년씩 걸렸다고 묘사된다(왕상 10: 22, 26-29).
그는 이웃 나라들과 상거래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협조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두로의 히람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5: 1-12). 또 당시의 관례대로 이웃 나라 공주들과 결혼하였다.
이는 솔로몬 왕국의 위치를 애굽과 같은 열강들 사이에 두려는 것일 수도 있다(3: 1). 그러나 그의 외국인 아내들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예배에서 멀어지도록 하였다(11: 1-8). 이로 인하여 그의 사후에 솔로몬 왕국이 분열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11: 9-13).
솔로몬의 지혜와 거대한 부는 후대 사람들에 의하여 자주 회자되고 있다. (10: 23, 마 6: 29, 12: 42). 왕상 3: 5-15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새로 임금이 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 한 가지의 소원을 요청하도록 하셨다. 이때 솔로몬의 지혜는 고명한 것으로, 그는 초기 유대 문학과 후기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 전통에 가장 많이 연관된 인물이 되었다. 잠언 두 부분(잠 10: 2-22: 16, 25: 1-29: 27)과 솔로몬의 아가, 전도서, 시 127편, 솔로몬의 송시 등이 그의 작품이다. 다양한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여러 부분을 그 내용으로 취급하고 있다.
2] 르호보암(<영> Rehoboam <히> 레하베암 <헬> 로보암 – 백성들의 수가 많다)
솔로몬과 암몬 여인 나아마 사이에서 출생. 남북분열 이후 첫 번째 남유다의 왕(B. C. 922-915년). 그의 이름은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마 1: 7).
41세 때 솔로몬의 뒤를 이어 유다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였다(왕상 14:21). 초기에는 그가 모든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l2:1, 대하 10:1). 지나친 부역과 세금을 감소해 달라는 백성들의 청원을 거절하자 북쪽 지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왕상 12:3-16).
북쪽 열 지파는 역군 감독 아도람을 죽이고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여로보암 1세를 추대하였다. 단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일부만이 예루살렘으로 피신해 온 르호보암을 지지 하였다(12: 18-21). 르호보암은 군사를 모집하여 북왕국을 치려하였다. 그러나 스마야 선지자의 메시지를 들은 유다 군사들은 싸우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12: 22-24).
왕국의 분열은 솔로몬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이 일은 아히야 선지자에 의하여 예고되었다(11: 29-36, 12: 15). 북왕국 안에 살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남왕국으로 이주하였다.
르호보암은 즉위한지 처음 3년 동안만 하나님을 섬겼으며, 그 후부터는 모든 백성들과 함께 우상숭배에 빠져 버렸다(대하 11: 13-17, 참조 왕상 14: 22-24, 대하 12: 1).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르호보암을 징계하시기 위해 애굽 왕 시삭이 유다를 침공하도록 허락하셨으며, 또한 르흐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나게 하셨다(대하 12: 2-4. I5).
유다의 백성들은 스마야 선지자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에 애굽에게 완전히 멸망당하지는 않았다(대하 12: 5-8. 12). 르호보암은 18명의 아내와 60명의 첩을 두었으며, 28명의 아들과 60명의 딸을 낳았다(대하 11: 21). 그는 아들들에게 유다 왕국의 중요한 성읍들을 분배해 주고 다스리도록 했으며, 특히 마아가의 몸에서 낳은 아비야(아비얌)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대하 11: 22-23).
3] 아비야(<영> Abijah, <히> 아비야, 아비야후 - 나의 아버지는 야웨이시다)
남유다 왕 르호보암의 아들로 왕위의 계승자(대하 12: 16, 13: 1). 그는 아비얌으로 불리기도 했다(왕상 14: 31, 15: 1, 7-8). 어머니는 마아가로 압살롬의 딸 다말과 우리엘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삼하 14: 27).
