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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무리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grace
네 짐이 무거운 것을 감사하라
박영선목사/남포교회
히 13:7-8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7-8)
오늘 7절에 있는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에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하는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성도들이 신앙 생활의 현실에서 당하는 세상의 어려움 들을 신앙의 차원에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보이는 모델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을 요구했던 자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내용과 원칙과 그리고 어떤 자세로 세상을 극복했는가 보라. 저들이 무엇을 기대했으며 무엇을 감수했는가 보라. 이런 얘기들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라 하는 것은 묵상하고 기억하고 곰곰이 생각해서 너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저들의 삶의 원칙과 목표를 비교하여 보고 본받으라 하는 뜻이 됩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 가시면 바로 이런 차원에서 대표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절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는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
바울을 특별히 한 모델로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은 너희를 가르치던 자,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이 히브리서를 받아들여야 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소유한 그 믿음의 선조들은 많습니다, 우린 히브리서 내에서도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위인들을 볼 수 있고 또 여러 이스라엘의 역사가 소유했던 많은 믿음의 위인들을 저들이 소유한걸 압니다. 그러나 지금 저들이 모델로 삼기에는 그 옛사람들은 좀 시대적으로 멀죠.
동시대를 살고 같은 환경과 시대와 조건 속에서 신앙생활을 한 좀더 살아있는 더 직접적인 증인들이 지금 여기 묘사되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적합한 사람들로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들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들을 앞장 세울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저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 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저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자들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기록에 의하면 야고보 12제자 중에 야고보가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제일 먼저 순교를 당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고 베드로가 구전에 의하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라는 정도로 알고 있고 물론 그리고 다 죽었죠. 바울도 죽고, 요한도 죽고 다 죽었습니다. 그 중에 몇몇 사람들이겠지요. 그 사람들이 순교했기 때문에 더 큰 가치를 가질 것은 없습니다. 순교를 당했든지, 수한이 차서 죽었든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꾼으로 열심히 살다 죽은 이 사람들의 기록들이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고 다 동일한 신앙과 믿음을 따라 주어진 환경을 그 믿음으로 승리했을 것입니다. 제일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 바울이기 때문에 바울의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그의 전 생애를 지배한 사상과 원칙이 있다면 여기 있는 바와 같이 4장 1절에 나오는 데로 하나님 앞과 산 자 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는 것을 궁극적인 심판으로 또 그때 가서야 보상을 받는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보상은 저 나라에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우리의 목표와 이 내용과 원칙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 때 세상과 우리가 타협할 수 없는 것을 어디서나 얘기합니다.
2절에 있는 바와 같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왜요?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기준으로 삼고 있지 않으니까. 그래서 5절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세상이 우리 편을 들지 않고 방해하는 모든 일을 감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을 7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 그것이 모든 신자들의 목표이며, 이 세상을 사는 원칙이요, 시각인 것입니다. 이 히브리서 수신자들이나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나 아니면 어느 시대에 살았던 성도들에게나 가장 큰 문제는 언제나 뭡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상되리라는 기대지요. 더더욱 문제였던 것은 한국 교회도 지난 꽤 긴 기간동안을 이 정당한 신앙의 보상을 현실적인 것으로 많이 강조해 왔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던, 예수 믿으면 승리하고, 예수 믿으면 형통하고,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크게 쓰인다는 식으로 그 보상을 강조해 왔고 그 혼란이 사실 좀 깊었습니다. 세상은 영원한 나라의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신을 증명하라고 하고, 남에게 이기라고 가르치고, 그러기에 어떤 것이던 하라고 가르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이것과 전혀 다르죠. 예수를 믿고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며 경건과 거룩을 연습하며 그 일을 방해하는 세상에 미혹되지 말라 이거죠. 그래서 오늘 본문 식으로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잘 묵상해 보라 이거예요.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생각해 보란 말이 예요. 그들이 세상에서 어떤 보상을 바라는가. 현실에서 어떤 그 기대를 했었던가 보란 말이지요.
빌립보서 1장에 보면 이 예수 믿은 사람들의 삶에 전 목표는 세상 적인 것이 전혀 없었죠. 빌립보서 1장 12절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람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바울은 뜻밖에 그 예수님께서 직접 골라 뽑은 열두 제자들 보다 더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초대 교회사도 바울만큼 큰 일을 한사람은 없습니다. 이 사도 바울이 큰 일을 하자 그를 추종하고 그를 따르고 편을 드는 무리도 있었고 그가 이런 일로 이름을 얻고 많은 영향을 끼치는 일에 대해서 시기하는 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제 감옥에 갇힌 겁니다.
