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장 위구르족의 대모 ‘레비야 카디르’
[허종국, 영산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티베트 문제는 일반인에게도 그렇게 낯설지 않다. 인도에 그들의 망명정부가 있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달라이라마’가 있다. 그러나 중국 최대의 화약고라 할 수 있는 신장위구르자치구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한다. 사실 신장의 위구르족에게는 위구르족의 대모라 할 수 있는 ‘레비야 카디르’(Rebiya Kadeer)가 있다.
그녀가 쓴 자서전 “Dragon Fighter”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하늘을 흔드는 사람”이란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그녀는 이 자서전을 통해 자신이 살아온 인생여정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아울러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신장위구르자치구에 대한 세밀하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다. 과거 ‘서역’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곳인 신장위구르자치구를 레비야는 ‘동투르키스탄’이라 부르고 있다. 중국 전체 국토의 1/6을 차지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중국의 서북지방에 위치해 있고, 석탄, 석유와 가스 등 엄청난 자원을 매장하고 있으며 중앙아시아로 나아가는 교두보로서의 탁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중국으로서는 민족문제는 국가통합에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로 간주된다. 그중 신장위구르자치구는 티베트와 더불어 중국의 국가통합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요인으로 간주되는 곳이다. 과거 러시아에 속해있던 중앙아시아 5개국이 분리독립하면서 신장에서의 분리독립에 대한 열망은 크게 부각되었고 상대적인 소외감을 크게 느끼는 이곳의 위구르족으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 한족과의 민족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신장의 주체민족인 위구르족은 외모와 언어, 그리고 종교 등 한족과는 판이하게 다른 민족이다. 중국은 전한시대의 한무제(기원전 140-87년)때 ‘서역도호부’를 설치한 이래 줄곧 신장은 중국의 영토였다고 주장하지만, 레비야는 비록 중국이 일정기간 신장의 일부지역을 통치하긴 했어도 ‘동투르키스탄’은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 중국과는 다른 국가로 존재해 왔다고 주장한다.
1884년 러시아와 세력다툼에서 승리한 청나라는 ‘새로운 영토’라는 의미로 ‘신장성’(新疆省)을 설치했다. 1911년 청조 붕괴 이후 신장의 위구르족은 몇 차례 독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할 즈음, 그들은 1933년과 1944년에 ‘동투르키스탄’이라는 독립국가를 수립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협상을 이끌던 신장의 지도자들이 중국과의 협상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가던 중 만주의 어느 산에 추락되었다는 사실도 뒤늦게야 알려졌다. 1949년 공산당이 국민당을 제압하고 새로운 민족국가를 구성하려고 준비를 하던 시기에 중국공산당은 소련의 연방제를 모방한 국가구성에 대한 고려도 있었지만, 1949년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은 결국 신장을 점령했고, 단일제 형태의 국가형태를 갖추었다. 그 후 중국은 민족구역자치제를 핵심으로 하는 자치정책을 추진하게 되었으며, 1955년에는 신장에 ‘신장위구르자치구’를 수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신장의 아커수(阿克蘇)라는 곳에서 태어난 레비야는 어릴 때 집안일을 도우며 자랐다. 어린 시절 가정환경이 어려웠던 레비야는 학교에 다닌 시간이 많지 않았고, 교육수준도 높지 않은 여성에 해당되었다. 어렸을 때 그녀의 부친은 소상인이었는데, 공산주의 운동의 전개와 더불어 재산을 몰수당했지만 다행이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레비야는 모친을 따라 남강(南疆)에서 유랑생활을 했다. 레비야가 아름답게 성장하면서 위구르족 간부가 그녀를 마음에 품고 집안전체를 부양하겠다고 청혼했고, 레비야도 그의 아내가 되었다. 이들 부부는 자녀들을 두며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대대로 상인이었던 레비야의 집안은 그녀에게 천부적인 장사수완을 물려주었다. 레비야는 남편의 그늘에 안주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장사를 했다. 세탁일부터 시작한 그녀는 점차 옷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시장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라 그녀가 벌인 사업도 성공했고, 그녀의 수입은 남편이 받는 월급의 4-5배가 되었다.