통치 기간은 2년(B. C. 915-913, 왕상 15: 2, 대상 13: 2에는 3년으로 기록되었다). 부왕의 뒤를 이어 여로보암 1세와의 전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왕상 15: 6-7). 역대기 기자는 전쟁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대하 13: 2-20). 그는 이 전쟁의 승리로 강성해졌다. (13: 21).
열왕기 기자는 아비야의 통치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왕상 15: 3). 이것은 역대기 기자가 그의 치적을 기리는 입장에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열왕기는 그의 업적에 대한 기록은 생략하고 하나님께 대한 그의 태도만을 특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비야는 다윗을 기억하신 하나님의 도움으로 강성해진 것이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고 있다.
마 1: 8. 아사 -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
1] 아사(<영> Asa, <히> 아사, <헬> 아사 - 치유자)
유다왕 아비야(대하 14: 1, 왕상 15: 8)의 아들로 왕위 계승자이다(B. C. 912-871년). 왕상 15: 10에 마아가가 아사의 모친으로 나와 있지만, 사실은 아비야의 모친으로(15: 2) 아비야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황태후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구약은 아사를 호의적인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왕상 15: 11, 대하 14: 2). 통치 첫 10년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 대한 부친의 승리로 평화스러웠다(대하 14: 1). 그는 게릴라 전투와 같은 이스라엘 왕 바아사(B.C.910-887년)와의 국경 분쟁을 억제시킬 수가 있었다(참조. 왕상 15: 16). 이때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개혁(대하 14: 2-5, 참조. 왕상 15: 12), 여러 성읍들을 견고케 하였다(대하 14: 6-8).
그가 에티오피아의 세라(애굽 왕 오소르콘 1세의 지휘관으로 추측)에 의해 침공을 받았을 때(B. C 902년) 아사는 엄청난 군대(대하 14: 9에 '백만'으로 표기)에 당황하였다. 그는 침입자들에 대한 위대한 승리를 하나님께 간구했고, 그들을 패망케 하였다(9-15).
선지자 아사랴의 예언에 용기를 얻어 개혁정책을 계속하고(대하 15: 1-9), 예루살렘에서의 엄숙한 의식을 통해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와의 언약을 갱신하도록 하였다(11-15절). 그는 조모 마아가가 아세라 상을 세웠다는 이유로 황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불태워 버렸다(16절, 참조. 왕상 15: 13). 산당을 제거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철저한 개혁을 수행하였다. (대하 15: 17, 왕상 15: 14).
통치 16년에(대하 16: 1에 나온 36년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바아사가 유다를 침공하여 라마를 요새화하고 남쪽 왕국의 통로를 방해하였을 때(참조. 왕상 15: 17) 아사는 에티오피아 군대의 침공시에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그는 성전과 궁전에 있던 은과 금을 취하여 수리아 왕 벤하닷에게 뇌물로 보내면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벤하닷은 바아사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북쪽 왕국의 북부 지역에 있는 여러 도시들을 공략함으로써 바아사의 라마 건축계획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대하 16: 2-5, 왕상 15: 18-21). 결과 아사 왕은 라마의 건축 시에 사용되었던 돌과 재목을 옮겨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다. (대하 16: 6, 왕상 15: 22).
열왕기서의 저자는 수리아의 도움을 청한 아사의 결정을 판단하지 않았지만, 역대기 사가는 선견자 하나니를 통한 정죄를 기록하고 있다(대하 16: 7-10). 아사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에 분격한 아사는 그를 옥에 가두고, 백성을 학대하였다(10절).
23년 후(B. C. 873년) 아사는 발에 중한 병이 걸려 결국 B. C. 871년에 죽게 된다. 이때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의사들을 청하였다(대하 16: 12, 왕상 15: 24). 렘 41: 9은 아사가 만든 구덩이를 언급하고, 예수님의 족보에 나와 있다(마 1: 7-8).