그러자 그의 편을 들던 자들은 자기들이 추종하고 하나님의 종이라 믿고 있던 이가 붙잡히게 된 것을 안타까워해서 이렇게 되면 우리가 그 뒤를 잇자 해서 열심히 자기네가 추종하고 그 존경하는 사도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지금 못하고 있는 일을 자기네가 책임으로 인계 받은 것처럼 열심을 내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기하던 이들은 바울이 갇혀서 일을 못하게 되자 뒤에서 모함하고 나쁜 소리하던 것을 이제 더 적극적으로 자기네들이 나서서 일을 함으로써 바울이 하나님의 진정한 충성된 종이었다면 하나님 왜 저를 감옥에 가뒀겠느냐 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자라서 갔다 가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진짜라 그래서 여기 있는 데로 시기하고, 투기하는 마음으로 바울을 더 괴롭게 하려고 바울이 갇힌 틈을 타서 자기네들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이런 이들도 있었답니다.
이거 우리 식으로 얘기하자면 열 불나는 일이지요. 그 동안 명예를 달라 그랬어요. 보수를 달라고 그랬어요. 열심히 신앙생활 했더니 좋은 결과와 좋은 명성이 얻어진 게 아니라 시기하고 모함하고 약 올리는 부류가 생겼단 말이예요. 그런데 18절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은 자기의 신앙행위나 자기가 맡은 그 직분으로 인하여 자기가 이익 볼 마음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주를 증거 하는 일이고 이일에 어떤 이들이 투기하는 마음과 시기하는 마음과 온전치 못한 마음으로 자기를 더 화나게 하고 잘난 척 하려고 행한 것마저도 주의 이름이 전파되는데 쓰여 졌다면 얼마나 다행이냐 라는 입장을 가지는 겁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결국 신앙의 싸움은 뭐냐 하면, 예수를 믿는 것을 현실적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냐 그게 아니라는 걸 각오하느냐의 싸움입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처음에 걸리는 시험은 다 이거예요. 예수 믿은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살 때 고통을 면하게 해주고 모든 일에 순탄한 길을 주느냐 안 주느냐에 관심이 있다구요. 그래서 예수 믿은 것으로 현실 생활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세상보고 뭐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가서 아우성을 친단 말이예요.
‘너희 세상은 왜 밤낮 이 꼴이냐 ’ 이렇게는 화를 안내요. 내가 정직하게 살고 내가 너희들한테 도움이 되게 사는데 너희들 왜(지랄)을 떤단 말이냐라고 하죠. 그럼 우리가 알아야 할 건 뭐예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세상은 거룩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경건과 영혼을 준비하는 자를 어떻게 해서든지 무너뜨리고 실패케 하려고 한다라는 말입니다.
세상이 무엇을 가지고, 무슨 무기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고통과 형통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여러분이 형통을 원하면 신앙을 놓으면 돼요. 세상과 타협을 하면 세상은 고통을 면하게 해줘요. 신앙을 붙들고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고 하지 마세요. 신앙을 붙잡으면 여러분 영생과 거룩과 영광을 얻어요. 고통이 면한다는 보상은 없어요.
계속 이 싸움이죠, 신앙이란 결국 이 싸움 이예요. 내가 세상에서는 고통을 당하고 세상에서는 말하자면, 세상과는 적이 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 편에서 떨어지는 일은 안 하겠다 이 싸움이죠.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 바울이 자기 생애의 고난당한 것을 공통분모로 하여 나열한 내용 이예요. “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번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게 다 무슨 얘기예요? 바울이 살아가는 그의 삶의 목표, 내용, 원칙, 동기 이런 것들은 얼마나 이 세상 것이 아닌지 영원하고 고급스러운 것인지 세상이 그를 막을 수 없었단 말이예요. 이 많은 수고를 얼마나 많이 수고했느냐의 차원에서 보지 마시고 40에 하나 감한 매 40-1개예요. 왜 40-1개냐 하면 유대인들에 법에는 때릴 때 40대 이상은 때릴 수가 없었어요. 최고의 벌이 서른 아홉 대가 되는 거죠. 이게 40에 하나 감한 매예요. 그걸 다섯 번 맞았어요.
