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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 이 시집
오독誤讀, 그 빛과 그림자
이동재(시인·소설가)
―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 김양숙, 『고래, 겹의 사생활』 (시와산문사, 2023)
― 곽효환,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 (문학과지성사, 2023)
― 권현형, 『아마도 빛은 위로』 (여우난골, 2023)
― 강연호, 『하염없이 하염없는』 (시인의일요일시집, 2023)
1
『해방 전후사의 인식』(한길사,1979)이라는 책이 있었다. ‘해전사’로 약칭되던 이 책은 한때 대학생들의 필독서였고, 대학가 금서목록에 수시로 오르내리던 책이었다.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광주가 현실 정치권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된 충격적인 사회적 사건이었다면, 해전사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 지적 사건이었다.
해전사는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부터 제1공화국 시기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되짚어 보고 있는 책이었다.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만을 언급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대학생들이 충격을 받았던 것은 어쩌면 그러한 기본적인 사실조차 대학까지 오는 동안 알지 못했다는 그 사실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국정교과서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은폐되고 왜곡된 현실과 근대사에 대한 분노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반독재투쟁 시기에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현실과 역사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느낄 때쯤 무슨 빚 청구서처럼 민주화운동에 대한 유·무언의 요구가 날라왔다. 그때쯤 손에 들려 있는 것이 김지하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이기도 했다. 해마다 대학가의 봄은 그런 식으로 오곤 했다. 옛날얘기다.
그런데 출간된 지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해전사가 여전히 문제가 있는 것은 건국절이나 이승만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논쟁이 여전히 현실 정치판과 사회를 휘젓고 있고, 뉴라이트와 일베 정치가 판을 치며, 선거 때마다 대한민국 국민을 맹목적으로 좌우로 나누어 싸우게 만들고 있는 지금의 사회적 현실 때문이다. 전 국민의 대졸화가 코앞이라고 10년, 20년 전부터 농담으로 말해왔지만, 대학 진학률이 세계 최고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면 뭐 하나? 여전히 국민 대부분의 역사적 지식은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수준이고, 철학은 국민윤리 교과서 수준이며, 국어나 문학은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그치는 것 같은데 말이다. 서울대를 나오고, 하버드를 나오면 뭐 하나? 차라리 이 모든 것이 내 오독이었으면 좋겠다.
해방정국에 관한 글을 쓰느라 한동안 해방 전후의 역사적 사실과 그 시기 작가들의 행적이나 작품에 관한 글들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았다. 최근에 나온 연구자료들도 훑어봤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당시 조선의 작가들 대부분이 일제 말기의 광기에 휩쓸려 들어가 말도 안 되는 글을 쓰고, 연설을 했다. 심지어 김동인은 일본 천황이 항복 방송을 하기 두 시간 전에 총독부 경무총감을 제 발로 찾아가서 친일을 위한 새로운 문인단체 설립을 건의하고 있었다. 나는 이 장면을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모욕적인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다.
오랫동안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는 말을 그럴듯한 말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말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말이었다. 이 말은 해방 직전까지 해방이 되리란 걸 아무도 몰랐으니,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은 자들의 논리를 대변하는 말에 불과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기에도 벅차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신경을 쓸 수 없었을 일반인들에겐 그 말이 맞는 말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한 나라를 대표하는 지식인이거나 리더라면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아무리 언론이나 정보를 통제하고 있었더라도 한 치 앞의 역사나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하는 자라면 리더의 자격도 없고 제대로 된 지식인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오독은 불가피하다. 일제 말기의 그 오판과 오독을 만회하기 위해 해방 후 많은 작가가 노력했지만, 역사는 다시 그들의 오독만을 확인시켜 줬을 뿐이었다. 남이든 북이든 어느 쪽을 선택했든 그것이 최선은 아니었다는 뼈아픈 인식을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시기를 살았던 시인과 작가들의 행적을 들여다보며 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적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
김양숙의 시집을 읽다가 문득 모든 시가, 시에 대한 모든 해석과 비평이 오독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퇴근길
버스에서 내려
골목길로 접어들어 얼마나 걸었을까
같이가 처녀
같이가 처녀
굵직한 사내의 음성이 발자국을 잡아 당겼다
등뼈를 뻣뻣이 세우고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다시 부르는 소리
같이가 처녀
같이가 처녀
길바닥에 발자국을 꾹꾹 눌러 찍으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며 걷는데
다시 애절하게 부르는 소리
같이가 처녀 같이가 처녀
마지못해 돌아본다는 느낌으로 돌아서 사내의 목소리를 찾는다
들어올 때까지 보이지 않던
골목 어귀에 세워진 생선 트럭
순간 사내의 목소리에서 오래된 비린내가 혹 풍겼다
화끈 거리는 얼굴을 숙이고 돌아서는데
다시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행간은 지워지고 음절로 끊겨 뚜렷하게 들리는 단어
― 김양숙, 「불온한 오독誤讀」 전문
위의 시를 읽기 전까지 김양숙의 시집 『고래, 겹의 사생활』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잘 읽히지 않았다. 어려운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복잡한 수사나 비유 때문인 것 같지도 않았다. 정신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심정적 이유 탓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여 원인을 찾아볼 필요성이 생겼다. 사고의 패턴이나 표현이 나와는 달라서일 거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리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다르다는 것, 낯설다는 것은 일단 긍정적인 신호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뭔가 자꾸 걸렸다.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고 중간중간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문장의 호흡이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장이 쓸데없이 길어지고 수사가 불필요하게 덧칠되다 보면 그런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시적인 통찰이 불필요한 서술로 진부해질 수도 있다. 사족이다. 잡목이나 잡풀이 우거진 숲을 보고 있는 듯한 답답함처럼, 덜어내고 싶은 말들이, 시를 읽는 속도를 더욱 더디게 하는 부분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 듯했다.
