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황한 대도시의 거리, 분주히 오가는 많은 사람들. 시골 처녀들 눈에 비친 그 광경은 말 그대로 요지경 속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든 악당은 있는 법- 이런 순박한 시골 처녀들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그리고.. 숙명처럼 악당이 가는 곳엔 정의의 사나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무례하군." 곧이어 약간의 실랑이 격투... (물론 여기서 악당의 수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리고 악당들은 삼십육계
정의의 사나이는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모습으로 뒤돌아서며 묻는 거다. 이렇게..
"숙녀님들께선 괜찮으신지...."
당연히 그는 잘생긴 백인의 청년사업가이다. 정석대로라면...
하지만 정의의 사나아는 백인 사업가 청년도 아닐 뿐더러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미소짓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두가지 정석이 있으니 앞장이 영화나 드라마의 정석이라면 실제에서는...
그리고 정의의 사나이의 실체란 이러했다.
그가 한 첫 말. 욕이었다.
오늘도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날씨가 무척 화창하다. 어느새 봄은 지나가고 여름이 성큼 다가온 것처럼 무더운 날씨가 연이어 계속되고 있다. 풀내음 가득한 들판길을 걸으면서도, 가금 심술궂은 소낙비가 우리를 적셔도 마냥 즐거운 여행이다. 우리는 감싸는 모든 향기들이 우릴 친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난 불만이야. 이게 도대체 무슨 모험이냐구. 깅!"
깅은 내 앞에서 마차의 요동에 따라 졸고 있다가 내 고함을 듣고 깜짝 잠이 깼다.
"아함, 아이. 모험이란게 다 그런거야. 언제나 위험한 일에 부딪히는 건 아니야. 대개는 지금처럼 한산한 게 보통이야."
깅의 요청으로 우리는 지금 마차를 타고 가고 있다. 카라시에서 다음 도시인 XY도시까지는 길이 너무 잘 닦여 있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깅의 말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더 중요한 이유가 있으니, 바로 그건 라이 때문이다!
라이의 살인적인 요리 솜씨로 인해 우리 모두가 지쳤다. 역시 처음에 쥐고기는 통조림 탓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서 빨리 다음 마을로 가기로 만장일치, 아니 라이만 제외하고 결정했다.
"하지만 깅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게임 속에 있는데 왜 이렇게 전투가 없는거야. 원래 게임은 적을 처치함으로서 레벨을 올리는 거잖아."
처음에는 다른 동료들이 들을까봐 우리 둘이서만 속닥였는데 어차피 얘기해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고 이제는 관심도 가지지 않아서 이제는 이렇게 터놓고 얘기한다.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만약 우리가 말이야..."
"잠깐 실례합니다."
마차 밖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이건 혹시...
"똑똑 안녕하세요. 산적인데요. 잠시 털어도 될까요. 괜찮다구요. 감사합니다. 마차를 세워주시겠다구요."
브라보! 이건 분명히 산적이다. 만세! 그런데 참 얌전한 산적이네.
마차의 창 밖으로 내다보니 턱에 수염이 잔뜩 난 전형적인 산적 모습의 십여 명 정도가 길을 막고 서 있었다.
"워워!"
마부가 마차를 세우고 안을 들여다보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산적이 왔는데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엥? 산적이 왔는데 저렇게 담담해?
"여긴 산적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군요."
"그렇죠. 여긴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곳이거든요."
그렇군.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담담하다는 것은 왜일까? 뭐 상관없겠지. 어쨌든 드디어 싸움이구나. 쿠쿠쿠. 나의 특훈의 결과를 보여주마.
"깅! 내리죠."
"후. 이 몸은 늙어서 나서기가 좀 그렇군. 아이 네가 알아서 해라."
오우 예. 바로 그 말을 기다렸지. 그럼 어디 실력 발휘를 해볼... 음. 루리와 제이의 눈빛을 보니 두고 나가면 엄청난 보복이 있을 것 같다.
"루리, 제이 함께 갈래?"
"와!!"
"당연하죠."
그래서 우리 셋은 사이좋게 마차에서 내렸다.
"얌전하게 내놓으면 될 것을 쯥쯥쯥. 매를 버는구나."
흥. 누가 할 소리를. 얘들아 가자.
