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수업이 끝나고 지하상가에 갔습니다.
중간고사 기간이기 때문에 이번 주에는 밤의 수업이 없어 기분도 가벼웠습니다.
은행 일을 보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이소에 들려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가기 신호가 오는 겁니다.
뱃속 깊은 곳에서 꾸루룩.. 꾸루룩..
위는 아니고요.. 소리의 발신지점은 그 한 뼘 정도 아래쪽입니다.
이건 엘리베이터가 방금 출발했으니 손님들이 지하층에 도착하기 전에 빨리 화장실로 가라는 신호입니다.
화장실은 만남의 광장을 끼고 다이소 반대쪽에 있으니 급하게 계산을 미치고 다이소를 나왔어요.
점점 내려오는 뱃속 엘리베이터 때문에 마음은 아주 급했지만 표정은 태연하게.. 발걸음은 우아하게.. 노력을 하면서 화장실 입구까지 갔습니다.
화장실 입구에는 묘한 아저씨가 서 있었어요.
얼굴은 완전 아저씬데..긴 머리를 뒤로 묶고.. 배래모 같은 모자를 쓰고 하늘색 청바지를 무릎부분에서 잘라낸 것을 입고 발에는 검은 신사구두.. 예술가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정신줄 놔버린 사람 같지도 않고..묘~한 분위기가 있는 아저씨이지만 저는 그 아저씨 정체를 궁금해 하는 것보다도 이제 거의 1층까지 내려온 뱃속 엘리베이터 때문에 서둘러서 화장실에 들어갔죠.
화장실 한 칸에 들어가 문을 닫은 순간 제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휴지가 있나..??’ 였습니다. 예전에 볼일을 보고나서 휴지가 없어 곤란해 했던 적이 있거든요.
화장실 안에는 휴지가 없고 제 가방 안을 뒤져봐도 휴지는 찾을 수 없었어요.
“휴지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 지하철 역 같은 곳에서는 휴지를 비치하지 않는 화장실 입구에는 보통 휴지 자동판매기가 있잖아요. 그래서 바깥쪽에 가봤는데.. 에궁.. 춘천은 아직 멀었네요~ 휴지자판기가 없었어요.
혹시 가까운 곳의 작은 매점 같은 게 없었나..?? 해서 급히 화장실 바깥으로 나가봤는데 주변을 둘러봐도 매점은 없고 휴지를 팔 만한 데는 만남의 광장을 사이에 낀 아까 있던 다이소 뿐이었어요.
어떻게 할까.. 생각을 했지만 다이소까지 갔다 올 여유는 없었어요. 손님들이 이미 지하층에 도착하고 막 문을 열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거든요.
'그래! 일단 일을 보고나서 방법을 생각해보자!!' 결심을 하고 얼굴을 돌리니 화장실 입구에 있던 아까 그 아저씨가 제가 고민하다 다시 화장실에 들어가려는 모습을 지켜봤었는지.. 저를 보고 방긋 웃더라고요~ 에궁.. 전 외간 남자가 저한테 미소를 보내는 것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ㅡㅡ;;;
그래서 화장실에 들어가서.. 급한 불부터 꺼야 하니 손님들을 무사히 바깥에 내보내고 물을 내렸어요.
그 다음에 제 가방을 열었어요. 휴지 대신 쓸 수 있는 것이 없을까.. 해서요.
제가 들고 있던 건 아주 작은 백이라.. 물건들이 별로 없었어요. 지갑 안에는 종이돈이 몇 장 있었지만 차마 그것을 사용할 수는 없고.. 그 외에 사용할 만한 것이라면 마트에서 장을 볼 때 받았다 지갑에 쑤셔 넣었었던 영수증 몇 장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트 영수증에는 제 이름이 적혀져 있어.. 너무나도 분명한 증거품이 될 것 같아(하긴 그것을 하나하나 펴 보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제 이름이 특이해서 혹시나 아는 사람이 본 경우에는 두고두고 그 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서요.) 사용이 망설여졌어요.
