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
(마태오
23,23-26)
You cleanse the outside of
cup and dish, but inside they are
full
of plunder and self-indulgence.
말씀의 초대
오늘부터 묵상하는
테살로니카 1서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먼저 작성된 책으로 특별한 가치를 갖는다. 복음서들보다도 먼저 기록된 이 서간은 초기 교회의 생생한 신앙과
바오로 사도의 열렬한 선교 정신을 보여 주는데, 그는 신자들을 자녀처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려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드러내신다. 그들은 제물에 관련된 율법 규정들을 강조하지만,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등 그보다 더 중요한 율법의
정신은 실천하지 않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바리사이들은 유다 마카베오 시대의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에게서 유래하는데, 그들은
종교의 자유만 보장해 준다면 누가 자기들을 통치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종교적인 문제에는 커다란 관심을 두고
살았습니다. 바리사이는 사제가
아닌 평신도였고, 대부분의 율법 학자들은 바리사이에 속해 있었습니다. 율법의 요구대로 그들은 소출로 얻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의 십일조를
철저하게 봉헌하는 등 겉으로는 경건하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등한시하거나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위선과 무지, 그들이 무섭게 꾸짖음을 받는 이유였습니다. 반면 바오로 사도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나 사도로서 권위를 인정받은 지금이나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 한 번도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구실을 붙여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다.”고 고백하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였다고 밝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달리, 바오로는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깊은 속까지도 샅샅이 살피시는 하느님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였음을 강조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증인”이시라고까지 단언합니다. 오늘 하루, “나는
예수님은 존경하며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인도의 성현 간디의 진언에 담긴 행간의 의미를 살피면서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동네 산책을
하다가 안경점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문득 신문 기사가 생각났습니다. ‘어느 날 계단 밑 안 보여 발 헛디디면 녹내장
주의!’라는 기사였지요. 솔직히 잘 보이지 않아서 종종 계단에서 발 헛디딜 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이 기사를 유심히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경점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글쎄 현재 쓰고 있는 안경이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새로 안경을 맞춘
뒤에 얼마나 잘 보이는지 모릅니다. 초점이 잘 맞으니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안경이 잘 맞지 않았던 것을 모르고 그저 내 눈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만 생각하고 불안해했던 것이지요.
시력이 좋지 않으면
안경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 안경이나 썼다고 해서 잘 보이는 것은 아니지요. 내 눈에 맞는 안경을 써야 잘 보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적합한 삶의 안경을 써야 하는데,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 좋을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맞지 않는 안경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물질이라는 안경, 명예라는 안경, 남들을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안경, 내 욕심과
이기심만을 채우려는 안경들…….
정말로 필요한
안경은 세상의 것들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2,000년 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단 한 번도 세상의 기준들을 중요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보다는 하느님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들, 바로 사랑의 실천들을 통해 진정으로 행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고 하시지요. 율법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인 것입니다. 그 사랑의 계명은 세상의 기준과는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도
사랑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되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심이 담겨 있지요. 바로 앞서 말씀드린
잘못된 안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잘못된 안경을 이제 벗어던지라고 하십니다. 대신 당신께서 목숨을 바쳐 보여주신 참 사랑의 안경을 쓰고서 세상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안경을 썼을 때,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하는 일로 인해 당신의 영혼이 해를 입느냐 입지 않느냐’이다. 만약 당신의 영혼이 해를 입는다면,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고 만다(알베르트 슈바이처).
돌이켜 볼 인생의
세 가지
어느 책에서 돌이켜
볼 인생의 세 가지를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세 가지 만남의
복: 부모, 스승, 배우자.
남에게 주어야 할
세 가지: 필요한 이에게 도움, 슬퍼하는 이에게 위안, 가치 있는 이에게 올바른 평가.
놓치면 돌아오지
않는 세 가지: 시간, 말, 기회.
세 가지 후회:
참을걸, 즐길걸, 베풀걸.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면서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내 삶을 돌아보면서 중요한 세 가지들을 잘 실천하셨으면 합니다.
-조재형신부-
지난 주일에 광화문
광장에서 교황 방한 1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교황님께서 시복식을
거행하신 장소에 ‘표지석’을
설치하였고,
축복식이
있었습니다.
명동에서 갈 때는
교구청 신부님들과 차를 타고 갔지만 돌아 올 때는 명동까지 걸어왔습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걸어오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광화문 광장의
잔디,
꽃을
보았습니다.
