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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동네 약국-상점이 ‘치매안심지킴이’… 주민들 나서서 참여
[위클리 리포트] 이웃 울타리 안에서 돌봄받는 ‘치매안심마을’
《온 이웃이 도우미… ‘치매안심마을’ 가보니
치매를 앓아도 병원이 아니라 내가 사는 집, 마을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식당 사장님부터 동네 의사 약사, 집배원까지 모든 이웃들이 함께 환자를 돌봐주는, 그런 마을이 있다. 》
16일 오전 치매 환자 윤만석 씨(왼쪽)가 서울 강서구의 한 ‘치매안심지킴이’ 약국에서 약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서구에는 이처럼 치매 환자의 실종이나 배회를 막는 치매안심지킴이 약국과 상점이 367곳이나 있다. 최혁중 기자
16일 오전 11시경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한 약국. 80대 노인 남성이 평소 먹던 약에 대해 이것저것 묻자 약사가 큰 소리로 차근차근 대답했다. 흔한 약국 풍경 같지만, 이들의 대화가 평범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환자인 윤만석 씨(83)는 치매 판정을 받은 홀몸노인이고, 이 약국은 동네 치매 환자를 특별히 보살피는 강서구 치매안심센터 지정 ‘치매안심지킴이’ 약국이기 때문이다.
● 환자 배회-실종 막는 ‘우리 동네 안심지킴이’
윤 씨가 치매 판정을 받은 건 지난해 11월이다. 처음엔 믿지 못했다. 평생 옷가게나 복권판매점 등을 운영하면서 계산기 없이도 셈을 척척 할 정도로 머리 쓰는 일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댈 곳도 없는 듯했다. 아내는 3년 전 췌장암으로 떠나보냈고, 자녀들은 모두 먼 곳에 살았다.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탓에 왕래하는 이웃도 없었고 경로당에도 정을 붙이지 못했다. 점점 기억을 잃다가 외롭게 요양시설에 들어갈 모습이 그려졌다.
그로부터 아홉 달이 지난 지금, 윤 씨는 요양시설에 입원하거나 상태가 나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치매에 걸린 80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걸음이 기운찼다. 아내를 간병하느라 47kg까지 줄었던 몸무게도 52kg으로 회복됐다고 한다. 윤 씨는 “매일 ‘출근 도장’ 찍듯이 치매안심센터로 산책하러 나오는 게 비결”이라며 웃었다.
치매 환자인 윤 씨가 매일같이 치매안심센터를 다니고 혼자 집 근처를 산책할 수 있는 건 강서구 일대가 치매 노인의 실종이나 배회를 막을 장치로 가득한 ‘치매안심마을’이어서다. 우선 인근 약국과 상점 367곳이 치매안심지킴이로 참여 중이다. 이들은 단골 치매 환자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면 치매 전담 관리기관인 강서구 치매안심센터에 연락하는 방식으로 치매 환자 실종을 조기에 막는 역할을 한다.
특히 약국에선 치매 환자가 약을 건너뛰거나 한꺼번에 많이 먹지 않도록 요일이 적힌 통에 약을 잘게 나눠 주는 식으로 복약 지도에 더 신경을 쓴다. 송인석 약사는 “약을 받아 간 지 얼마 안 된 환자가 또 약국에 찾아오면 미리 적어둔 보호자 연락처로 전화해서 ‘어르신이 오늘 좀 이상하다’고 알린다”고 말했다.
동네 음식점들은 무료 치매 검사 안내문을 가게에 비치했다가 손님에게 나눠 준다. 등촌동에서 한식집을 운영하는 권민아 씨(56)는 “몇 해 전 아버지가 치매로 진단됐을 때 치매안심센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라며 “손님이 음식을 주문해 놓고 깜빡하거나 할 때면 안내문을 쥐여주며 ‘꼭 검사해 보시라’고 권한다”고 말했다.
치매 환자가 비슷하게 생긴 건물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아스팔트에 커다랗게 현재 위치를 적어두기도 하고, 주민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두뇌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정류장 벽마다 간단한 퀴즈도 붙여 놨다. 강서우체국 집배원 130여 명도 지난해 9월부터 배회하는 치매 노인을 발견하면 경찰이나 치매안심센터에 신고하는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강서구 치매안심센터는 보건복지부 주관 ‘치매관리사업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최근 3년 연속 최우수상을 받았다. 강선옥 강서구 치매안심센터 총괄팀장은 “직원들이 발로 뛰어다니며 여러 기관을 설득한 결과”라고 말했다.
