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성경은 믿으면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설명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믿음과 믿지 않음은 본질로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만 형식으로는 그렇지 않으며 알수 없습니다.
이런 알수 없는 부분에 사람의 기대와 소망이라는 생각이 들어가 말씀의 뜻이 사람의 교리로 변질되어진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도 믿으면 구원을 받는가? 살아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이 있는데 죽은 믿음도 구원을 받는가?
죽은 믿음도 구원을 받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십시다.
네가 한 분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니 잘하는 것이라.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
오 허황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인 줄 네가 알고자 하느냐?
야고보서 2장 19절 20절
O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광대하여 그 길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으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협소하여 그 길을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장 13절 14절
위 말씀에 죽은 믿음은 좁고 협소한 문으로 가는 것을 행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믿음이란 형식이 아니라 순종이라는 본질이 갖추어질때 믿음의 본질도 갖추어지는 것이며, 본질의 믿음은 반드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잘 믿는 것과 다르며, 믿음이란 의심하지 않고 순종하는 본질을 가졌을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며, 이는 약속된 구원으로 확정된 것입니다.
이러한 글을 쓰는 이유는 믿음의 형식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어버리려는 사람의 의지가 자신과 이웃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기 편한 것만 믿으려는 것은 좁고 협소한 진리의 길이 아닙니다. 진리가 때로 불편하고 외로워도 그것이 진리로 보이면 그대로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절충하려고 하다가 점점 더 크고 넓은 문으로 나아가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앙의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만이 기쁜 것이 아니라 자기 편한대로 믿던 사람이 진리를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믿음으로 나아올때도 함께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형식의 교회당도 전도 대상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은 우리 자신에게나 이웃에게나 치명적인 것이며, 불신앙으로 지옥에 가는 것이나 형식의 믿음으로 지옥에 가는 것이나 똑같이 비참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당에 가보면 초신자에게 매우 친절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친절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의 생각에 초신자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는 사람들로 여기지만 형식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래도 천국으로 정해진 사람들로 생각하는 오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에게도 적용해보면 형식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불편하지만 진리로 받아들이고, 좁고 협소한 길로 들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편하고 힘든길이라고 해서 모두 진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은 불편한 진리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들아, 만일 누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의 양식조차 없는데
너희 중에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라.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하면서 그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그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만으로는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장 14절 ~ 17절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본다면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서 백신을 분별하지 못함은 형제나 자매를 돕기 이전에 자기 자신의 육신을 보호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믿음의 유익은 형제 자매보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서 백신을 분별하지 못함은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자기 자신부터 돌보지 못하는 믿음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백신으로부터 형제 자매를 보호함은 자기 자신을 보호함이 외부로 표현되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 내면에서 드러나지 않게 먼저 자기 자신을 보호함은 먼저 실행함이 된 것입니다.
그 여인이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 떨며, 와서 주 앞에 엎드리며 모든 사실을 말씀드리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도다. 평안히 가라. 그리고 네 병고로부터 온전해지라."고 하시더라.
마가복음 5장 33절 34절
믿음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의 열매부터 스스로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행한 일에 대한 보응을 받는 것이 참으로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 잘못을 행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고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하시니라.
누가복음 23절 41절 42절 43절
주와 함께 십자가형을 받던 강도가 낙원에 가는 모습입니다. 그는 말을 하기 이전에 이미 그의 마음에 자신을 구원할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도울 기회는 없었지만 자기 자신을 구원할 기회는 잡은 것입니다. 그리고 낙원은 천국이 아닙니다. 지금 천국과 지옥은 비어있고, 마지막 심판을 많은 사람들이 낙원 혹은 음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도는 낙원에서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그의 심판은 천국으로 내려진 것이 아닙니다.
낙원에 간 이 강도와 우리 모두의 마지막 심판은 마치 축구경기에서 심판이 VCR을 돌려보듯이 많은 책들로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상급의 문제이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지옥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믿음은 당신을 구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은 믿음이 백신으로부터 육신을 구원하지 못했다면 죽은 믿음은 짐승의 표로부터 혼과 영을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고통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리라.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으며 여기에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하더라.
요한계시록 14장 11절 12절
왜 혼과 영인 것인지는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조건이 백신을 맞는 것처럼 육적인 것이 아닌 짐승의 형상에 경배하고 이름의 표를 받는 말씀을 대적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인내가 필요없는 관념의 믿음은 편리하기는 하지만 형제 자매에게 도움을 줄 수 없을 뿐만아니라 그 자신에게 먼저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믿음은 순종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빈 상자일뿐이며, 능력이 없는 믿음은 형제 자매를 돕는 행함이전에 그 자신부터 구원해 줄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