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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을 기다리고 맞이 한 세대.>
(11개 질문으로 보는 경동 80년사 -56회~60회)
질문1. 2001년, 도전 골든벨 촬영을 하였는데, 당시 기억 남는 것과 에피소드는?
관련사실: 1,2학년은 전원 참가. 3학년은 40명 참가.
성북구 월곡동 성북구민 체육관에서 촬영.
윤인구 아나운서, 손미나 아나운서 진행.
2010년 다시 경동고 도전골든벨 촬영.
각박한 고3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종례시간에 이렇게 말씀하셨
죠. “경동고등학교가 ‘도전 골든벨’에 출연하게 되었다”. 모두들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단, 1,2,3학년 모두가 참여하기에 3학년에게는 40명 정도가 할당되었고, 3학년 15개반으로
환산하면 한 반당 2-3명씩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학교 체육관이 촬영을 하기에 협소
하여서, 성북구 월곡동에 위치한 성북구민체육관에서 촬영을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응원하는
학생들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MC는 윤인구 KBS 아나운서, 손미나 전 KBS 아나운서였습니다. 참고로 ‘도전 골든벨 경동고편’은 손미나 아나운서의 골든벨 마지막 촬영편
이기도 했죠. 단순히 문제를 푸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께서 야구 퍼포먼스를 보여주시기도 했고, 2학년 학급(10반)에서 담임 선생님께 노래를 불러드리기도 했고, 59회 졸업생인 신희동 동문이 고영균(지리과) 선생님의 성대모사를 해서 모두를 열광의 도가니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 때 3학년 13반이었던 이남우 학생이 아깝게 마지막 문제에서 탈락해서 골든벨을 울리지는 못했지만, 학창시절동안 흔하게 경험할 수 없는 방송 촬영이 학교 단위로
이루어지게 되어서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친구들과 그 때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경동고는 2010년에 다시 ‘도전 골든벨’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제가 2009년에 경동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갔었을 때의 첫 제자들(1학년 11반: 경동 68회 졸업생)이 골든벨에 출연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기뻤습니다. 그 때 탤런트 정보석의 아들이 경동고에 재학중이어서 골든벨에도 출연했었는데, 여러 모로 도전 골든벨하면 많은 기억들이 떠올라 지금도 미소짓게 합니다.
(58회 이훈희)
고등학교 시절 평소에 ‘골든벨’ 프로그램을 즐겨 보았었는데, 우리학교에서 촬영을 진행하여 고등학교시절의 대표적인 추억으로 자리잡았다. 긴 시간동안 촬영이 진행되었지만, 문제풀이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을 보며 응원하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또한, 문제풀이 중간에 친구들이 춤, 노래, 성대모사 같은 특기를 보여주어 지루함 없이 응원할 수 있었다. 특히, 선생님 성대모사를 하는 신희동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당시 전교생뿐만이 아니라 방송을 진행하던 사회자도 엄청 웃다보니 방송진행이 잠시 중단됐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그 당시 골든벨에 참여했던 학생이라면 그 친구를 모르는 졸업생은 없을 것이다.
(59회 고경현)
저는 경동고등학교 골든벨 방송 촬영 때, 골든벨 참가자로 문제를 풀었고, 또 장기자랑으로 선생님 성대모사를 하여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은 2학년 수학여행 당시 우리 2학년 학생들은 3-4가지 모듬활동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그 중 연극모둠이 있었습니다.
당시 수련회 교육 교관 께서 기존대본 (햄릿,춘향전 등으로 기억함)은 있지만, 기왕이면 대본을 만들어 보면 재밌는 추억이 되리라 말씀하셔서 당시 우리 연극 참가자들은 경동고 수업 모습을 가지고 연극을 만들어 보면 좋은 추억이 되리라 생각했었습니다.
저는 당시 지리과 담당이셨던 고영균 선생님 역할이었는데, 저와 고영균 선생님은 걸음걸이와 외모, 목소리가 비슷하여 당시 큰 히트가 되었고, 그것이 골든벨로 연결되어 방송을 타게 되었습니다.
당시, 촬영은 월곡동에 있는 성북구민 체육관으로 기억하는데, 방송촬영을 처음 보는 학생들은 모두 들뜬 마음으로 우르르 구경 갔다가 장작 10시간 가까운 촬영시간에 많이도 도망갔던 기억도 납니다.
1시간 방송을 10시간 가까이 촬영하는 고된 작업을 하는 걸 보면서, 사회가 만만치 않은 곳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그 당시에도 잠시했었습니다.
당시는 골든벨 방송이 장안에 화제였는데, 그 방송이 제 학창시절에 우리 경동고를 촬영했고, 그 방송에 제가 잠시나마 출연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입니다.
(59회 신희동)
질문2. 교련을 아시나요? 지금 경동 후배들에게 교련을 설명하라면 무어라 설명하시겠습니까? 또 교련에 대한 추억은 무엇입니까?
관련사실:58회 동문들은 두 학급 정도를 묶어서 경동고 과학관 건물과 야구부응원석에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함.
