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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키즈(Kids)…사이버 세계의 유혹
지난 1999년 4월 22일 콜로라도주 컬럼바인고교 학생인 에릭 클레볼드와 다이런 해리스가 교내에서 총기를 난사해 동료학생 12명과 교사 1명 등 모두 13명을 숨지게 하고 자살한 사건이 발생,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다.
마치 유희(遊戱)를 즐기듯 동료 학생들에게 총기를 난사한 이 사건을 두고 미국 사회에서는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범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미국 학부모들은 10 대 자녀들의 인터넷·PC통신 사용을 어떻게 감독해야 할지에 관한 고민에 빠졌다.
한국 사회에도 올 들어 기성세대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이 줄을 잇고 있다. 지난 3월 광주에서 게임에 중독돼 ‘살인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중학생이 잠자던 동생을 흉기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또 지난 10월에는 수업 중인 교실에 흉기를 들고 나타난 고등학생이 급우를 찔러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수업 중인 교실에서 벌어진 최초의 살인사건이었다. 11월에는 50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한 자해사이트를 개설한 10대 여학생 2명이 검찰에 적발됐다. 자해사이트 회원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상당수가 ‘경쟁적’으로 자해를 한 적극적인 가담자인 것으로 드러나 이해 못할 10대의 행동은 극히 일부 학생의 문제가 아니라 평범한 내 아이, 이웃 아이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섬뜩한 추정까지 하게 됐다. 10대들을 향한 위험한 유혹들이 인터넷을 매개로 확산되고 증폭되면서, TV보다 더 인터넷에 열중하는 대부분의 청소년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강가에 내다 둔 아이보다 컴퓨터 앞에 있는 온라인키드(Online-kids)에 대해 더 가슴을 졸여야 하는 상황이다.
●요즘 아이들, 컴퓨터가 키운다?
▲ PC방에서 인터넷에 몰입하고 있는 10대들. |
통계청이 12월 5일 전국 3만 표본가구 내 6세 이상 가구원 8만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보화실태 조사결과’에 따르면 컴퓨터 보유가구 비율이 전체 가구의 절반을 넘어 2가구 중 1가구 이상이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컴퓨터 사용시간은 하루 평균 2시간, 인터넷 이용은 주당 평균 10.2시간이며 초등학생도 10명 중 6명 이상이 인터넷을 사용할 줄 알고 있었다.
100가구당 컴퓨터 보유대수는 작년 50대에서 올해 58대로 늘었다. 15~19세 아이들은 1주일 평균 14.1시간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5~19세 청소년은 일주일 평균 10.5시간 동안 인터넷을 이용해 컴퓨터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온라인에 접속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앞서 한국인터넷정보센터가 지난 9월 말 전문조사기관인 인터넷메트릭스와 함께 전국 3854가구의 7세 이상 국민 1만978명을 대상으로 ‘인터넷 이용실태 조사’결과에 따르면 대도시 가구의 65.2%가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컴퓨터 보급이 확대되고 인터넷 사용시간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청소년들에게 부모 세대는 경험하지 못한 사이버 공간이 기본 환경으로 자리잡게 됐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YMCA 인터넷중독 상담팀 송은희(31) 상담원은 “지금 자라고 있는 학생들은 정보화사회 1세대로, 산업시대의 마지막 세대인 부모와의 문화적 단절이 어느 시대보다 강하다”고 진단했다. 송 상담원은 “인터넷을 통해 청소년들은 다양한 역할들을 연습해 성인과 다름없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부모나 학교가 아니라 컴퓨터가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이만을 가지고 ‘애들이 왜 저럴까’하며 청소년문제에 접근하면 처음부터 잘못된 전제(前提)를 설정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
●10대를 향한 위험한 유혹
