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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5 묵상글 ( 부활 제2주간 수요일. - 하느님 사랑을 믿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강론글 : 아직 / 06:4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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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5. 부활 제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15 05:48
- 하느님 사랑을 믿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전에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크게 두 가지 곧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창조자요 구원자라는 것을 우리가 믿으며,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죄를 지었어도 끝까지 구원해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이 사랑을 잘 드러내는 것이 성 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 때 복음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복음이 이 말씀을 한 것은 곧 제자들이 배반의 죄를
모두 지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 사랑을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 여기에 제자들의 운명이 갈렸습니다.
끝까지 그리니까 배반할지라도 사랑하실 것을 믿은 제자들은 죽지 않았지만
유다는 이 사랑을 믿지 않았거나 거부했기에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의 요한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 것보다
어쩌면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이 믿음을 더 기꺼워하시고 고마워하실 것입니다.
배반한 제자들을 놓고 이 믿음의 중요성을 얘기했지만
악령들에 대해 얘기하면 이 중요성이 더 잘 드러날 것입니다.
악령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거룩하신 분이라고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괴롭히려고 오셨다고 믿고
그래서 주님이 자기들과 뭔 상관이 있냐며 자기들을 떠나달라고 했지요.
오늘 요한복음도 같은 맥락에서 주님께서는 구원하러 오셨지만
이 구원을 믿지 않은 사람은 결국 심판을 받는다고 얘기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빛을 거부하는 것이 어둠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빛을 사랑하지 않고 거부한 결과가 어둠입니다.
하느님은 어둠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어둠은 실재(Reality)가 아니고 빛이 없을 뿐입니다.
빛이 우리를 비추면 우리는 밝음이고 그렇지 않으면 어둠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가려서 당신 빛을 비추시지 않고,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똑같이 빛을 비추시는 분인데
우리가 그 빛을 거부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할 뿐이겠지요.
그런데 왜 거부하겠습니까?
자기의 죄악이 드러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느님 사랑을 거부한 것이 죄와 악이고,
주님께서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심판받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 구원을 믿는 것이
내게도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묻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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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5. 부활 제2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대안적 삶의 방식을 창조해 내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도가 살아가던 세상은 오늘날 우리의 세상과 꽤나 비슷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관상과 해방, 그리고 활동
대안적 삶의 방식을 창조해 내기
2026년 4월 14일 화요일
CAC의 교수진인 카르멘 아세베도 부처와 브라이언 맥라렌은 2025년 가을 신앙 재조명(ReVision) 회의를 열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권위주의 정치와 결탁하고 폭력으로 오염될 때, 우리는 어떻게 신앙을 살아가야 합니까?" 이 질문은 오늘날의 상황처럼 들리지만, 두 사람은 정치적 위기 속에서 관상적 응답을 모색했던 초기의 모범들을 되새기며,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약 480–547)와 철학자 보에티우스(약 480–524)의 삶을 성찰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들의 성 베네딕토에 대한 묵상을 나누려 합니다. 맥라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정치적 분열과 부패, 경제적 불안정, 서로 다른 민족 집단이 권력을 다투며 반목하는 세상은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 권력과 손을 잡고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지 오늘 우리의 현실만이 아니라,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 살아갔던 시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성 베네딕토는 그리스도교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의 단순함과 사랑, 비폭력의 삶을 기억했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새로운 길을 걸으라는 부르심이 울려 퍼졌습니다. 성 베네딕토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삶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혼란스럽고 왜곡된 세상의 기준과 관습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카르멘 아세베도 부처는 성 베네딕토가 관상적 은둔을 통해 맺은 열매를, 공동체의 능동적인 쇄신으로 설명합니다:
성 베네딕토가 살아가던 세상은 불길 속에 있었습니다. 전쟁과 침략, 잔혹함, 화산 겨울로 인한 재난 속에서 많은 이들이 집을 잃고 굶주렸습니다. 그 한가운데서 성 베네딕토는 오직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의 갈망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특권적인 삶을 내려놓고 세 해 동안 동굴로 물러가 살았는데, 그곳에서 음식이 그를 위해 밧줄에 매달려 내려오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거룩한 은수자의 이야기를 듣고 영적 조언을 구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사막 교부들의 전통 속에서 "말씀"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제가 성 베네딕토였다면, 아마도 몇 해쯤 더 기다리며 세상이 조금 가라앉기를 바라며 출발을 미루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 베네딕토는 동굴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을 품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느껴, 수비아코 근처에 열세 개의 수도원을 세웠고, 마지막에 세운 수도원의 원장으로 머물며 특별한 돌봄이 필요한 형제들과 가까이 살았습니다.