세종대왕 동상
아래에는 세종이야기를 볼 수 있는 전시공간이 있었습니다.
혜민 스님께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것도,
피정을 하는
것도,
1년 전 교황님의
방한을 돌아보는 것도 어쩌면 비슷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제대로
왔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광화문에서 오는
길에 역사의 물줄기를 보았습니다.
조선의 개국에서
최근의 역사까지를 연대별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제가 태어난
1963년을
보았더니,
4가지의 역사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취임,
장충 체육관
건립,
서독 광부
파견,
라면의
등장’이었습니다.
교보 빌딩에는 이런
글 판이 걸려있었습니다.
‘나무는 독립적으로
서 있어도 하나의 숲을 이루는데 왜 우리는 하나의 숲을 이루지 못하나!’
우리 안에 있는
시기,
갈등,
질투,
욕망,
원망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숲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녀들을 신앙인으로
잘 키우고,
가정을 화목하게
꾸려가는 어머니는 신앙의 숲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치고 힘든 어깨를
하고 집에 돌아오지만,
그래도 환하게
웃으며 자녀들과 친구가 되어주는 아버지,
아내를 위해 작은
꽃 한 송이라도 준비하는 아버지는 신앙의 숲을 만들 수 있습니다.
길가에 쓰러진
할아버지를 부축해 드리고,
구급차가 올 때까지
말동무를 해 준 아들도 신앙의 숲이 될 수 있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예쁘고,
잘 생기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키가 늘씬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는
다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어떤 모습이라도 다 예쁘게 보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숲을 이루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 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의 숲을 이루는 조건을 몇 가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한 번도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구실을 붙여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증인이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에게서도 찾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위엄 있게 처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에서,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습니다.”
더불어 함께 신앙의
숲을 만드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다
-반영억신부-
매일
같이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옷매무새를 고칩니다. 외출을 하려면 거울을 보고 다시 한 번 몸단장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하고 외모를 가꾸려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에 비하면 마음을 가꾸는 일에는
너무도 인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표정이 맑고, 얼굴이 빛납니다. 그 ‘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럼에도
마음을 가꾸는 것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라고 권고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정결 예식에 대한 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데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러나 ‘위선자’소리를 듣는 것은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컵을 닦고 그릇을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겉을 깨끗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닦아야 할 속을
버려두고 겉만 닦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잔이 아무리 좋은 잔이고 화려해도 속이 더러우면 쓸 수가 없습니다. 속이 깨끗하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15,19-20).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외적 행동 또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꺾인다”(잠언 15,13). 따라서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주님, 당신께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흠 없는 길에 뜻을 두리니 언제 저에게 오시렵니까? 저의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걷고 불의한 일을 저의 눈앞에 두지 않으오리다.,,,그릇된 마음 제게서 멀리 떨어지고 악한 것을 제가 알지 않으리이다”(시편101,2.
4).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자존감,
정체성, 분별력
-이수철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 묵상 중 문득 떠오른 주제는 ‘자존감과 분별력’입니다. 자존감과
좋은 분별력은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교육의
핵심도 자존감 함양에 있습니다.
자존감이
약하면 제대로 분별도 못합니다. 자존감이
좋아야 진정 겸손할 수 있고 제대로 분별할 수 있으며, 비겁하거나
비굴하게, 야비하게 처신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가난이나 능력의 유무에 상관없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부모의 삶이 반듯하고 사랑이 많으면 자존감
높은 자녀로 키울 수 있는 것입니다. 공부는
못해도 자존감이 높으면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고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얼마전
읽은 불편하나 깊이 성찰케 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오래전
한 미 국무성 관리의 발언이 떠오른다. "북조선은
밉지만 '우리의 존경할만한 적' (our respectful foe)이고, 남한은
곱지만 '우리가 무시하는 동맹' (our despising ally)이다" 이제는
별로 이상히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민족 자존감이 마비된 상태이다.-
국가간은
물론 개인이나 공동체에도 대체로 확인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자존감이 약해
스스로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소홀히 함부로 대하면
이웃도
우리를 무시하고 소홀히 대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의 보편 진실입니다.
많이
사랑받고 사랑받을 때 절로 높아지는 자존감입니다. 역시
자존감 함양에는 신뢰와 격려, 인정과 존중의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자존감임을 깨닫습니다.
또
자존감은 정체성과 함께 갑니다. 자존감이
높아야 정체성 또렷한 행복한 참 나를 살 수 있고
이어
좋은 주체적 판단의 좋은 분별의 지혜입니다.