2] 여호사밧(<영> Jehoshaphat <히> 예호솨파트 -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
유다의 4대 왕(B. C. 873-849년). 아사와 실히의 딸 아수바 사이의 아들(왕상 22: 42). 유다를 요새화(대하 17: 2, 참조. 12-19절)하였으나 북이스라엘과 더불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왕상 22: 44).
다른 종교의 영향으로 유다가 고통에 빠지게 되었다(왕하 8: 18, 27). 화합정책은 그의 아들 여호람을 아합과 이세벨 사이에서 낳은 딸 아달랴와 결혼으로 가시화되었다(대하 18: 1).
여호사밧은 아합이 길르앗 라못을 원정하는 것을 돕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였다(왕상 22: 2-40, 대하 18: 3-34). 목숨을 건져 돌아온 여호사밧을 선견자 예후가 '여호와를 미워하는 악한 자'를 도왔다고 꾸짖었다(19: 2).
여호사밧은 실패로 끝난 해상 원정을 위해 아합의 아들 여호사밧과 동맹을 맺었다(대하 20: 35-36, 참조. 왕상 22: 48-49). 그 후 아합의 다른 아들 여호람과 연합, 모압 왕 메사를 치는 것을 도왔다(왕하 3: 4 이하). 국제사에서 여호사밧이 성공한 증거는 주변국가로부터 그가 받은 존경(대하 17: 11), 에돔에 대한 분명한 종주권(왕상 22: 47), 엔게디에서 동맹한 모압 사람, 암몬 사람, 마온 사람에 대한 큰 승리의 기사(대하 20: 1-30)가 그것들이다.
여호사밧은 바알을 버리고 다윗의 의로운 모범을 따랐다(대하 17: 3-4). 여호와 숭배를 위해 산당을 제거하지는 않았지만 아세라와 바알에게 바치는 것들과 제의적 음행의 장구를 제거하였다(왕상 22: 43, 46, 대하 17: 6, 19: 3).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관심(왕상 22: 5 이하, 대하 18: 4 이하, 20: 3-20)으로 방백과 레위인, 제사장을 유다 성읍에 보내어 백성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17: 7-9). 또 언약적 이상과 조화를 이루도록 공평하고 편벽되지 않은 사법 제도를 재조직하였다(19: 5-11). 여호사밧은 25년 동안 다스렸고 다윗성에 장사되었다. 아들 여호람이 계승하여 왕이 되었다(21: 1-3). 마 1: 8에서 예수님의 조상 가운데 열거된다.
3] 요람(<영> Joram <히> 요람, 예호람의 단축형 - 여호와께서 높여 주신다)
유다의 5대 왕(B. C. 849-841년). 여호사밧의 아들로 아합과 이세벨 사이에서 낳은 딸 아달랴의 남편이다. 왕하 8: 17에 의하면 삼십이 세에 왕이 되어 8년을 다스렸다. 16절은 그의 즉위를 이스라엘의 여호람(한글 개역 성경 "요람") 제5년으로 기록하나,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즉위하였을 때(B. C. 852년) 이미 일 년을 다스렸다고 지적한다.
학자들은 그가 B. C.853년에 부친 여호사밧과 공동 섭정왕으로 출발하여 B. C. 849년에 유일의 통치자가 되었다고 제시한다. 세력을 얻은 후 즉시 여호람은 그의 형제들과 방백 몇 사람을 죽였다(대하 21: 2-4). 그들이 그가 따르는 이방 관습을 반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참조. 13절).
전형적으로 악하다고 특징 지워진 그의 통치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오므리 가(家)의 아달랴와 결혼한 데서 찾을 수 있다(6절. 참조. 11,13절, 왕하 8: 18). 역대기 기자는 선지자 엘리야가 블레셋과 아람의 침입 그리고 왕의 중병 형식으로 신적 형벌을 예고함으로써 여호람을 꾸짖었다고 보고한다(대하 21: 11-15, 참조. 16-19절).
