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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고조선의 서쪽 강역을 알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사료이다. 현재 중국은 공식 간행된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일대로 표기하고 있다. 진제국의 영토가 한반도 평양까지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중국이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태강지리지』‧『진서지리지』‧『통전』의 관련기록을 검토하여 중국측의 주장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역사왜곡인지 살펴보고, 진나라 만리장성 동단의 올바른 위치를 밝히려고 한다. 글이 다소 길어서 4회에 걸쳐서 연재한다. |
1. 들어가는 글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東端은 고조선의 강역을 알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사료이다.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진제국의 동북쪽 국경일대에 만리장성을 쌓아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만리장성의 북쪽에는 흉노가 위치하였고, 동쪽에는 고조선이 위치하였다. 고조선과 진제국은 만리장성의 동단을 경계로 하여 서로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만리장성의 동단은 곧 고조선의 서쪽 국경일대에 해당한다.
중국은 1982년 공식 간행된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그림 1>과 같이 한반도 평양일대로 표기하였다. 진제국의 영토가 한반도 평양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이러한 주장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며, 여러 사서들의 기록에 의하면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였다. 고조선의 강역이 멀리 하북성 북경 서남쪽 일대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중국역사지도집』은 어떤 사료를 근거로 하여 그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에 대한 올바른 위치를 밝혀보기로 한다.
<그림 1>『중국역사지도집』‘진秦 산동북부제군’ |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일대로 해석한 최초의 학자는 일제 식민사학자인 이나바 이와기치(槄葉岩吉)였다. 그는 1910년 발표한 『진장성동단급왕험성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라는 논문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대동강 부근의 수안遂安지역으로 비정하였다. 그 논거는 아래의 『태강지리지』(사료 A-1, A-4)와 『진서』지리지(사료 A-2)였다. 이어서 중국학자로서 진장성의 동단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첫 번째 학자는 왕국량王國良이었다. 그가 제시한 진장성 관련 지도에는 진장성이 한반도 평양의 동쪽을 지나 평양 남쪽의 어느 지점까지 이어져 있다. 이렇게 표기한 근거에 대해서는 아래의 『진서』지리지(사료 A-2)와 『통전』(사료 A-3)의 기록을 제시하였다.
1982년 중국에서 공식 간행된 『중국역사지도집』은 위의 <그림 1>과 같이 진장성을 평양 서쪽의 어느 지점까지 연결하였는데, 장성의 동단지점을 구체적으로는 평양 서남쪽의 강서군 함종리(현재 평안남도 증산군 함종리) 부근까지 연결시켰다. 이렇게 연결시킨 근거로서 아래의 사료 A-1, A-2, A-3 기록을 제시하였다.(한밭대 공석구 논문 “낙랑군 수성현 관련기록 고찰” 5쪽, 한국상고사 대토론회 <한군현 및 패수의 위치 비정에 관한 논의> 참조)
번 호 | 사 료 |
A-1 |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하였다(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사기색은』 |
A-2 | “낙랑군은 한나라가 설치했다...(중략)...수성<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樂浪郡, 漢置 ...(中略)... 遂城<秦築長城之所起>).” 『진서』권14, 지4, 지리 상, 평주 낙랑군 |
A-3 | “노룡현은 한나라 비여현으로 갈석산이 있다.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므로 그 이름을 얻었다. 서진의 태강지지에 이르기를 ‘진秦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산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 지금 고구려의 옛 강역에 있으며, 이 (노룡현의) 갈석산이 아니다(盧龍, 漢肥如縣有碣石山 碣然而立 在海旁, 故名之.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통전』권178, 주군8, 고기주 상 |
A-4 | “서진의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진秦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산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 지금 고구려의 옛 강역에 있는 것은 갈석산이 아니다(晉太康地理志云 秦築長城 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碣石山也).” 『태평환우기』권70, 하북도19, 평주 노룡현 |
『중국역사지도집』이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일대로 표기한 것은 일제 식민사학자 이나바 이와기치(槄葉岩吉)와 중국학자 왕국량王國良 등의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위의 사료들을 가지고 진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 일대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지 살펴보기로 한다.