마이크 페트로 박사(Dr. Mike Petrow)의 말처럼, 성 베네딕토가 세운 수도원들은 무너져가는 세상 속에서 관상 전통을 지켜낸 피난처요, 시대를 간직한 기억의 보관소이며, 영적 실험실이자 거룩한 전통을 경작하는 보호된 터전이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삼십 년간의 혼인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후, 저는 방향을 잃고 절망 속에서 뉴멕시코의 사막에 도착했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유배”시키셔서 새로운 실재를 발견하게 하신 듯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심각한 건강의 도전도 함께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막의 광활함과 끊임없이 비추는 태양빛은 제 영혼을 전에 알지 못했던 성령의 기쁨과 부활의 희망으로 열어 주었습니다. 제 삶에 있어 크나큰 변화의 시기를 지나며, 저는 은총의 치유를 체험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Dave A.
References
Adapted from Brian McLaren and Carmen Acevedo Butcher, “ReVisioning through Ancient Eyes: Choosing Contemplation and Action” ReVision: What Do We Do with Christianity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October 2025). Unavailabl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nnie Quick, untitled (detail), 2025, photo, Albuquerque.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맨발로 땅에 닿아 서 있는 것은 고요한 수도자의 몸짓을 의미합니다. 즉각적인 반응은 그 힘을 잃고, 대신 관상적 응답이 솟아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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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사랑의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보내신 당신의 "외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고 요한 복음은 전합니다.
그러고 나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요.
세상을 심판하는 것은 구원하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지 말하는 것은, 실제로 유익한 일을 하러 나서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저녁에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심판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심판이 아닐 겁니다. 이 심판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랑의 흔적을 찾으시려는 심판인 것입니다.
우리말에 "믿다"라는 단어는 김민수 편 [우리말 어원 사전]에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밑[本(근본 본), 底(밑 저), 原(근원 원)] + 다[동사 어미].
그러니까 믿음의 어간 '믿'은 본래 '밑', 즉 아래, 토대, 근원 등을 뜻하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月印釋譜(월인석보)>에는 "본(本)고장"을 "믿곧"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釋譜詳節(석보상절)>에는 "本國(본국)"을 "믿나라"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은 "밑"과 긴밀한 "뿌리", "토대", "바닥"을 의미하는 어간이기에, "믿음이 있다"라는 말은 "디디고 설 바닥이나 토대가 있다"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에 토대를 두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런 사랑에 토대를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하느님께서 펼치시고자 하시는 사랑을 나와 함께하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삶을 사는 사람일 것이고요!
그러니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사랑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명목상의 믿음과 말뿐인 사랑을 지닌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하느님 사랑에 토대를 두고자 그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며 이를 삶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구현해 내려고 노력(수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런 사랑으로 삶의 방향을 잡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사람의 삶은 하느님 사랑을 향해 변화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계속해서 독서로 듣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이 그 사랑을 향해 변화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일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영어에서도 믿음을 의미하는 "belief"라는 단어는 이제는 사라진 중세 영어 "lief"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 "lief"는 "사랑"을 뜻하는 말로서 현대 영어 "love"의 어원이 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에 이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믿음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겠지요?! 그리고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삶이 그 사랑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내어줌"입니다. 그리고 이 "자기-내어줌"은 '내'가 불리한 쪽, 낮은 쪽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가 추구했던 "작음"(minoritas-minority)의 영성입니다.
그런데 우리 에고는 본질적으로 이 '낮음'과 '비천함'을 택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니 관계성 안에서의 사랑을 택하지 못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그렇기 때문에 이 에고는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어떤 본당에 있을 때 세례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자 한 분이 저를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왜 성당에는 저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걸어 놓는 거지요? 볼 때마다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라고요.