시인의 간결한 시에서 오히려 시인의 시적 가능성을 보게 된다면 나만의 착각일까? 장편 서사시도 있고, 이야기시란 것도 있지만 시인은 기본적으로 서사적인 욕망과 싸워야 한다. 불필요한 서술이나 수사가 시의 흐름을 막고 진부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도 잘 안 되는 일이고, 이 또한 나의 오독이다. (이런 식의 말을 할 지면은 아닌데 학생들 가르치던 버릇이 남아서 주제넘게 괜한 짓을 자꾸 하고 있다. 회장님 죄송.)
곽효환의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은 시베리아, 연해주, 중국과 동남아 및 국내 여러 곳을 여행하고 쓴 기행 시집이랄 수 있다. 시인이라면 여행 시 몇 편씩 없는 시인이 없고, 글을 쓰기 위해선 여행을 많이 해야 한다는 식의 문장론 책이 여전한 것을 보면 딱히 그 말이 틀린 말도 아닌 듯하다. 인생 자체를 여행에 비유하기도 하니, 굳이 따로 여행 시라고 할 것도 없을지 모른다. 모든 시가 여행 시일 테니까.
백석이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 통영을 방문한 이후, 몇 차례의 남행 경험이 녹아있는 그의 ‘남행시초’ 편의 시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잘 쓰인 여행 시가 얼마나 매력적일 수 있는지 잘 알 만도 하다.
곽효환이 이 시집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는 연해주와 만주 일대의 기차 여행 경험이 녹아있는 1부인 듯하다.
검푸르고 시린 어둠을 헤치고 하얼빈 가는 길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밤 열차는
서쪽으로 혹은 서서북쪽으로 북만을 가로지른다
10월인데 어느새 서리가 몇 번 내리고
하얀 눈 소복이 쌓인 우스리스크를 지나
수척해진 수이펀강을 건널 무렵
예 어디 있었을 육성촌을 어림하며
이 강을 건너오고 건너간
어질지만 시름 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더듬는다
― 곽효환, 「시베리아 횡단열차 4」 부분
동방을 정복한다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는 그 이름부터 제국주의의 영토 확장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공간지명이며,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으로서 우리 조상들의 고토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조선 말기부터 식민지 시기까지 수많은 조선인이 건너가 삶의 터전을 일궜던 지역이자 스탈린 시대 강제 이주를 당해야만 했던 통한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지나가는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 대한 감정이 없을 수 없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도 있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다. 여행자의 눈에도 아는 만큼 보이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이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여행에 나선 작가나 시인이 앞선 작가나 시인의 흔적이나 행적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46년 8월부터 10월까지 소련 기행에 나섰던 상허 이태준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카자흐스탄 등 가는 곳마다 1928년에 연해주로 망명했던 포석 조명희의 행방을 수소문한 적이 있다. 조명희는 1938년에 이미 하바롭스크에서 ‘인민의 적’이란 죄명으로 총살당한 후였지만, 해방 후까지 국내에선 그의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곽효환 시인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 만주 일대를 횡단하며 조명희, 윤동주, 박팔양, 백석, 안수길, 염상섭, 박영준, 최남선, 그리고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당원으로서 러시아혁명 당시 백군파에게 잡혀 처형당한 김 알렉산드라(1885-1918) 등 선배 작가들과 혁명가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의 행적을 더듬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시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할 얘기는 많으나 미처 시적으로 승화되지 못하거나 시라는 장르로는 감당하기 벅찬 내용이 뒤섞여 들어가다 보니 시가 길어진다. 아는 것과 본 것을 다 시로 쓸 수는 없는 일이다. 쓸 만한 시를 얻기 위해선 시인의 제목처럼 ‘소리 없이’ 오래 울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가운데에는 쓴 것을 잘라내야 하는 아픔도 포함되어 있다.
