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20](월) [허균 얼 톺아보기] 성소부부고 살피기 003#
https://youtu.be/qITsbQjPY-8
✦살피기 머리에
한글 소설, 홍길동을 지은 허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작업으로 님이 남긴 문집, 《성소부부고》를 가져와 다시 읽으며 새롭게 이해하고, 그 뜻을 새길 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민족문화주진회에서 2006년에 7월에 펴낸 ‘신편 국역 성소부부고’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전체 7권으로 한글로 풀어낸 것이지만 쓴 글투가 한자투로 되어 있어 어떤 경우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그 책을 따라 가며 가능하면 쉬운 우리말인 한글로 다시 풀어 내려고 합니다. 아마도 많은 시간이 들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대로 교산 허균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면 싶은 마음으로 차분하게 살펴 보도록 하겠읍니다.
✦문집 머리에
(Ⅰ)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교산 허균(1569~1618)이 엮은 시문집입니다.
교산(蛟山)은 님의 호로 이 외에도 학산(鶴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가 있읍니다.
이런 교산 허균은 아버지, 초당 허엽(許曄)과 후처인 어머니 김씨(김광철의 딸, 사천 애일당) 사이에서 막내(둘째 형인 하곡 허봉, 막내 누나인 난설헌 허초희)로 태어 났읍니다. 교산에게는 또 한 명의 형인 첫째 형, 악록 허성과 큰 누나 둘을 두고 있읍니다. 악록은 전처인 한씨를 어머니로 태어 났는데 이 한씨는 두 딸에 이어 이 악록을 낳은 것입니다.맏딸은 박순원의 아내요, 둘째달은 우성전의 아내입니다.
과거 시험에 처음으로 합격한 것은 초시로 님의 나이 17살 때인 1585년(선조 18년) 봄입니다. 이때 초시는 예조에서 주관하는 시험으로 문과·생원·진사시가 있으며 병조·훈련원에서 주관하는 무과·잡과의 제1차 시험입니다. 하지만 이 국역본에서 밝힌 합격하여 첫 벼슬을 내 얻은 것은 9년 후인 1594년(선조 27년), 26살 때입니다.
그후 이이첨의 꼼수에 걸려 들어 반역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한 때가 1618년(광해군 10년), 님의 나이 50살 때였읍니다.
님이 실제로 반역을 꿈꾸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런 혐의를 덮어 씌운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긴 하지만 님이 남긴 많은 자료에서 나타나듯이 뚜렷한 개혁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만큼 드러내 놓고 새 나라를 꿈꾼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꿈을 간직한 채 조금씩 준비하는 삶을 사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님의 삶을 따라가 보면 낙천적이고 때로 괴팍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기 주장이 뚜렷하여 서로 뜻을 함께 할 수 없었던 권력을 누리는 데에만 정신을 팔았던 상층 양반 계층들에게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 것으로 또한 대체로 비아냥의 대상으로 삼았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님의 후반기 삶은 지금까지 살아 온 것과는 매우 달리 님의 글 재주가 필요했던 만큼 당시의 권력층은 그 필요에 의해서 오히려 님을 가까이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예로 이이첨과 가까원던 점에서도 읽을 수 있읍니다. 또한 당시 광해군의 며느리이자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임신을 하지 못하자 이를 대신하여 허균의 딸이 왕세자인 이지의 후궁으로 뽑혔는데 이때부터 이이첨은 긴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편이 아닌 다른 편으로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삼아 허균을 밉게 여기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기회만 되면 어떻게든 몰아 내려는 미움이 점점 커져 결국, 반역의 죄를 씌우는데에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 집니다. 그러니까 권력욕에 집착이 컸던 이이첨과의 친분은 교산의 운명을 반역으로 몰고 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개혁 성향이 강했던 교산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치명타로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Ⅱ)
일반적으로 문집은 선생님이 후학을 가르치는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아니면 돌아 가신 후 후손들이나 제자들이 존경의 뜻을 담아 남기신 글을 모아 엮어 펴 낸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이 성소부부고는 교산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7년 전인 1611년(43살) 4월에 손수, 문집으로 엮고 제목을 붙이는 등 자신이 직접 펴낸 우리나라 최초의 문집입니다.
