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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고영훈 | |
숙부 장현(張炫)은 비록 중인이었지만 ‘숙종실록’에 ‘국중
(國中)의 거부’로 기록될 정도로 부자였다. 그런데 서녀
(庶女)였던 장옥정 자신은 종모법(從母法·자식의 신분은
어머니를 따르는 법)에 따라 천인이었다. 어머니 윤씨가
조사석 집안의 여종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돈을 주고 속환
(贖還)받아 여종 신세는 벗어났지만 천인 딱지는 뗄 수 없었
다. 양반가의 여종 출신으로 중인의 첩이 된 어머니 윤씨의
신산스런 삶이 자신의 미래였다.
장씨는 이런 신분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녀가 궁녀가 된 것
은 다른 여성들처럼 호구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녀의 숙
부 장현은 남인 계열 종친 복창군과 함께 유배된 적이 있을
정도로 정치색이 강한 인물이었고 사실상 남인 당인(黨人)
이기도 했다. 장현이 장옥정을 입궁시킨 것은 남인 정권획
득의 일환이었다. 남인의 후원으로 자의대비전 나인(內人)
이 된 옥정은 대비의 후원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숙종을 만
날 수 있었다.
열 한 살 때 얻은 동갑 부인 인경왕후 김씨를 잃어 외로움에 젖은 스무 살(1680년) 청년 숙종이
실록에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기록된 미녀 옥정에게 빠져든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옥정은
후궁에 봉해기도 전에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에게 강제로 쫓겨났다. 명성왕후는 옥정이 남인의
간자(間者)라는 서인들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옥정은 이듬해(1681년) 숙종과 서인 영수
민유중 딸(인현왕후)의 국혼 소식을 궐밖에서 들어야 했다.
그녀의 하염없는 기다림은 2년 후인 숙종 9년(1683) 명성왕후 김씨가 41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끝났다. 복상 기간이 끝나자마자 입궁한 그녀를 숙종은 내명부 종4품 숙원에 봉했다. 정식으로
후궁이 된 옥정은 남인의 계획대로 인현왕후 민씨와 대결했다. 서인들이 편찬한 ‘숙종실록’은
곳곳에서 인현왕후의 부덕(婦德)과 장씨의 패덕(悖德)을 비교하고 있지만 민씨가 장씨의 종아리를
친 사실이 기록돼 있을 정도로 민씨의 격렬한 질투가 행간에 남아있다. 숙종은 명문가 출신 민씨가
아니라 여종의 딸을 더 총애했다. 후궁 장씨에 대한 서인들의 증오는 증폭됐다. 서인들은 숙종 13년
6월에 발생한 수해를 장씨 탓으로 돌리고, 조사석이 장씨 모친 윤씨의 애인이기 때문에 우의정에
제수됐다는 말까지 지어냈다.
그러나 장씨는 서인들의 이런 저주를 비웃기라도 하듯 숙종 14년 10월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이
아이가 왕이 될 지 모른다고 판단한 서인들의 반응은 더욱 격렬해졌다. 서인 소속의 사헌부 관리들은
장희빈의 산후 조리를 돕기 위해 궁중에 들어오는 모친 윤씨의 옥교(屋轎:지붕이 있는 가마)를
빼앗고 꾸짖었다. 장씨는 이를 갓난 왕자에 대한 공격이자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판단했다. 숙종은
서인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갓난 왕자를 원자로 정해, 자신의 후사임을 내외에 천명했다. 그런데 이미
종묘 고묘까지 마친 이 사안에 대해 서인 영수 송시열이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로써 숙종과 서인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숙종은 재위 15년 서인들을 내쫓고 남인들을 등용하는 기사
환국(己巳換局)을 단행했다. 나아가 서인 계열 왕비 민씨까지 쫓아냈다.
숙종 16년(1690) 10월 여종의 딸인 장씨는 드디어 왕비 자리에 올랐다. 서인 명문거족들과 맞서 거둔
승리였다. 서인 영수들은 불귀의 객이 됐다. 남인들이 장악한 조정에서 원자는 당연히 세자로 책봉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적으로 돌린 상대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쫓아낸 적이 있는 서인이었다.
송시열이 사사 당하던 날 서울의 남문 밖 우수대(禹壽臺)에는 천여 명이 넘는 서인 사대부들이 모여
눈물을 흘렸는데, 이 눈물은 장씨와 남인에게 향하는 것이었다.