사실 저는 그 십자가를 어렸을 적부터 보아 와서 그랬는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무섭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러면서 저 십자가가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사형틀이라는 것을 곰곰이 새겨 보니 '십자가와 그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는데도 우리 교회가 여전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우리 교회의 상징으로 두고자 하는 이유는 이 십자가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대변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그분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우리와 하나 되시기 위해(진정한 사랑을 위해) 온전한 "자기-내어줌"을 택하시어 이 세상에 내려 오시고 그 잔혹한 사형틀에서 돌아가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던 겁니다.(필리 2,6-8 참조).
요즘 들어 제가 왜 불안하고 암울한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자주 있는가를 깊이 들여다 보니 제가 성 프란치스코 사부님의 정신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기로 서약까지 했으면서도 이 사랑, 즉 "자기-내어줌"을 택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해서 금방 제가 변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이 "자기-내어줌", 즉 "낮음"과 "비천함"을 택하는 사랑을 묵묵히 살고자 하는 수양을 계속해 간다면 당연히 이러한 "자기-내어줌"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사랑을 택할 힘을 실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 말씀 22번을 함께 나누며 오늘 복음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22. 잘못을 고침]
"다른 사람이 해 주는 훈계와 문책과 꾸지람을 마치 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하듯이 인내로이 견디어 내는 종은 복됩니다. 꾸지람을 듣고는 그 꾸지람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순종하며, 겸허히 고백하고, 기꺼이 보속하는 종은 복됩니다. 자신을 변명하는 데 빠르지 않고, 자기 탓이 아닌 죄에 대해서도 부끄러움과 꾸지람을 겸손히 참아 받는 종은 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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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5.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세 번째 대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는 흔히, “복음서 속의 복음” 또는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이 “하느님의 사랑”, 나아가 “먼저 하신 사랑”, 곧 “거저 베풀어진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며,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니,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혹시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속정신입니다.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과 안정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와 같은 것들 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속정신에 빠져 속화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녹이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 곧 ‘먼저 베풀어지고’, ‘거저 베풀어진 사랑’이 복음정신입니다. 그것은 ‘이타적’ 사랑이며, ‘위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건만,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심판한 까닭입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그렇습니다. 사랑의 거부는 이미 심판받게 되지만,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면서도
죽기까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죽기까지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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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5.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은 1년에 두 번 시간을 바꾸고 있습니다. 3월과 11월에 시간을 바꾸는데 이것을 ‘Daylight Saving Time(일광절약시간)’이라고 합니다. 보통은 ‘Summer Time’이라고도 부릅니다. 저도 미국에 온 지 어느덧 8년이 되었고, 그 시간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계의 바늘이 한 시간 앞으로 가기도 하고, 다시 뒤로 가기도 합니다. 시간은 늘 우리 곁에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시간에는 서로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성서는 시간을 두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입니다. 크로노스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한 달은 30일이며, 1년은 365일입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기준으로 정해진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부자에게도 하루는 24시간이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하루는 24시간입니다. 젊은 사람에게도,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물리적인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아침이 오면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이 되면 하루를 마칩니다. 이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의 삶도 함께 흘러갑니다.
하지만 성서는 또 다른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카이로스, 의미의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는 결혼기념일이 있습니다. 서품 기념일이 있습니다. 축일이 있고 생일이 있습니다. 은경축이 있고 금경축이 있습니다. 이런 날들은 단순히 달력에 적힌 날짜가 아닙니다. 그날에는 우리의 삶을 바꾸었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날을 떠올리면 감사가 떠오르고, 기쁨이 떠오르고, 때로는 눈물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사람은 바로 이런 의미의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동물들은 물리적인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종족 보존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의미의 시간을 통해 문화와 역사와 예술과 철학과 종교를 만들어 갑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의미의 시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의미의 시간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기도 합니다. 어쩌면 종교도, 그리고 부활 신앙도 바로 이런 의미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대사제들과 사두가이파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사도들을 잡아 가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사도들은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고, 다시 성전에 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힘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이제는 사도들이 전하는 진리를 두려워합니다. 정의롭지 못한 힘은 언제나 두려워합니다. 부당한 권력은 언제나 떨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억누르고, 잡아 가두고, 침묵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권력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힘도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박해와 멸시를 받았던 사도들은 2000년 교회의 역사 속에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밝혀주는 빛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 차이입니다. 권력과 힘은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사랑과 진리는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영원히 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권능과 힘을 가지셨지만, 그 힘을 사랑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사용하십니다.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있을 때, 능력이 있을 때, 재물이 있을 때 그것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사랑과 희생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시계는 돌아가고 하루는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 하루가 사랑과 진리로 채워진다면, 그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담긴 카이로스의 시간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는 패배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카이로스 안에서는 구원의 순간이었고 부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도들의 감옥 생활도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는 고통이었지만, 카이로스 안에서는 복음이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하루는 그냥 지나가는 하루가 될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은총의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바로 이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느님의 의미를 발견하는 삶, 평범한 하루를 은총의 시간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하루가 단순히 지나가는 크로노스의 하루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카이로스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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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5.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20:18 추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간단한 공식이자 신앙의 신조(信條)!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대목,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 프로젝트를 요약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공식이자 신조(信條)가 있다면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복음 3장 16절 이하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더 나이 들어 머릿속이 흐려지고 기억력이 감퇴하더라도, 이 공식만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달달 외워둬야겠습니다.