지난 10월 부산에 사는 안모(14)양의 부모는 갑자기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안양의 몸을 살펴보다 자해(自害)한 상처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안양의 몸은 수십 군데에 걸쳐 자해한 상처로 피부가 누더기가 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모 채팅사이트의 자해동호회에 가입해 약 한 달 동안 자해를 해왔다는 안양의 말을 들은 부모는 부산지방검찰청에 신고했다. 11월 9일 부산지검 특수부는 인터넷 채팅사이트에서 안양이 가입했던 자해동호회를 개설, 운영한 혐의로 김모(15)양과 전모(15)양 등 2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인터넷 채팅사이트에서 만난 사이인 이들은 지난 6월 ‘DIE BLOOD(고통·쾌락·상처)’라는 동호회를 개설한 뒤 자신이나 회원들이 칼로 자신의 팔 등을 긋거나 담뱃불로 몸을 지져 상처를 낸 사진이나 동영상(動映像)을 게시한 혐의였다. 이 사이트는 단 6개월 동안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부터 고등학교 2학년 학생까지 5400여명의 회원을 모집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또 이 동호회 게시판에는 ‘…베어지는 듯한 아픔’ 등 자해 경험담과 방법, ‘자살방법 5가지의 재료·비용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회원들의 글 1000여편이 올라와 있었다고 검찰은 밝혔다. 사건을 수사한 검사는 “중요한 문제는 이들 2명의 여학생이 아니라 5400여명에 달하는 동호회 회원들과 경쟁적으로 더 엽기적인 자해를 하려고 드는 그들의 심리”라며 “공개된 장소에서 컴퓨터용 카메라로 자해 모습을 촬영한 듯한 장면도 있어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문제의 사진을 직접 확인해본 결과 컴퓨터가 여러 대 놓인 공간에서 한 학생은 컴퓨터에 설치된 카메라 렌즈를 주시하며 팔뚝을 자해하고 있고 그 옆자리에 앉은 한 사람은 게임을 하는 듯 무심한 얼굴로 자신 앞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검찰은 “조작된 사진이 아니라면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사이트에 올라온 수백장의 사진을 검토한 검찰은 “5400여명 회원 중 상당수가 적극적으로 자해를 했을 뿐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경쟁적으로 자해 강도를 높인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사진뿐 아니라 게시판에 올라온 글 또한 섬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동호회 한 회원은 “살아있단 거.../ 느끼기 위해 나는 또 칼을 들어/ 삶이 무모해질 땐/ 세상에 내가 묻혀갈 때…/ 나를 꺼내기 위한 비상구랄까…/ 나는 살아있다…/ 아직… 살아있다…/ 그런 거잖아…/ 지금은 귀란 게… 눈이란 게… 심장이란 게 있다고 못느끼고/ 하루를 살지만/ 눈이나 귀나 심장이 아프면/ 그것들이 느껴져…/ 자학(自虐)이 아니야… 자각(自覺)이지…/ 아플수록…/ 내가 아플수록…/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그게…/ 내 동기야…”라고 자해 동기를 썼다.
검찰 관계자는 “이와 비슷한 글들이 수백편 올라와 있다”며 “얼마나 자해를 잘했는지 서로 평가하는 글까지 올라와 있었다”고 했다. 수사를 한 검사는 “부모나 가족의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한, 예외적인 학생들만 가입했다기보다는 안양의 경우처럼 ‘멀쩡한’ 학생들이 이런 사진과 글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자해’의 유혹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인터넷으로 가출한 아이들
자해사이트를 만든 김양과 전양은 “자해하면 기분이 좋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서”라고 동기를 설명했다고 한다. 또 이들은 검찰에서 “지금 인터넷에 접속하면 우리와 비슷한 애들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고 진술했다고 검찰은 전했다.
검찰 관계자는 “김양 등의 진술을 종합해 보면 ▲가정에서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했고 ▲내향적(內向的)이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학교에서도 소외를 받았으며 ▲부모의 불화와 그에 따른 어머니의 가출에 충격을 받은 듯 남녀간의 결합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심한 것으로 보였다”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은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오히려 또래 아이들보다 순진하고 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김양과 전양의 어머니는 모두 IMF 당시 가출했고, 이후 친척집을 전전했다고 한다. 김양은 중1 때, 전양은 올해 초 학교를 중퇴했다. 김양은 “작년에 죽으려고 손목에 칼을 그었는데 기분이 좋았다”며 그때부터 자해를 하기 시작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고 한다.