귀양을 간 함열에서 시(詩), 부(賦), 문(文), 설(說)의 4부로 나누어 64권으로 엮어 ‘부부고(覆瓿藁)’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하고 있읍니다. 이에 따르면 ‘성소(惺所)’는 교산 허균의 또 다른 호이고, 부부(覆瓿)’는 장독 덮개를 뜻합니다. 또한 고(藁)는 쓴 글이 세상에 내 놓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라 여겨 집(集)이라 붙이지 못하고 고(藁)라고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소부부고는 ‘허균이 지은 장독 덮개로나 쓰일 정도의 변변치 못한 글들을 묶어 놓은 책’이라는 뜻을 담고 있읍니다. 여기서 장독을 덮을 정도의 변변치 못한 글이라고 한 것은 교산이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읍니다.
교산은 이런 성소부부고를 문집으로 엮으면서 직접 손수 펴낸 것입니다. 다 엮은 후 사위인 이사성(李士星)에 보내어 보관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역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은 탓에 정식으로 간행은 되지 못한 채 그때의 필사본이 남게 되었는데 처음과는 달리 아쉽게도 26권만이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읍니다.
그 썩 후 이 문집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그때, 이사성의 아들이며 교산 허균의 외손자인 이필진이 그 과정을 밝히는 발문을 붙여 외 할아버지, 교산을 변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읍니다.
(Ⅲ)
이런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어떻게 짜여졌는지 좀 더 자세하게 살펴 보겠읍니다.
1~2권은 시가 연대 순으로 정리되어 있어 시부(詩部)라고 합니다. 맨 처음에 중국 사신의 일행으로 따라갈 때 지은 정유조천록(丁酉朝天錄)을 시작으로 궁사(宮詞)가 먼저 나옵니다. 궁사는 궁중의 일이나 풍경을 칠언 절구(七言絶句)의 형식으로 읊은 중국 시의 한 갈래입니다. 다음으로는 화사영시(和思潁詩)라는 제목으로 ‘감호(鑑湖)를 추억하면서’를 시작으로 29편을 끝으로 ‘두견(杜鵑)의 울음을 들으면서 화미조(畵眉鳥)의 운을 쓰다‘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속몽시(續夢詩)이며 끝은 억기시(臆記詩) 순서입니다.
3권은 동정부(東征部)를 비롯하여 9편과 훼벽사(毁壁辭)를 비롯하여 2편의 사부(辭賦)가 들어가 있읍니다. 이 부(賦)는 작자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것이라고 합니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다룬 적벽부(赤壁賦)를 연상하면 좋겠지요.
4권~21권은 서(序), 기(記), 전(傳), 논(論)을 비롯하여 서로 떨어져 있는 상대에게 자신의 안부나 소식, 하고 싶은 말들을 전하기 위해 써서 보낸 편지글인 척독(尺牘)에 이르기까지 문체별로 구분해 놓았다고 합니다.
22~26권은 성웅지소록(惺翁識小錄), 성수시화(惺叟詩話), 도문대작(屠門大嚼)으로 특별히 분류하기 힘든 것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끝에는 부록으로 덧붙여 놓은 듯한 한정록(閒情錄)이란 이름 아래 1~17권으로 나누어져 있읍니다.
이러한 내용은 중국 학자인 이정기가 조선을 다녀 온 주지번에게서 성소부부고를 받아 읽고 그것에 대해서 남긴 글로도 확인됩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대로 시(詩), 부(賦), 문(文), 설(說)의 4부요, 전체 26권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 책 뒷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제목을 달고 있는 글들을 살펴 보겠읍니다.
