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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7 묵상글 ( 부활 제2주간 금요일. - 능력에 대해서는 겸손하고, 사랑에 있어서는 충만한.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강론글 : 아직 / 06:5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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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7. 부활 제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17 05:59
- 능력에 대해서는 겸손하고, 사랑에 있어서는 충만한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들과 달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아이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수천 명을 먹이시는데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실 뿐 아니라
어른의 것이 아닌 아이의 것을 가지고 먹이심을 돋보이려는 것 아닐까요?
틀림없이 아이 말고 어른들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오병이어뿐 아니라 더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한복음은 아이와 오병이어를 주님께서
은총의 도구로 쓰셨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는 수천을 먹이는 데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렇기에 이런 우리 인간의 생각을 대표하여
안드레아는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자기의 생각을 얘기합니다.
주님께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소용이 없기로 치면 빵이 오천 개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것이 없어도 수천을 먹이실 수 있기에
다섯 개나 수천 개나 소용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안드레아보다 주님께 그것이 더 없어도 되지만
반대로 주님보다 안드레아에게 그것이 더 있어야 하지만
안드레아는 그것을 소용이 없다고 무시하는 것임에 비해
주님께서는 그것을 소용이 있는 것으로 소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능력과 사랑을 다 가지고 계신 것이고
안드레아는 그것을 소중히 쓸 능력도 부족하고 사랑도 부족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안드레아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드레아처럼 먹이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요?
능력은 없을지라도 사랑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서 먹이고 싶은 마음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는 하지 못해도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으시니,
주님께서 먹여주시고 저를 아이처럼 도구로 써주시며,
제가 가진 것 비록 보잘것없을지라도 봉헌하오니
오병이어처럼 소중히 써주소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은 없어도 사랑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능력에 대해서는 겸손하고
사랑에 있어서는 충만해야 하고 주저치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시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다고,
반대로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우리가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고,
오늘 사도행전의 가말리엘처럼 주님의 뜻에 의탁하는 믿음이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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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7. 부활 제2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세속 권력 안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지켜내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길을 오늘도 살아내며 보존할 수 있을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관상과 해방, 그리고 활동
세속 권력 안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지켜내기
2026년 4월 16일 목요일
2025년 가을 열린 리비전(ReVision) 회의에서 브라이언 맥라렌은 철학자 보에티우스(+524)의 관상적 증언을 강조했는데, 그는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도와 동시대 인물이었습니다:
보에티우스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으나 매우 부유한 귀족에게서 양육을 받아 큰 혜택을 누렸습니다. 그는 이러한 특권 덕분에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는 폭력적이고 불안정한 왕 테오도릭의 정부에 들어갔고, 서른세 살에는 왕의 고문이자 조언자가 되었습니다. 이 젊은 그리스도인은 큰 특권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 특권을 어떻게 사용했을까요?
보에티우스는 자신의 탁월한 지성을 신앙 안에서 바르게 사용하여, 그리스도교 신학과 그리스 철학을 통합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또한 테오도릭 왕국에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520년에 그는 자신의 양심과 신앙에서 비롯된 용기를 가지고, 동서 교회의 일치를 위해 위험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524년, 그는 왕의 비판자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테오도릭 왕에 의해 투옥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보에티우스는 성 베네딕도가 동굴에서 은수 생활을 했던 것처럼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네딕도에게 사람들이 찾아왔던 것처럼, 그에게도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남은 몇 달을 가르치는 데 바쳤고, 마침내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을 집필했습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연구되고 있으며, 로마 고전 시대의 마지막 위대한 저작이자 중세 문학의 첫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에서, 고통 가운데 자신을 찾아와 지혜를 건네는 어떤 여성적 형상(지혜)과의 만남을 묘사합니다:
지혜의 여성적 형상인 소피아는 그에게 평온을 주고, 마음을 다시 중심에 두도록 도와주며, 관상의 길로 인도합니다. 이 책을 집필하는 행위 자체가 그에게 하나의 관상적 수행이 되었고, 로마 제국의 쇠퇴와 완전한 몰락을 넘어 수세기 동안 수많은 이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을 완성한 직후, 잔혹한 고문을 당한 뒤 처형되었습니다. 그가 선을 이루기 위해 헌신했던 정부가 결국 그를 배신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이 두 사람, 성 베네딕도와 보에티우스는 그리스도 신앙을 살아내기 위해 전혀 다른 길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은 권력의 중심에 머물며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그것을 선한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권력의 중심을 떠나 주변으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길을 살아내고 지혜를 보존할 수 있는 대안적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이는 진리보다 권력과 부, 폭력과 무기에 집착하던 세상 속에서 빛나는 증언이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그렉 보일 신부님의 묵상(The meditation)은 제 마음을 깊이 울렸습니다. 특히 이 구절이 그렇습니다: “도덕적 탐구는 우리를 도덕적으로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멀어지게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도덕적 탐구를 내려놓고, 온전함과 사랑의 충만함, 그리고 거침없는 기쁨의 여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침없는 기쁨(Defiant joy)’!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침없는 기쁨을 추구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 암센터로 걸어가는 길, 수술 당일 병원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 휠체어가 아닌 제 발걸음으로 수술실에 들어가는 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거침없는 건강(Defiant health)’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거침없는 기쁨’을 찾기를 고대합니다!