현재 위의 사료들을 가지고 진장성의 동단을 비정하는데 있어서 크게 세 가지 학설이 대립하고 있다(<그림 2> 참조). 첫째는 진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라는 설로 필자와 심백강 등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최신의 견해이다. 둘째는 진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라는 설로 윤내현과 이덕일 등 다수의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견해이다. 셋째는 진장성의 동단이 현 한반도 평양 일대라는 설로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과 중국 사학계의 통설이다. 과연 어느 주장이 옳은지 위의 각 사료들을 하나씩 검토보기로 한다.(계속)
<그림 2> 진장성 동단의 위치에 대한 세 가지 견해 |
첫댓글 이런 글은 그만 퍼오는게...
진시황의 장성 끝이 어딘가를 알수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장성의 축조방향까지도 수년전에 이미 김자가 밝혔는데...
아직도 장성의 끝을 찾고 있다니...
김자님은 진장성의 동단을 어디로 보고 있는지, 그리고 김자님이 밝힌 글은 어떤 글을 말하는 것인가요?
김봉렬님은 제가 아주 흥미롭게 읽은 '고조선으로 가는 길'의 저자로 나름 독학으로 어렵게 공부하고 연구하시고, 강단사학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국내최대 역사카페인 '부흥'에서 식빠들과 외롭고 처절하게 싸우신분 입니다. 김봉렬님과 견해가 다르시더라도 비하하거나 조롱조로 말하지마시고.. 올린 글을 다 보시고~ 본인의 견해나 의견을 별도로 제시하시는게 어떠한지요~
@고려선비 고려선비님께서 제가 쓴 책을 보셨군요. 감사드립니다. 부흥 카페를 보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책의 문제점을 실감합니다. 학교에서 식민사학에 찌든 역사를 가르치니 일반인들은 그것이 옳은 줄 알지요. 하루속히 학생들이 식민사관을 극복한 역사책을 공부할 수 있도록 교육부나 유관기관에 지속적으로 요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제가 쓸데없는 글을 올렸군요.
본인의 글인줄 몰랐습니다.
송구합니다.
김봉렬님 감사합니다.
세심히 살펴보겠습니다.
심백강 박사님과 김선생님의 견해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요?
서정님 반갑습니다. 낙랑군 수성현과 만리장성의 동단을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 일대로 보는데 있어서는 저와 심백강 박사의 견해가 일치합니다. 심 박사님은 원래 낙랑군 수성현과 만리장성의 동단을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로 보고 있다가 최근에 견해를 수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장하는 내용들을 보면 하북성 보정시 낙랑군설과 하북성 진황도시 낙랑군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가령 저는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로 비정하고 있으나 심박사님은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로 비정하고 있지요.
@사람이 하늘이다 <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서진의 낙랑군은 6개현 3,700호의 소규모 군입니다. 그 낙랑군에 수성현과 조선현이 모두 들어 있는데, 수성현과 왕검성이 위치한 조선현이 천리나 떨어져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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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지리지>의 낙랑군은 공석구 주장과 같이 1 차 교치 기록이고 보정시를 수성현으로 보는 견해는 <수서/지리지> 상곡군 수성현에 근거하겠지만 그 기록은 북위 영주의 교치 기록일 뿐입니다. 따라서 보정이 진장성의 동단도 아니고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위치도 아닙니다.
낙랑군이 정확하게 언제 어디로 교치되었는지를 알지 못하면, 강단사학계의 식민사학 논리에 동조하는 꼴이됩니다.
현 강단사학계의 주장을 살펴보면 기원전 108년 한반도 평양 일대에 낙랑군 설치 - 서기 313년 낙랑군이 창려(조양일대)로 이치 - 서기 432년 조선현을 난하 하류 방면에 이치 - 서기 524년 경 북위가 창려(요령성 조양 일대)에 영주소속으로 낙랑군 복치 - 서기 537년 남영주(하북성 보정시 일대) 소속으로 낙랑군 이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일제 식민사학이나 중국 동북공정이 왜곡한 역사지리를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제 주장은 기원전 108년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 낙랑군 설치 - 서기 313년 낙랑군이 창려(북경 일대)로 이치 - 서기 432년 조선현이 하북성 보정시 방면으로 복치 - 서기 524년 북위가 창려(북경 일대)에 영주 소속으로 낙랑군 복치 - 서기 537년 남영주(하북성 보정시 일대) 소속으로 낙랑군 복치입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잘못 이해하고 있군요.
