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제부터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임영석
나, 이제부터는 반듯하게 살지 않기로 했다
좀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그간 허리 휘게 일하고 돈 벌어 꼬박꼬박 세금 내며 살았는데
백수건달 양아치처럼 살아가기로 했다
내가 반듯하게 살아간다고 세상이 반듯한 것도 아니다
벚꽃 피면 벚꽃 축제, 진달래 피면 진달래 축제,
갈대꽃 피면 갈대 축제, 해바라기 피면 해바라기 축제
눈이 오면 눈꽃 축제, 이 나라 축제란 축제 모두 즐기며 살기로 했다
이미 지구는 23.5도 기울어져 있다
기울어 있는 지구를 똑바로 세우고 살지 못할 바에야
내 몸을 기울여 살기로 했다
그래야 내 정신이 똑바로 서기 때문이다
그간 내가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은
지구가 기울어 있는 만큼
내 몸을 기울여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내 몸을 23.5도 기울여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시집『나, 이제부터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2020. 시산맥 시혼시인선
고추
임영석
늦가을 고추는 뿌리를 뽑아야
서리가 와도 얼지 않는다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고추는
늦가을 된서리 한 번 맞으면
땡땡한 열매가 모두 삭아 내린다
그래서 고추밭 농부는 서리가 올 때쯤
뿌리를 낫으로 자르거나 뽑아 둔다
악착같이 번성하겠다는 미련을 끊어 놓아야
발정을 멈추고 매달고 있는 고추를
뜨겁게 지켜내는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고추가
제 몸에 불을 질러 다 타들어 갈 때까지
열매를 지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농부는 고추의 뿌리를 뽑아
허공에 걸어둔다
시집『나, 이제부터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2020. 시산맥 시혼시인선
임영석 시인
1961년 충남 금산에서 출생.
1985년 <현대시조>봄호 2회 천료.
시집 <이중 창문을 굳게 닫고><사랑엽서> <나는 빈 항아리를 보면 소금을 담아놓고 싶다>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뜬다> <배경> <고래 발자국> 시조집 <초승달을 보며>
2011년 시조세계문학상 수상. 15회 천상병문학상 우수상. 38회 강원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