—Lea M.
References
[1] Boethius, The Consolation of Philosophy (Penguin Classics, 1999), 3–4.
Adapted from Brian McLaren, “ReVisioning through Ancient Eyes: Choosing Contemplation and Action.” ReVision: What Do We Do with Christianity?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October 2025). Unavailabl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nnie Quick, untitled (detail), 2025, photo, Albuquerque.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맨발로 땅에 닿아 서 있는 것은 고요한 수도자의 몸짓을 의미합니다. 즉각적인 반응은 그 힘을 잃고, 대신 관상적 응답이 솟아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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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기적은 풍족한 상황이 아니라 결핍 속에서 일어납니다!
기적은 풍족한 상황이 아니라 결핍 속에서 일어납니다. 풍족할 때 우리는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부족함이 없으면 현실과 고통을 깊이 마주할 필요가 없고, 단지 편리함에 안주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은 거의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보리는 가장 값싼 곡식으로, 사실상 가축의 먹이로 여겨졌던 곡물입니다. 그러니까 이 보리빵은 가장 가난한 이들이 먹는 빵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군중은 뭔가 채워지지 않은 자기들의 내면의 결핍을 깊이 느꼈기에 그 결핍을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으로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 나섰고,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 내면의 결핍뿐 아니라 외적인 결핍까지도 채워 주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 중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제외하고는 빵을 많게 하시는 기적 이야기는 유일하게 네 복음서가 다 수록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것이겠지요?!
오늘 우리는 이 빵을 많게 하시는 표징(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동정심(연민)이 하느님의 자비의 원천이며, 또한 이 동정심이 서로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덕임을 깊이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 세상처럼 전쟁과 갈등 서로에 대한 불신이 점점 더 커지면서 참된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결핍 중에서 채워져야 할 가장 절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동정심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서로 갈라놓는 이기적인 탐욕과 자기 힘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자만심, 그리고 헛된 교만과 같은 정신은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 거저 주시는 선물인 은총을 의식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참으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서로에 대한 동정심과 사랑과 용서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의식하고 인정하면서 가난하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머물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 필요와 부족함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우리에게는 이런 절박함을 주님께 고백해 드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런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 존재 안에 이 사랑과 동정심을 더 깊고 넓게 해 주실 것이고 우리가 참으로 인간답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런 절박함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마음과 행위를 통해 희망의 불빛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시고 또 그 필요를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더욱 밝은 희망의 불빛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채울 길까지도 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란 우리에게 자그맣게 남아있는 사랑과 동정심의 불씨라도 감사하며 거기서부터 시작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길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장정만도 오천 명인 군중에게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셨다고 오늘 요한 복음은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오늘 우리가 더 깊이 묵상해야 할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족함 가운데서도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 말입니다. 여기에는 물질적인 부족함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부족함까지도 포함됩니다!
