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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6 묵상글 ( 부활 제2주간 목요일. - 땅에서 하늘을 사는 부활의 사람은.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강론글 : 아직 / 05:17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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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6. 부활 제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16 05:11
- 땅에서 하늘을 사는 부활의 사람은
공관 복음에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위의 세 말씀을 엮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되겠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 있는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기는 하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대한 순종으로 무얼 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랫사람이 순종으로 뭘 하라 해도 윗사람은 순종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극진히 돌보는 것은 사랑 때문이지 종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엄마가 아기의 모든 요구와 필요를 들어주고 채워주는 것은 사랑 까닭이지
종이기 때문이 아니고 다른 이유 때문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숭고한 순종이라고 하는 것도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렇기에 또한 사랑이 아닌 것에는 아무리 순종하라고 해도 순종하지 않고,
특히 하느님 사랑에 어긋나는 것은 순종하지 않겠다고 오늘 사도들은 선언합니다.
이 세상에서 죽고 하늘에서 부활한 사도들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을 살고 천국에서 살아야 할 사람이 왜 세상 지도자들에게 순종합니까?
지금 트럼프라는 막되먹은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입각하여
교황님이 반대 입장을 취하시자 감히 이를 굴복시키려고 들지만
교황님은 그의 폭언과 협박에도 꿋꿋하게 주님의 길을 가셔야겠지요.
전혀 구애받지 않고 주님의 길을 가야 합니다.
높이 나는 새는 강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고
제가 자주 말하는 바대로 전혀 구애받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어야 하고 선언해야 합니다.
트럼프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아무리 막돼먹은 짓을 할지라도
오래 가지 않을 것이며 하느님의 진노를 얻게 될 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진정 부활을 사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땅에서 하늘을 살 뿐이지 세속의 어떤 것에도 휘말리지도
굴복하지도 않음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이 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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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6. 부활 제2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머무르고, 배우고, 사랑하십시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세상이 도덕적 중심을 잃어가는 때에,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충실히 머물 수 있을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관상과 해방, 그리고 활동
머무르고, 배우고, 사랑하십시오
2026년 4월 15일 수요일
카메론 트림블 목사(Rev. Cameron Trimble)는 성 베네딕도의 수도적 지혜를, 그의 영적 조상인 사막의 교모들과 교부들의 전통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성 베네딕도는 공동체에 머물러 있으라 가르쳤습니다. 삶의 자리와 관계, 나눔의 생활 안에 뿌리내리라는 것이지요. 그는 "안정(Stabilitas)"이야말로 사랑이 무너짐 속에서도 살아남는 길이라 일깨워 주었습니다. 세상이 흔들릴 때마다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헌신하고, 돌보며, 끝까지 머무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네딕도가 공동체를 조직하여 머물도록 가르치시기 훨씬 전부터, 또 다른 영적 원로들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막의 교부와 교모들이었지요. 그들은 잠시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세상의 왜곡에 물들지 않고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배우고자 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서로 반대되는 가르침처럼 보입니다: '떠나라' 대 '머물러라'. '세상을 등지라' 대 '뿌리내리라'. '사막' 대 '수도원'.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같은 영적 물음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주변 문화가 도덕적 중심을 잃어갈 때,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충실히 머물 수 있는가?"
사막의 원로들은 소음을 떠나 맑음을 회복하려 했습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구조를 세워 그 맑음을 지키려 했습니다. 두 전통 모두 깨달았습니다. 의도적인 영적 훈련과 성숙 없이는, 권력과 두려움, 그리고 세상의 허영이 진리보다 더 빠르게 영혼을 길러버린다는 것을.
사막은 결코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 통찰력을 훈련하고 기르는 장이었습니다.
한 원로는 영적 삶의 첫 과제가 자신의 반응을 분명히 보는 것이라 가르쳤습니다. 분노가 얼마나 빨리 스스로를 정당화하는지, 두려움이 얼마나 쉽게 지혜인 척하는지, 에고가 얼마나 자주 용기인 듯 가장하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침묵은 이러한 모든 것을 드러내지만, 사람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베네딕도는 그 다음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명확히 보는 법을 배운 뒤, 어떻게 공동체 안에서 오래도록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의 답은 강렬함이 아니라 "리듬"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기도와 노동, 함께하는 식사, 상호 돌봄, 책임, 겸손, 그리고 회복의 리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물음은 단순히 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지리적 철수를 부르심 받은 것이 아니라, 부패에 내적으로 협력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 깊이 헌신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영혼을 내어주지 않고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지키는 경계가 필요합니다. 분노를 끊어내는 리듬이 필요합니다. 서로에게 진실을 부드럽고 직접적으로 나누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기도와 침묵, 그리고 정직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감정의 왜곡이 정체성으로 굳어지기 전에 맑게 씻어내는 길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가 영적으로 범람된 듯 느낍니다. 경보와 분석, 반응과 두려움에 가득 차 있습니다. 신경은 결코 쉬지 못하고, 도덕적 상상력은 충동이 아니라 지혜의 목소리를 들을 만큼 고요해지지 못합니다.