숙종 19년 무렵 궁녀 최씨가 숙종의 승은(承恩:임금을 밤에 모심)을 입은 것을 계기로 서인들은 정권
탈환에 나섰다. 최씨 역시 장씨처럼 미천한 신분이었는데, 궐 밖의 폐비 민씨가 그녀를 서인으로 포섭
했다. 최씨가 숙종 20년 연잉군(延▩君:훗날의 영조)을 낳자 서인들은 본격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폐비
민씨와 귀인 김씨, 숙안공주·숙명공주 등 명문거족들은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숙종 20년(1694)
3월 말 서인들의 이런 움직임을 간파한 남인들이 서인들을 역모로 고변하자 서인들도 남인들을 역모로
맞고변했다. 숙종은 4월 1일 비망기를 내려 남인들을 전격적으로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했다. 이것이
갑술환국(甲戌換局)이었는데 이후 기사환국과 똑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숙종은 왕비 장씨를 별당으
로 내쫓고 폐비 민씨를 불러들였다. 남인들이 쫓겨난 조정에서 후궁으로 격하된 장씨가 기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숙종 27년 인현왕후가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장씨는 재기를 꿈꿨다. 서인들은 장씨의 목숨을
끊어놓지 않으면 언제 기사환국과 같은 일이 재발할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서인들은 숙빈 최씨를
시켜 ‘민비의 죽음은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밀고하게 했다. 숙종은 장씨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는 장씨가 중전을 한번도 문병하지 않고,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해 저주했다고
비난하면서 자결을 명령했다.
14세의 세자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했다. 여종의 딸로 신분제에 맞섰던 장씨는 당쟁을 이용해 왕비까지
올랐으나 역시 당쟁 때문에 비참하게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남은 것은 증오였고 그에 따른 보복의
비극뿐이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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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빈 소생인 경종과 아내 선의왕후 어씨의 능.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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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숨져 독살설
장희빈 소생인 세자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서인들은 이후 세자를 제거하려는 노론과 보호하려는
소론으로 나뉘었다. 최씨 소생의 연잉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숙종은 재위 말년 노론 영수
이이명과 세자 교체를 논의했다. 하지만 소론의 반발 때문에 실패하고 세자가 끝내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경종이다.
노론은 즉위 초부터 경종을 윽박질러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케 하고, 나아가 왕세제 대리청정을
밀어붙이다가 소론 강경파 김일경 등에게 역습을 당해 정권을 빼앗겼다. 그 후 노론이 경종을 살해
하려 했다는 고변이 이어지면서 많은 핵심당인들이 사형 당했다.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노론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연잉군이 임금(영조)에 즉위한 지 4년 후(1728) 이인좌
등은 경종의 복수를 다짐하며 군사를 일으키기도 했다. 정치 보복이 보복을 낳는 악순환의 계속이었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
그리고 장희빈이 무당을 시켜서 인현왕후를 저주해서 죽였다는둥 하는건 일종의 루머에
가까운 말이라고 합니다. 도리어 장희빈을 시기하고 투기한쪽은 인현왕후쪽이었지요.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종의딸인 장희빈이 숙종의 사랑을 받는게 명문가의 딸인 그녀의 입장에선 달갑지않은
일이었으니까요.
아울러 장희빈이 사약을 받을때 온갖 패악을 치면서 죽었다는 말도 아들 경종의 하초를 잡았다는말도
근거없는 소리라고 들은적이 있습니다. 사실 권력을 잃어버린 장희빈에게 있어서 아들 경종은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을텐데 과연 그랬을까요?또한 경종은 날때부터 그리 건강한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건강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암투가 가득한 조정에서 몸이 배겨날수있었을까요?)
아무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신분제사회에 저항해서 승리했다가 빼앗겨서 죽음을 맞은
장희빈은 패자라서 어떻게 왜곡되고 잘못된 역사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경종 역시
어머니처럼 서인들의 손에서 희생되어왔을지도 모르고요.
첫댓글 장희빈 드라마로 또 만들었으면 좋겠어요~ㅋㅋㅋ볼때마다 너무 재밌게 봤던 기억이...새로 만든다면...김민정 추천!!ㅋㅋㅋ
나ㅓㄴ 오히려 인현왕후보다 장희빈이 더좋다긔..