오늘날 우리 세상은, 아니 우리 자신은 지금 정말 약하고 부족하고 결핍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서로에 대한 이해와 연민과 사랑의 측면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아무리 턱없이 부족하더라도 우리 내면에는 자그만 사랑과 이해, 동정심의 불씨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그 자그만 사랑을 축복해 주십사고 간절해 청해야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9년 불가리아를 방문하셨을 때 어린이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어떤 기적은 오직 여러분처럼 나눌 줄 알고, 꿈꾸고, 감사할 줄 알고, 신뢰하며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마음에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고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께서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우리의 작은 손길만이라도 당신의 협력자로 필요로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핍되어 있지만 이런 영적인 결핍이 완전히 바닥 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여전히 자그만 사랑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마저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안에 이러한 정을 더해 주십사고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선 우리 안의 작은 희망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사랑하고 용서하고 서로의 어려움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지니고 동정(同情: 같은 정을 지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자그만 미소, 자그만 마음 씀, 자그만 정성, 자그만 함께함 등등....
작지만 주님 앞에서 이에 대해 감사하며 용기를 가지고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참혹한 현실을 복된 현실로 바꾸어 주실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가능성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고, 그것이 절대 바닥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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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7.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우리가 들은 ‘5천명을 먹인 이야기’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시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도,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곧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요한 6,9)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아이’는 ‘예수님 자신’을 표상합니다. 사실, 그것은 제자들이 본 모자란 것이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 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하찮은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오늘, 모든 것에 감사하며
더없이 존귀한 임께 감사하며
늘 함께 하는 당신의 사랑과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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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7.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킬린에서 하루 머물렀습니다. 킬린 성 정하상 본당의 사목회장님이 숙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호텔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려고 하니, 성과 방 번호를 넣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저의 성과 방 번호를 입력했습니다. 그랬더니 무선 인터넷 연결이 안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의 이름으로 예약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목회장님이 예약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번에는 사목회장님의 성과 방 번호를 입력했습니다. 그랬더니 인터넷 연결이 되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미리 하는 걸 좋아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급한 성격에 서두르다가 이렇게 종종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사칙연산은 조금만 생각하면 풀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정식과 함수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문법은 원리만 알면 풀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규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문과 번역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종합적인 사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로서 가말리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말리엘의 말은 논리적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 선포가 사람의 뜻이라면 곧 사라질 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 선포가 하느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막아서도 안 되고, 우리가 막는다면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고, 박해하던 사람들은 가말리엘의 말을 따랐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습니다. 저도 하느님의 뜻보다는 저의 욕심과 저의 이기심으로 판단한 적이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표징’을 전하고 있습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드셨습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듣느라 제대로 먹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이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안드레아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저는 표징의 시작은 ‘측은한 마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군중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저는 표징의 마침은 ‘감사의 기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성’입니다. 감사의 기도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방 번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다른 것을 입력하려고 합니다. 돈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효율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경로를 독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경로를 독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가르침은 자신들을 통해서만 전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경로의 독점은 정치에서도 드러납니다. 많은 독재국가들은 경로의 독점을 통해서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 결과 자유를 억압하고, 저항하는 사람을 탄압합니다. 공동체에 갈등과 분열이 생기는 이유는 경로를 독점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경로를 독점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경로의 독점이 아닙니다. 나눔과 섬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이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종이 아니라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권력과 폭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 나눔과 사랑으로는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 땅을 녹이고, 파란 새싹이 돋아나게 하는 것은 따뜻한 봄 햇살이면 충분합니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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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7.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https://cafe.daum.net/bbadaking/LgBn/2054