그 공식의 저자는 요한 복음사가인데, 정말이지 군더더기 하나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아무런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간단합니다.
①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② 그 극진한 사랑의 표시로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③ 예수님이 이 땅에 파견되어 오신 이유는 세상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④ 이 세상 그 누구든, 그 어떤 대역 죄인이든 상관없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받고 멸망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너무 쉬워서 어려운 것 같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표현에 제 마음이 한참 머물렀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밥먹듯이 죄를 짓고, 동일한 잘못을 평생토록 반복하는 우리 죄인들에게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종말에 펼쳐질 무시무시한 광경이 자주 등장합니다.
읽을 때 마다 끔찍한 생각과 함께 밀물처럼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큰 일이네 이거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며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사실 종말에 펼쳐질 무시무시한 광경들에 대한 성경 저자들의 표현은 유다교 묵시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요한 복음 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시기 보다 우리 인간 각자가 자초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 인간 각자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 혹은 불신의 결과로 구원 또는 멸망을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 각자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해 신앙이냐? 불신이냐?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는가 여부에 따라 심판과 구원, 단죄와 영원한 생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어떻게서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그 간단한 공식, 신앙의 신조(信條)를 굳게 믿어야겠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 하느님으로 굳게 믿고 고백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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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5. 부활 제2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3,16–21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주셨다.”
복음은 구원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사랑을 먼저 말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벌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실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드러남을 위한 심판의 빛이 아니라,
치유를 위한 구원의 빛으로 오십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식이
‘멀리서 명령하는 힘’이 아니라
‘가까이 와서 함께 짊어지는 사랑’임을 강조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하느님 사랑의 깊이는
말로만 말해지는 교리가 아니라,
아들을 내어주시는 자기 증여로 드러납니다.
빛은 우리를 폭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다시 살도록
길을 열어 주는 은총입니다.
오늘 2주 친절/선행 주간에
이 복음은 아주 현실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나는 사람을 만날 때,
그를 심판의 빛 아래 세우려 하는가,
아니면 살리는 빛 안으로 초대하려 하는가?
• 나의 말은
상대를 드러내 상처 주는 말인가,
아니면 부끄러움을 덜어 주는 친절의 말인가?
• 나의 선행은
‘내가 옳다’는 증명인가,
아니면 하느님 사랑이 지나가는 통로인가?
빛 안으로 나아오는 사람은
완벽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가 있어도, 부끄러움이 있어도
그럼에도 빛이 더 안전하다고 믿기에
조심스레 나아오는 것입니다.
친절은 그 사람을 몰아붙이지 않고
한 걸음씩 걷게 하는 손길입니다.
선행은 그 손길이
오늘의 선택으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주님,
저를 심판의 사람으로 만들지 마시고
빛의 사람으로 빚어 주소서.
누군가의 어둠을 들추기보다
그가 빛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친절과 선행으로 길을 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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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5.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20:10 추가.
<‘이웃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 사랑’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6-21).”
1)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라는 말씀을,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8-12).”
“하느님께서는 왜 인간들을 사랑하시는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이다.”
말장난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말장난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그리고 달리 더 좋게 설명할 말이 없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존재들이기 때문에.’, 또는 ‘당신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뭔가 많이 부족한 말이고,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가
가장 좋은 설명입니다.