여호람 때에 동편의 에돔 사람과 서편으로 블레셋 경계에 있는 성읍 립나의 반역에 의해서 배반을 당했다(왕하 8: 20-22, 대하 21: 8-10). 여호람은 열왕의 묘실에 장사되지 못하였다(19-20절. 참조. 왕하 8: 24). 그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여호와아하스)가 왕이 되었고, 아하시야는 분명히 과부가 된 아달랴의 영향 아래 있었다. (왕하 8: 26-27, 대하 22장).
그 다음 아하시야(왕하 8: 26), 요아스(왕하 12: 1), 아마샤(왕하 14: 1)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다. 이에 대한 해석 중에서
(1) 마태가 인용한 족보에서 이미 그 이름들이 생략되었기 때문.
(2) 히브리 원문에 대한 70인역(LXX)의 독법(讀法)의 잘못 때문. (Alen, Calvin).
(3) 그들이 사악한 아합과 이세벨(왕하 8: 27)과의 관계 때문.
또한 간악한 왕후이자 왕위 찬탈자(왕하 11: 1-20)인 아달랴(왕하 8: 26)의 자손이므로 3, 4대에 걸쳐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계율(출 20: 5)에 따라 생략(Ebrard, M. Henry).
(4) 히브리 문학적 기교에 따라
14대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마태가 고의적으로 생략함(Jerome, Light-foot, Carr) 등이 있다.
마지막 14대에서도 명단을 단축시킨 것으로 보아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17절).
마 1: 9 웃시야 -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
1] 웃시야(<영> Uzziah <히> 웃지야, 웃지야후 - 여호와는 나의 힘 <헬> 오지아스)
아마샤와 왕비 여골리야 사이에서 출생. 제9대 유다 왕이다. 본명은 아사랴인데, 왕하 14: 21, 15: 1,6-8, 17, 23, 27에서는 아사랴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웃시야란 이름은 왕하 15: 13, 30, 32, 34, 대하 26: 1-27: 2에서 사용되었다. 두 이름의 히브리어 표기는 자음 한 자가 다르다. 아사랴란 이름은 "여호와께서 도우신다."이다. 두 이름의 어원이 유사하기 때문에 서로 교호적(交互的)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은 웃시야가 52년 동안 유다를 통치하였다(B. C. 약 783-742년. 왕하 15: 2, 대하 26: 3). 아마 선왕인 아마샤(아마 약 15년 정도)와 아들인 요담(약 10년 정도)과 함께 통치했던 기간이 중복된 것 같다.
그는 아버지 아사랴를 거역하고 살해해 버린 유다 백성들에 의하여 열여섯 살 때 왕으로 추대되었다(왕하 14: 21, 15: 2, 대하 26: 1). 예수님의 족보는 웃시야가 요람의 아들로 나타나 있다(마 1: 8-9). 열왕기서의 저자는 웃시야의 통치에 대한 개요와 업적만을 기록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했으나 산당만은 제거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문둥병의 징벌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진술하였다. (왕하 15: 1-7).
역대기의 저자는 자세하게 웃시야의 행적을 기록해 놓았다(대하 26장). 웃시야는 통치 초기에 하나님께 의지하여 선정을 베풀고 유다를 번영케 했다. 그의 권세가 높아지자 교만에 빠져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는 성소의 분향을 직접 행하려다 문둥병에 걸렸다(B. C. 750년경). 이 일로 왕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요세푸스의 Ant. 와 후기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웃시야가 죄를 짓던 순간에 지진이 일어나 유다 땅을 황폐케 만들었다고 한다. 참조. 암 1: 1, 슥 14: 5).
그 후 웃시야는 홀로 별궁'(대하 26: 21)에 거하였다. 웃시야는 열왕의 묘실 바깥에 장사되었다(26: 23. 참조. 왕하 15: 7). B. C. 1세기경의 비문에도 웃시야의 장례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 비록 성전에 분향하려는 실수를 범했으나 오랫동안 유다를 잘 다스렸다. 그가 통치하던 기간 이룩했던 유다의 번영은 솔로몬 통치 이후 가장 큰 번영이었다.