박 베로니카 26.04.17 00:13
| 인간은 부정적이지만, 주님은 언제나 긍정적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행하신 빵의 기적을 통해 우리는 아주 ‘살짝’ 하늘나라의 맛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간 세상과 하늘나라 사이에 엄중하게 차단되었던 가림막을 살짝 열어보니, 하늘나라의 광경은 그간 우리가 상상해왔던 곳 보다 훨씬 더 멋진 곳이었습니다. 빵의 기적을 통해 드러난 하늘나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풍요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아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 11-13) 하늘나라, 그곳은 어떤 곳으로 생각하십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한없이 자비하신 주님께서 중심을 잡고 계시고, 그 둘레로 성모님과 사도들, 성인성녀들이 앉아 계시고,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사랑에 목말라하는 가난한 백성들이 모여있는 곳, 더 이상 죽음과도 같은 갈증이 없는 곳, 더 이상 쓰라린 배고픔이 없는 곳, 더 이상 슬픔도 눈물도, 높낮이도 차별대우도 존재하지 않는 곳, 모든 이가 원없이 먹고 마시는 풍요로운 곳. 이 시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상 천국의 모습도 꿈꾸어봅니다. 국회의원이든, 국회 청소 노동자든, 같은 식탁에 앉는 곳, 바로 천국의 모습입니다. 누구는 특실을 쓰고, 누구는 6인실을 쓰지 않고, 모든 이가 특별대우를 받는 곳, 바로 천국입니다. 재벌이라고 특혜를 받지 않고, 가난하다고 홀대받지 않은 곳, 바로 천국입니다. 제자들의 볼멘 소리와, 그에 반해 넉넉하고 풍요로운 주님 음성이 크게 대조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절=)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 8-9) 보십시오. 인간은 계산하고 잔머리를 굴리지만, 예수님은 아버지를 신뢰하며 기도하십니다. 인간은 부정적이지만, 주님은 언제나 긍정적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절망하지만, 주님은 늘 희망하십니다. 인간은 언제나 제한적이지만, 주님은 무한하십니다. 주님은 한 마디로 ‘무한리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의 기적은, 2천년전의 한 기적사화로 공부하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되풀이되고 실현되어야 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과제입니다. ++++++++++++++++++ 살레시오회 2차 몽골 자연 피정에 초대합니다. 1차 피정이 조기 마감됨으로 인해 아래와 같이 2차 피정을 마련했습니다. 1차 피정 준비 과정에서 착오로 순례비를 너무 낮게 책정한 관계로, 2차는 날짜가 6박 7일로 줄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일시: 2026년 8월 10일(월)~16일(일) 장소: 미니 고비 사막, 후그너항 산, 하르호린, 울란바토르 등 동반: 이해동 신부 *살레시오 피정 센터 웃음치료사 *미국 포담 대학교 영성상담심리 전공 최원철 신부 *살레시오회 전 관구장 *몽골 지부장 인원: 30명 참가비: 200만원 내용 *맑고 선선한 몽골의 여름 체험 *몽골 사막, 산, 옛 사원과 유목 문화 체험 *대초원에서의 미사와 영성 강의, 묵상 *별빛 아래 고백성사와 인생 상담 유의사항 *숙소: 몽골 전통 가옥 게르(3일), 호텔(3일) 2~3인실 *음식: 육류가 주류이므로 약간의 밑반찬 준비 필요함 *산과 사막에서 하는 피정이므로 기본 체력이 요구됨 문의 및 신청 *041-675-7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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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Dami 매일묵상 4월17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사랑의 기적, 용서의 기적!
단체로 세미나에 오신 분들 아침 해장꺼리를 사러 재래 시장을 찾았습니다.
해장에는 뭐니뭐니 해도 시원하고 담백한 바지락탕이지요.
요리하기도 쉽습니다. 일단 신선도가 첫째가는 관건입니다.
잘 해감시킨 바지락을 깨끗이 씻은후 적정량의 물을 분과 센불에 바글바글 끓인 다음 청양고추와 대파를, 왕창 투입시키면 끝입니다.
늘 고민되는 문제는 양입니다. 백여명되는 사람들을 위해 5킬로면 되겠지 했는데...그걸로는 제맛이 안납니다.
어쩌지 하다가, 5킬로를 더 샀더니 들고 오는데 얼마나 무겁던지...
백명 손님 치르려면 온 식구들이 달라붙어야 하고 다들 거의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식탁에는 장정만 5천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성 1만명, 아이들 5천명 하면 거의 2만명이 동시에 식사를 한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의 기적은 그야말로 엄청난 기적이었습니다.
그 놀라운 기적의 빵을 나눠먹은 백성들은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미리 앞당겨 목격하고 체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이런저런 기적과 표징들을 행하시고 보여주신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손을 통해 아버지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자비와 따뜻한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표징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과 예수님 두분은 뗄례야뗄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두분은 온전히 하나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인간의 지성과 이성으로는 죽었다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기적과 표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과 표징은 더 이상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껑충껑충 뛰고 하는 스타일의 기적이 아닙니다.
이 시대 기적은 사랑의 기적입니다.
도저히 사랑할수 없는 상황인데도 사랑하는 기적입니다.
또한 용서의 기적입니다.
도저히 용서할수 없는 상황인데도 기꺼이 용서하는 그런 기적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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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7. 부활 제2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6,1–15
큰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
제자들은 계산합니다.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가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앉히시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뒤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십니다.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기적을 ‘양이 늘어난 사건’으로만 보지 않게 합니다.