● 사진관-영화관서 일하는 환자들… 주민들과 교류
치매안심센터에 등록된 환자들은 인지 기능을 높이는 스트레칭을 배우거나(위 사진) 작업치료사의 방문 상담(아래 사진)을 받아볼 수 있다. 조건희 기자
치매안심마을은 치매 환자가 살던 동네에서 안전하게 돌봄을 받으면서 살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한 행정구역으로, 각 지방자치단체가 선정한다. 보건복지부 ‘제3차 치매관리종합계획(2016∼2020년)’에 따라 2017년 일부 지자체가 시범 도입했고, 2019년부터 전국으로 확산해 지난해 말 기준 전국 710곳이 운영 중이다.
치매안심마을은 초로기(初老期) 치매 환자에게 일자리를 주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40, 50대에 치매로 진단되는 초로기 치매의 경우 한창 생계를 이어가야 할 나이에 일자리를 잃게 되면서 가정 경제에도 큰 타격을 입는다. 초로기 치매는 몸을 활발히 움직이고 사회생활을 지속하면 증상 악화를 상당히 늦출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인천광역치매센터의 ‘가치함께 사진관’이다. 지역 주민에게 무료로 가족사진을 찍어서 액자를 만들어 주는 이 사진관에선 특이하게도 손님 응대부터 촬영, 인화를 모두 초로기 치매 환자 10여 명이 담당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주역은 사진사 출신 치매 환자 한창규 씨(65). 한 씨는 2018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혈관성 치매로 진단돼 평생 꾸려 온 사진관 문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지난해 치매 상담 중 “카메라를 다시 잡는 게 소원”이라는 그의 말을 귀담아들은 센터 직원들이 ‘아예 치매 환자들이 운영하는 사진관을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지난해 1월부터 올해 7월까지 총 188명의 지역 주민이 이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받아 갔다. 한 씨는 “사진 속 이웃들의 즐거운 표정이 눈앞에 생생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시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게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경기 시흥시 치매안심센터는 공공일자리 사업을 통해 초로기 치매 환자 3명을 고용해 영화관을 운영한다. 치매 관련 영화만 틀어주는 ‘알츠시네마’다. 최저임금 수준의 일자리이지만 ‘치매 직원’들의 만족도는 높다. 여기서 일하는 치매 환자 A 씨는 “치매로 진단된 후 처음으로 내 손으로 돈을 버니 가족 앞에서 위신이 선다”고 말했다.
치매 환자가 지역 주민과 융화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을 만드는 곳도 있다. 대구 남구 치매안심센터는 지난해 9월 인근 대학 모델과와 협력해 ‘한복 패션쇼’를 열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치매 환자의 우울감도 개선해주고, 치매에 대한 참가 학생들의 인식도 올려줘 일석이조라고 한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스트레스를 달래기 위한 프로그램도 많다. 인천 서구 치매안심센터는 치매 환자와 가족이 함께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 그림책으로 그려보는 사업으로 호응을 얻었다. 충북 제천시 치매안심센터는 안마사를 채용해 치매 환자의 가족에게 ‘힐링 마사지’를 하고 있다.
● 살던 곳에서 돌봄받아야 비용도 절감
정부와 지자체가 치매안심마을 조성에 힘쓰는 이유 중 하나는 ‘비용 대비 효율’이 가장 높은 길이기 때문이다.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국내 65세 이상 추정 치매 환자는 2021년 88만 명에서 2050년 314만 명으로 급증할 것으로 예측된다. 같은 기간 치매 환자 관리에 드는 연간 의료비와 간병비 등 관리 비용도 18조7000억 원에서 121조7000억 원으로 치솟을 것으로 추산된다. 지금처럼 치매 환자를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사실상 ‘격리’시키는 방식을 지속하면 국민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험 재정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따라서 전국 256개 시군구에 구축된 각 치매안심센터는 해당 지역의 특성에 어울리는 ‘맞춤형 전략’을 구사하려 노력하고 있다. 경북광역치매센터는 면적이 넓고 대중교통이 불편한 경북 지역 특성을 감안해 치매로 진단된 이후에도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칩거 환자’를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공립 요양병원이 많은 강원 지역 치매안심센터들은 뇌중풍(뇌졸중) 등으로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환자들에게 지역사회에서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안내하고 있다.
증상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치매 환자가 중증으로 악화하지 않도록 막는 것도 주요 임무다. 치매 중증도를 4단계(최경도, 경도, 중등도, 중증)로 나눴을 때 최경도 환자의 한 해 관리 비용은 1542만 원이지만, 중증의 경우 3312만 원으로 2배가 넘는다. 환자가 중증으로 악화할 때까지 방치하면 당사자에게도 큰 불행이지만, 국가 의료비 측면에서도 부담이 커진다는 얘기다.