사막의 원로들은 이 상황을 곧바로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사라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적 토대를 세우라고 권면하곤 했습니다. 일상의 한가운데 작은 "사막"을 마련하여, 진리가 다른 목소리와 경쟁하지 않고 들려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행동은 충동이 아니라 깊이에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베네딕도도 이에 동의했을 것입니다. 머무르십시오. 그러나 깨어 머무르십시오. 뿌리내려 머무르십시오. 겸손과 용기의 훈련 속에 머무르십시오. 두려움보다 사랑에 의해 빚어진 삶으로 머무르십시오.
목표는 결코 도피가 아닙니다. 목표는 자유입니다. 그것은 곧, 체제(systems)가 인간다움이 무언지를 잊을 때에도 온전히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삼십 년간의 혼인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후, 저는 방향을 잃고 절망 속에서 뉴멕시코의 사막에 도착했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유배”시키셔서 새로운 실재를 발견하게 하신 듯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심각한 건강의 도전도 함께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막의 광활함과 끊임없이 비추는 태양빛은 제 영혼을 전에 알지 못했던 성령의 기쁨과 부활의 희망으로 열어 주었습니다. 제 삶에 있어 크나큰 변화의 시기를 지나며, 저는 은총의 치유를 체험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Dave A.
References
Cameron Trimble, “Staying Without Surrendering Your Soul,” Piloting Faith, Substack, Jan 30, 2026. Used with Permission.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nnie Quick, untitled (detail), 2025, photo, Albuquerque.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맨발로 땅에 닿아 서 있는 것은 고요한 수도자의 몸짓을 의미합니다. 즉각적인 반응은 그 힘을 잃고, 대신 관상적 응답이 솟아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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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에게는 '사랑할 본질적 존재의 힘'이 주어져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요한복음에는 이와 유사한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 보여 주신다."(5,20).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어 셨음을 아셨다."(13,3).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 것이다."(16,15).
"이제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온 것임을 알았다."(17,7).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다."(17,10).
이렇게 아버지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다."(15,15).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17,22).
"모든 것"과 "온전히"라는 말은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이 하느님의 언어는 유다인들이 하루에 두 번 암송하는 신앙의 근본 선언인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에도 반복되어 나옵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하느님께서는 양이 얼마나 되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전부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의 "가난한 과부의 헌금"도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그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다."(마르 12,44; 루카 21,1–4). 우리가 가진 것이 많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진 것을 내어드릴 때, 우리의 것 모두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곧 신앙 안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우리는 삼위일체의 생명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요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로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또 그것은 완전함 혹은 완벽주의적인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그것, 그 모든 것을 내어 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가진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존재가 주어져 있고, 그 존재 안에 사랑할 마음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는 내어 줄 것이 없어!"라고 생각한다면, 마음을 새롭게 먹을 필요가 있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 주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주어지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이미 주어진 소중한 것을 볼 여유도 없어지게 되고, '나'에게 있는 '사랑할 본질적 존재의 힘'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성가는 프란치스코가 가난(소유 없음)을 선택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 놓았을 때 그에게는 하느님께 온전하게 주신 참 자아만이 남게 되었고, 결국 그는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나'라는 가장 소중한 것을 다른 존재들과 나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전에 한 번 나누어 드렸던 [누군가가 깊이 상처를 입었을 때]라는 짧은 묵상 글을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우연히 <ContemplativeMonk.com>이라는 사이트에서 보고 그 내용이 좋아서 번역해 놓은 글입니다.
누군가가 깊이 상처를 입었을 때
그것을 치유해 주려 하지 마세요.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많이 아파할 때
그 고통을 없애주려 하지 마세요.
(할 수 없습니다.)
대신 상처를 입은 그 사람 옆에서
함께 걸어가 줌으로써 사랑을 나누세요.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또 예전에 여러 번 나누어 드렸던 [In Sinu Jesu(예수님의 품 안에서)]라는 책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한 부분도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에게 당신과의 관계성 안에 현존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임을 설명해 주십니다.