"저, 잠시만 기다리면 될 텐데요.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엥?
"뭘 기다리나?"
"곧 올 겁니다."
뭐가?
"가지고 있는 것 다 주십시오. 주신다구요? 감사합니다."
빙긋 웃고 있는 산적 두목(이 맞는 것 같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제이와 루리는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루리는 머리 위에 난 꽃을 손질하고 있었고, 제이는 벼루에 먹을 갈고 있었다. 흠. 이거 전혀 전투 분위기가 나지 않잖아!
휘이이휘이이이휘이이잉.
응? 뭐야 이 휘파람 소리는?
"왔다. 모두 마차에 타세요!"
마부가 우리한테 고함을 질렀다. 대체 무슨 일이야!
마부의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우리 뒤에서 말을 탄 한 남자가 나타났다. 긴 휘파람의 여운을 남기면서....
"허. 이 벌건 백주 대낮에 레이디를 괴롭히다니. 나 정의의 휘파람이 너희들을 용서할 수 없다."
엥? 뭐야. 이거 혹시 정의의 사잔가? 너무나 뻔한 스토리잖아!
"빨리 타요. 빨리요."
마부가 우리를 재촉했다. 그리고 그 정의의 어쩌고 하는 사나이와 산적들 사이에는 끈적끈적한 살기(?)가 오고가는 대화 속에 흐르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혹 정의의 사자라고 칭하는 이가 아닐런지."
"맞습니다. 산적님. 전 정의의 휘파람이란 별호를 가진 현상금 사냥꾼이죠. 이 대로의 평화는 대대로 제가 지키고 있죠. 그냥 얌전히 물러가 주시면 좋겠지만 그러시지 않겠지요?"
"예. 요즘 벌이가 너무 좋지 않아서 오늘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겠군요. 그럼 실례를 해야 겠군요."
"오! 먼저 뽑으시죠."
"아! 예 감사합니다."
란다. 뭐야! 이 따위의 싸움은 정말 구역질난다.!
"빨리 타라니까요. 위험합니다. 위험해!"
마부의 재촉에 우리는 마차를 탔다. 마부는 고삐를 잔뜩 움켜쥐고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아까 산적이 나타났을 때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긴장하다니.
카우보이 모자 같이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정의의 사도라고 칭하는 남자가 말을 달렸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산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흠.
"이랴."
절묘한 타이밍으로 마부는 마차를 달려 길가에 붙이더니 앞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예고도 없는 출발에 당연히 마차 안에 우리들은 엉망이 되었다.
"으악, 조심해요."
"피카비."
"캬아아."
으이구. 대체 왜 저래. 난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날리는 사람들과 나무, 그리고 돌덩이 들이었다.
"우하하. 악인은 지옥으로..."
그리고 들리는 말을 탔던 남자의 목소리 뿐..
마부의 급한 채찍질로 마차는 쏜살같이 달려 차 한 잔 마시기도 전에 그 지역에서 벗어났다. 이제 그만 세워요!!!
마부는 마차를 급히 세우더니 숨을 골랐다.
"누구에요 대체."
"휴. 이 지역에서 유명한 현상꾼 사냥꾼입니다. 무척 강해서 현상꾼들이 무서워하지요. 다만..."
다만?
"정의감이 너무 투철해서 종종 사고를 치죠. 게다가 일을 하면 그 지역은 모두 날아가 버립니다. 아까처럼요."
흠.
"근데 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거죠?"
"이 지역 영주 아들이거든요. 그리고 본성은 착하신 분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요."
위험한 사람이군.
와구와구.
음냐 맛있다. 정상적인 음식의 고마움을 뼈저리게 알겠다. 우걱우걱.
"라이 오빠 인상 펴요.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난 오빠의 요리가 좋으니까요. 헤헤."
그래, 넌 개과니까 그렇지. 선지피가 뚝뚝 흐르는 덜익은 고기를 씹고 있는 제이가 말했다. 하지만 난 사람이라구!!
"아이 제발 사람처럼 먹어라. 대체 어떤 여자가 그 꼴로 먹냐! 어어! 침 튀키지마."