사랑-자존감-정체성-분별력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어제의
경향신문 사설의 일부를 나눕니다. ‘인성함양도
나라사랑도 의무교육하라는 정부’라는 제하의 사설입니다.
-정부가
이른바 인성교육에 이어 나라사랑교육을 강화하는 이른바
‘애국교육법’제정을
적극 추진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인성과
마찬가지로 나라사랑하는 마음도 법으로 진흥되는 게 아니다. 발상자체가
시대 착오적이다. 애국심은
주입과 강요에 의한 획일적 교육이 아니라
민주적
시민교육 과정에서 스스로 배양되도록 하는 것이다.-
날로
피폐해지는 청소년의 인성의 현실을,
날로
희박해지는 청소년의 애국심의 현실을 깨달은 정부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법제정과 교육의 강화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보고 듣고 배우는 삶의 현장이 우선입니다.
정말
많이 사랑받고 사랑하는 자존감 높고 행복의 질이 높은
공정과
상식이 지배하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와 학교와 가정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절로 인성은 좋아질 것이고 나라사랑도 커질 것입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자존감으로
하면 예수님과 바오로는 최정상급입니다.
오늘
독서의 바오로 일행과 복음의 주님으로부터 불행을
선고받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충만한
자존감에 분별의 지혜를 겸비한 바오로 일행의 당당함과 의연함과 자유로움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추호의
두려움도 불안도 없습니다.
이들을
대표한 바오로의 고백이 감동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여 맡기신 복음을 그대로 전합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한 번도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구실을 붙여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증인이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오늘날
사제들의 사목선언서로 택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감동적인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샘솟는 자존감이요 분별의 지혜임을 봅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것이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자존감과
분별력은 바닥을 칩니다.
이들에
결정적으로 결핍된 것이 기득권에 안주하다 보니
현장삶의
치열성이 송두리째 빠졌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꼭 적용하고 싶은 말이 분별력의 결핍을 뜻하는 주객전도主客顚倒, 본말전도本末顚倒요,
자존감의
결핍을 뜻하는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삶입니다.
하여
주님은 이들을 위선자, 어리석은자라 하며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더 중요한 것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작은 벌레들을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것이다.”
그대로
분별력 결핍의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어리석은 행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어
주님은 이들의 속과 겉이, 안과 밖이 다른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위선적 현실을
예리하게
지적하십니다.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차 있다. 먼저
잔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 질 것이다.”
바로
이것이 표리부동의 보편적 인간현실입니다. 속이
깨끗하면 저절로 겉도 깨끗해 집니다. 진정
하느님 중심의 자존감 높은 진실한 삶만이 표리부동의 삶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가 자존감과 분별력의 원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시고,
분별력의
지혜를 선사하시며,
표리부동의
위선적 삶을 치유해 주시어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참조).
아멘.
겉과 속이 같은 참 사람 -기경호신부-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 죽는 일만큼 쉽지 않은 듯싶다. 그러다보니 생존의 몸부림 속에 하느님을 잊고 사람됨의 근본을 망각하기도 한다. 하느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위선적으로 허세를 부리고 체면을 중시하며 살아가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오늘의 말씀들은 이런 우리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추스르도록 촉구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겉과 속이 다르게 처신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회개를 촉구하신다. 먼저 십일조에 관한 말씀을 보자. 구약 시대에 십일조는
하느님의 절대적 점유권을 상징하는 뜻에서 소출의 십분의 일을 사제들의 생활에 보탰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모든 소출에 십일조를 확대시켰으며,
로마제국은 그 어마어마한 수입에 탐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십일조의 근본정신이 정의와 자비와 신의임을 상기시켜주신다. 여기서 정의란 각 개인의 권리를 뜻하고, 자비란 각 개인의 기본권을 알아주는
자세이며, 신의는 성서의 가르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명을 뜻한다(예레 5,1; 로마 3,3). 예수님께서는 최소한의 규범을 지키는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각 사람의 권리와 인격을 최대한 인정해 주어야 함을 가르치신다.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24절) 이 말씀은 중요한 것을 고의적으로 외면한다는 뜻일 수 있고, 사소한 일에 집착한
나머지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게 된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태도는 자가당착이나 생명경시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망각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시키는 종교적 변태를 야기한다.
서양 속담에
‘수도복이 수도자를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실제 명칭이나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 수도자들을 꼬집는 말이다.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축성을 받은 사람으로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고 그 소명에 합당한 말과 성실한 응답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위선자가
아니겠는가!