잘읽었어요~~ 정말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쓰인다는 말이 장희빈을 보면 잘 들어맞는다는...ㅎㅎㅎ 계속 남인이 집권했더라면 우리는 인현왕후를 나쁜 왕후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얼마전에 여인천하때도.....문정왕후를 그리 묘사해놓은거 보면..오죽하면 문정왕후 이후로 윤씨집안에서 왕비 절대 안뽑았다는...ㅋㅋㅋㅋㅋ
222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쓰인다는 것 정말 동감
장희빈이 드라마에 나온것처럼 악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보는데.. 미나리는 사철이고 장다리는 한철이다 이 노래만 해도요. 신분제에 맞섰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갔을 뿐, 그 제도에 편입되어 간것은 마찬가지니까요.
그런데 전 역사란게 워낙 승자의 기록이다보니 그 노래도 좀 믿겨지지가 않아요. 역사란게 승자쪽에서 마음먹으면 왜곡시키는거 충분히 가능하거든요. 참고로 저 제목은 이덕일씨 여인열전 장희빈편에서 제가 차용해온거예요~님의 말도 물론 일리는 있지만 그래도 장희빈은 다른 여성들처럼 그저 내 운명이려니 식으로 받아들이고살지는 않았죠~
22222222222 신분제에 맞서 싸웠다기보단 그냥 개인의 욕심때문인거 같네요;;
장희빈에 대한 새로운 사실 잘 읽었어요 근데 글 첫머리의 그림은 좀 무서워요.^^;
저 그림 예전에 역사를 바꾼 여인들,이었나, 역사 속의 여인들이었나 해서 동아일보 섹션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그 때 나왔어요. 예쁘지 않나요?;
나도 뭔가 장희빈이 더 정감가고 슬프고 그렇다구..
역사는 역시 승자의 편.
잘 읽었습니다 역시 역사는 승자의 주관이 강하다는걸 또한번 느끼네요 장희빈 그림 너무 예쁘다
근데 죽기전에 대를끊기위해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겠다고 해놓고선 자기아들의 남성을 손으로 쥐어뜯어서 아들을 성불구자로 만들었다는 얘기때문에 어떤말을해도 나도모르게 장희빈이란 인물에 대해선 선입견이나 안좋은 면이 머리속에 있었나봐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신빙성이 그다지 없다더군요....
예전에 고딩때 국사선생님이 말씀해주신 얘기라서 저도 들은얘기. 근데 그 아들이 성불구자였던것도 신빙성이 없나요? 아님 성불구자가 된 계기가 신빙성이 없다는 말씀? 따지는거 아니긔. 궁금해서 물어보는거긔.
성불구자였던건 아니고 몸이 병약했다고 합니다.
그림이 좀 무섭네요/
장희빈 또 보고 싶다!!!!!개인적으로 정선경 나온거 진짜 재밌게 봤는데!!!!!!!!!!!!!1
나 장희빈 닮았어!!!!!!!!!!!!!
신분제도에 대한 그거보다 그냥 파벌의 희생양정도?
장희빈 어쩐지 김태희 닮았어~~
이런 글 너무 좋아.
역사가 승자를 위한 기록이라는 점에는 동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희빈이 신분제에 맞선 사람이었다고 거창하게 말할 수는 없을것 같은데요? 다 제쳐두고 이 글만 보더라도 자기 욕망에 충실했던 사람일 뿐이죠. 혹은 이용당했거나.
아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이덕일씨가 쓴제목을 차용해서 가져온거라서요^^;;;;
씩씩하게님의 말 백퍼센트 공감해요.
캐동감
나 장희빈 넘 좋아..정말 숙종의 정치적 계략에 철저히 희생당한 여자아니냐규.. 세가 없었떤 남인 그나마 조정에 들어앉힌것도 결국은 다 장희빈 공로구.. 내가 만약 장희빈 같은 중인 신분이었다면 난 그냥 신세한탄이나 하면서 살았을것 같다규.. 암튼 남인도 장희빈 이용했고 장희빈도 남인 이용했고 그 둘을 또 숙종은 이용하고..어휴..숙종도 솔직히 장희빈 사랑이야 했겠지만 결정적으로 장희빈을 빈으로 봉한것은 당시 엄청난 부를 가진 남인측 중인들에게 정치자금 유도하려고 그런것 아니였냐규.. 그러다가 쓸모없어지자 이젠 다시 폐비윤씨 불러들여서 남인 세력 눌러버리고.. 이런식으로 보면 결국 최후의 승자는 숙종인것 같삼..
정말 숙종은 피도눈물도 없는 왕이었던 듯..그마나 아들은 자기 핏줄이라고 끝까지 지켜주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