벌써 식사를 마친 깅이 자꾸 날 들들 볶는다. 칫, 뭐야. 깅은 대단히 미식가라 비싼 것만 먹는다. 어디서 알았는지 귀신같이 그 도시에 명물 집을 꽤차고 있어서 항상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물론 그 덕분에 우리도 맛있는 것을 먹었지만 여기서 문제점은 난 미식가가 아니라 대식가이다. 그래서 이제 돈이 거의 바닥이 났다. 그러면서도 깅은 절대로 자신의 입을 더 중요시 한다.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요거다."
깅은 공중에 동그란 원을 그리면서 말했다.
"앞으로 수도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 동안에, 그리고 수도에서 쓸 돈 정도는 벌어야지.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잖아. 그래서 내가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음식점 문이 벌컥 열리면서 아랫배가 툭 튀어나온 아저씨 한 명이 기세좋게 들어왔다. 턱에 주름이 세 개나 생길 정도로 비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도 탐욕스러워 보이기 보다는 사람좋아 보이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자자, 주목하세요."
안 그래도 음식점에 사람들이 모두 주목하고 있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이 도시의 영주이신 라이신 자작님 밑에서 자그마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올시다. 제가 지금 여기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이유는 요번에 침묵의 숲에서 유적이 발굴되어 그 유적을 조사하기 위해 인원을 뽑기 위함입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음식점이 술렁거렸다. 급기야는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침묵의 숲을 조사한다는 겁니까?"
우리 옆에서 스파게티를 먹고 있던 일행 중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검은머리 용병이 사납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며 말했다. 무척 사납게 생긴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허리춤에는 양쪽으로 검을 매고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던 그 비대한 아저씨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좌중을 살펴보다가 용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습니다. 최근 자작님이 우연한 기회에 침묵의 숲에 고대인의 유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셔서 그곳을 발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대인의 유적?
"하지만 왜 그걸 사람들을 뽑아서 하는 겁니까? 자작님에게도 사병들이 있을 텐데."
음식점 후미진 곳에서 전신을 외투로 가린 마법사 차림의 사람이 말했다.
"아! 그건 말이죠. 실은 계시가 내려왔어요. 실제로 그 전에 우리들이 발굴을 하려고 사람들을 보냈는데, 모두 실패했거든요. 여러분도 침묵의 숲에 대해서 아시겠죠?"
침묵의 숲?
난 그래도 제일 만만한 라이를 콕콕 찔렀다.
"여기에는 침묵의 숲이라 불리우는 숲이 있어. 그 이유는 말이야, 100년 전쯤에 그러니까 지금 황제의 조부가 되시는 아레스 황제님이 제국을 다스리실 때였어. 그 당시만 해도 이 숲은 많은 사람들의 휴양터가 되는 숲이었어. 이 숲의 한가운데에는 생명의 나무라고 불리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는데 정말 영험했다고 해. 여기서 병이나 출산 등에 대해 간절히 정성을 다해서 빌면 많은 효엄이 있었대. 휴일이면 근처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러 오곤 했는데, 어느 날 하룻밤 사이에 이 숲이 이상해 진 거야. 그 환하게 폈던 꽃도 다 지고, 밝은 햇살이 비치던 오솔길도 어둠이 깔렸지. 그래서 아레스 황제는 조사원을 보내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나?
"죽지 않았지. 아무 일도 없었어."
에? 뭐야?
"다만 생명의 나무를 찾지 못했을 뿐이지. 그 숲은 아무 위험이 없었어. 몬스터도 없고, 그렇다고 독충이나 늪지대 같은 것도 없었어. 다만 아무 소리도 없었지. 그래 숲만이 존재했어. 곤충도 동물도 햇볕도 없는 어둠과 침묵만이 존재하는 숲.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숲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졌고 지금에 이른 것이지."
흠. 아무 위험도 없는 숲이라.
"...그래서 일주일 전에 자작님이 신전에 가셔서 계시를 받아왔는데, 그 유적을 발굴하려면 모험가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의 힘을 빌리려고 왔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혜택이 있죠? 고대인의 유적이라면 엄청난 물건이 많이 있을 텐데요."
금발머리를 곱게 내린 성직자 복장의 여자가 조심스레 손을 들면서 말했다.
"자작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찾은 팀에게 그 유적의 반을 주시겠다구요."
"정말입니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데요."
비대한 남자는 자신을 믿으라는 표정을 지으려 말했다.