"내 가슴은 그대의 기도를 듣기 위해 열려 있고, 나는 매우 기쁘게 그대의 기도를 듣는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도록 영감을 주는 이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내 마음을 참으로 기쁘게 해주는 기도의 비밀이다: 그 기도는 그대가 내 성체성사의 현존 앞에 오기 전에, 그대가 기도하기 위해 입을 열기 전이나 펜을 들기 전, 혹은 그대가 기도의 말마디를 생각해 내기 전에 벌써 한 영혼 안에 내가 이미 심어 놓은 은총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기도들이야말로 내가 즉각적으로 답을 주는 기도다. - 이런 기도들은 내가 반드시 응답을 주는 기도인데, 그 기도들이 바로 한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역사하심이기 때문이다. 이때 성령께서는 한 영혼에 내 성심의 갈망과 계획에 완전히 조화를 이루어 기도하는 마음을 가르쳐 준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없다고 여겨서는 안 되겠지요?!!
어쩌면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참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말고 이미 주어진 것을 보지 못 하게 하는 것들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 이미 주어진 것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또 이미 주어진 것들을 소중한 마음으로 새기면 새길수록 그 주어진 것들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삶의 자세가 좋은 눈으로, 하느님 선의 눈으로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보려는 수양과도 같은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의 자그만 시선이 선하다면 '내' 존재가 선으로 차고, 그래서 훈훈해지기 때문입니다.
조금 다른 비유로 설명하자면, 메이스터 에크하르트(+1328)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두 양동이에 들어있는 물과 같습니다. 한쪽 양동이에서 다른 쪽으로 물을 따르면 다른 쪽이 더 무거워집니다. 즉 한쪽이 무거워질수록 다른 하나는 가벼워지는 것이지요. 같은 이치로 우리가 더 많이 내어줄수록, 우리에게는 내어주는 일이 점점 더 쉬워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득 찬 양동이를 기울이는 것이 어렵지만, 계속하다 보면 점점 쉬워진다는 뜻입니다. 프랑수아 페넬롱(+1715)도 같은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강조하고자 한 사실은 우리가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일이 본래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정말 어려운 것은 우리가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우리 에고의 경향 때문에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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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6.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여 말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왜 그럴까? 왜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졌다고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것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의 신원과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을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신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곧 아드님은 위에서 오신, 위에서 보내진 사랑입니다. 여기서, ‘위’ 혹은 ‘하늘’이란 단순히 하늘과 땅, 위와 아래라는 상대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와 ‘오신 분’이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절대적인 차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난 이”가 아닌,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오신 분”, 곧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심을 말합니다. 곧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 우리를 넘어서 계시는 분이심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해를 넘어선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믿음”은 단지 자신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내면적인 응답만을 말하지 않고, 동시에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곧 응답을 통하여 자신을 건네 드리는 실천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두 가지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정해진 내용을 믿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차원인 ‘하느님께 성실함’을 뜻합니다. ‘성실함’(믿음이나 성실함은 다 같이 히브리어 “에무나”를 쓴다)은 “하느님께 자신을 고정하다.”, “하느님을 붙들고 놓지 않다.”라는 뜻으로, 구체적인 의미로 ‘순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하느님께 성실함, 곧 하느님의 성실하심에 자신을 고정하는 일이요, 자기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것으로 돌아서는 철저한 헌신을 토대로 하는 방향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credo)라는 단어도 자신의 심장, 곧 자기 자신을 건너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cro;심장, 생명’+dare;주다).
그러기에,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인 결속을 뜻합니다. 결국,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 한가운데서 행동하시며,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서 행동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받아드리며, 실제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곧 ‘오신 분’이 이미 ‘와 계신 분’이 되고, 동시에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되고, 영원한 생명이 현재가 되고, 현세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생명을 살게 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에게서는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필리 3,20)이 됩니다. 땅에서 부활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주님!
항상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 머리 위에 올라 당신을 조정하지 않게 하소서.
제 이성 위에 지혜로 계시고, 제 판단 위에 자비로 계시소서.