그는 묻게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가?
사람은 빵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빵이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굶주릴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에게 참된 굶주림은
위장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굶주림을 “물건”으로만 채우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먼저
감사와 질서와 나눔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공동체로 묶으십니다.
오늘 2주 친절/선행 주간에서
이 복음은 이렇게 들립니다.
• 친절은 ‘내 것을 빼앗기는 손해’가 아니라
굶주린 이를 앉히는 배려입니다.
• 선행은 ‘대단한 기적’이 아니라
아이의 작은 빵을 내어놓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작은 것을 붙잡아
공동체를 살리는 큰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세우려 할 때,
예수님은 물러나십니다.
아우구스티노의 관점에서
주님은 ‘권력’을 원하지 않으시고
‘사랑의 질서’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배부름은
권력의 승리가 아니라
나눔의 평화입니다.
오늘 우리는 묻습니다.
내 마음은 무엇을 향해 쉬지 못하는가?
그리고 오늘 나는
누구의 굶주림 앞에서
작은 빵 하나라도 내어놓을 수 있는가?
주님,
제 마음의 굶주림이
헛된 욕망으로 채워지지 않게 하시고
당신 사랑으로 배부르게 하소서.
오늘 작은 친절 하나, 작은 선행 하나를
용기 있게 내어놓게 하시고
그것이 누군가를 살리는 은총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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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7. 부활 제2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어디선가 저희를 축복해 주신 자매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000 자매님,
어제 아침에 쪽지 하나가 온 걸 발견했습니다. 저는 예상을 했습니다. 아마 자매님이실 것 같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걸 우연히 영세를 받고 여름에 서울에 올라가 어떤 밴드 모임의 형제자매님을 만났을 때 김포성당에 가 만난 자매님이 사용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형제님 '여자의 촉인데요' 해서 그때 그 의미를 알았습니다. 제 촉으로 거의 자매님 같았습니다. 열어보니 역시나 자매님이어서 놀라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최근에 올린 글을 다 보셨던 모양입니다. 저랑 인연이 된 자매님의 권유로 내렸습니다. 사실 잠시 스쳐가는 인연으로 남자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혹시라도 흔적조차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반전에 반전을 해서 딱 소통을 한 지 한 달 만에 자매님이 저에게 청혼을 한 것입니다. 자비의 주일에 톡이 왔습니다. 원래 주일 이틀 전에 정리를 했는데 그때에 월요일 아침에 서울에 올라가 만나기로 했었던 것입니다. 정리가 되는 바람에 무산됐는데 다시 어찌 극적인 계기가 돼 월요일에 보고 싶다고 해 월요일에 상경했습니다. 고속버스터미널에 있는 성당에서 만나 다른 장소로 가기로 해 갔습니다.
한 달 동안 톡과 통화로만 하다가 사실 어느 정도 사진을 통해 대충은 이미지를 알았긴 했지만 실제로는 그 느낌이 어떻게 될지 몰랐습니다. 만약 실제 만났을 때 느낌이 원래 생각했던 느낌대로라면 결혼을 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해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마 근 20년 만에 강남터미널에 간 것입니다. 켜피숍에서 대화를 하면서 자매가 자신도 생각했던 것보다 저가 좋았던 모양입니다. 이야기 도중에 한 번은 가까이 귀에 대면서 하는 말 중에 "형제님, 진짜 어떻게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서 좋아요" 하며 수줍어하며 조용히 귓속말처럼 하는데 그때 생각했습니다. 자매가 저에 대해 호감을 가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터미널에 내렸을 때 가슴이 한편 두근두근했습니다. 아주 많은 나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혹시 만났을 때 기분이 엄청 실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랬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성당에 가는데 그날은 월요일이라 성당 문이 닫혀 있다고 이미 톡으로 알려줬습니다. 딱 봤는데 저를 보며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때 이미 조금 안도를 했습니다. 딱 봤을 때 느낌이 안 좋으면 그냥 천천히 다가왔을 겁니다. 근데 저를 보자마자 얼굴에 미소를 띈 채 살짝 뛰어왔습니다. 순간 첫인상에서는 나쁜 점수를 받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악수만 하려고 했는데 제 손을 잡고 허그까지는 아니고 가벼운 포옹을 하시려고 해 그렇게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도권에서는 형제자매들도 '평화의 인사' 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해 사실 조금 놀라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나 식사 시간이라 식당에서 가볍게 식사도 하며 이야기도 하고 저녁 때쯤에 내려오려고 했습니다. 사실 올라갔을 때 서울 목동 성당에 계신 형제님도 한 번 만나보고 싶어서 사전에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그냥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본당에서 미사를 한 번 하고 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하루를 서울에서 묵게 된 것입니다. 새벽미사를 봉헌한 후에 정오쯤에 마산에 내려왔습니다. 하루 같이 지내며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말고 그냥 서로의 느낌만 어떤지 고민하자고 했습니다. 실제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았다고 자매는 이야기했습니다.