“개인적인 경제활동은 자본주의적인 것이고 그것은 공산주의를 전복할 수도 있다”는 공산당의 견해에 따라 레비야는 곧 제재를 받게 되었으며, 정부가 나서서 그녀의 활동에 관여하게 되었고, 여기에 레비야의 남편도 연루되었다. 남편은 두 가지 선택에 직면했다. 공직에서 제명되든지 아니면 레비야를 버리는 것. 결국 남편이 이혼을 선택하자 레비야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레비야는 중국정부에 큰 원한을 품게 되었고, 정부에 무조건 복종하는 남자들을 불신하게 되었다.
1978년 중국에서 사회주의 경제시스템이 붕괴되고 중국은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했다. 사회주의 시스템과 같은 제재가 사라지자 레비야는 물을 만난 생선처럼 장사수완을 발휘했고 얼마가지 않아 중국 갑부 순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다. 아직 그녀는 30대였다. 그녀는 다시 결혼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하기 시작했고, 의지할 만한 배우자를 찾고자 했다. 이때 지금의 남편인 인권운동가 ‘시딕 로지’를 만났다.
그녀가 개인의 안위함과 편안함을 뒤로 하고 위구르 민족과 독립운동을 생각하게 된 것은 중국 공안에 의한 위구르인의 구타현장을 목격하고 난 뒤였다. 그의 이런 생각은 후에 남편 로지와의 만남, 그리고 뒤이어 이루어지는 그녀의 정치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남편 로지는 소수민족 관련 운동으로 장기간 구금된 바 있으며,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다. 그녀는 로지가 전 남편과는 달리 정부의 억압에 대항하자 그의 용기에 존경심마저 갖게 되었다. 아울러 정부가 명령한다고 해서 아내를 버릴 사람은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한때 그녀는 중국 6대 갑부, 여자 중에서 최고의 갑부 반열에 오르며, 엄청난 부를 축척했지만, 결코 이런 부를 혼자의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으며, 위구르의 불쌍한 백성과 민족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경제적인 부분 외에도 정치적으로도 크게 역할을 하였다. 한때 그녀는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전국인민대표대회의의 대표라는 직책을 맡아 쟝쩌민(江澤民) 전 당총서기와 만나 신장의 인권과 더 큰 종교의 자유에 대한 요구를 하기도 하였으며, 위구르의 어느 누구도 말하지 못하는 그들의 고민을 대신 요구하기도 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체계적으로 갖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위구르는 티베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어느 누구도 위구르의 상황을 전해주는 이가 없었다. 1990년대 북경에서 열린 제4차 세계여성대회에서 티베트 승려들이 손발을 묶고 해외에서 온 회의참가자들에게 강경하게 자신들의 처지를 표시한 반면,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신장의 위구르족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못하는 현실을 직면하고 그녀의 정치적인 견해는 더욱 강경하고 대담해졌다. 그녀의 이런 생각과 행동은 점차 중국정부에게 눈의 가시가 되었으며, 5년 반이나 되는 세월을 국가기밀 유출죄로(8년형을 선도받음) 중국의 감옥에서 참혹한 생활을 하였으며, 2005년 감옥에서 추방이란 형식으로 풀려난 후 인권운동가로서 워싱턴에 살고 있다.
‘9,11테러’는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준 사건이지만 그녀는 이 사건에 의해 위구르인들도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중국은 9,11 사건 이후 동투르키스탄의 민족독립운동을 국가의 통합을 분열시키는 테러행위로 간주하고 이들의 분리독립운동을 ‘엄타’ 정책에 의해 강력하게 통제한다. ‘9,11테러’는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했지만, 중국에게는 민족분리를 주장하는 이들을 응징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위구르족의 중요한 일상인 각종 종교활동도 분리주의 활동과 상관되어 크게 제약을 받고 있다.
지금 그녀는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와 같은 존재다. 해외의 위구르족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로 묘사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신장의 ‘독립’을 위한 강경노선을 걷지는 않으며, 보다 온건한 노선의 보다 큰 ‘자치’를 요구하고 있다. 독립요구가 현실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란 현실적인 판단도 있겠지만, 아직도 그녀의 자식들이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도 큰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녀는 모두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첫 남편에게서 6명의 자녀를, 그리고 둘째 남편에게서 3명의 자녀를, 그리고 2명은 입양했다.
