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승지 1번지, 영주 풍기
“풍기 차암 금계촌 동쪽 골짜기이니, 소백산 두 물길 사이다豊基車岩金鷄東峽, 小白山兩水之間.”
『감결』에서의 영주 풍기 금계촌 십승지 소개다. 소백산 두 물길은 남원천과 금계천을 말하는데, 이 사이의 동네가 몸을 피신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꼽혔다.
풍기 십승지마을은 한반도 남쪽의 내륙 깊은 곳에 자리한 데다 소백산맥이 북쪽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방패 역할을 해줌으로써 천혜의 요새를 이룬 땅이 되었다. 지금의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일대다. 이곳은 지리적인 이점으로 거란이나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 및 6・25 전쟁 때도 큰 피해 없이 지나갔다.
풍기가 가진 이 천혜의 자원은 훗날 자연현상과 그에 따른 인위적인 사회활동의 영향으로 ‘풍기3다豊基三多’란 말을 낳았는데 제주도의 ‘삼다도’와 같이 ‘돌・바람・여자’가 많기로 유명한 고장이 되었다.
소백산 두 물길 중 하나인 금계천. 남원천과 금계천 사이의 동네가 몸을 피신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꼽혔다. 지금은 많이 정리가 되었지만 예전 풍기 읍내 주변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넘쳐났다. 겨울철에는 매서운 바람이 잦았는데 다행히 비농기라 농사에는 지장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많은 것은 이북 주민들의 유입으로 직물산업이 발달하면서 이에 종사하던 여성의 수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자동화 시스템으로 여직공이 줄어들어 ‘3다’의 개념이 무색해졌다. 직물산업은 순전히 십승지마을이라는 이유로 풍기에서 집중적으로 태동했는데 그 배경이 재미있다. 미국에서는 금을 캐러 서부행렬이 이어졌다면 일제강점기의 한국에서는 이북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소달구지를 끌고 남쪽 땅 풍기로 몰려들었다. 이북 주민들은 정감록의 예언을 믿었기에 고향의 전답을 팔고 풍기에 정착한 것이다.
조선 최고의 예언가가 꼽은 십승지 1번지 조선 중기, 소백산 근처를 지나던 한 술사가 갑자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며 “이 산이 사람을 살리는 십승지다.”라며 감탄했다. 그는 “대소백산에 모인 정기는 천 년을 병란에 물들이지 않을 땅”이라고 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몸을 숨기는 데는 여러 산 가운데 소백산이 제일이고 그다음이 지리산이다藏身 諸山之中 小白爲上 智異次之.”라고 극찬했다.
그가 바로 조선시대 최고의 예언가인 격암 남사고(1509~1571년)다. 소백산과 풍기 십승지에 관해서는 남사고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남사고에 관해 특별히 관심을 끄는 또 한 가지는 위서 논란이 있지만 그의 호를 딴 책인 『격암유록』에서는 38선이 생기고 6・25 전쟁으로 백성이 살상된 후 미래에 남북이 통일된다는 것과 우리나라가 동양에서 최강국이 된다는 예언을 했다는 점이다. 38선과 6・25 전쟁은 이미 겪었으니 통일과 최강국이 될 날만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볼 일이다.
조선 최고의 술사 남사고는 명종 때 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서양에 노스트라다무스가 있다면 동양에는 남사고가 있다고 할 만큼 예언가로 유명한데, 이 둘은 공통점이 무척이나 많다.
우선 둘 다 동시대 사람이고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503년생, 남사고는 1509년생이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566년에 사망했고, 남사고는 1571년에 사망해 둘 다 63세에 사망했다.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삶을 보여주었다.
또한 점성술의 대가로서 예언 내용도 똑같다. 홍수와 역병, 기근, 전쟁 등이 예언의 주된 소재였는데 남사고를 비롯한 우리나라 정감록 또한 질병과 기근, 전쟁을 핵심으로 다루고 있다. 정감록이 금단의 책이었듯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 『제세기』 역시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금서가 되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제세기』를 통해 예언을 남겼고, 남사고는 『격암유록』을 남겼다. 호는 격암이며 본관이 영양인 남사고는 경북 울진이 고향이다. 평생 소학을 즐겨 읽었고 역학·풍수·천문·관상의 비결에 도통했다. 그의 예언은 꼭 들어맞아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려고 몰려들었다.
1575년(선조 8년)의 동서분당을 예언했고, 명종 말기에 이미 “임진년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 그에 앞서 1564년(명종 19년)에 “내년에는 태산을 봉하게 되리라.”라고 예언했는데, 끔찍하게도 이듬해 문정왕후가 별세해 태릉에 장사를 지냈다.
남사고는 다른 정감록보다 상대적으로 더 구체적인 표현을 썼기 때문에 신뢰감이 컸다. 그가 말에서 내려 배알까지 한 풍기를 비롯해서 소백산 일대를 제1승지로 꼽은 것은 예사롭지 않다. 다른 비결서에서도 풍기는 줄곧 제1승지로 부각되었는데 감히 ‘십승지 1번지’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금이 박힌 닭 모습’이라는 뜻의 금계바위
풍기 금계촌의 십승지 역사는 훨씬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말 도선대사가 기록했다고 하는 『도선비기』에서는 최고의 명당터로 “소백산 아래 풍기 금계리는 훗날의 안전을 도모할 터”라고 했다. 이미 신라 말~고려시대부터 그 존재가 부각되어온 것으로 조선 중기에 와서는 보신처로서 절정에 이르렀다. 정감록에서 ‘금계포란’의 형세라고 해 십승지 중 제1승지로 꼽았던 것이다.
십승지는 삼재불입지지라 해서 흉년이나 전염병, 전쟁이 들어올 수 없는 지역으로 이 십승지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태백산이나 소백산 등 높고 험준한 명산에 주로 자리 잡고 있어 외부 세계와 단절된 지형을 이루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문인 이중환이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소백산은 웅장해도 살기가 적다.”라고 했으며 “소백산 아래는 실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라며 극찬했다.
비결서에서는 “사람의 씨를 보전하려면 양백(태백과 소백)으로 가야 한다.”라고 했고 “곡식의 종자를 구하려면 삼풍(풍기・무풍・연풍)으로 가야 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만큼 소백산에 둥지를 튼 풍기는 어떠한 전란이나 기근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의 땅’으로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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