소통한 지 딱 한 달 만에 만남을 가진 것입니다. 찜질방에 가서 좀 더 이야기를 했는데 아주 좋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결혼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일단 아주 좋은 점수를 받아서 기분은 좋았습니다. 같이 산책을 하며 길을 걸을 때 가볍게 손을 잡고 걸었습니다. 걸으면서도 정말 이렇게 냄새도 안 나는 형제님은 처음이라고 하면서 나중에 형제님이랑 살게 된다면 정말 이거 하나는 걱정을 안 해도 되겠다고 해 아주 좋아하는 것입니다. 마산에 내려와 좀 더 시간을 가지고 통화를 하면서 확실한 마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저랑 결혼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게 대충의 스토리입니다. 어제 통화를 했는데 제가 자기와의 이런 에피소드와 여러 관련된 묵상글을 굿뉴스에 올려달라는 것입니다.
다만 신상만은 비공개로 해달라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인연이 됐을 때 우리의 결혼 스토리를 신앙 안에서 좋은 내용으로 세상에 공개를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매도 사실 글과 관련된 일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실 굿뉴스에 제가 올린 묵상글이나 생활묵상글에서 이미 호감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제 글을 보며 많은 겸손을 했다고 하며 특히나 제 신앙관과 신심에 반해서 정말 처음엔 나이 열 살만 차이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청혼을 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근데 너무 많은 차이가 나 그냥 신앙 안에서 좋은 영적인 친구로만 지냈으면 했는데 이게 결혼으로 연결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블로그를 통해 뭔가 하는 건 전문이라고 하면서 결혼을 하면 제가 글만 매일 주면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하며 공통의 취미도 된다고 했고 이렇게 살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냥 성당만 다니는 수준의 형제랑 만날 것 같으면 절대 결혼은 하려고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아마 자기가 원하는 수준의 그런 형제는 없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고 해 흥분을 감추지 못하더군요. 이젠 딱 한 가지 어려운 관문만 통과를 앞두고 있습니다. 장모님 되실 분의 허락입니다. 지금은 엄마가 눈치가 아주 빨라 남자가 있다는 건 확실하게 아는 건 사실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제가 엄마랑 동갑이라는 사실에 엄청 충격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처음엔 많은 걱정을 했는데 어제도 통화를 하면서 기도하며 잘 해보자고 했습니다. 만약 극단적으로 반대를 한다고 해도 저를 선택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번 ㄱ회를 놓치면 평생 성가정은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아무튼 저는 잘 되길 기도를 할 생각입니다. 이런 사실을 일부 저는 제가 다닌 영세 받은 본당 자매님께 소식을 알려드렸습니다. 축하의 메시지가 계속 오고 있습니다. 어제 자매랑 통화를 하면서 하는 말이 " 아저씨, 내년 이맘때쯤이면 우린 결혼해 성가정을 이루고 있겠죠" 해서 아마 그렇지 않을까 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매님, 저희의 이런 모습에 " 참 아름답다" 고 축복의 인사를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당부를 해 주신 것처럼 늘 한결같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렇다고 해도 잘 헤쳐나갈 거라고 믿는다고 하신 말씀 잘 명심해서 행복한 성가정이 되도록 겸손된 마음으로 하느님만 바라보며 열심히 사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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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7. 부활 제2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 주님의 은총으로 여는 하루
오늘도 평소처럼 집에서 출발해 산타모니카 비치까지 Bike Trail을 따라 왕복했습니다. 집앞에 가는 길에는 미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공 선착장이 있는데, 약 1만5천에서 2만 척의 배가 정박해 있는 그 장면을 지나칠 때마다 늘 경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찬란하고 따스한 태평양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연과 생명의 선물을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됩니다. 하루를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시편 118,24)
오늘 이 말씀처럼, 우리 교우 여러분의 하루도 감사와 희망으로 가득 차시길 기도합니다.