25-26절에서
언급되는 잔과 접시는 인간 전체를 상징한다. 인간은 정결예식이 아니라 율법의 기본정신에 따른 올바른 행동으로 깨끗해진다. 탐욕과 방종을
비워냄으로써 하느님의 눈에 깨끗이 보이는 자가 참 사람이다. 따라서 잔의 안쪽은 내면의 태도라기보다는 하느님 앞에서 마음을 다하여 율법을
실천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잔의 바깥쪽은 인간 앞에 나타나는 의인을 상징한다.
위선이란 거짓을
진실처럼, 남의 선을 자신의 것인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봉사하거나 강의를 들어도 그 동기가 다른 이의 시선이나 체면
때문이라면 그보다 추한 위선은 없다. 겉다르고 속다름은 어울리거나 하나가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우리는 나 자신과 공동체의 삶에서 얼마나
자주 이런 틈과 가면을 자주 보는가! 문제는 머리로 살려 하지 온 마음과 온 정신과 혼을 쏟아 모든 것을 마음에 새기고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선포하면서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 했고, 한 번도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다(1테살 2,4-5 참조). 성 프란치스코가 포지오 부스토네라는 은수처에 머물던 때, 성탄이 다가와 군중이 그의 설교를 들으러 모이자 그가
말했다. “여러분들은 저를 거룩한 사람으로 믿고 이렇게 열성적으로 모이셨습니다. 그러나 실은 이번 단식기를 맞아 저는 돼지기름으로 만든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병약하여 음식을 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에조차도 이를 자주 식도락의 소치로 보며 위선에 떨어지지
않았다(2첼라노 131).
나에게 있어 떨쳐
버려야 할 겉치레 모습은 무엇이며 벗어버려야 할 가면은 어떤 것들인가? 나는 하느님 앞에 참으로 깨끗하고 진실한가?
신앙의
본질
-고진석신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율법의 근본정신보다는 지엽적인 규정에 목을 맵니다.
율법에서 지키고자
하는 거룩함의 원천인 하느님은 잊어버리고 율법의 사소한 규정들에만 집착하며 사람들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들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교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닌 듯싶습니다.
교회 안에서 점점
늘어나는 절차와 규정들 그리고 복음정신보다 교회법 조문들이 자주 들먹거려지는 현상이 안타깝습니다.
또한 신앙의
실천이, 성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사와 전례의 거행 또는 신심활동으로 축소되는 경향도 걱정스럽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철저한 그리스도 추종에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에 대한
경배, 즉 성사와 전례 거행이 신앙생활의 중요한 축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사와
전례에는 하느님에 대한 찬양과 예배의 성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희생에 대한 기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경배는 현실에서 실천되는 그리스도 추종을 통해 완성됩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일상에서 어떻게 따를 것인가?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실천하려는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이자 화두입니다.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마태 23,23)
-오상선신부-
여러분은 헌금과 교무금을
얼마나 내십니까? 받은 은혜와
축복에 얼마나
감사하십니까? 개신교에서는 여전히
십일조에 대해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의
십분의 일은 하느님의 몫이라
여기자는 것이지요.
그 정도야 합당한
요청이 아닐까요? 문제는 그 은혜를
돈으로만
그것도 교회에만 갖다
바치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요?
돈보다 더
값진 사랑의 희생과
봉사로 십일조를
바친다면 반드시 교회에 바칠
이유도 없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바치는 자비와
희생과 봉사는 분명 하느님께서 더
기뻐하실 테니까요.
자,
오늘 나는 하느님께 받은
은혜와 축복에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 또 그렇다면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지 한번
돌아봅시다.
-한상우신부-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종교
지도자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우리 종교의
주인이 누군지를 묻고
계십니다.
그 무엇도
소유하지 않으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인도자로
우리를 제대로 이끄실
수 있으셨습니다.
모든
종교의 모순을
벗겨보면 거기에는 신앙조차
사유화하려는 우리의 욕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건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소유욕이
강할수록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올바른 신앙은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마주하는
겸손함입니다.
더 낮은 곳으로
나아가 그리스도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정화의 방향은
언제나 자기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자기자신을 제대로 다스리는
사람은
언제나 가난함을
지향했음을 기억합니다.
신앙을 소유하지
않을 때 기꺼이 자리를
양보한 수 있으며 현존해 계시는
예수님을 드러낼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불행과
행복 위선과
진실을 가늠하는
기준은 소유하지
않음에 있음을 다시 마음에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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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