오늘도 당신에 신비, 그 놀라움
우러러 주님이신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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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6.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사순 때 ‘킬린(Killeen)’엘 다녀왔습니다. 작년 대림 때 가려고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갈 수 없었습니다. 이번 사순 때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성 정하상 성당입니다. 1986년에 설립되었을 때는 한인 공동체만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 신부님은 떠났고, 지금은 오스틴 교구에서 미국 신부님이 사목합니다. 미국 공동체와 베트남 공동체 그리고 한인 공동체가 함께 본당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한국 신부님도 없고, 한국 공동체가 60명 정도 나오는 작은 공동체로 변하였지만, 본당 이름은 여전히 성 정하상 성당입니다, 본당 신부님도 한인 공동체를 위해서 서툴지만, 한국어를 조금 하면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성당을 보수하면서 한인 공동체를 위해서 103위 성인의 벽화를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유해도 모신다고 했습니다.
한인 공동체의 교우들은 한국어 미사를 원하였습니다. 오고 가며 왕복 6시간 걸리는 성당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다녀왔습니다. 2시간 고백성사, 1시간 미사, 1시간 30분 사순 특강하고 왔습니다. 30명이 넘는 분이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한국어로 성사를 보니 마음에 있는 것을 다 이야기해서 좋았다고 했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가슴은 뿌듯한 만남이었습니다. 대림 때도 꼭 와 달라는 교우들의 눈빛이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전국을 다니면서 성사를 주시고, 미사를 드렸을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지난번 엘파소도 그렇고, 이번 킬린도 그렇습니다. 엘파소는 2달에 한 번 가려고 합니다. 어르신들이 한국어 미사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자기가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이끌어 주심을 믿으며 이 또한 감사드립니다.
신앙은 ‘이어달리기’와 같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사도들은 비록 박해와 고통이 따를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을 선포하겠다고 합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사도였고, 그분들이 순교자였고, 그분들이 성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사람 구원하기를 바라셨고, 그래서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아들 예수의 말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욕망, 시기, 질투, 불신, 분노, 원망의 삶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신뢰한다면, 함께 나눈다면, 조건 없이 사랑한다면 바로 이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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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6.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07:48 추가.
환골탈태한 사도들의 모습!
요즘 첫 번째 독서로 봉독되는 말씀은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신약성경의 다섯번째 책으로 초대 교회 공동체의 생활상과 사도들의 행적에 대해서
소상히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책입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유일한 역사서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이 어떻게 만방에 전파되고 지속되는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이자 제3복음서의 저자인 루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에 대한 루카복음사가의 기록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그 무렵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사도행전 4장 13절)
제가 사도행전을 기록했다면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예수님의 애제자였던 요한에 대해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 기록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란 표현은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그들의 약점을 감추고 장점을 부각시키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정식 율법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지혜롭고 총명했다.
특히 전문직 어부로서 갈릴래아 호수 전체를 꿰뚫고 있었으며, 고기잡이에 관해서는 둘째가면 서러워할 노하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루카복음사가는 그 어떤 가감도 없이 솔직하게 두 사람의 출신배경을 소개합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
따지고 보니 그렇습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던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지혜와 경륜이 충만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당대 둘째가면 서러워할 율법학자들의 토론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탁월한 언변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을 묵상하노라면 깜짝 놀랄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때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했던 제자들, 나약하고 우유부단했던 제자들의 모습은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완전 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완전 환골탈태한 새로운 모습으로, 그 어떤 박해나 협박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섭니다.
용맹하고 당당하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체포되어 산헤드린 앞으로 끌려갔던 베드로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더이상 머뭇머뭇하던 과거 그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노회하고 구린 산헤드린 의원들 앞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습니다.
더 이상 더듬더듬, 주저주저가 아니라 술술~감동적이고 논리정연한 설교를 펼쳐나갔습니다.
풀려난 두 사도는 동료 제자들이 모여있는 장소, 곧 초대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그 기쁜 소식, 자신들이 적대자들 앞에서 얼마나 당당하고 통쾌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했는지를 알려줬습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동료들은 한 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기도를 바쳤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더 이상 의혹이나 불신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박해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환골탈태한 제자들! 그 배경에 과연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가 생각해봅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초대 교회 공동체 전체를 뒤덮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제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힘차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활기찬 동반에 힘입어 제자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힘차게 선포하며, 박해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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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6. 부활 제2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3,31–36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
복음은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의견을 보태는 스승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참된 증언자이십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대목을 묵상할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핵심을 이렇게 방향 잡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정보’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내 삶을 ‘의탁’하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생명을 ‘조금’ 나누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또한 말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믿음은 단지 교리를 인정하는 머리의 동의가 아니라
성령을 받아들이는 삶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크리소스토모는
믿음의 표지를
말의 화려함에서 찾지 않고
삶의 변화에서 찾게 합니다.