예전에.. 필호광장에서 역시 갑작스러운 엘리베이터의 하강 때문에.. 서점의 화장실에 들어가 같은 상황을 당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는 청바지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이 큰 역할을 했었죠. (사용 후에 버리기가 아까워.. 아주 조심스럽게 접어서 주머니에 다시 넣어 집에 오자마자 빨았어요. 기분에 찝찝해 입었던 청바지도 바로 벗고 빨았죠~)
근데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손수건도 없었어요.
이럴 때는 양말을 벗고 해결한다.. 고 하는 선인들의 지혜로운 말씀도 생각났지만.. 마침 신고 있던 게 제가 아끼는 등산양말이라.. 부피가 커서 사용 후의 집에 가져갈 때 문제가 될 것 같았어요.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고 말이에요..)
스스로에게 타일렀어요.‘침착해라.. 침착해라..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난다..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준비해 놓으셨을 거야..’
그래서 이번에는 방금 전에 다이소에서 산 물건이 들어 있는 봉지를 뒤져봤어요. 비누 두 개에 강아지 간식, 그리고 커피를 내릴 때 사용하는 필터가 전부였어요.
그런데 커피 필터를 본 순간 머리가 번쩍~!! 했죠~
‘바로 이거야~~!!’
커피 2~4잔 용 종리 필터 70장이 들어서 2천원. 넉넉하게 사용할 수 있는 양이었어요.
역시 하나님은 길을 준비하셨었구나~ 라고 감탄하면서 뒷마무리를 했습니다.
필터 종이는 피부에 닿을 때는 좀 거친 느낌이 드는데 수분을 흡수하면 금방 아주 부드러워져서 거시기를 거시기하는 데는 딱입니다... ^^*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다이소였고.. 집에는 커피 필터가 아직 몇 장 남아 있었는데도 왠지 필터를 사고 싶더라고요~
그 커피 필터 때문에 위기를 벗어나고..저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화장실을 나와 무사히 집에 돌아왔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저를 위기로부터 구해주시고 새로운 경험까지 하게 해주신 것에 감사하면서도..
아무래도 커피를 내릴 때.. 다이소에서 사온 필터를 사용할 때마다 생각이 날 것 같아요.
앞으로 커피 맛이 약간 찝찝해질 것 같다는 예감과 함께..
혹시 저 뿐이 아니라 이 글을 읽으신 분들도 커피를 내릴 때마다 찝찝한 생각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좀 미안하기도 하면서 오늘의 제 이야기를 끝~~!! 입니다. ^^;;;
첫댓글 이야기는 맛있다 할 수 없지만 글이 참 맛납니다. ^^
감사합니다.. ^^* 근데 커피 맛은 앞으로 쬐끔 떨어질 듯.. ^^;;;;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쓸수 있을까 부러워요. 졸린 강아지 모습 귀여워요
사실은 소설보다 흥미롭다...?? 일까요.. ㅎㅎ 감사합니다.
끝내 드러나지 않은 베레모아저씨 정체가 궁금해요.
저도 궁금합니다~ 근데..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의 기분이 왠지 범죄 아닌 범죄를 저지른 것 같은 이상~하게 아주 당당하지는 못하는 묘한 기분이라.. 주변을 살펴볼 생각을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빨리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그 아저씨가 그 때 아직 거기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사실 전 몰라요~ ^^;;;;;;
ㅎㅎㅎ...
재미있어 그냥 웃지요,,,^^
고맙습니다.. 언젠가 아주 급하실 때.. 참고가 되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누구나 한번쯤 당해 봤을 일인데~~~그죠?ㅋㅋ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오르다님은요..????
저는 칠전동 사격장 앞에서
달리기 하다가 배수로에서 머리 푹 숙이고..
목에 감긴 수건으로 처리를..
얼마나 시원 하던지...^^
우와~ 시원~~했겠어요~ 그 수건 다시 목에 들고 오셨남요..??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