저희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고등학교 때 강한 교련교육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교련이라는 과목이 군사 관련, 안보 관련 과목이라는 말을 듣고, 제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그 과목이 폐지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니 여전히 교련이라는 과목은 개설되어 있었습니다. 단, 폐지가 확정된 과목이라 강하게 심도있게 교육이 이루어 지지는 않았고, 과학관 3층의 시청각실에서 2개 학급을 합반하는 형태로 운영되었습니다. 1명의 교련 선생님이 2개 학급 110명을 동시에 수업을 진행하였으므로, 분위기도 많이 산만했고 집중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그러한 분위기가 교련이라는 과목의 운명을 암시했던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야구장 스탠드(응원석)에서 진행되었던 삼각붕대실습과 운동장에서 조별로 수행했던
약식 제식실습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58회 이훈희)
교련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고등학교때 배우던 교련은 남과 북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학생들에게도 군사교육(제식 및 총검술등)을 시키려는 목적으로 1968년 도입되었으나, 우리 세대 때에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고, 1997년 7차 교육과정에서 교련과목이 필수가 아닌 선택과목으로 바뀌게 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도 하였다.
실질적으로 고등학교 1학년때 내가 교련시간에 배웠던 내용은 대부분 구급법 (지혈, 붕대감기 등)이었던 것 같으며, 구급법 같은 경우에는 실생활에서도 사용 될 수 있으니, 배워서 나쁠 건 없었을 거 같은데.. 이제는 사라져 아쉽기만 한 과목 인 듯하다.
교련하니 떠오르던 일이 고등학교 재학중 옆에 앉아있던 친구와 사소한 문제로 다투었던 적이 있었는데, 다툼 후 서먹서먹하기만 했던 사이를 교련시간에 옆에 앉아있던 친구와 붕대감기 하면서 다시 화해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다툰지 얼마 안 되서 어색했지만, 붕대감은 친구의 모습이 웃기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화해하게 되어버린.. 하나의 추억으로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59회 이정남)
교련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처음 경동고 1학년 때 교련을 배우면서 들었던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공부하는 학교에 제식 훈련, 붕대말기 라니...."
아마도 그 이유는 당시 교련 과목이 시대의 끝에 와 있어서 전 세대 기수들에 비해 체계적인 설명도 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 저희 다음 세대 기수는 교련을 아예 모를 것이기에 잠시 당시 상황을 간략히 덫 붙이자면, 처음 시간에는 교련 이론을 배우고, 두 번째 시간에는 경동고 야구장 응원석에 가서 실습을 했습니다.
붕대 말기, 제식훈련 인공호흡법 등을 배웠던 걸로 기억합니다.
1학년 최증기 선생님은 정식으로 교련을 가르치셨고, 2학년 신현중 선생님 때 부턴 더 교련이 약화 되어 1년 내내 한자펜글씨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에야 생각해 보면, 아마도 우리가 전쟁을 겪은 민족이고, 또 오랜 군인정치를 겪은 세대여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 우리 졸업 시점에 교련이 없어지며, 교련 선생님들이 각기 다른 과목 선생님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이런 역사도 있었음을 우리 선배들은 역사대로 기록하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우리나라엔 전쟁과 같은 비극이 없어서, 다시 교련 과목 따위가 부활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59회 신희동)
- 학창시절에 교련선생님이 갑자기 다른 과목수업하시는 것을 보면서 교련이 폐지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교련시간에 대해서 크게 기억에 남는 점은 없다. 운동장에서 제식훈련을 하거나 교실에서 펜글씨 수업을 했던 기억만 남아있다. 교련이 폐지되었지만, 교련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교련시간에는 머리를 다쳤을 때 붕대를 감는 법이라든지, 팔을 다쳤을 때 응급저치를 하는 법 등 평소에 배우기 힘든 분야를 가르쳤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실생활에 유용한 지식을 가르쳤었던 학문으로 기억한다.
(59회 고경현)
1학년 교련시간에 제식훈련과 응급처치교육 등으로 군사훈련의 기초인줄 알았었지만, 2학년 때 이후로는 펜글씨쓰기를 실시해서, 본질적인의미가 없어진 과목으로 인식됩니다.
(59회 오세훈)
질문3. 경동고는 현재 당신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중학생 시절 저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에 거주하였습니다. 장위동에는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인근 석관동의 석관고등학교로 진학하거나 공동학군을 지원하여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저는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을 통해 역사와 전통이 깊고, 선발 인원이 많아서 내신성적 관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경동고등학교를 선택하기로 하였습니다.
경동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면서 가장 좋아했던 시간은 체육시간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운동장 철망(보문동 방향)에 기대서 안암동, 보문동 일대를 바라보면 마음이 매우 편안해졌습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그 때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경동고등학교는 저에게 있어 늘 친구같은 존재입니다. 뭔가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할 때 가끔씩 경동고등학교에 가서 운동장 벤치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면 옛 학창시절도 생각나고, 학교를 위해서 꼭 무언가 하고 싶은 생각도 들면서 애교심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대학 졸업반(4학년)인 2009년에 모교인 경동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한 달동안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담당하였던 후배들이 66회(당시 3학년), 67회(당시 2학년), 68회(당시 1학년)였습니다. 그 때 교생실습을 하며 다짐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 다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반드시 친구같은 모교인 경동고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할 수 있게 노력하자”
(58회 이훈희)
아무래도 인생을 살면서 고등학교 생활이 평생에 미치는 영향력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영향력은 역시 학업이 아닐까 싶다.