식민사관이 왜 나오죠?
전 108 년 설치된 낙랑군은 지금의 란하 동쪽인 건창 부근입니다.
낙양 동북쪽 5000 리 지점이지요.
고구려 동천왕이 관구검과의 2 차 전역에서 역전하여 낙랑군세를 크게 위축시켰고 이후 미천왕 시기에 완전히 쫓아냈는데 <진서/지리지> 낙랑군 수성현 주석에 `진축장성소기`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는 동천왕 이후에 낙랑군이 서쪽으로 지금의 란하를 건너서 교치된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위서> 평주의 북평군과 조선현 기록 때문에라도 <진서/지리지>의 낙랑군 조선.수성현 등이 교치된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북위의 평주는 한 시기의 요서군 남쪽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북위의 영주는 평주 북쪽이며 한 시기 요서군의 북쪽 지역인 유성현 일대입니다.
영주에 속한 낙랑.대방의 군.현은 요동 세력인 장통이 원래의 낙랑.대방군 지역을 일시 장악하던 중 미천왕의 공격에 대응하기 힘들어지자 역시 서쪽으로 지금의 란하를 건너 서진이 교치한 낙랑군 지역 북쪽인 요서군 교려 곧 창려현에 근거를 둔 모용선비에게 귀부하여 설치된 것이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진서/지리지>에는 기록할 수가 없었겠지요.
한편 이 영주가 내란을 겪으면서 남영주로 개칭되어 복치되고 이후 <수서/지리지>에 별 의미도 없는 교치 기록이 상곡군 수성현 주석이며 님이 말한 보정입니다.
보정은 낙양 몇 리?
@신석재 우선 사실관계부터 정확히 알고 계시는 것이 좋겠군요. 첫째 공석구 교수는 <진서/지리지>의 낙랑군 기록은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지 서기 313년 교치된 낙랑군이라고 주장한적 없습니다. 공석구 교수는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기록이 교치된 기록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래의 낙랑군 위치는 어디이며 서기 313년 이치된 창려의 위치는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여러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하여 판단할 문제이지 단순이 <후한서/군국지>의 기록만으로 낙랑군이 낙양의 동북쪽 5000리이다는 기록만 맹신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그러면 <후한서/군국지>에서 상곡군이 낙양 동북쪽 3,200리이고, 창려의 위치인 요동속국의 위치는 3260리입니다. 상곡군의 위치는 현 북경 서북쪽 회래 일대인데 거기서 동쪽으로 60여리인 창려의 위치가 어디라고 보시나요. 그릭고 <후한서/군국지>에 어양군과 우북평은 낙양 동북쪽 2000리인데 이곳은 어디로 보시나요.
@사람이 하늘이다 김선생님이 정리하신 강단과 님의 견해를 보면,
견해의 차이는 낙랑군 최초설치 지점(평양/보정시)과 창려의 위치(조양/북경일대)와 432년 조선현의 위치이군요.
그리고 537년 남영주에 있게 된 낙랑군은 강단이나 김선생님도 하북성보정시로 견해가 같구요. 제가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요?
@영희 예 그렇습니다. 제 견해는 낙랑군이 하북성 보정시에서 북경 일대로 이치와 복치를 반복하는데 비하여, 강단사학계의 통설에서는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서 요령성 조양으로 그리고 하북성 진황도시로 또 최종적으로 하북성 보정시로 수 천리를 이동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 한사군 교치론을 가지고 식민사학이 마치 대단한 것을 찾은양,
낙랑군재평양설을 고집하던데, 저렇게 요약이 되는 모양이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자세한 내용이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낙랑군 교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나불대기는.
강단 식민사관자 공석구가 교치라 답변한 것은 정확한 것이다.
문제는 공석구가 상상하는 것처럼 반도 평양에서 교치된 것이 아니라 원래의 낙랑군 위치인 중국 요녕성 건창 부근에서 서쪽으로 불과 300 여리 옮긴 것 곧 지금의 란하를 건넌 것 뿐이라는 것이다.
이덕일이 제대로 공부했더라면 공석구에게 반론할 좋은 기회였는데 그걸 놓친 것이다.
이해되는가?
신석재 선생님,그러면 위 님 주장내용을 본글로 올려 주시면 어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