2] 요담(<영> Jotham <히> 요탐 - 여호와는 완전하시다 <헬> 요아담)
웃시야의 아들. 요담 왕의 어머니는 사독의 딸인 여루사였다(왕하 15: 32-38, 대하 27: 1-9). 25세에 즉위하여 16년 동안 통치하였다. 처음에는 문둥병에 걸린 아버지를 도와 섭정 왕으로 다스렸다(B. C. 750-741. 참조. 왕하 15: 5. 대하 26: 16 –27: 1). 홀로 통치한 햇수는 불과 5-6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도 통치 말년에는 아들인 아하스를 섭정왕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B. C. 732년에 죽었다. 호세아와 관련된 연대기적 언급은 불명확하다. (참조. 왕하 15: 30, 33. 17: 1).
요담은 웃시야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15: 34. 대하 27: 2). 요담의 통치 아래 있던 유다는 경제적으로 번영하였으나, 백성들은 계속하여 우상숭배와(왕하 15: 35) 탐욕을 행하였다(대하 27: 2. 참조. 사 2: 8. 5: 8-23).
요담은 성전의 윗문(북문)을 건축하였고(왕하 15: 35) 오벨산의 성벽을 증축하였다(대하 27: 3). 유다 산간 지대에 전략적인 요새 성들을 건축하였으며, 유다 전역에 성채와 망대들을 많이 세웠다(4절). 웃시야 왕이 죽자 암몬족이 반란을 일으켜 군사력으로 암몬을 정복, 무거운 조공을 부과하였다(5절).
유다의 전승에 의하면 요담 시대의 유다는 요단강 동남부 지역 곧 암몬에서부터 모압과 에돔을 거쳐 에시온게벨까지 차지하였다. 요담도 북이스라엘과 수리아와 연합하여 반앗수르 정책을 폈다.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성경의 '불'왕)가 유다를 침공하려 하자, 유다에서는 친앗수르 파들이 아하스를 섭정 왕으로 즉위케 했다. 그 결과 유다는 친앗수르 정책을 펴게 되었는데, 이러한 정책으로 인하여 아람과 북이스라엘 연합군의 침공을 받았다(참조. 왕하 15: 37. 사 7: 1 이하). 예수님의 족보 안에 요담의 이름이 나타나 있다(마 1: 9).
3] 아하스(<영> Ahaz <히> 아하즈 – 그는 단단히 붙잡았었다)
유다의 12대 임금으로 20세에 즉위했다(왕하 16: 2. 대하 28: 1). 초기 3년 동안은 요담과 공동으로 통치했으며, B. C. 732년에 그의 아버지가 죽자, 유다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어 716년까지 치리했다.
아하스가 영적으로 신실치 못하여 조상 다윗과 같지 않고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이방 민족의 더러운 풍습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으며, 산당과 산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지내고 분향하였다고 묘사한다(왕하 16: 2-4. 대하 28: 1-4).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아주 비천하게 낮추셨다(대하 28: 19. 참조. 5절). 하나님께서 아람 세력으로 하여금 유다를 침략하도록 허락하셨다.
아람 왕 르신은 북이스라엘 왕 베가와 반 앗수르동맹을 맺고 남쪽 유다에게 압력을 가하였다(왕하 15: 37). 유다 왕 아하스는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왕에게 조공을 바치고 원병을 요청하였다(왕하 16: 5-9, 사 7: 1-16). 앗수르왕 디글람 빌레셀 3세는 다메섹을 함락시키고 이스라엘 왕 '르신'을 죽임으로써 유다를 돕는 듯 하였으나(왕하 16: 9), 유다까지도 압제하고 수탈을 자행하였다(대하 28: 20).