어른들이 딱 3년만 고생하라고 했는데, 난 왜 고생은 안하고 눈치 보며 놀기만 한 건지 후회됩니다.
물론 인생에 있어서 학업이 전부는 아닐 수 있겠으나, 그 당시 열심히 학업에 열중했더라면,
내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선택지의 폭이 지금보다 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59회 이정남)
경동고와 현재 제 삶을 말하라고 하면, 경동고는 제 삶의 한 기준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도 역시 사회에서 책을 보고, 강의 등을 들으며 발전을 꾀하고 있지만, 제가 가진 지식의 전반은 우리 경동고등학교에서 쌓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제가 사회에 나와 많은 이들과 교우하고 있지만, 우리 경동고등학교에서 같이 수학했던 동기들과 또 많은 선후배님들의 관계가 제 인간관계에 기본임을 인정합니다.
또 어렵고 힘들 때, 돌아볼 수 있는 안식처며, 제 마음의 휴식처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우리 동문 여러분은 경동고가 어떤 의미이십니까?
(59회 신희동)
사실 현재 나의 삶에 있어서 경동고가 큰 의미가 있지는 않다. 하지만 경동고를 졸업한 좋은 친구들과의 정기모임을 가지며 가끔씩 고등학교시절의 추억을 얘기하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또한, 사회생활을 하며 높은 지위에서 역량을 발휘하는 선배님들을 보며 자랑스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나 역시도 나의 분야에서 즐겁고 열심히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경동고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59회 고경현)
당시 재학생 일 때는 몰랐지만, 졸업 후의 의미가 큽니다,희동이와 59회 동창회를 이어가는 것부터 해서, 정서진 여행, 야구부후배들 응원 등등 추억과 감동을 지닌 활동들을 같이 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59회 오세훈)
질문4. 39회 이용준 선생님과의 에피소드는?
고3때 담임선생님이 이용준 선생님이었고, 졸업식 날 용준 선배님하면서 정말 재밌게 졸업식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59회 오세훈)
2학년 때까지도 이용준 선생님의 존재를 잘 몰랐습니다.
수업에 들어오시지도 않으셨고, 늘 등굣길 교문을 지키시는 무서운 학생부 선생님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한지 모르지만, 동문 선생님들에겐 악역(학생부)을 많이 권장했던 모양입니다.
3학년 지구과학 첫 시간.
크러스트가 뭐냐는 이용준 선생님의 질문을 시작으로 설사에 비유하는(?) 화산분출 지각이론 등.
정말 숨 넘어가게 재미있고 유익했던 지구과학 수업.
(당시 피자 광고로, 크러스트 피자치즈 가 방영 중이었습니다.)
경동고는 매 쉬는 시간 마다, 라면 제육 돈까스 등을 팔았는데, 아침 1교시 전에 가면 항상 한쪽에서 경동 라면을 드시던 이용준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 때는 왜 선생님이 학생식당에서 저러고 계시나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동문교사 로써 늘 이른 아침에 교문 지도를 하시느라 아침을 못 드셨던 것 같습니다. 또 학생들과 허물없이 편하게 지내셨으니 가능했다고도 생각됩니다.
또 이발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교문에서 두발 지도를 하셔서 바리깡을 사용해 고속도로를 내시곤, 후배들이 안타까워서 쉬는 시간에 찾아가면 반삭을 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또 당시 질풍 노도의 시기에 학생들이 맘을 못 잡고 찾아가면 직접 반삭을 해 주셔 학생들의 마음을 잡아주기도 하셨습니다.
저 역시도, 이용준 선생님께 세 차롄가 반삭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 이발비를 갚으려고(?) 요새도 종종 연락을 드립니다.
한 선배에게 들으니, 현재는 혜화여고에 계시며,
지금도 학생들에게 열정과 혼신을 쏫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 열정과 혼신 덕에 오늘의 저도 있습니다.
이용준 선생님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59회 신희동)
질문5. 경동 부식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까?
관련사실: 당시, 경동고 부식은 점심시간에 매일 다른 식사를 판매.(식권2,000원)
아침 조회 후와 매 쉬는 시간에 라면(700원),제육,돈까스(2,000원) 판매.
매점에서 각종 과자와 음료 판매. 개맛살과 3단 돈까스 판매(500원)
개맛살과 3단 돈까스를 라면에 넣어 먹곤 함.
경동고 당시 식당은 1999년 3월 초 준공 예정이었으나, 3월 중순 준공 완료.
학교에는 학생식당과 매점이 존재하였습니다. 학생식당에서는 점심 급식외에도 라면과 제육덮밥을 수업 시간과 점심 시간 이외의 시간대에 판매를 하여 학생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았습니다. 가끔 학교 선생님들께서도 라면과 제육덮밥을 드시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라면의 경우에는 면을 미리 삶아서 끓인 국물을 부어주는 형태였고, 제육덮밥은 밥에 제육볶음을 올려주는 형태였습니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고, 직접 끓인 라면보다도 맛이 덜할 것 같은 느낌이었으나,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할 정도로 당시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 동생도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60회 졸업), 동생과 싸워서 말을 안 하다가 동생이 식당 근처에서 배고파하는 모습을 봐서 동생과 동생 친구에게 제육덮밥을 사주고 나서 동생과 화해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라면과 제육덮밥을 다시 한 번 먹어보고 싶네요. 경동고 50대 후반 기수와 60대 초반 기수는 라면과 제육덮밥에 대한 추억을 다들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58회 이훈희)
고등학교 시절 식당에서 친구들과 함께 각종 부식을 먹었던 추억이 있다. 식당에 가면 없는게 없었다. 배고픈 학생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엄마 품 같은 공간으로 기억된다.