사랑은,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 라는 말씀은, “당신 자신을 내주셨다.”로 생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입니다(요한 10,30).
그래서 외아들을 내주시고 아버지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내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라는 말씀은, 에제키엘서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에제 33,11).”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인간들은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고,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해서 멸망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어둠 속에 있는 인간들을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라는 말씀은, ‘무조건 누구나’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회개하는 믿음’이어야 하고,
또 ‘실천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2)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 라는 말이 그 답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랑받고 있음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법은 ‘이웃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을 하든지 받든지 간에, 이웃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 사랑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3) 사랑은 ‘말’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삶’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18절-19절의 ‘심판’에 관한 말씀은, “구원을 주려고 오신 메시아를 믿지 않는 것은, 멸망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 안 믿고 있는 것은, 지금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이고, 그래서 이미 스스로 심판을 받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20절-21절의 말씀은, “그날이 되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악행은 악행대로, 선행은 선행대로 모두 드러날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진리를 실천한 이’는 아무 거리낌 없이
당당하고 떳떳하게 하느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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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5. 부활 제2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20:00 추가.
요한 3,16-21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다른 사람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고 하면서, 가족이니까 친구니까 가까운 사이니까 자기 어려움을 해결해달라고 요구하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사람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물질적 이익과 관계를 맺으면, 그 이익이 사라졌을 때 그와의 관계도 깨져버리고 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해결사’로 만나서는 안됩니다. 대신 상대방과의 관계 자체에 집중하며 서로에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 좋은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건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그저 내 소원을 이뤄주는 ‘도깨비 방망이’로만 여기면 그분과 인격적 친교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분 뜻을 헤아리고 따를 수 없기에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지요.
그러면 하느님과 진정한 친교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하신 이 말씀에 집중하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첫번째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은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나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기 위해 하시는 ‘좋은 일’들이라는 점을 항상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고통과 시련이 닥쳐올 때 쉽게 넘어지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실 ‘좋은 것’들을 희망하며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두번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가장 귀한 선물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여 그분과 함께 참된 행복을 영원히 누리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것임을 항상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욕심과 집착에 빠져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뜻에서 벗어난 일을 하여 뒤늦게 후회할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처럼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집중하지 않으면 엉뚱한 것에 정신이 팔려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태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모습으로 설명하시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좋은 길로 이끄시는데,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길을 거부하다 엉뚱한 길로 빠져 멸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진리의 빛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밝게 비추시어 유혹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인도하시는데, 내가 그 밝은 빛이 너무 눈부시고 불편하다며 굳이 거짓과 위선의 어둠 속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혹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죄’를 짓게 되고,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면 나중에는 다시 일어서는 것조차 포기한 채 그대로 죄의 상태에 눌러앉고 말지요. 그렇게 구원의 길 걷기를 포기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에, 그 자체가 그에게는 구원받을 수 없는 ‘심판’이자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단절되는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 속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그분 말씀과 계명을 충실히 실천하여 구원의 빛 속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의 끝에 우리가 그토록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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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5. 부활 제2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 20:30 추가.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0&id=2131380&menu=4770
Mark Choi[mychoi1960] 260415. 08:41 ㅣNo.189095
■ 미국에서 사목하는 한국 천주교 사제들에게 드리는 단호한 제언?!
미국에서 사목하는 한국 천주교 사제들에게 드리는 단호한 제언?!
오늘 저는 미국에서 사목하고 계신 한국 천주교 신부님들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이 글은 비난을 위한 비난이 아니라, 신자들이 실제로 겪는 고민을 솔직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디 불편하더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시길 바랍니다.
저 역시 혼자 살아본 사람으로서, 사제 생활의 외로움과 스트레스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해가 곧 동조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문제는 음주에 대한 절제 부족입니다.
한국 천주교는 술을 금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음주가 이루어집니다. 그 자체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와 마시느냐, 얼마나 마시느냐,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떤 모습으로 공동체 앞에 서느냐입니다.
예를 하나 들면, 토요일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진 후, 다음 날 주일 미사에 피곤하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신자들은 말은 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깊은 실망을 느낍니다. 사제의 작은 행동 하나가 신자들에게는 신앙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래로 막을 것을 호미로 막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제가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면, 작은 문제 하나가 결국 공동체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큰 문제로 번질 수 있습니다. 사제는 누구보다 높은 기준과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처럼, 사제 스스로에게 더 엄격해야 합니다.