거주지가 김양은 부산, 전양은 청주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들은 ‘자해’를 주제로 채팅을 하던 중 친해졌고, 올 6월 함께 S인터넷 채팅사이트에 자해동호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과의 인터뷰를 요청하자 검찰 관계자는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아이들을 만나서 뭐하겠냐”며 거절했다. 김양 등은 자신의 몸을 자해해 그걸 사진으로 찍어 게시했을 뿐 남에게 강요한 적도 없는데 왜 검찰에 불려나와 조사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수사를 담당했던 검사는 “김양 등은 자신들이 만든 가상의 공간에 매몰돼 그곳에만 머물렀다”며 “설사 보호자와 같이 있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인터넷으로 가출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검찰에 ‘자해사이트’를 신고한 안양의 부모도 딸이 한달여 동안 인터넷으로 가출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동생을 살해한 Y(15)군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롤플레잉게임인 ‘이스이터널’ 등에 심취해 있었고 사건 직전에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등 하루 3시간 이상 컴퓨터 게임에 몰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업 중 급우를 살해한 K(15)군도 방과 후 대부분 시간을 친구들과 함께 인터넷 게임이나 채팅을 하면서 보냈다고 한다. 김군은 인터넷게임방에서 밤을 새고 학교에 가지 않은 날이 있을 정도로 게임과 채팅에 열중했다고 같은 반 친구들은 전했다.
이들은 모두 집에서 자고 학교에 다니고 있어도 사실상 많은 시간 동안 ‘인터넷 속으로 가출’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 ‘가출’ 시간 동안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 처해 어떤 유혹을 받는지 어른들은 잘 몰랐다.
●정보화 사회, 그리고 육체폐기(肉體廢棄)
미국의 총기 난사사건이나 수업 중 급우를 살해한 사건, 타인이나 자신의 자해를 즐기고 감상하는 등의 끔찍한 사건들은 최근 왜 빈발하는 것일까? 청소년문화연구소 김옥순 연구실장은 “정보화사회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인간의 ‘몸’에 대한 존중을 잃어가는 ‘육체폐기(肉體廢棄)’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10대 여학생들의 성매매(性賣買·원조교제), 몸 여기저기 구멍을 뚫어 고리를 거는 피어싱 등도 ‘육체폐기’ 현상의 한 종류라고 그는 설명한다. 김 연구실장은 “점점 심해지는 학교폭력, 이유없는 살인, 자해 등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또 김 연구실장은 “요즘 청소년들은 인터넷을 통해 정보에 과다하게 노출돼 골똘히 생각해 사고를 정리하기보다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를 받아들이기에 급급하다”며 “청소년들에게 사고를 조금만 깊이 해도 사고의 줄기가 흐트러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고 했다. 청소년들이 심각한 이야기를 기피하는 것도 ‘생각하기의 거부’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리셋(Reset)증후군’도 인간의 몸에 대한 존경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컴퓨터를 리셋하면 다시 켜지고, 컴퓨터 게임에서 사람이 죽어도 리셋 버튼만 누르면 다시 살아나는 것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반복하면서 현실 세계에서도 마치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이다. 한 전문가는 “동생을 살해한 예는 ‘리셋증후군’의 극단적인 사례”라고 하기도 했다.
●정체성 혼란 겪는 아이들
청소년문화연구소 김옥순 연구실장은 “인터넷 공간의 ‘익명성’이 청소년들의 자연스러운 정체성 형성에 방해 요소가 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타인과의 차이 혹은 대립을 겪으면서 하는 ‘왜 나와 다를까’하는 성찰(省察)적 사고가 정체성을 형성한다”며 “온라인으로 상대방을 접하는 시간이 늘어난 요즘 아이들은 의견이 다르면 ‘접속’을 끊어버린다”고 말했다. 익명성 속에 숨어버림으로써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장정연(30) 상담팀장은 “청소년기의 중요 과제는 자신에 대한 정체감과 또래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며 “요즘 청소년들은 인터넷에 대한 탐닉으로 그런 단계를 건너뛰고 있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지켜보고 대화하라
전문가들은 인터넷 환경이 보편화된 공간에서 자라는 세대는 아직 청소년으로, 이들이 사회에 나왔을 때 과연 어떤 현상이 생길지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 청소년들에게 인터넷이 가져다 준 긍정적 기능 또한 많기 때문에 몇 가지 병폐만 보고 ‘기성세대’의 사고 방식으로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 신문인 ‘주간 우리들신문’ 최헌(40) 대표는 “인터넷을 거부하는 것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만큼 악영향을 최소화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며 “각종 사회단체들의 문화캠프 등 인간과 인간이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는 공간에 학부모와 학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