특히, 나는 제육볶음과 라면을 좋아했었는데, 10분 동안의 짧은 쉬는 시간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양을 먹고서 다시 교실로 재빠르게 돌아왔었는지, 지금 보면 내 자신이 대단하고 신기하게 느껴진다. 배고픈 나의 고등학교 시절에 포만감을 선사해주었던 경동고등학교 식당이 그립다.
(59회 고경현)
경동고 를 우리 50기 후반에 다닌 동문이리면 아마 절대 경동고의 부식들을 잊지 못 할 것입니다.
경동고는 점심시간에 정규 급식 외에 매 쉬는 시간 마다 부식을 판매하였는데, 아마도 이 기억은 타학교에는 없는 우리 경동만의 추억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경동식권은 2000원, 라면 식권은 700원이었습니다.
2000원 짜리 경동식권이면 점심식사나 혹은 쉬는 시간에 팔던 제육이나 돈까스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매 수업이 끝나면 매점으로 달려갔고, 한참 성장기에 있던 우리는 정말 엄청이도 먹었습니다.
저 역시 10분 쉬는 시간 동안 제육에 라면에 빵을 한움큼 물고 교실로 달려간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당시 좀 껄렁껄렁(?)한 친구들은 수저 하나만 들고와 많이들 뺏어먹기도 했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학교를 마치면 장위동에 있는 도서실에서 공부를 하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 늘 잠이 부족했습니다.
때문에 점심시간은 늘 잠으로 보내서, 거의 항상 아침 1교시 전에 제육을 먹고 점심시간에 잠을 보충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 1교시 전이냐면, 거의 아침을 안 먹고 나오는데다가 아침에 가면 전날 남은 제육을 처분하느라 양을 곱으로 주었던 까닭입니다.
(그 때, 한쪽에서 우리 동문 이용준 선셍님의 라면 드시던 모습을 자주 뵈었습니다.)
경동 라면은 면에 국물을 부러주는 라면이었는데 그 위에 매점에서 파는 3단 돈까스나 개맛살 등을 띄워 먹곤 했었습니다. 그 땐, 술도 안 마셨는데 그 때부터 해장의 맛을 알았지 싶습니다.
졸업을 하고 아직도 59기 친구들과 모임을 하는데 경동 제육과 라면은 늘 회자되는 내용입니다.
그 땐, 참 엄청이도 먹었는데요....그 때가 그립습니다.
제육, 돈까스, 라면 나눠 먹던 친구들은 오늘날 뭐하고 있는지 새삼 궁금해지네요.......
(59회 신희동)
경동고 쉬는 시간 하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는 추억이 바로 식당에서 부식 먹기가 아닐까 싶다.
제육덮밥은 밥위에 제육을 부어주고, 라면은 미리 삶아놓은 면에 국물만 부어주었는데,
그 당시 그 음식들이 그렇게 맛이 있었고, 지금도 그 맛을 잊을수가 없는데,
음식에 추억이라는 조미료가 들어가서 그런 것일까? 나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중 하나이다.
수업 끝나면 그 짧은 10분 안에 제육이랑 돈까스 먹어보겠다고, 열심히 뛴 기억이 누구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때는 수업종 치기전에 끝내주는 선생님들이 어찌나 고맙던지..
반대로 수업종 치고 끝나는 선생님들이 미웠다는 건 비밀로 조용히 간직할까 한다.
내가 고등학교때 잠시 게임에 빠져 있었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PC방가서 게임하려고, 점심비용으로 받은 식권비(2000원)을
라면식권(700원)으로 대처해서 3교시 끝나고 라면으로 먹고, 점심 굶고 PC방 갔던 기억도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때 점심을 잘 챙겨먹었더라면, 내 키가 5Cm는 더 커있지 않았을까..
잃어버린 5cm를 찾아서...
(59회 이정남)
질문6. 2002년에 우리나라는 한일 월드컵을 개최하고, 4강에 드는 놀라운 결과를 거두었는데, 월드컵과 관련된 경동고 에피소드가 있습니까?
관련사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한국 감독 히딩크 (한국 이름 : 희 동구) 활약.
역사상, 최초 대한민국 4강 진출.(전차 군단 독일에게 패배)
2002년 월드컵은 나에게 아쉬운 추억중 하나이다.
2002년 당시에 나는 고3이었다. 매 경기가 있을 때 마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가 응원하고, 환호하고, 함께 기뻐했었는데..
나는 딱 집에서 TV로 경기만 봤을 뿐 이다.
그 뜨거운 열기를 함께 거리로 나가 느끼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이 좀 아쉬운 기억으로 남는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그 열기를 함께 느낄 준비가 되어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다시 한번 그때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고, 그때에는 나도 많은 추억을 남기고 싶은데,
짝짝짝짝짝~ 대한민국~ 파이팅! 다시 한번 그날의 기적을 위해서!