서른 아홉 대를 맞으면 거반 죽어요. 싱가포르는 아직도 곤장을 때리는 나라인데 그 곤장형에 처할 때는 의사가 꼭 동석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한번에 3대 이상을 못 때립니다. 석 대면 벌써 거반 죽어 버려요. 서른 아홉 대를 5번 맞았다는 건 서른아홉 대를 맞고 거의 죽을 랑 말 랑까지 갔었으나 포기하지 않고, 또 그 길을 가서 또 서른아홉 대를 맞고, 또 그러고도 포기하지 않고 가서 또 서른아홉 대를 맞고, 그렇게 다섯 번을 맞고도 그것만이 끝이 아니라 세 번 태장으로 맞고 세상이 싫어하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길을 갔기 때문에 배타고 가다 파손하고, 한번은 돌로 맞아서 죽는 줄 알고, 여러 번 여행을 하는데 동족의 위협과 이방인의 위험을 만나요. 세상에서 반대하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느라고 이 모든 것을 했다구요.
그런데도 이런 것들은 문제가 아니예요. 그에게 어려운 일은 뭐냐 하면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일은 28절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을 얻은 이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일에 실패할까봐 아니, 흑암에 앉아 있고 사망에 그늘에 있는 영혼들이 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동참하는 일을 방해받는 일이 있을까봐, 저들이 미련하게 이것을 거부할까봐, 이런 일들이 안타깝고 목을 매고 있지 세상이 그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지금은 조금 변화가 됐지만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경기 고등학교가 최고 일류 학교였고 공부 열심히 하는 모범생들만 모인 학교였지요. 그런데 제가 사는 동네에 껄렁껄렁한 제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동네 친구죠. 광화문 근처에서 주먹 쓰는 세계에 끼어 있었던 쫄다구인데 고등학생들 지나가면 괜히 “야! 이리 와봐.” 그래서 “ 새끼! 빵 값 내놔.” 이걸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친구였는데 하루는 “야! 경기고등학교 학생들은 못 당하겠더라.” 그래요. 그 전날 경기 고등학교 학생을 한명 잡았는데 “야, 임마! 너 뭐야? 이 밤에 어디 다녀?” 그랬더니 가만히 있더래요. 그래서 “새끼! 말 안 해?”위협했더니 “ 빨리 때리세요.” 그러더래요. “ 빨리 때리고 놓아 주세요. 과외 공부 가야 되요” 그러더래요. 그럼 못 당하는 거죠. 맞고 안 맞고의 자존심이 없지요. 그런 문제는 상관이 없죠. 공부하러 가야 되는 것이 일편단심 가장 소중한 일이죠. 빨리 때려라 이거 예요. 시간 없으니까.
사도 바울이 지금 그렇게 사는 거지요. 너 때려라 이거 예요. 빨리 때려라 서로 나한테 빨리 때려라 이거예요.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는 서른 아홉 대 그 5곱을 오늘 하루 다 맞자 이거예요. 중간 중간 귀찮게 부르지 말고, 뭐 때문에 그렇지요? 영원한 나라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보상을 알고 있으니까. 여러분의 신앙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물어봐야 될 건 이겁니다, 여러분 왜 예수를 믿는 거예요. 예수를 믿어서 무슨 보상이 있다고 성경의 약속을 믿고 있어요? 이 세상에서 어떠한 형통함이 있다고 약속 되 있었느냔 말입니까? 예수 믿으면 병 낫는 다구요? 예수 믿으면 사업에 성공 한다구요?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요.