새로운 힘과 밝은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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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ginning the Day in the Lord’s Grace?!
This morning, as usual, I set out from home and followed the bike trail all the way to Santa Monica Beach before returning. Along the way, I passed one of the few man‑made marinas in the United States—home to nearly fifteen to twenty thousand boats. Riding past that vast forest of masts and continuing along the trail always gives me a sense of quiet awe.
Breathing in the radiant, warm air of the Pacific Ocean, I felt grateful for the gift of creation and the life God has placed before us. It is a beautiful way to begin the day, receiving the morning as a blessing rather than a routine.
As the Psalm says, “This is the day the Lord has made; let us rejoice and be glad in it.”
May this same spirit of gratitude and hope fill the hearts of all our parishioners today.
I pray that each of you begins your day with renewed strength and a hopeful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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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본당의 부제 제도는 인정하지만,한인 이민교회에는 도입할 필요가 있나
미국 본당의 부제 제도는 인정하지만, 한인 이민교회에는 도입할 필요가 있나?!
미국 가톨릭교회 안에서 영구(부제) 제도는 전례 보조, 사회봉사, 본당 행정 지원 등 분명한 공적 기능을 수행해 왔습니다. 대형 본당과 광범위한 사회복지망을 가진 환경에서는 부제가 본당 운영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 점은 분명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같은 제도를 그대로 한인 이민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한인 공동체는 언어·문화적 특수성과 규모 면에서 본토 교회와 다릅니다. 이미 수도회와 수녀단, 자원봉사 네트워크가 교육·복지·사목·행정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며, 소규모 본당의 현실에서는 영구부제 도입에 따른 형성 비용과 운영 부담이 큰 실익을 내기 어렵습니다.
부제 제도 도입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역할 중복입니다. 수도회와 수녀, 자원봉사로 충당되는 봉사 영역이 분산되면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둘째, 재정·행정 부담입니다. 형성 과정과 지속적 운영비는 작은 공동체에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셋째, 문화적 갈등입니다. 본토 중심의 제도적 관행이 한인 공동체의 자율적 운영 방식과 충돌할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현실적 대안이 더 합리적입니다. 수도회·수녀단과의 협업을 체계화하고, 자원봉사 조직을 전문화하며, 비사목적 행정은 전문 인력으로 맡기는 방식이 비용 대비 효율이 높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공동체의 자율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필요한 기능을 충족합니다.
결론적으로, 미국 본토 교회에서 부제가 필요한 이유는 인정하되, 한인 이민교회에는 미국식 영구부제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권고합니다. 제도는 도구일 뿐이며, 무엇보다 공동체의 실제 필요와 역량을 기준으로 신중하고 맥락에 맞는 사목 계획을 이제는 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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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rmanent Diaconate Has Its Place...
The Permanent Diaconate Has Its Place in U.S. Parishes, but Not in Korean Immigrant Churches?!
The permanent diaconate serves clear public functions within many U.S. Roman Catholic parishes: assisting in liturgy, supporting charitable outreach, and helping with parish administration. In large parishes with extensive social ministries, deacons can be an indispensable part of parish life. That reality deserves recognition.
Yet transplanting the U.S. model of the permanent diaconate into Korean immigrant Roman Catholic communities is unnecessary and can be counterproductive. Korean parishes in the United States differ from mainstream U.S. parishes in language, culture, and scale. Religious sisters, religious orders, and well-established volunteer networks already cover much of the educational, welfare, pastoral, and administrative work. For small to mid-sized Korean parishes, the costs and burdens of forming and maintaining a permanent diaconate yield little practical benefit.
Introducing the diaconate into these communities risks several harms. First, role duplication: functions already performed by sisters and volunteers may be fragmented. Second, financial and administrative strain: formation programs and ongoing support impose burdens on limited parish budgets. Third, cultural friction: institutional practices developed for large, English-speaking parishes may clash with the governance and pastoral rhythms of Korean congregations.