P.S
당시 학교에서는 교문을 좀 지나 선생님들이 등교하는 학생의 두발검사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월드컵때 8강 4강 진출한날은 두발검사를 하지 않고,
선생님들 대신 푯말에 이런 글 들이 적혀있었습니다. 8강때는 무적함대 격파하자(스페인전때..) 4강때는 전차군단 무찌르자(독일 전때..) 라고요.
(59회 이정남)
2002년 월드컵 당시 경동 59회 였던 저는 불행히도 고3 수험생이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는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대한민국 붉은 악마가 월드컵 4강에 진출한 놀라운 월드컵이었습니다.
당시, 고3이었던 우리 59기에도 일화가 있습니다.
첫째, 당시 우리는 고3 수험생으로 방과 후 야간자율 학습을 하였는데 당직 선생님들의 꼴 이 터졌을 때, 소리치는 함성에 가슴 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경우는 방과 후 독서실에 다니며 공부하던 동기생들에게도 볼 수 있었는데, 당시 혈기 왕성했던 고3 학생으로써는 정말 참기가 곤욕이었습니다.
소문으로는 당시 광화문 응원전에 참석하려고 경동 담을 넘어 도망치다가 다치는 수험생도 있었다고 하니 그 열기를 새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 우리 대한민국이 4강에서 프랑스에게 지고 난 다음날, 학교에 프랑스가 약물 복용으로 우승 취소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아서 하루 종일 교실이 떠들썩 했던 일화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대표팀이 4강에 진출한 것만도 기쁘지만 못내 아쉬운 마음에 그런 소문도 돌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이후에는 아직도 우리 대한민국이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 하고 있어 아쉽습니다.
그 때, 맘 놓고 못 했던 응원, 목이 터져라 하고 싶은데.
그 당시, 떠들썩 하던 서울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 온 시내 거리.
다시 우리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축구 파이팅!~^^
대한민국 &경동고 파이팅!~^^
(59회 신희동)
나는 고등학교 때 야간자율학습을 했었다. 학생의 자율에 맡겨 밤 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하는 시간이었는데, 수능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이다 보니 열심히 공부를 했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이 시작되고 나서는 축구경기를 보고 싶은 마음에 공부를 소홀하게 되었다. 특히, 교실에 있는 TV를 통해 몰래 우리나라 축구경기를 보며 응원하기도 했다. 자율학습을 감독하는 선생님께서도 우리나라 경기가 있는 날에는 학생들의 일탈행동을 모른 척 해주셨던 기억이 있다.
(59회 고경현)
이용준 선생님 왈, 이런 기회는 인생에 절대 오지 않는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국민적인 행사에 빠지면 후회된다는 이야기에.
8강전, 4강전 모주 단체응원가는 영광 아닌 영광을 누리고...지금도 후회 하진 않지만...
수업시간에 중계 방송 보고...의미있는 즐거운 학창시절 이었다 는 건 분명하다.
(59회 오세훈)
질문7. 경동 마라톤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까?
58기 이전에는 다른 장소에서 경동마라톤대회가 열렸다는 말도 얼핏 들었던 거 같은데, 58기는 3년 연속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경동마라톤대회가 진행되었습니다. 1시간 간격으로 3학년이 출발하고 2학년, 1학년이 순서대로 출발하였습니다. 학교 체육복을 입고 뛰었는데, 선생님들께서 코스마다 중간에 위치해 있으셔서 확인 도장을 찍어주셨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대략 7km 코스로 기억하는데, 운동에 그다지 능력이 없었던 저는 1학년 800여명 중 615등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2009년 3월 30일부터 4월 24일까지 4주동안 경동고등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하였는데,
그 사이에 경동마라톤대회가 있어서, 교생 자격으로 다시 한 번 경동마라톤대회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직접 뛰는 것은 아니라 선생님들을 보조하여 도착지점에서 학생들의 기록을 체크하고 안전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다시 한 번 경동마라톤대회를 몸소 느낄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됩니다.
(58회 이훈희)
매해마다 전교생이 과천 서울랜드에 모여 마라톤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나는 느리게 걷는 완주를 지향했기에, 친구들과 함께 꼴지 그룹을 형성했었다. 학교생활을 하다보면, ‘집-학교-학원-집’이 되기 일쑤여서 걷기 운동을 하기 힘들었는데, 긴 거리를 걸으며 건강도 챙기고 스트레스도 날릴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59회 고경현)
경동 마라톤은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대공원 산길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던 추억이 있다.
마라톤에서 무슨 산길을 거닐며 추억을 나누냐 묻는 사람들이 있을수 있지만, 나는 마라톤에서 뛰지 않았다.
처음 시작 후 잠시 동안과 마지막 구간 코스를 제외하고는..
친구들과 담화를 나누며, 추억을 나눴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라톤 10KM구간 열심히 뛰어봤어도 될 법 하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는
힘들게 뛰어 무엇 하냐, 그냥 천천히 걸으면서 놀자는 분위기가 형성이 되었고, 나또한 동참하고 있었다.
후회도 하지 않으며, 나쁘게도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친구들과 밖에서 이야기하며 추억을 쌓는 것 도 좋았던 것 같으니..
