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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국제통상전략연구원 연구위원
기업의 사회공헌은 오랫동안 ‘얼마를 기부했는가!’로 평가받아왔다. 어려운 이웃에게 성금을 전달하고 복지시설을 지원하며, 장학금을 내놓는 일은 기업이 사회적 책임(CSR)을 실천하는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이러한 기부는 여전히 중요하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재원이 전달되고 당장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지고 기업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사회공헌의 의미도 달라지고 있다. 단순히 돈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적 문제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일회성 후원보다 예술가가 지속적으로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시민들이 꾸준히 예술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제 기업의 사회공헌은 ‘기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문화적 토대를 만드는 일까지 고민해야 한다.
문화예술은 다른 사회공헌 분야와 조금 다른 특성을 갖는다. 한 번의 지원으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가에게 작품을 만들 기회를 제공하고 전시와 공연이 지속될 수 있도록 공간과 인프라를 마련하며, 시민들이 이를 향유(享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에는 오랜 시간과 꾸준한 투자가 필요하다. 문화예술 생태계는 어느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창작자와 기획자, 공간 운영자, 관람객이 서로 연결되면서, 서서히 형성된다. 따라서,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도 단순히 특정 전시나 공연의 비용을 지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한 번의 행사가 끝난 뒤, 지원도 함께 끝나는 방식으로는 지속적인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다음 작품을 준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새로운 예술가가 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며, 시민들이 문화예술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기업이 문화예술을 지원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는 한 사회의 정체성을 만들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힘을 갖는다. 경제적 성장만으로 사회의 풍요로움을 설명할 수 없는 시대에 문화예술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기업이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것은 단순히 예술가 한 사람을 돕는 일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이 더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특히, 문화예술은 세대와 계층, 지역을 연결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공연장에서 음악을 듣고 하나의 전시장에서 같은 작품을 바라보며, 각자의 생각을 나눌 수 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그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하는 과정 자체가 사회적 자산이 된다.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은 이러한 만남의 기회를 넓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업의 역할은 어디까지여야 하는가? 기업이 예술의 방향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기업의 지원이 커질수록, 예술이 후원자의 취향이나 기업의 홍보 수단에 종속될 가능성도 함께 커지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기업의 지원은 창작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기업은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지시하는 주체가 아니라, 예술가와 문화기관이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도록 기반을 제공하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재단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기업이 사회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면, 재단은 그 자원을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가치로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단기적인 성과에 매달리기보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분야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새로운 시도를 지원하며, 예술가와 시민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문화예술의 혜택이 특정 계층에만 머물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대형 미술관이나 유명 공연장의 관객만을 위한 문화지원은 문화예술의 외연을 넓히는 데 한계가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 장애인, 노인, 지역 주민 등, 그동안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가 적었던 사람들에게 문화의 문턱을 낮추는 것도 중요한 사회공헌이다. 예술을 잘 아는 사람을 위한 지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을 처음 만나는 사람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
미술관을 비롯한 문화예술 기관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기업과 재단이 아무리 많은 자원을 지원하더라도, 그것을 시민의 문화적 경험으로 연결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적 의미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미술관은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 시민들이 예술을 통해 서로 만나고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좋은 문화공간은 전시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작품 하나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하고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적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기도 한다. 어린 시절, 미술관에서 본 한 작품이 훗날 예술가를 꿈꾸게 할 수도 있고, 가족과 함께 관람한 공연 한 편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수도 있다. 문화예술의 가치는 이런 보이지 않는 변화까지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은 단기적인 성과를 측정하기 어려울 수 있다. 몇 명이 행사에 참여했는지? 몇 건의 프로그램이 운영됐는지? 같은 숫자만으로는 문화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 한 사람의 생각이 달라지고 한 어린이가 예술을 처음 경험하며, 한 예술가가 창작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 역시, 중요한 성과다. 문화예술에 대한 사회공헌은 눈앞의 성과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과 사회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지역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예술 인프라는 여전히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많은 예술가와 문화기관이 수도권에 모여 있고 지역에서는 문화예술을 지속적으로 향유(享有)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기업과 재단의 사회공헌이 문화예술의 지역 격차를 줄이는 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지역 예술가를 발굴하고 지역의 문화공간을 지원하며, 지역 주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지역사회의 문화적 자생력을 높이는 일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문화예술 생태계는 단기간에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한 명의 예술가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하나의 문화공간이 지역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도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일회성 행사나 단기 프로젝트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건강한 문화생태계를 만들기 어렵다. 기업의 사회공헌도 이제 ‘무엇을 지원했는가?’보다, ‘무엇이 지속될 수 있도록 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기업의 자원과 재단의 전문성, 문화기관의 현장 경험, 예술가의 창의성이 서로 연결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문화예술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물론, 기업이 모든 문화예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공문화정책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이 있고 예술계 역시, 스스로 건강한 생태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시민 또한, 단순한 관객을 넘어 문화의 소비자이자 참여자로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후원만으로 문화예술의 공공성을 완성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기업이 가진 자원과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 역할을 외면할 수도 없다. 기업은 이제 단순한 경제주체를 넘어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기업의 사회공헌 역시,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변화해야 한다. 문화예술은 그 변화의 중요한 한 축이 될 수 있다.
기부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건네는 일이다. 그러나, 문화예술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을 함께 만드는 일이다. 전자가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의미가 있다면, 후자는 미래의 가능성을 키우는 데 의미가 있다.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제 우리 사회는 두 가지를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기업의 사회공헌이 진정한 사회적 가치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돈의 크기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얼마나 많은 돈을 내놓았느냐?보다, 그 돈이 어떤 생태계를 만들었는지? 누구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는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문화예술은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며, 지역과 지역을 잇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그것은 숫자로 쉽게 환산하기 어려운 사회적 자산이다.
이제 기업의 사회공헌은 단순한 기부를 넘어야 한다. 예술가에게는 창작의 시간을, 시민에게는 예술을 만날 기회를, 지역사회에는 문화가 자랄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재단은 장기적인 시선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미술관과 문화기관은 그것을 시민의 경험으로 연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술의 자율성과 다양성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결국,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은 미래에 대한 투자다. 오늘 한 사람의 예술가를 지원하는 일이 내일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고, 오늘 한 아이에게 제공한 문화적 경험이 훗날 그 아이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꿀 수도 있다. 오늘 지역에 만들어진 작은 문화공간 하나가 수많은 사람의 만남과 창작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기업의 사회공헌이 이제 ‘기부했다’는 기록을 남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에 어떤 문화가 남았는가?를 묻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
좋은 사회공헌은 돈을 쓰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가 계속 창작할 수 있게 하고 누군가가 예술을 처음 만날 수 있게 하며,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기업과 재단, 미술관과 예술가, 그리고 시민이 함께 그 기반을 만들어갈 때, 문화예술은 일부 사람들의 향유(享有)를 넘어 우리 사회 전체의 자산이 될 수 있다.
이제 기업의 사회공헌을 바라보는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얼마를 기부했는가?가 아니라, 어떤 문화를 남겼는가? 이것이 앞으로 우리 사회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던져야 할 새로운 질문이다.
김성수 (現 국제통상전략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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