Practical alternatives are preferable. Strengthen formal collaboration with religious orders and sisters, professionalize parish administration where feasible, and invest in structured volunteer training. These measures preserve community autonomy and cultural identity while meeting pastoral and operational needs more efficiently.
In short, while the permanent diaconate has legitimate uses in many U.S. parishes, it is not a necessary or advisable import for Korean immigrant churches. Pastoral planning should be context-sensitive: adopt tools that fit the community’s real needs rather than imposing institutional forms by 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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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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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7.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7:20 추가.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1-7)>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2-15).>
1)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빵의 기적’과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빵의 기적’은 같은 기적이지만, 그 일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다르고, 그래서 강조하는 점도 다릅니다.
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일’로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은 당신의 양들을 먹이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나오는 군중은 ‘배고픈 사람들’이 아니고 표징만(기적만) 바라면서 몰려든 사람들입니다(2절).
그래서 ‘빵의 기적’이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을 계시하신 일”로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신 분”이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빵’이라는 말에서 중요한 말은 ‘빵’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뜻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생명이신 분”이라고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요한 14,6).>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일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일은, 바로 뒤에 있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에 연결되고, 또 그 다음에 길게 이어지는 ‘생명의 빵에 관한 논쟁’에도 연결됩니다.
사도들은, 군중이 예수님께 임금이 되어 달라고 요청할 때, 그 일에 동참했거나, 아니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하면서
들뜨고 흥분했던 것은 아닐까?
2) 4절의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새로운 파스카의 빵이시며, 새로운 ‘만나’이신 분”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파스카가 해방을 뜻하기도 하니까, “예수님은 참되고 영원한 ‘해방’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도 암시합니다.>
6절의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군중이 모여들 때부터) ‘빵의 기적’을 계획하셨다는 뜻입니다.
7절의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과 9절의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라는 말은, “이 군중을 먹이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천 명이 넘는 군중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빵과 물고기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원래 하느님의 기적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실 때, 인간들 쪽에서는 그것을 받아먹기만 했을 뿐입니다.
기적의 재료를 하느님께 바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없었어도 어떻게든 기적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빵과 물고기는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랑과 나눔을 설명하기 위한 소재로 삼을 수는 있지만, 여기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3) 14절의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는 모세가 약속했던 예언자입니다(신명 18,15).
유대인들은 그 예언자를 메시아로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일은, 사는 것이 고달픈 사람들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는 것이긴 한데, 그들이 원한 것은 ‘구원’이 아니라 그냥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즉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바라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시면, 힘들게 노동을 하지 않아도 날마다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떻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하신 이유는 뒤의 27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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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7. 부활 제2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0:42 추가.
요한 6,1-15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적은 양의 음식으로 수천명이나 되는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장면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이 장면을 예수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자 구세주이심을 드러내는 ‘기적’으로 부르는 반면,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는 이들로하여금 특별한 깨달음을 얻게 하여 마침내 참된 믿음으로 이끄는 ‘표징’이라고 부르지요.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그리고 오늘 복음을 읽는 우리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당신의 큰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다른 복음에서처럼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을 시켜 나눠주시지 않고 예수님께서 직접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눠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광야를 헤매던 자신들에게 ‘만나’라는 음식을 내려준 이가 ‘모세’라고 오해했던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시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당신의 의도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시기 위해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이는 빵의 구입처를 몰라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로하여금 빵을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지, 자신들에게 빵을 주시어 살게하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바라보게 하려고 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필립보는 이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은 빵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출처와 근원을 물으시는데,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부족하겠다며 ‘수량’으로 응답한 겁니다. 숫자로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재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드는 인간의 관점이지요. 그 관점으로 바라보면 항상 모든 것이 모자라게만 느껴집니다. 인간은 원래 부족하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걸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 들지 말고 하느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순간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그분께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충만하게 만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을 알려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시기 전에 먼저 그것을 손에 들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당신 백성을 배불리 먹이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자기가 가진 소박한 재물을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내어드리는 일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신 후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음식을 나눠주셨는데,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은 양이 ‘열 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우리를 충만한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의 큰 사랑이 분명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과 함께 하시며 필요한 것을 충만하게 채워주시지만, 당신 능력을 이용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이들은 단호하게 떠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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