(59회 이정남)
경동고등학교는 제 기억으로 매 5월에 경동마라톤 대회를 개최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마라톤 코스는 과천 어린이 대공원이었는데 거리는 약 7km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에 관한 2가지 일화가 있는데, 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째, 1,2,3학년 3번을 모두 함께 달리신 교감 선생님.
경동고등학교 교문을 보면, 버스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올라와야 하는 경사로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희 학창시절에는 이 경사도 버거워하는 학생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렇게 헉헉 대며, 학교 교문을 통과해 등교하면 운동장에서 늘 달리기를 하시던 교감 선생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늘 학생들에게도 체력이 있어야 공부도 한다고 강조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경동 마라톤 1,2,3학년이 3시간의 차를 두고 7km씩의 마라톤을 뛰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 교감선생님 께서는 1,2,3 학년 총 3회 21km를 학생들과 같이 달리셨습니다.
보통 다른 선생님들은 자기 학년 때나 한번 달릴까 말까 하셨지만 말입니다.
아마도 학생들과 같이 달릴 수 있는 것이 좋아서 그러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마라톤 후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리가 아파 쩔쩔 매면서, 아마 교감 선생님도 한 동안은 달리기 안 하시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마라톤 이후 그 바로 다음 날 부터도 아침 마다 경동고 운동장에서 달리기 운동 하시던 교감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잊지 못 합니다.
그 때, 그 교감 선생님 께서 지금은 어찌 지내시는지 새삼 궁금하네요.
두째, 김영상(국사) 선생님과의 질주.
경동 마라톤이 5km를 돌 때 쯤이 되면, 평소 운동을 게을리 했던 학생들은 숨이 벅차 오르고, 넉다운이 되서 걷기로 전환 하는 일이 자주 생깁니다.
저 역시 5km 부근에서 지쳐 넉다운 직전이었는데, 제 옆으로 김영상 선생님께서 긴 숨을 몰아 쉬며 달리고 계셨습니다. 그 때, 젊은 내가 선생님께 질 순 없다며 선생님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골인선에 들어 간 기억이 납니다.
마라톤이 지난 다음, 국사시간 김영상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마라톤 힘들었죠? 난 마라톤 때, 희동이가 옆에서 자극을 줘서 시간이 많이 단축됐습니다. 서로 친구들끼리 좋은 자극을 많이 나누세요. 또 여러분이 이번에 보니까 마라톤 후 매우 힘들죠? 공부나 인생도 그렇습니다.늘 꾸준히 운동하고 준비하면 큰 일이 있어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좋은 상대를 두고 늘 노력하고 살면、언젠간 쑥 성장한 본인을 볼 겁니다. 파이팅!"
저는 이 마라톤의 경험과 김영상 선생님의 이 말씀을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참 경동마라톤도 우리가 그 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값진 경험이 아니었나 생각 됩니다.
(59회 신희동)
질문8. 경동고 담은 당시 포트리스로 불리며 드높았었는데, 현재의 경동고를 보며 느낀 점은?
관련 사실 : 본관 개축 공사 완료. ( 2009년 11월)
경동 포트리스 철거. (2010년 초)
제가 고1때만 하더라도 학교에서의 두발검사가 매우 엄격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심지어 당시 정문에는 소규모의 경비실 건물이 있었는데, 그 뒤의 경사진 부분들을 선배들이 교복을 입고 올라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행위들은 매우 위험한 행동들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즉각 중지시켰고, 등교는 무조건 정문을 통과해야만 할 수 있도록 등교지도가 강화되었습니다. 학교 위치상 후문이 없고 정문만 있는 구조여서, 이러한 일들도 발생하였다고 생각됩니다.
(58회 이훈희)
경동고의 처음 입학 할 때 부터, 경동고의 높은 담은 마치 성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경동고에 재학 중일 때는, 정말 그 높은 담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들어가는 곳도 좁은 교문 하나요. 나오는 곳도 좁은 교문 하나니, 철의 요새란 이런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 재학 때만 해도, 체벌이 허용되던 때여서 당시 윤리과 박종민 선생님 시간에 과제 미비로 체벌 당할게 두려워서 담을 넘다가 다리가 부러지는 학생이 생겼던 사건이나, 2002년 전세계를 시끄럽게 했던 월드컵을 보려고 담을 넘다가 다리가 뿌러지는 등.
정말 도망치기(?) 힘든 요새였습니다.
졸업 후에도 동문 친구들과 종종 학교를 방문하는데, 어느 핸가 그 높던 담이 없어지고 뻥 뚫려서 후배들이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못내 서글픈 생각이 들어서, "아 나도 꼰대(?)가 되었나!" 하는 생각도 하여보았습니다.
하지만, 높다란 담 대신 후배들이 자유로이 거늘 수 있는 계단을 보며, 참 좋아보인다 하고 미소를 짓기도 하였습니다.
높다란 상막한 구시대 담벼락은 없어지고, 환하고 예쁜 디자인에 학교에서 공부하고 자랄 후배들을 생각하니 마음도 좋습니다.
우리 후배들이 구시대와 다른 새롭고 자유로윤 환경에서 새 미래의 주역들로 성장하길 바래봅니다.
