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동문
“33세 동장, 믿고 맡겨준 고향 주민께 보답해야죠”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27호(2022.02.15)
정경식(심리09-19) 세종시 소담동장
행시 출신, 주민추천제로 선출
‘특색 없던 마을’ 문화사업 활기
“너무 젊으시다. 시험 보신 거예요?”
올해 33세 정경식 세종시 소담동 동장이 주민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그는 올해 1월 소담동장에 부임했다. 5급 공무원인 동장은 보통 비고시 출신 고참 공무원이 맡는다. 세종시는 시민추천제로 읍면동장을 뽑고 있다. 그래도 대부분 50대 중후반인데 소담동 주민들은 30대 청년에게 마을을 맡겼다.
세종시 연서면 출신으로 조치원고(현 세종고)를 졸업한 정 동문은 5급 공채 일반행정 세종 지역직에 합격해 고향에 돌아왔다. 2월 7일 세종 소담동 행정복지센터에서 정 동문을 만났다.
정 동문은 사실 ‘재수’ 끝에 동장이 됐다. 세종시청에서 도시재생과를 거쳐 문화예술과에 근무하던 중 국장 선배의 권유를 받고 보람동 동장 선발에 지원했다. 학생 대표를 포함한 주민들 앞에서 직접 공약을 발표하고 면접도 봤다.
“그땐 주민들이 원하는 바를 잘 모르고 제 얘기만 열심히 했어요. ‘지역에서 초, 중, 고를 나왔고, 서울대 졸업 후 고시 붙어서 여기 왔다’. 결국 주민들의 부름을 받지 못했죠. 발표를 보신 공무원 분들은 다 제가 될 줄 알았대요. 발표대회면 1등이었다고요. 주민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피드백을 주셨죠.”
실패를 복기하고 이듬해 소담동장에 도전했다. ‘주민들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뭘까’ 고민 끝에 “문화로 부흥하는 소담동을 만들겠다” 공약했다. 압도적인 표차로 4 대 1 경쟁률을 뚫었다.
“소담동이 살기 좋은 동네로는 통했지만, ‘어떤 동네냐’고 물으면 아무도 대답을 못 했어요. 문화로 특색을 입혀 디자인 문화마을을 만들겠다고 말씀 드렸죠. 도전을 겁내지 않는 성격인데 투표결과를 기다리면서 갑자기 떨리더라고요. 내가 무슨 일을 한 거지 싶고. 선택됐다는 말을 듣고서야 안도했어요.”
시청에서 조치원 폐정수장에 문화정원 조성을 주도했던 그는 동네에 지역예술인, 상인, 주민이 함께하는 상생형 문화거리를 만들려고 한다. 세종시 골칫거리인 상가 공실에 미술관을 조성하면 아파트 코앞에서 예술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관내에 학교만 다섯 곳인 만큼 아이들 안전은 언제나 현안. ‘안심 발자국’ 등 횡단보도 디자인부터 뚜렷하게 바꿀 참이다. “시민들의 제안은 대부분 실생활에서 겪는 문제들인데 규정이 한 발 느린 부분이 있죠. 예전엔 ‘규정상 안 될 것 같다’고 했을 것 같은 부분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으니, 함께 해결해 가자’는 말을 더 자주 하려고 해요.” 주민들이 서로 경험을 공유하는 ‘소담을 바꾸는 시간 15분’까지 도입하면 잔잔하던 동네가 좀더 시끌벅적해질 것 같다.
시 사업 유치하랴, 다양한 주민 단체 만나랴, 동네 돌아보랴 동장의 하루는 짧다. 그래서 관록과 인맥 없이 어려운 자리라고들 한다. 더러 그를 알아보는 동민들이 있다. 내내 우등생이었던 데다 고교 3학년때 TV 퀴즈 프로그램에 나가 골든벨을 울렸다. 그는 “우려도 하셨지만 직접 선택한 동장이라 기대가 크신 것 같다”며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온 점도 좋게 봐주시고, 많이 도와주셔서 지금까진 수월하게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동 살림을 짊어진 어깨가 무겁지만 마을이라는 단위에 집중해 오롯이 자신의 구상을 펼칠 수 있어 즐겁다. 부임 첫 달부터 주민에게 감동한 일도 생겼다. 구순의 할머니가 자녀가 준 용돈을 모아 어려운 이웃에게 써달라며 기부했고, 아이들이 저금통을 꽉 채워 찾아오기도 했다. “소담동은 약 2만명이 거주하는 작고 아담한 동네지만, 기부와 나눔의 문화가 있다”는 정 동문. 세종시 핵심 사업이 주민자치인 만큼 ‘공동선이 발현되는 마을’을 만들겠다는 꿈도 꾼다.
‘워라밸’ 중시하는 젊은 인재들이 소명의식만으로 공직에서 버티기 힘들다는 말이 나온다. 지금이 자못 만족스러워 보이는 그도 “야근 싫어하고, 주어진 시간에 일을 끝내려 애쓰긴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하지만 마을의 관리자가 되고 나니 더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문서도 더 꼼꼼히 보고, 한 시간 더 일찍 나오게 되고요. 그래서 전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을 젊은 사무관들의 편이 돼주고 싶어요. 젊은 세대 공무원의 변화에 이런저런 말이 나오지만, 그들의 책임감이 없었다면 정부 조직이 지금처럼 원활하게 유지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한때는 넓은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어 외교관을 꿈꿨다. 골든벨 상금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했고, 과외와 수영장 라커룸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몇 달씩 타국에서 살았다. 두바이에서 인턴 생활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밥이 그리워 한국을 떠나 살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고, 행정고시로 방향을 전환했다. 열심이던 축구 동아리 활동도 접고, 다 붙은 교환학생까지 포기하고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20대에 여러 가지를 보고 들은 경험이 절 유연하게 만들어줬죠. 제가 본 해외 도시들은 저마다 광장문화, 공원 문화 같은 콘텐츠가 있었는데 제가 가게 될 지역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고민도 해보고요. 이 작은 마을을 맡겨 주셨으니 여기서부터 시작해보려 합니다.”
“소담동을 1등 마을로 만들겠다. 문화에서도, 생활에서도.” 임기 2년 내 그의 목표다. “‘결국 보물은 고향에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말이에요. 상전벽해가 된 고향을 지켜봤고, 고향을 더욱 발전시키는 게 제 사명입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협력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저 역시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아 자라났다고 생각해요. 마을에서 키워낸 아이가 이제 고향을 위해 일해줄 거란 기대감이 저를 움직이게 합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