뭐가 복인지 모를 때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온천 한 만물의 주인인가를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그렇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힘과 능력과 여러분에게 복 주시는 이심을 설명할 수 있지요. 그러나 성경에 궁극적인 목적은 물질이 아니죠. 왜요?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그 물질을 주장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죠. 문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거죠. 하나님 마음에 드는 거지 물질이 아니죠. 하나님의 명령아래 있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의 원인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죠. 그래서 다 어디로 우리를 모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다운 데로 가는 것이죠.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생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빌립보서 3장 4절부터 봅시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 가노라”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게 된 이유가 뭡니까 근본적으로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을 어느 날 알게 된 것이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며 이 온 우주를 만물을 지으시고 역사를 통치하시는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어느 날 알게 됐지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죽으면 끝이 아니고 저 세상을 가는 심판이 있고 영원한 나라가 우리를 위하여 준비된 것을 알게 됐지요. 우리의 영원한 복을 위하여 그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나를 위하여 보내신 것을 알게 됐지요. 우리의 짧은 인생이 그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는 기간이라는 걸 알게 됐지요. 그런데 왜 언제나 바꿔 먹냐 말이예요. 왜 영원한 나라를 팔아서 지금을 땜질 하려고 하는 그런 미련하고 어리석은 생각이 더 많이 나느냔 말이죠. 믿음이 없어 그렇죠.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에게 공부를 시킬 때에도 우리 애들이 공부 평생 해 봤자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교 4년 16년 고생을 해야 되요. 그것만 하면 평생을 어느 학교 나왔다고 재고 사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아이들한테 밤낮 그 얘기하죠. 너 공부 열심히 해라, 공부 열심히 해라. 네가 전공하고 네가 나온 학교에서 뭐 혜택 받지 않아도 그 이름 하나가 평생 동안 너를 쫓아다닌다. 교회서 구역장을 해도 어느 대학 나왔는가가 문제가 된단 말이예요. 우리가 우리 자녀한테 이 짧은 인생 속에서도 무엇을 언제 준비해야 되는지를 안단 말이예요.
그런데 이 영혼을 준비하는 일에 우리 인생 팔십을 어떻게 희생하고 근신하고 감수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어리석고 미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얘기로 뭐라 그럽니까. 빌립보서 3장 7절 다시 보세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도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도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 함이라.”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해요. 고급하고 높고 귀하고 복된 것이에요. 실질적으로도 그래요, 무슨 개념과 관념에 관한 문제가 아니에요. 이상에 관한 문제가 아니 예요. 현실적으로 그래요. 그 안에만 복이 있어요. 영생이 있어요. 운명이 있다고요. 영광과 치욕의 갈림길이 있다고요. 인간의 인간 된 가장 고급한 영광된 구원과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를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일을 배신한 자들의 처절한 심판의 갈림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요.
예수를 믿고 예수를 믿는다는 말속에 포함된 내용들을 최소한 지킨다면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조금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생기는 어떠한 어려움들도 그것이 문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되고 넉넉히 극복할 자세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라고 성경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아주 재미있는 얘기가 나와요.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를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 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 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 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잘 보세요. 하나님의 사람들, 즉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 하려고 하는 게 뭐였느냐, 하나님께 인정받는 거예요. 하나님께 종교를 동원하여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구요.
신앙을 동원해서 자신을 증명하려면 그 얘기는 곧, 현실 세상으로부터의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남보다 종교성이 우월 한다든가 윤리 도덕성이 더 뚜렷하다든가 잘났다던가 하는 것을 증명 받으려는 이 시험 이야말로 굉장히 큰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 걸리는 현실에서의 어려움들이 처음에 어디를 찌르느냐 하면 자존심을 찌른단 말이예요. 정당한 신앙 생활을 했는데 왜 이 꼴이냐 하는 자존심의 찔림을 받는데 그건 세상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저들이 그 길에서 형통하지 않았다구요.
그 대표적인 예가 지금 이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경우인데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성도들을 시험하는 것이 있다. ‘사단의 가시’라고 표현한 어떤 치명적인 병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어느 곳에서는 바울의 표현을 따르면 너희가 할 수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줬을 것이라 라는 표현 때문에 그 심각한 안질이 있었다고 추측하는 이도 있고,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몸에 있다라는 표현이 갖는 그 시험한다라는 것과 어근이 같은 병중에 간질이 어근이 같습니다. 그래서 간질이었을 것이다 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하여튼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심각한 병이었던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그가 설교를 잘 하고 또는 병을 고쳐주는 기적을 행하고 그가 개 거품 을 품고 버둥거려 보십시오, 얼마나 심각한 손해가 됐었겠습니까? 저도 뭐 바울 만큼은 안 해도 심각한 외형적인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심심치 않게 그런 일을 당해요.
