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유대계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 (Pindar)

라뮤나
2022. 11. 24. 0:09
13 의회, 세계 일루미나티 지도자는 "Pindar" 라고 불립니다. Pindar 는 13 통치 가문의 일원이며 항상 남성입니다.
Pindar 라는 칭호는 "Pinnacle of the Draco" 또는 "Penis of the Dragon" 으로 알려진 용어의 줄임말이며 이것은 최고의 힘, 지배, 창조, 관통, 팽창, 침범, 그리고 공포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이 칭호를 가진 계급은 지구 내부의 순혈 렙틸리언 수뇌에게 보고되며 피라미드의 "눈"은 13 통치 가문을 의미합니다.
그 이야기 한번 시작해 보겠습니다.

그 전에 유대인이 어떻게 지내왔는지에 대한 과거를 보면 좋을꺼 같아서 글을 공유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화폐의 진화과정과 유대인으로 보는 은 이야기
안녕하세요. 블로거 라뮤나입니다. 오늘은 은 이야기에 대해서 써보고자 합니다. 금은 지폐 화폐가 나오기 ...
프랑크푸르트 게토
18~19세기 유럽의 대부분은 기독교를 믿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과거에서부터 계속적으로 차별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신성로마제국의 자유도시 프랑크푸르트의 게토에서 시작됩니다. 게토도 마찬가지로 유대인을 박해하였으며 강제 격리 지역까지 설정하여 유대인 거주 지역이 따로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주로 좁은 구역 안에서 닭장처럼 생활을 해야 했고 로스트 차일드 가문도 그 지역에서 작은 고물상을 하던 소규모의 상인 가문에 불과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인물이 바로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 즉 마이어가 로스차일드의 가문을 탄생시킨 최초의 인물이자 훗날 엄청난 성공을 거둔 다섯 아들의 아버지입니다.
마이어는 워낙 뛰어나 10살 때 랍비 학교에 들어가서 교육을 받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랍비는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학자로 마을 단위의 공동체의 이장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이어의 양친이 모두 천연두로 사망하게 되자 고아가 되어 어쩔 수 없이 랍비 학교를 그만두게 됩니다.
(2~3년간의 랍 비교육은 마이어를 세계적 금융업자의 발판이 된 원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이어는 친구들이 대부분이 랍비 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랍비 학교를 나오지 못한 유대인들보다 빠르게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정보교환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과거에 유대인들은 민족 전체가 가나안에서 쫓겨나 흩어져 살았습니다. 이를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세계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종교적 의문점이 생겼을 때 랍비들 간에 편지로 의견을 전달하는 전통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이 편지에는 종교적 견해뿐만 아니라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상품 정보와 환시세 정보 그리고 기타 정보까지 적어서 보내기 시작하였고 그 정보를 랍비들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공유를 하였습니다.
즉 과거에도 유대인들은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정보를 교환했었던 것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시작
양친을 모두 천연두로 잃은 마이어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하노버의 은행에 취직을 하게 되어 은행에서 5년간 일을 하면서 금융 시스템의 원리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의 마이어의 선택은 개인사업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이어는 하노버에서 일을 하고 성인이 돼서는 다시 프랑크푸르트 게토로 돌아오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번지가 정해지기 전 자신이 사는 곳을 알리기 위해 간판을 거는 풍습이 있었는데 마이어의 조상들은 한때 유대인 거리의 번화가 끝자락에 살았고 잡 앞에 붉은 방패(독일어로 로트칠트)모양의 간판이 마이어 가문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에 마이어는 부모님이 하던 고물상 앞에 붙어있던 붉은 방패 간판을 따서 로트칠드 영어식 발음으로는 로스차일드를 자신의 성으로 삼아 로스트 가문의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첫째, 암셸 마이어 로스차일드
둘째, 잘로몬 마이어 로스차일드
셋째, 나탄 마이어 로스차일드
넷째, 카를 마이어 로스차일드
다섯째, 야콥 마이어 로스차일드
워털루 전투
로스트 차일드 영국을 사다.
1815년 6월 영국과 프로이센 동맹군과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것이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름이 알려지게 되고 부를 축적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 당시 런던증권거래소에서는 워털루 전투 결과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즉 프랑스가 이기면 영국 국채가 하락할 것이고 나폴레옹이 지면 영국 국채는 상승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프랑스군이 우세하였지만 오후가 되자 영국군에 프로이센 동맹군이 오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영국군이 우세하게 됩니다. 결국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승리를 하게 되며 영국이 승리하게 됩니다.
이에 영국 웰링턴 장군은 승전보를 영국에 알리기 위해 영국으로 갑니다.
허나 전쟁에 시스템이 있었는데 전쟁 후 정식 승전 공문을 만들어야 했고 이에 조사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즉 승전 후 웰링턴 장군은 정식 승전 공문을 만들기 위해 조사를 해야 하는 시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건은 여기에서 일어납니다.
이 과정에서 나탄(셋째)는 먼저 출발한 비둘기와 쾌속선을 통하여 왕실보다 30시간이나 빨리 결과 소식을 알게 됩니다.
남들보다 30시간이나 먼저 승전 소식을 들은 나탄의 선택은 어땠을까요?