열왕기에는 아하스 왕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왕하 16: 10-18), 역대기 기자는 불경전한 아하스 왕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여 기록하였다(대하 28장). 첫째는 아람 세력을 동원하여 징벌하신 사실(5-7절), 둘째는 북 왕국이스라엘의 침략과 에돔 및 블레셋의 침략(7-19절), 셋째는 아하스가 앗수르에게 원병을 청하고 더욱 악화된 상황, 그리고 우상 숭배를 언급하였다(20-25절). 이러한 비참한 처지가 하나님의 징벌로 주어진 것이었음을 강조하였다.
아하스의 최후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왕하 16: 19. 대하 28: 26. 참조. 사 14: 28). 그는 예루살렘에 묻혔으며(왕하 16: 20), 열왕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했다(대하 28: 27).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아하스는 대상 3: 13의 왕족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님의 조상들의 계보(마 1: 9)에도 들어가 있다.
마 1: 10. 히스기야 -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
1] 히스기야(<영> Hezekiah <히> 히즈키야, 히즈키야후, 예히즈키야, 예히즈키야후)
유다의 열네 번째 왕(B. C. 715-687년). 아하스와 아비야 사이의 아들. 25살에 왕위에 올랐다(대하 29: 1. 왕하 18: 2). 어떤 학자들은 즉위 연도를 앗수르왕 산헤립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한 701년, 히스기야왕 14년이라고(왕하 18: 13. 사 36: 1) 주장한다. 통치기간의 사건들은 왕하 18-20장, 대하 29-32장, 사 36-39장에 기록되었다.
앗수르 세력이 강하던 위태로운 시기에 유다를 이끌고, 여호와 신앙에 대한 배신을 척결한 유능하고 경건한 통치자로 묘사되어 있다(왕하 18: 3-8). 마 1: 9-10의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히스기야가 직면한 도전의 원인은 아하스왕의 통치기간(B. C. 735-715년)에 형성되었다. 이스라엘의 베가와 다메섹의 르신은 유다가 동참하기를 거부한 반앗수르 동맹을 맺고, 아하스가 왕위에 오른 시점에 유다를 공격하였다(왕하 15: 37). 에돔과 블레셋 사람들이 그 공격에 가담하자 이사야의 충고를 무시하고,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도움을 호소하였다(사 7장). 앗수르는 그들을 공격하였고, 십 년이 되기 전에 유다의 적들은 소멸하여 유다는 앗수르의 종속국으로 남았다.
앗수르에 대한 정치적 종속은 그들의 신들을 인정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고, 아하스는 예루살렘 성전에 앗수르식의 단을 세웠다(왕하 16: 5-16). 당시 선지자들의 예언(사 2: 6-8, 20. 8: 19-20. 미 5: 12-14)과 왕하 16: 2-4은 아하스 통치 시대에 행해진 자국과 전래된 우상숭배를 잘 묘사하고 있다.
아하스가 죽은 후에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정치적 ·종교적 지배로부터 유다를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우상들을 제거하고, 점치는 것과 사람을 희생물로 드리는 것을 금지시켰을 뿐 아니라 여호와 신앙과 오랫동안 관련된 숭배물들도 제거하였다. 여기에는 모세에 의해 만들어진 놋뱀도 포함되어 있었다(18:4). 그는 종종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된 지방 신당들도 폐쇄하였다.
사르곤이 통치하는 동안에 반앗수르 동맹에 대한 애굽의 참여 제안을 거부하고, 산헤립이 왕위를 계승한 후 메소포타미아로부터 팔레스타인에 이르기까지 앗수르 왕에 대한 배척이 널리 퍼졌을 때에 공식적으로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왕하 18: 7). 그는 이사야의 경고를 무시, 배척의 지도자가 되어 애굽과 조약을 맺었다(사 30: 1-7. 31: 1-3). 어떤 공격도 저항할 수 있도록 예루살렘을 정비하고 물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서 실로암 수로를 파기 시작하였다(왕하 20: 20. 대하 32: 30).