또한, 신자들의 분위기나 권유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사제는 공동체의 중심이며, 신자들은 사제의 모습을 통해 신앙의 방향을 잡습니다. 그렇기에 절제는 선택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이 글은 사제직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제의 존엄성과 신자들의 신뢰를 지키기 위한 단호한 호소입니다. 신부님들의 헌신을 존중하며, 더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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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Firm Appeal to Korean Roman Catholic..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1&id=2131379&menu=4770
260415. 08:39 ㅣNo.189094
A Firm Appeal to Korean Roman Catholic Priests Serving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
Today, I write with a firm and honest message to Korean Roman Catholic priests serving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is is not an attack, but a direct reflection of concerns that many parishioners quietly carry. Even if the message feels uncomfortable, I ask that you receive it with sincerity.
I understand the loneliness and stress that come with living alone as a priest. I have lived alone myself, so I know the challenges. But understanding does not mean agreement. The issue I must address is the lack of moderation in alcohol consumption among some priests.
The Catholic Church does not forbid drinking, and within the Korean Catholic community, drinking is often accepted as normal. That is not the problem. The real issue is who you drink with, how much you drink, and what condition you present yourself in afterward.
To give a concrete example: some priests spend late Saturday nights drinking, only to appear at Sunday Mass tired, unfocused, or visibly unprepared. Parishioners may not speak up, but they notice. And they are disappointed. A priest’s smallest action can shape a parishioner’s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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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5. 부활 제2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영근 님 ------- 20:40 추가.
■ 예수님은 무엇을 두르시고 계신것일까?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id=2131401&menu=4770
최영근 [dimonz] 260415. 17:03 ㅣNo.189103
** 예수님은 무엇을 두르시고 계신것일까?
** 예수님은 무엇을 두르시고 계신것일까?
예수님의 십자고상을 보면
헝겊조각을 두르신채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모습 입니다
아주 어렸을때 기억, 개신교회에 다녔을적에 보았던
예수님도 십자가에 넝마를 두른채 못박히신 형상 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개신교회는 예수님이 없는 십자가가
대다수인것 같습니다. 왜 십자가에서 예수형상을 없앤것일까요??
고대로마 십자가형은 죄수를 발가벗겨
나체로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로마체제에 대항한 정치범 들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치욕과 고통을 주려했던 것 같습니다
이 두가지 사실의 괴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가톨릭이나 개신교 모두 이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없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쉽게 해결책이 나왔습니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마리아 발또르타, 도서출판 크리스찬
어느 열심한 신자의 개인적인 체험을 기록한 책 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에 대한 묵상이 10권으로 나온 책 입니다
제9권, 수난편 365쪽 ~ 366쪽을 읽어보면 내용이 나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의 길을 (비오 돌로로사) 걸으신 예수님께서는
골고타 언덕에 도착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려 옷을 벗습니다
그런데 겉옷은 벗으시고 통자 속옷은 그냥 입고 있으려는데
로마 군인이 속옷마저 벗으라고 말합니다
완전히 발가벗긴채 나체로 십자가에 매달리는게 거시기한
예수님께서는 로마 병정에게 속옷은 입은채로 해달라고 애원하십니다
병정은 그말을 무시하고 벗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광경을 보고있던 성모님께서는 당신께서 쓰고계시는 베일을
벗으셔서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로마 백부장에게 건넵니다
성난 군중에게서 예수님을 보호하는 친절을 베풀었던 백부장은
받은 베일을 속옷을 벗으려던 예수님에게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통자속옷을 다벗고 난후 베일을 서혜부에 두르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눈물이 베어있는 베일을 두루시고
계신 것입니다. 잔인하고 슬픈 장면.
저는 이 글을 읽고 "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성모님 발현에 대한 책들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이책도 재미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말씀 읽고 묵상하고 미사 참례하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생활을 통한 깨달음 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요.
다른 사람들의 체험이나 간증글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되는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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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서 : 마리아 발또르타의 유언
" 나의 고통은 끝났다. 그러나 사랑하기를 계속 하겠다"
그녀가 기록한 것 모두를 계시라 인정하기에는 어려우나
그녀가 독특한 체험을 한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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