"다른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든 재산을 국채에 투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탄 로스차일드는 달랐다. 그는 팔았다. 몽땅 내다 팔았다. 국채 값은 끝없이 떨어졌다. 증권 거래소에서는 영국군이 패했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국채는 떨어졌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몽땅 잃어버릴 수도 있나는 찰나에 나탄은 갑자기 대량의 채권 다발을 헐값에 사들였다. 잠시 후 승전 소식이 증권거래소에 날아들었고 가격은 치솟았다." - 로스차일드 가문 일기책 중에서-
이렇게 나탄은 95% 하락된 가격에 채권을 대량으로 매입하며 하루에 20배가 넘는 차익을 남기게 되며 이때 영국 채권의 62%가 로스차일드 가문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반면 이날 대부분 명문가는 파산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왜 패배했나?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진 후 나폴레옹시대는 끝이 나게 되면서 백 년 평화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에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의 배후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806년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고자 대륙봉쇄령을 내립니다. 대륙봉쇄령은 나폴레옹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패배한 보복 조치로 영국에 강제적 타격을 주기 위해 내린 봉쇄령입니다.
이에 영국은 활로를 잃어버려 수출 상품 재고가 쌓이게 되면서 수출 상품의 가격이 하락하게 됩니다. 이에 다른 주변 나라는 영국 수출 상품이 수입되지 않게 되자 생필품 등의 가격이 폭등하게 됩니다. 이에 나탄(셋째)는 가격이 폭락한 영국 수출 제품을 대량으로 구입하여 대륙봉쇄령을 피해 밀수출하여 큰돈을 벌게 됩니다.
"나는 당시 나폴레옹과 싸우던 웰링턴 공작이 군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정부에 금괴를 모두 팔았는데 정부는 그 금을 포르투갈에 있는 웰링턴 공작에게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몰랐다. 나는 금괴 운송을 전적으로 책임지기로 하고 프랑스를 거쳐 운송했다. 그 일은 내 일생 최고의 사업이었다." - 로스차일드 일가 나탄의 말 중에서-
어떤 방법으로 대륙봉쇄령을 피했을까?
정답은 평저선이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배들은 밑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이런 유형의 배는 속도가 빠른 대신 접안시설이 없으면 항구 진입이 불가하였습니다. 당시 나탄은 덴마크 해안으로 밀수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덴마크 해안은 세계 5대 갯벌로 꼽히는 바덴 갯벌이 있었고 첨저선은 갯벌에 접근이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을 타고 밤에 밀수품을 나르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에 갯벌을 통해서 배가 온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밀수를 단속하는 당국에서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암암리에 밀수도 하면서 금과 화폐도 영국군에 지원하면서 영국군의 군자금 수송도 하게 됩니다. 또한 나폴레옹의 경우 군자금을 내는 사람도 없었을뿐더러 금융 시스템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나폴레옹 왈 "유럽에는 오직 하나의 힘이 존재한다. 그것은 로스차일드다"
로스차일드 돈 쓰는 법 = 이스라엘 건국
로스차일드는 이렇게 어마 무시한 돈을 벌게 됩니다. 그렇다면 로스차일드는 그 돈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바로 이스라엘 건국에 기여합니다.
1881년 러시아에서는 국왕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암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암살범이 유대인 처녀의 집에서 집회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기 시작됩니다. 이에 러시아에 살고 있던 23만 명의 유대인이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망명하기 시작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하게 됩니다.
이에 프랑스 랍비와 러시아 랍비가 에드몽 로스차일드를 찾아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해달라고 요청을 하게 됩니다. 에드몽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에서 프랑스를 맡았던 다섯째의 아들이자 마이어의 손자입니다.
에드몽은 은행일을 형들에게 맡기고 본격적으로 고대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 민족주의 운동인 시오니즘 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이에 1882년부터 에드몽은 팔레스타인에 농장용 땅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이 자립할수록 돕게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영토의 80% 이상이 에드몽이 사준 땅이 됩니다.
이스라엘 초대 총리 벤구리온 왈 "유대인이 유랑민으로 지낸 2000여 년의 세월 동안 에드몽 로스차일드에 버금가는 또는 그와 견줄 만한 일물을 발견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위기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대공황을 맞이하게 되면서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부상하게 되면서 히틀러는 유대인인 로스차일드가에게 모든 재산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 로스차일드가의 수장이자 유대인 자본가의 전형이었던 그는 히틀러 총통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인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왜 오스트리아에 남아있는 것이었을까? 왜 그토록 위험한 지역에 남아 표적이 되기를 자처했던 것일까? 이유는 그가 오스트리아에서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었다. 일가의 수장인 루이스는 오스트리아가 주목하는 대상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 일가 책 중에서-
결국 히틀러의 직접 영향권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로스차일드 일가는 독일 나치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가게 됩니다. 이에 히틀러는 모든 재산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며 오스트리아 로스차일드 가문은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하게 됩니다. 이에 이민을 통하여 미국으로 가게 되고 프랑스 로스차일드 일가도 오스트리아 로스차일드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에 나치 세력하에 로스차일드가는 국적을 박탈되어 죽음을 맞이하거나 추방당하게 됩니다.
이후 나치에게 큰 변을 당한 로스차일드 가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철저히 베일 뒤로 숨게 되고 이에 은행과 본사 건물 외부에 명패도 없을 정도로 철저히 가문을 숨겼으며 가문의 자산 규모 또한 비밀로 가려저 철저히 보완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