(59회 신희동)
현재의 경동고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포트리스를 연상시키는 우뚝 솟아있는 위용은 과거나 현재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오르막이 길게만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건강에 도움이 되겠다는 긍정적인 면으로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새롭게 건물이 리모델링되어, 과거보다는 학업을 위한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공부가 다는 아니지만, 후배들이 이 글을 본다면 ‘공부할 때의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이다’라는 글귀를 조언으로 해주고 싶다.
(59회 고경현)
현재의 경동고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포트리스를 연상시키는 우뚝 솟아있는 위용은 과거나 현재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오르막이 길게만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건강에 도움이 되겠다는 긍정적인 면으로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새롭게 건물이 리모델링되어, 과거보다는 학업을 위한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공부가 다는 아니지만, 후배들이 이 글을 본다면 ‘공부할 때의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이다’라는 글귀를 조언으로 해주고 싶다.
(59회 오세훈)
질문9. 경동 야구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까?
당시 학교에는 조태행 체육 선생님이 계셨는데, 경동고등학교 졸업생이셨습니다. 따라서 야구 응원을 가야할 상황이 발생하면, 체육관에 모여서 조태행 선생님을 필두로 하여 경동 응원반의 시범을 보고 응원 연습을 신나게 하였습니다. 학교 인근에 동대문 야구장이 있었기에, 야구 응원을 가게 되면 오전 수업만 하고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동대문 야구장에 가서 응원을 하였습니다. 재학생들뿐만 아니라 졸업하신 선배님들도 오셔서 응원해주시는 모습을 보고 매우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올해도 코로나 위기 속에서 고등학교 야구리그가 진행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시간을 내서 꼭 경동고 경기에 응원을 가도록 하겠습니다.
(58회 이훈희)
아직도 그때의 그 경기가 기억 속 에 생생하다.
학교에 야구부가 있는건 알았지만, 한 번도 경기도 못보고 추억을 쌓을 거리도 없다보니, 그냥 야구부가 있구나 하고 넘어갔던 시절이 있었다.
4강진출(아니면 수정바람)을 하게 되어 한번은 학교 차원에서 응원을 나가게 된 적이 있었다.
상대 고등학교는 마전고(아니면 수정바람, 모르겠으면 이 라인 삭제.) 였던 것 같다.
지금은 없어진 동대문운동장에서 경기를 하게 되었는데,내 생애 첫 야구시합구경이었다.
응원할 대상이 있는 야구 경기는 굉장히 재미있었다.
친구들과 서로 의기투합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모교인 경동고를 응원했다.
조금 떨어진곳에서는 함께 경동고를 응원하는 선배님들의 응원단이 있었다.
우리한테 뒤쳐지지 않을 만큼 굉장히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선배님들의 모습을 보며,
알수 없는 마음이 들었다.
선배님들과 우리들의 응원 때문이었을까?
9회초까지 경동고가 2-0으로 계속 리드해 나가게 되었다.
허나 불운이 있었을까.. 9회말 2-3으로 역전당하며, 아깝게 패했던 기억이 있다.
계속 이기고 있다가 마지막에 역전당해서 였을까..
아쉽고 또 아쉬웠지만.. 그게 스포츠이자 승부의 묘미 아니겠는가..
(59회 이정남)
경동고 재학 때는 솔직히 야구 뿐 아니라 스포츠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지 못 하지만,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 경동고 1학년 때, 동대문 야구장에 응원 갔을 때인데, 친구들과 흥분해서 고함 지르고 우리 쪽 담장에 경동 선수들이 보이면 소리소리 지르며 응원하다가 목이 나갔던 추억이 있습니다.
둘, 하나와 같은 경기로 기억하는데 제 기억으로는 당시 학교급식실 사장님이 등장하셔서
"경동이 오늘 경기에서 이기면 내일 하루 돈까스•제육을 무료로 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셔서, 학생들이 더욱 목이 터져라 응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으론 그날 야구에서 져서 먹지는 못 하였던 걸로 기억합니다.(상대팀 : 마산공고?)
이 급식실 사장님과 우리 경동의 관계는 두고두고 미스터리 입니다.
혹시, 우리 경동 선배님은 아니셨을까 추측해 봅니다.
셋, 졸업 후 10년 가까이 지나서 59회 동창 오세훈과 광진구 구의 야구장에 경동야구 응원을 갔던 추억이 있습니다.
거의가 학부모와 학교 관계자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한쪽에서 선배로써 목청 껏 응원했습니다.
우리의 응원소리를 들었는지, 우리 경동 야구부 후배들은 9회말 역전승을 하여 우리 응원에 부응했습니다.
올해도 동창들•선후배들과 경동야구 응원을 가고자 하였데, 코로나가 우리를 막고 있어 야구장에 가지 못 하여 상당히 아쉽게 생각합니다.
하루 빨리, 코로나가 없어져서 경동 야구를 야구장에서 소리쳐 응원하게 될 날을 소원합니다.
경동 야구 파이팅!~
대~~한~~경~~동~~!!
(59회 신희동)
고등학교시절에 전교생이 야구 경기 응원을 간 적이 있긴 하지만, 졸업후 후배들경기를 응원간 것이 더 추억이다. 희동이도 같이 기억하겠지만... 주말리그 응원가서 선배들이 응원해주는느낌은 정말 기분 좋았다..