오늘 2주 친절/선행 주간에
이 복음은 이렇게 번역됩니다.
•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머물면
나는 사람을 더 쉽게 살릴 수 있는 쪽을 선택하게 됩니다.
• 성령을 한량없이 받는다는 것은
감정이 늘 뜨겁다는 뜻이 아니라,
친절이 끊기지 않도록 마음이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 선행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
믿음이 실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가장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성모님의 날인 오늘,
마리아는
아드님의 말씀을 이해한 뒤에 순명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임이 삶 전체를 바꾸게 했습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더 많이 ‘설명’하려 하기보다
말씀에 의해 더 많이 ‘변화’되기를 청합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을 머리로만 다루지 않게 하시고
삶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는 주님,
오늘 제 안에
친절과 선행이 마르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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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6.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7:45 추가.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1-36).”
1) 이 말은, “예수님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증언이고,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20장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인가?
의무가 아니라 우리의 ‘희망’입니다.
‘간절한’ 희망.
바로 그 간절한 희망 때문에 하는 일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의무인가?’ 라고 물으면,
“의무가 아니라 우리가 원해서 하는 것이다.”가 답입니다.
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싫다는 사람에게 그 생명을 억지로 주는 일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싫고,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기 싫다는 것은, 영원히 멸망하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본인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라.” 라는 가르침은, ‘명령’이 아니라 ‘권고’입니다.
사랑의 권고.
2)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멀게만 느껴지는
영원한 생명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어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원래 신앙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해서 차츰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고
성숙해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맨 처음에 행하신 기적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일입니다(요한 2,1-11).
그 일은 ‘영원한 생명’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입니다.
물론 혼인잔치의 당사자들에게는, 포도주가 떨어진 일이 심각한 문제였겠지만, 그래도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부터 시작하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신 일은
병자 치유에 속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해결해 주는 일부터 시작하셨는데,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것은 ‘신앙생활의 시작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3-15).”
많이 아플 때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슬플 때 슬프다고 하소연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무슨 복잡하고 추상적인 신학 이론으로
신앙생활을 설명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뭔가 힘든 일이 있어서 기도할 때, “혹시 나의 신앙이 기복신앙인 것은 아닐까?” 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4) “모든 것 위에 계신다.”는, 표현으로는 “모든 사람을 지배하신다.”인데, 뜻은 “모든 사람을 보살피신다.”입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는, “예수님께서는 진리만 말씀하신다.”입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의 진리’ 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다.”입니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는,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다.”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고 진리’인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는, “아버지와 아드님은 하나이시고”입니다.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는, 예수님께서 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 <그러니까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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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6. 부활 제2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1:55 추가.
요한 3,31-36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게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오늘 복음을 읽다보면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느껴집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 예를 들어 ‘금수저’와 ‘흙수저’ 사이의 간극은 죽기살기로 노력하거나, 아주 좋은 기회를 잡으면 어떻게든 메워볼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애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하여 그 위에 계신다고 하니, 그분은 우리처럼 비천한 인간과는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저 멀리 완전히 다른 차원에 속한 존재로 여겨지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당신과 우리 사이의 간극을 강조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께서 이 세상에 속한 그 어떤 것에도 욕심부리거나 집착하지 않고 ‘초월’해 계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욕심내고 집착하면 이 땅에 속한 존재, 즉 이 세상에 마음과 영혼이 속박된 존재가 되는데, 그렇게 어딘가에 묶인 상태가 되면 하느님 나라로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 삶에 하느님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해야 합니다. 태양은 세상 만물에 공평하게, 골고루 빛을 비춰주지만 커다란 무엇인가가 나를 가리고 있으면, 즉 내가 어떤 것이 만든 그림자 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 빛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세상 만물에 당신의 은총과 사랑을 골고루 내려주시지만, 내가 욕심과 집착에 빠져 죄악의 그늘 속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은총과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지요.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분 말씀이 내 마음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몸은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을 지언정, 마음과 영혼만은 하늘에 속한 존재가 됩니다. 이 점을 생각하며 오늘의 복음말씀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봅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게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오늘 내 삶 안에서 하느님이 모든 것 ‘위’에 계시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오늘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거나 결정할 때 하느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우리가 그분 뜻을 소중하게 여기며 따르는 삶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계시게 해 드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모든 것 위에 있는 존재, 즉 하느님 나라에 속한 존재가 되게 해 주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방법이자,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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