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독(危篤) 제1호
이승훈
램프가 꺼진다. 소멸의 그 깊은 난간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장송(葬送)의 바다에는 흔들리는 달빛, 흔들리는 달빛의 망토가 펄럭이고, 나의 얼굴은 무수한 어둠의 칼에 찔리우며 사라지는 불빛 따라 달린다. 오 집념의 머리칼을 뜯고 보라. 저 침착했던 의의(意義)가 가늘게 전율하면서 신뢰(信賴)의 차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시방 당신이 펴는 식탁(食卓) 위의 흰 보자기엔 아마 파헤쳐진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쓰러질 것이다.
(『현대시』 13집, 1967)
[작품해설]
김춘수의 시를 흔히 ‘무의미의 시’라 하는 데 비해,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이승훈의 시를 ‘비대상(非對象)의 시’라 부른다. 이것은 김춘수가 심상만을 제시하는 서술적 이미지에 초점을 두는 데 반해, 이승훈은 무의식적 세계의 환상을 순간순간 떠오르는 언어로써 이미지의 고리를 만들어 향상화하는 데서 이르는 말이다.
이 시는 제1호에서 제9호까지 연작시 형태로 이루어진 것 중 제1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들 각 편이 의미의 맥락을 갖는 것이 아니고, 다만 ‘위독’이라는 말의 심상을 공통적으로 모디프로 삼고 있을 뿐이다. 이 시는 내면세계의 처절하고 참담한 감정적 분위기를 순간마다 떠오르는 언어들의 상호 충동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 시에는 몇 개의 시적 소재가 등장하고 있지만, 그 외부의 사물을 노래하고 있다기보다는 시인 자신의 직관 그 자체를 시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적 소재들이 어떤 인과적 의미망이나 사실적 풍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유 연산에 따른 초현실주의적 수법에 의해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가 ‘장송의 바다’라는 시구나 ‘위독’이라는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죽음에 직면한 어떤 상황을 암시라는 인상만을 전해 줄 뿐, 분명한 내용 전개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 난해시로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 보이는 여러 시어들, 즉 ‘램프’ ⸱ ‘난간’ ⸱ ‘장송의 바다’ ⸱ ‘달빛’ ⸱ ‘어둠의 칼’ ⸱ ‘불빛’ ⸱ ‘집념의 머리칼’ ⸱ ‘차건 손’ ⸱ ‘식탁’ ⸱ ‘흰 보자기’ 등은 어떤 의미 질서의 맥락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내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지의식의 어두움, 또는 깊숙이 배어 있는 절망이나 고독의 감정을 제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단편적 사물들이다. 이러한 시어들은 시인의 개인적 내면인 어두움, 고독, 절망 등에 의해 발생된 것들로 무의식적 내면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램프가 꺼진다’는 첫 구절은 밝음에서 어두움으로의 변화, 즉 내면세계의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그 어두움의 깊이는 ‘소멸의 깊은 난간’이라는 구절로 제시되어 있다. 바로 그 같은 내면세계에서 도달하게 된 ‘장송의 바다’는 끝없는 절망을 표상하며, ‘파헤쳐진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쓰러질 것이다’는 마지막 구절은 ‘장송의 바다’의 끝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따.
따라서 이 시를 통해 우리가 체험해야 하는 것은 이들 언어들이 상호 충돌을 통해 이룩해 내는 내면적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 그 상황 속에서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시는 현실의 실제적 상황에 부딪쳐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한 실존의 내면의 무의식적 환상을 심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시의 그 처절하고 참담한 정서적 상황은 곧 현실의 참담한 상황의 무의식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작가소개]
이승훈(李昇薰)
1942년 강원도 춘천 출생
한양대학교 국문과 및 연세대 대학원 졸업
1962년 『현대문학』에 시 「바다」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4년 『현대시』 동인
1983년 제29회 현대문학상 수상
1987년 제19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현재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시집 : 『사물 A』(1969), 『환상의 다리』(1976), 『당신들의 초상(肖像)』(1981),
『사물들』(1983), 『상처』(1984), 『당신의 방』(1986), 『아름다운 사람 그리운 시간』(1987), 『너를 본 순간』(1987), 『안간들 사이에서』(1987), 『87년의 편지』(1987), 『시집 샤갈』(1987), 『나라는 환상』(1989 『환상의 다리』(1976),), 『길은 없어도 행복하다』(1991), 『밤이면 삐노가 그립다』(1993), 『밝은 방』(1995), 『나는 사랑한다』(1997), 『첫사랑』(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