《성옹지소록》은 전해져 오는 옛 이야기들로 그때 그때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여 모은 것으로 《성소부부고》 설부에 들어가 있는 글입니다. 교산이 1610년(광해군 2), 과거시험 부정사건으로 42일간 옥(獄)에 갖혀 있다가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流配)되었는데 바로 이때 기록해 둔 것을 함열에서 다시 정리하여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읍니다.
《성수시화》는 《학산초담》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시 평론집입니다. 이 또한 함열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것으로 최치원(崔致遠)에서부터 살았던 그때의 인물은 물론 승려, 여성들의 시까지도 평가해 놓았던 평론집으로 《성소부부고》 설부에 들어가 있는 글입니다.
특히, 가르침을 받았던 이달을 높게 평가하고 있읍니다. 이런 이달은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삼당 시인(三唐 詩人)’으로 소개할 정도니까요.
이런 허균의 시평은 그 때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 점이 독특합니다.
《도문대작》은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 품평서라고 소개하면저 짧게 말씀을 드리고 있읍니다. 이 도문대작은 지금으로 말하면 별미 책자에 해당됩니다.
또한 마치 부록처럼 《한정록》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읍니다.
(Ⅳ)
이 신편 국역 성소부부고는 2006년 7월 31일자로 발행되었읍니다. 옮긴이는 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이며 펴낸 곳은 한국학술정보(주)입니다.
이렇게 발간되기에 앞서 필사본을 사진으로 떠서 간행한 바가 있다고 기록으로 남겼네요. 마침 교산 허균의 문학과 사상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 이에 부응하고자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국립중앙도서관본을 중심으로 하여 그 밖의 규장각본, 홍문관본, 연세대학본, 박종화본을 두루 참조하여 이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여 출판한 사실도 밝혔읍니다.
이 외에도 성소부부고를 문집으로 엮기 이전에 쓴 필사본으로 초본으로 여겨지는 교산집이 있읍니다. 이 교산집은 현재,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참고하면 좋을 듯하여 덧붙입니다. 이 머리글은 해제라는 제목으로 신호열(辛鎬烈)이 썼읍니다.
이 신호열은 1914년에서 태어나 1993년에 돌아 가셨읍니다. 이 신호열을 소개하는 글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읍니다.
4세 때 할아버지 학산공으로부터 한학 수업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이병수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8세 때는 향교 명륜당의 칠서강장에서 수백 명 중 장원으로 뽑혀 신동으로 알려졌읍니다. 23세 때 서울에 유학하고, 30세에는 정인보·변영만 등과 가까이 지냈다고 합니다.
장년 이후에는 국역사업에 종사하면서 한문학연구의 발전을 도모하여, 47세 때부터 동방고서국역간행회 편집부장, 독립운동사 집필위원을 지냈고, 61세인 1974년부터 민족문화추진회 부설 국역연수원 교수로 있었는데 아마도 이때 이 성소부부고를 번역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1959년 아주시단 한국지도위원을 지냈고, 1978년 한국한문학회를 만들어 한국한문학 연구에 온 힘을 쏟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성균관대학교·동국대학교 대학원 등에 출강하였으며 백악강회를 열어 경사자집을 강의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2006년 7월 31일자로 새로이 펴낸 것으로 소개한 것은 바르게 밝힌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 신호열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던 때에 번역한 첫 번역을 그대로 새로 찍어 내면서 ‘신편 국역’이라고 붙인 것으로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아무튼, 국역으로 풀긴 했지만 옛 말투로 되어 있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 여러 가지로 아쉬운 점이 많기에 부족한 저가 다시 찬찬하게 읽으면서 소개할 참입니다.
첫댓글 교산 허균의 성소부부고 살펴보기 그 세번째 시간입니다.
매주 월요일에 갖는 시간이지요.
그 제목을 '허균 톺아보기'로 잡았으며 그 방법으로
허균의 '성소부부고를 살피기'입니다.
이것은 교산 허균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찬찬히, 깊이 읽어 내겠읍니다.
그 세 번째 시간을 한번, 살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