1990년대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진 이후 시인이나 작가들도 이래저래 해외 출입이 잦아지면서 해외 기행 시들이 범람하기도 했으나 눈에 띄는 작품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시인이나 작가들이 좀 더 현지에 녹아들어 울어야 하는 이유다. 그래도 이 시집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탈 기회가 있으면 한 번쯤 가지고 갈 만한 시집이다.
앞서 김양숙의 시집이나 곽효환의 시집에 국내외 기행 시라 할 만한 작품이 많았다면, 권현형의 『아마도 빛은 위로』나 강연호의 『하염없이 하염없는』는 주로 집이나 동네 골목을 서성이는 화자의 모습을 자꾸 목격하게 되는 시집이다.
빛을 파묻은 시간에서 마른 장미 냄새가 나다니
저녁과 저녁 사이
성북구의 종소리를 들었다
요사이 쌓인 죄가 녹아 없어지는 순간
종소리는 잘 빠져들게 되는 음악
흰 눈가루를 타고 어깨에 내려앉는 종소리와 함께
가까이 있는 심장과 함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나의 죄를 내가 용서해도 된다면
지금 생각나는 사람을 맘껏 생각할 것이다
― 권현형, 「저녁이 와서 당신을 이해한다」 부분
권현형의 이 시집은 오랜만에 곳곳에 밑줄을 그으며, 시인이 지나다니는 골목과 창문과 화분을 상상하며, 잘 구운 빵조각을 뜯어먹듯 읽게 되는 시집이다. 결국, 마지막으로 밀려오는 것이 펄럭거리는 인도코끼리의 귀 같은 허무라 할지라도 읽고 있으면 잠시 따듯하니 충만하다.
오랜만에 출간한 강연호의 『하염없이 하염없는』에는 늦둥이도 생기고 삶의 이력이 좀 더 늘어났겠으나, 외롭고 쓸쓸함을 자극하는 정서와 적당히 시니크한 처세와 권태가 여전하다. ‘우유부단’이 우유를 끊지 못한다는 소리라는 식의 시인의 아재 유머도 여전하다. 별 탈 없이 살고 있다는 증거이겠고,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고 살고 있다는 반증이겠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시가 벽화라고 강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럴 때 그는 여전히 시인이다.
상처 입은 짐승은
동굴 깊이 숨는다
일 년이 간다
십 년이 간다
상처는 깊었지만
깊은 만큼 깊이 숨어
겨우 아문다
그런데 나가는 길을 잃는다
나갈 수가 없다
길을 잃은 상처는
다시 도진다
깊이 숨은 만큼 깊게 도진
상처가
벽을 긁는다
― 강연호, 「벽화」 전문
서정시에 표준이란 것이 있다면 내겐 강연호의 시가 그렇다. 시 읽기나 쓰기를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시인의 시집이다.
3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보기가 겁난다. 명실이 상부 하지 않는 말과 일국의 대통령, 장관이나 국회의원씩이나 되는 공직자들의 사욕에 눈먼 그 무지가 참고 듣기에 심히 괴롭다. 언론과 방송의 언어 자체가 거짓이고 조작이다 보니 차라리 오독이 정독이 되곤 한다. 잠시 밥을 먹다가 눈을 돌리니 오늘은 대통령께서 또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다.
‘내가 외국 정상을 만나고 다니다 보면 너도나도 반도체 공장을 자기 나라에 세워 달라고 야단입니다. 그러면 내가 물어요. 반도체 라인을 하나 까는데 원전 1기가 필요한데 그런 원전이 있습니까? 그러면 아무 말도 못 해요.’
상대 외국 정상이 입을 다문 것이 원전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원전에서 생산한 전력으로 만든 반도체는 앞으로 팔아먹을 수 없을 텐데 RE100이 뭔지도 모르고 원전 타령이나 하는 바보 같은 소리에 어이가 없어서일까? 그 직전엔 벤틀리를 타는 것이 일자리 창출이고, 다주택자 세금을 감면해 주는 것이 서민을 위한 정책이라고 했다. 여전히 누군가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거나 알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하다. 학습 능력이 정체된 지도자는 자신은 물론 공동체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다. 문학작품의 오독은 또 다른 창조이지만, 정치권력자나 리더의 오독과 오판은 그냥 망조일 뿐이다. 윤석열을 뽑거나 뽑지 않은 사람도, 그를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거나 누군가는 분명 윤석열이라는 텍스트를 오독했거나 여전히 오독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나라 곳간은 자꾸 비어가고 여기저기 누수도 늘어난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오독이고 꿈이었으면 좋겠다. 봄이 와도 봄이 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