(59회 오세훈)
질문10. 졸업 후 동문들과 어떤 활동을 해왔으며,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싶은지 서술하시오.
지금까지는 친한 친구들과의 친목 도모의 만남과 활동 위주였는데, 뭔가 기회가 되면 학교에 대한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을 날이 반드시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경동고 파이팅입니다.
(58회 이훈희)
- 경동고를 졸업한 친구들과 가끔씩 모임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모두 사회활동을 하는 친구들이다보니, 같이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회포를 푼다. 현재 어딘가에서 우리처럼 소규모로 모임을 하고 있는 동기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동기들과 함께 더욱 더 크고 활발한 모임활동을 해나가고 싶다.
(59회 고경현)
지금도 연락하며, 친하게 지내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있다.
가끔은 옛 고등학교 추억 이야기도 하며, 그때는 그렇게 변하지 않을것 같던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조금씩 세월에 함께 늙어가는 모습을 볼때면,
감회가 새롭다.
경동고 졸업후 딱히 어떤 활동을 하는건 없지만, 그냥 그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끼리 서로 만나 하나둘 이야기하다보면
그 재미가 새롭고 즐겁다.
앞으로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많은 우리, 서로 함께하며, 행복하게 지냈으면 한다.
(59회 이정남)
경동고를 졸업하고, 대학교 1학년 때는 거의 바쁘고, 재수도 거의 끝난 21세 때, 경동고 앞에서 당시 59회 동문 9명이 모인 걸 시작으로, 59회는 아직도 6명이 석달에 한 번씩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물류회사 사원으로, 은행원으로, 외국계열 회사직원으로,요리사로, 공기업 직원으로 모두 바쁜 생활 중에도 3,6,9,12월에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3월은 코로나로 실시하지 못 했습니다.)
대학을 다니며, 술도 마시고 돌아다녀도 보고, 군휴가 나오면 으례 연락해서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경조사 및 애경사, 결혼식•장례식도 같이 하여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습니다.
특히, 모임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친구 각자각자의 사정을 살펴 모임시간과 장소를 정하기가 참 어려운 점 중 하나입니다.
특히, 오세훈 동기와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데, 토요일 밤에 일 마치고 태안으로 바다를 보러 간 일, 남양주 숯가마에서 밤을 샌 일, 구의 야구장에 경동 야구를 응원 간 일 등 참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
작년 연말 부터 세훈이와 저는 경동 경기 북부 모임에 참석 중인데, 이홍만(44회) 선배님을 비롯 하여 많은 선배님들께서 따뜻히 맞아주셔서, 경동인의로써의 자부심과 애착이 더욱 상승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자랑스런 경동인의 한 사람으로써 부끄럼 없이 열심히 생활하며, 여러 선후배님들과 동기들과 함께 경동의 자부심을 꿋꿋히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59회 신희동)
질문11. 경동인 으로써 자부심을 느꼈던 적이 있다면, 언제 였습니까?
경동인으로써 자부심을 느꼈던 적을 꼽으라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동안은 옛주소로 동창회에서 오는 우편물을 간간히 받아보곤 하였다.
내용은 그냥 한번 쭉 흩어보고 치워놓고.. 나중에는 그냥 그대로 쌓아만두고..
이사 후 에는 주소가 변경되어 그 우편물을 받아볼수 없었다.
이제는 나이가 먹어서일까.. 지금은 아쉬운 마음이 든다..
과거의 인연과 현재의 인연을 이어주고 공유해줄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라 생각이 되는데..
그러한 길을 볼수가 없다..
그러다가 친구한테 이번에 경동 80년사 관련된 책자를 편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냥 추억속에 묻어두고, 가끔 친구들과 이야깃거리 정도 로만 여기고 있었던 일을,
누군가는 기록에 남기고, 여러 사람들에게 그 길을 보여주려고 한다는 생각에
부끄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또한 내가 이렇게 글을 써가면서 옛추억을 떠올리고, 감상에 젖어 있게 되니 기분도 좋아진다.
분위기에 취해버렸다고 해야하나..
요즘 코로나19때문에 누구 할것없이 다들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며, 교우들의 얼굴도 보기가 힘들다.
빨리 이번사태가 해결되어, 예전처럼 보고싶은 친구들과 함께 술한잔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59회 이정남)
저는 동질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생활하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하였습니다.
그 중 택배일과 현재 장애인콜택시 운전원으로써 일하고 있는 것이 가장 동적인 일에 속하는데, 저는 택배를 할 때도 또 요즘 장애인콜택시 운전을 하면서도 경동고 주변을 지나게 되면 늘 경건함과 엄숙함을 느낍니다.
자부심이라는 것은 내가 경동인임을 의식하고, 그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맹세하는 의식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또 59회 6인 정도가 3개월을 주기로 모임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사회 어느 곳에 있으면서도 경동인이며, 또 그 소속감과 책임감을 느낄 때 경동인에 대한 자부심도 같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경기북부 모임을 나가고 있는데 이홍만 선배님외 많은 선배님들께서 또 따뜻하게 맞아주셨을 때, 아 난 경동인이구나 경동인으로써 부끄럼 없이 살아야지 하고 다시 새삼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선배님들께서 이룩하신 경동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저에 역할에 대한 무한의 책임감을 느낍니다.
(59회 신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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