한번은 L.A에 갔을 때 가깝게 지내는 집사님이 저를 꼭 만나고 싶어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 그래서 약속 장소에 나갔어요. 그 분 보고 당신이 그렇게 오매 불망하던 박 목사님입니다. 소개를 했더니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소개하는 사람을 보더니 심각하게 “진짜예요?” 그렇게 물었습니다. 요즘도 가끔 어려운 일이 생기면 꿈에 그 일이 나타나요. 그게 뭐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아니, 사람을 면전에 놓고 진짜냐고 묻는 그런 몰상식한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랬더니 아, 목소리가 맞다 이렇게 되어서 확인이 됐는데 그 사람이 뭘 기대 한 거예요? 제 테이프를 다 듣고 제 책을 다 봤데요. 그러면 벌써 이거 뭐 목소리가 카랑카랑 하거나 내용의 살벌함을 봐서 ‘아, 이 사람이 벌써 날카롭게 생겼을 것이다. 마르고 눈에 총기가 있고 작을 것이다.’ 이쯤은 상상을 해야 될 거 아니예요. 그렇게 들으면서도 목사에 대한 기대는 다 뭐예요. 일단 약간 머리가 벗겨지고 부하게 생기고 자애롭게 큰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상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웬수들이) 근데 날 딱 보더니 (완전히 이거 뭐) 머리카락이 곤두섰지요, 쳐다보는 게 서늘하지요. 그러니깐 이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예요.
사도 바울은 이제 심각한 거죠. 그러나 사도 바울이 자신을 위하여 이 가시를 빼달라는 거 아니잖아요. 이렇게 해서 주님의 영광과 내가 전해야 되는 복음의 가치가 방해를 받을까봐 이걸 빼주십시오 그러는 데도 뭐래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며 짐이라.
그러니까 이 부분을 우리가 모른다구요. 우리는 바울이 훨씬 형통하고 멋있고 무슨 고급한 지위를 갖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더 잘되고 설득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그렇지 않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복음이 갖는 영원성, 저 나라에 속한 내세성을 잊고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 갖는 보상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게 된단 말이예요. 이것 때문에 그래요.
우린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한 모든 어려움들에 대하여 억울함에 대하여 넉넉하게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은 왜 안 주시느냐. 지금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영원한 나라에 가고 신령해지는 것이 우선 이고 그것이 혼동 될 위험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이 길과 방법을 하나남의 지혜와 능력에서 나옵니다. 최선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식을 기를 때에도 자식이 생각하는 것과 부모가 생각하는 것이 다르듯이 우리 그 애들 키워 보면은 공부에 대해서 이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번씩 다해요. 좀 열심 있는 자녀들이 이런 얘기를 하죠. 학교 가니까 쓸데없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자퇴하고 독립하여 개인으로 공부를 하겠다. 학원에 나가고 검정고시를 보아서 대학에 가야겠다. 그래서 1, 2년 빨리 대학을 가는 이런 발상을 가지게 되는데 그렇게 좋은 발상은 아닙니다.
그런 특별한 재주와 길을 가야 되는 특별한 학생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인정을 합니다만은 학교는 더 많은 것을 배우는 곳입니다. 공부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또래의 그 동료들과 어울리는 것을 배우는 귀한 장소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선생님도 만나고 마음에 안 드는 학생도 만나는 그런 그래서 다른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부모도 그렇게 자녀에게 요구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오히려 자녀들이 그 얘기를 하지요.
부모가 그렇게 하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보자면 그것이 훨씬 손해이고 자기가 생각한 것이 지름길인 거 같은 데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서 대해서 베푼 우리가 보면 고통스럽고 손해 보는 길 아니요.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이하신 인도하심 속에서 그의 지혜와 능력을 따른 고급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짐과 결심됨과 승리가 있을 줄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신자로써 이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어려움들과 많은 짐들에 대하여 울고불고할 문제가 아니라 묵묵히 지고 나갈 필요가 있으며 그래서 인내로써 신실한 믿음으로써 만이 아니라 기대를 가져야 된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여기서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상치 못한 하나남의 사람으로의 결실이 있다는 것 꼭 기억하셔야 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앞선 믿음의 위인들이 반열에 서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저들 위인들을 바라보고 숭배하고 추앙하고 그러는 입장에만 세우지 않으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우리의 현실 우리 삶의 배경, 조건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요, 나를 사랑하고 복 주시기 위하여 베푼 과정임을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충성된 여러분의 신앙 인생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