서울 강서구 치매안심센터는 초기 치매 환자 가운데 가족의 보살핌을 받기 어려운 이들을 선별해 작업치료사 등이 주 1회 방문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올해 초부터 방문 서비스를 받고 있는 김옥단 씨(87)는 “매주 (작업치료사) 선생님이 오는 날만 기다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정된 예산으로 우선순위를 정하다 보니, 센터 측이 대상을 최대한 늘렸는데도 올해 방문 대상은 36명이 한계였다. 김 씨의 딸 신미애 씨(56)가 작업치료사를 배웅하면서 말했다. “선생님, 저희 내년에도 계속 방문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면 정말 좋겠는데….”
조건희 기자
“약 드세요” 알려주고 넘어지면 119 신고… “손주와 사는 기분”
[위클리 리포트] 이웃 울타리 안에서 돌봄받는 ‘치매안심마을’
치매 환자 돌보는 AI
“어르신, 좋은 아침입니다. 혈압약 드실 시간이에요. 꼭 챙겨 드시고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충남 당진시 치매노인센터는 2021년부터 지역 내 치매 노인들을 대상으로 인공지능(AI)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치매 노인이 사용하는 AI 스피커는 겉보기엔 보통 집에서 쓰는 AI 스피커와 비슷하지만 주인에게 먼저 말을 건다는 것이 다르다. 노인이 약 먹을 시간을 알려주고, 폭염주의보가 발령되면 ‘날이 많이 뜨거우니 되도록 밖에 나가지 말라’고 일러주기도 한다.
이처럼 치매 노인들을 돌보기 위해 정보기술(IT)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지방자치단체가 늘고 있다. IT 기기들은 노인이 낙상하거나 다친 것을 감지해 조치를 취하거나 인지 능력을 향상시키는 ‘학습 도구’ 역할을 하기도 한다.
● AI, 치매 노인의 말벗 겸 건강 지킴이
당진시에서 활용하는 AI 스피커는 노인들의 말동무가 돼 주며 적적함을 달래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가 좋다. 노인이 집을 나서며 “병원 다녀올게”라고 말하면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하고 답하는 식이다. 당진에 사는 이모 할아버지(90)는 “AI 스피커가 말을 걸어 주니 손자, 손녀와 함께 사는 기분이 들어 좋다”고 말했다.
AI 스피커의 기능 중 노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건 음성으로 원하는 노래를 검색해 재생하는 기능이다. 73세 김모 할머니는 “평생 TV에서 나오는 노래만 듣고 살았는데,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아무 때나 들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정윤숙 당진시 치매안심센터 주무관은 “처음엔 어르신들이 매달 300곡씩 들을 수 있게 지원했는데, ‘더 듣고 싶다’는 요구가 많아 재생 횟수를 무제한으로 늘렸다”고 했다.
AI 스피커는 노인이 위급 상황에 빠졌을 때 119에 신고하는 SOS 기능도 갖추고 있다. 노인이 낙상하거나 쓰러졌을 때 “살려줘”라고 말하면 24시간 운영되는 관제센터로 전달되고, 센터에서 노인에게 전화를 건다. 노인이 전화를 받지 못하거나 전화상으로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즉시 119에 신고가 접수된다. AI 스피커를 개발·운용하는 SK텔레콤에 따르면 2019년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 SOS 호출은 6000건 넘게 발생했고, 이 중 500여 건은 실제로 119 출동으로 이어졌다.
● 스마트워치가 낙상 감지해 실시간 신고
전남 나주시 치매안심센터와 한양대 생존신호정보연구센터는 스마트워치를 활용한 노인 안전 서비스를 시범 운영 중이다. 지난해 치매 고위험군 노인 80명에게 스마트워치를 지급했는데, 착용한 노인이 낙상 사고를 당하면 이를 자동으로 감지해 관제센터와 자녀에게 알림을 보낸다. 산소포화도와 심박수도 실시간으로 측정해 건강 이상 신호가 감지되면 알림을 보낸다. 아직은 시범 단계지만 응급상황 발생 시 경찰과 소방에 자동으로 신고를 접수시키는 시스템도 준비하고 있다.
치매 노인의 인지 능력 개선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도 IT가 활용되고 있다. 광주 동구 치매안심센터는 기존에 사용하던 책 대신 태블릿PC를 활용해 인지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노인들이 집에서 태블릿PC를 가지고 틀린 그림 찾기, 시계 보고 시간 맞히기 등의 퀴즈를 푸는 형태다.
광주 동구 치매안심센터가 사후평가를 해 보니 3개월간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치매 노인들의 인지선별검사(CIST) 결과가 평균 14.3점에서 16.7점으로 높아졌다. 이 센터 정소희 주무관은 “태블릿PC를 활용하면 글이 아닌 음성과 그림으로 안내가 나오니 한글을 모르는 어르신들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지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