그녀의 정치적인 행보는 중국뿐 아니라 세계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2005년 노르웨이의 토로프 라프토 교수 기념상(Thorolf Rafto Prize, 국제인권상)을 받았으며, 2006년 5월 망명중인 위구르인은 레비야 카디르를 미국 위구르협회 의장으로 임명했다. 2006년 11월 ?헨에서 열린 세계위구르인대표대외(WUC)에서 그녀를 대표로 선출했으며 지금도 대표를 맡고 있다. 2007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한 위구르 독립운동가는 유목생활에 익숙한 위구르족이 만약 하나로 연합하는 힘을 강하게 견지했다면 그들이 열망하는 독립은 이미 달성되었을 것이라고 한탄한 적이 있다. 레비야 카디르는 해외에 있는 위구르족의 힘과 독립의 열망을 하나로 묶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과 민족이 직면하고 있는 온갖 고난에 대해 ‘극복할 수 없는 난관은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언젠가는 ‘독수리처럼 높이 솟아올라’ 자유로운 신장을 훨훨 날 수 있는 그날을 기대하고 있다.
레비야 카디르(Rebiya Kad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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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과 중국, 그 애증의 역사 [김현재, 영산대학교 아세안비즈니스학과 교수]
베트남과 중국 간의 역사는 한마디로 애증의 역사이다. 건국초기부터 한(漢),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靑)대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 속에서 끊임없이 독립을 위해 피 흘려야 하는 굴욕의 역사를 가졌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중국의 선진문명과 문화의 유입으로 베트남의 행정, 교육, 문화 등의 발전을 이루기도 했다.
오랜 중국지배 역사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대다수 베트남인이 중국의 육례(六禮)를 기초로 한 출생의례, 혼인의례, 장례, 제례 등의 가정의례를 지내고, 음력설인 뗏(Tet)을 베트남 민족 최대명절로 쇠며, 중추절에는 중국식 월병을 먹는 모습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베트남과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기저에 중국문화의 흐름이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두 나라 모두 중국의 남쪽 끝과 북쪽 끝에 국경을 접하면서 오랜 세월 중국의 영향을 받아온 공통된 역사에 기인한다. 그래서 베트남은 지리적으로는 동남아에 속하면서도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는 달리 유교문화권,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동남아속의 동북아국가로 우리나라와 닮음 꼴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의 왕조들은 중국에 국왕의 책봉과 국호의 승인을 받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서 베트남의 국호 역시 중국에 의해 지어진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안남(安南)과 월남(越南)인데, 안남은 당(唐)나라 때 베트남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는 행정관청을 설립하면서 "남쪽을 안정시킨다"라는 뜻으로 지어졌다. 이때부터 베트남은 안남으로 불렸으며 훗날 우리나라, 일본, 서양에서도 안남으로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찰기가 없는 쌀을 일컬어 ‘알람미’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바로 베트남에서 산출된 쌀, 안남미(安南米)에서 온 것이다. 한편, 월남이라는 국호는 1803년 베트남 원(元)씨 왕조 때 남월(南越)을 국호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을 청나라에서 월남으로 수정하여 제시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국명으로 불리고 있다.
오랜 세월 지배와 피지배관계를 유지해 온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현대에 들어 변화의 양상을 보였다. 베트남이 프랑스와 독립전쟁을 전개할 때 중국이 1940년 이래 2차에 걸쳐 약 200억 달러에 해당하는 원조와 인적 자원을 제공했고 1950년에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세계최초로 공식 승인하고 군사원조를 실시했다. 이와 함께 양국이 사회주의 국가로서 우호협력관계를 설정하는 가운데 오랜 갈등의 사슬을 끊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73년부터 국경분쟁, 베트남 내 20만 화교의 강제축출, 1978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이 이어지면서 양국관계는 점차 악화되어 급기야 1979년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고 다시 원수의 관계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1989년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의 철수로 새로운 관계회복의 계기가 마련되면서 1991년 양국 간 경제관계 회복 이후 상호 경제적 협력자로서 위상을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양국 간 오랜 관계의 흔적이자, 한때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약 100만 화교는 이제 양국 간 경제교류에서 가교 역할을 담당하며 양국이 과거 천년에 이르는 갈등의 역사를 끊고 21세기의 새로운 경제적 밀월관계로 거듭나게 하는데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중국은 오늘날 베트남의 경제개방정책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최대 교역상대 국가로서 베트남과 밀접한 상생관계를 갖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베트남과의 길고 긴 애증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1979년 베트남-중국 전쟁 당시 베트남의 중국군 포로들
1979년 베트남-중국 전쟁 당시 중국의 베트남군 포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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