B. C. 701년 산헤립은 팔레스타인에서 저항을 진압하고 애굽의 구원군을 쳐부수었다.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은 정복되어, 그는 산헤립의 연대기에 의하면 '새장에 갇힌 한 마리의 새 같이'(ANET, p.288) 예루살렘에 갇히게 되었다. 해결책이 없음을 알게 된 히스기야는 굴복하여, 앗수르에 대한 조공이 엄청나게 증가하였고, 히스기야의 딸들 가운데 몇 명은 앗수르 인들의 첩으로 바쳐졌다. (참조. 왕하 18: 13-16).
왕하 18: 17-19: 37은 앗수르에 대한 두 번째 반란의 기록이다. 다시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하였으나, 이사야의 확약대로 멸망하지 않았다(사 14: 24-27. 17: 12-14. 31: 4-9. 참조. 왕하 19: 29-34). 앗수르 군대가 퇴각하였는데 군대 안에 전염병이 발생했거나(왕하 19: 35), 산헤립의 신속한 귀환 요청 때문일 것이다(36-37절).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기도의 응답으로 생명을 15년 연장 받은 것이 이 기간이었다. 여호와에 대한 그의 찬송이 사 38: 10-20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죽은 B. C. 687년에 앗수르에 대한 유다의 오랜 저항은 끝이 났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2] 므낫세(<영> Manasseh <히> 메낫쉐 - 잊게 만드는)
히스기야와 헵시바의 아들로 B. C 687-642년 사이의 유다 왕. B. C 696년부터 부왕과 함께 공동 섭정으로 유다 왕들 가운데 최장 기간을 통치했다. 그의 아버지와 달리 유다를 우상 숭배의 길로 인도하였다(왕하 21: 1-9. 대하 33: 1-9).
그는 예루살렘에서 무죄하고 경건한 자들을 많이 죽였다(왕하 21: 16).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도 므낫세 시대에 톱으로 켜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참조. 왕하 21: 10-15). 왕하 21: 1-18에 묘사된 므낫세의 모습은 부정적이다. 심지어 유다의 멸망까지도 므낫세의 탓이라고 기록되어 있다(21: 10. 23: 12, 26. 24: 3. 참조. 렘 15: 4).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므낫세를 심하게 비난하지 아니했으며, 오히려 환난 중에 회개하여 우상숭배를 타파하는 모습을 기록해 놓았다(대하 33: 12-17). 그는 부왕을 따라 반 앗수르 정책을 실시했으며, 그 결과 결박당한 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33: 11-13).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온 그는 예루살렘 성을 요새화하고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그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도 나타난다(마 1: 10).
3] 아몬(<헬> Amon <히> 아몬 - 신뢰할 수 있는)
므낫세 왕의 아들이며, 훌륭한 요시야왕의 아버지이다. 그의 이름이 애굽 우상과 같은 이유는 아마도 므낫세 왕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을 때 그를 낳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악한 왕이었다. 그래서 통치 2년 만에(B. C. 642-640년) 신하들에 의해서 살해당했다(왕하 21: 19-26. 대하 33: 21-25).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었다(마 1: 10).
구약 역사가 전체적으로 그러하지만, 특히 열왕들의 역사 천년은 암흑기간이었고 인간의 전적 부패를 증거한 기간이었다. 그러나 메시아의 인간적, 법적 계보는 이렇게 흘러내려왔다. 인간의 많은 부족과 무력(無力)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계획을 이루어 오셨다.
하나님은 주권자요, 그의 주권적 긍휼은 죄인들을 능히 구원하실 구주를 보내시고 또 그들을 실제로 구원하실 것이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누가 가히 예측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지금 악한 자들로 인해, 지금 지상교회들의 배교와 부패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자.
하나님의 실패치 않는 섭리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음을 믿자. 악인들은 악을 행하게 내버려두고, 우리만은 선을 행하자. 참된 성도들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자. 주의 참된 교회들을 세우며 그 교회들이 부흥하며 주의 일들을 이루도록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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