"어차피 지금 자작님은 거길 발굴하실 수 없고, 게다가 자작님은 거기에 있는 보물보다는 그곳의 역사적인 가치를 중요시 여기시니까요. 게다가 여러분은 어느 정도 저희 자작님의 성품을 알고 계시지는 않는지..."
성품?
"그거야 우리도 알고 있지만 워낙 고대인의 유물이라는 것이 엄청난 것이 많아서.."
"그래도 그 위치를 아는 것은 저희 자작님밖에 없으니까요. 여러분이 그 유적을 찾으시려면 어쩔 수 없이 저희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겁니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얘기하는 건데요 그 유적은 아마 혼자서는 찾으실 수 없을 겁니다."
남자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음.
"어때! 저건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겠는걸. 우리 유적 탐사에 참가하자. 일단 돈을 벌어야지."
하긴 깅의 말이 아니어도 할 생각이었다. 유적탐사. 그건 환타지에서 필수적으로 나오는 이벤트가 아닌가!!
"그렇게 하죠. 고대인의 유적이라면 분명히 특종이 있을 거야."
"와! 동굴 탐험이다."
"피카비!"
"안녕하세요, 모험자 여러분. 전 이 영지의 영주 라이신 자작입니다."
침묵의 숲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제각기 험악한 인상의 사람들이 많았는데 거의 대부분이 검을 차고 있어서 더욱 험악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조용하고 질서정연한 모습이었다.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는 침묵의 숲에 있는 고대인의 유적을 탐험하려고 합니다. 이번 드림을 모시는 신전에 내린 계시로 여러분을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서론은 이만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지금 침묵의 숲 근처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이 존재해서 길을 알지 못하고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든 팀에게 안내자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비록 안내자라고는 하지만 모두 제 수하들 중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그럼 아무쪼록 여러분의 무훈을 빕니다."
자작이 내려가고 꼬질꼬질하게 생긴 할아버지가 두꺼운 책을 들고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전 라이신 자작님의 집사입니다. 그럼 제가 간략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제가 들고 있는 이 책이 요번에 자작님이 얻으신 고대인의 책으로 이 침묵의 숲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이 책을 해석한 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어디.. 보자.. "
두꺼운 책장을 낑낑거리며 넘기더니 중간쯤을 펼쳤다.
"억겁의 시간을 넘어서 지금 이 자리에 섰다. 천 년의 시간. 그 시간을 넘으면 이곳에도 생기가 넘치게 되지 않을까? 6개의 상징, 6개의 마음."
응? 또다. 6개의 상징, 6개의 마음.
"이 생명의 숲이 침묵의 숲이 되는 날, 첫 번째 문이 열리고 첫 번째 마음이 열리리라. 닫혀져 있는 마음. 첫 번째 문을 두드릴 마음. 진정한 용기를 얻지 못한 자, 그대여 지혜의 숲을 지나, 힘의 천사를 만나고 나면 그대 첫 번째 문을 두드릴 수 있으리라. 그대, 진정한 용기를 지니지 못한 자여 지금 그대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어휴. 이건 무슨 선문답이람.
"이상입니다. 그럼 각 팀에서 한 사람씩 오셔서 번호표를 받아가세요. 그 번호표에 따라 인원을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갔다올께요."
피카츄와 루리가 재빨리 뛰어갔다. 어이! 한 발 늦었군. 루리와 피카츄가 뛰어간 곳에서 엄청난 소동이 일었다.
"잠깐 생각을 해 보아야 겠군."
머리를 긁적이더니 깅이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 땅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주섬주섬 배낭에서 잔하고 홍차 잎을 꺼내더니 정성스레 홍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하이구, 깅도 괴짜야.
사람들의 힐끔거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깅은 무시한 채(아니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것이 아닐까?) 홍차를 끓였다. 당연히 난 일행이 아닌 척 깅과 약간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라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멀찌감치 떨어져서 딴 짓을 하고 있었다.
"번호 받아왔어. 우린 13번이야."
불길하군.
"그리고 이 사람이 우리의 안내원이래."
루리와 피카츄 뒤에는 헌칠한 여자가 서 있었다. 등에는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로 큰 가죽 배낭을 매고 있었고, 덥지도 않는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망토로 감싸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전 아이구요, 얜 라이에요."
그 여자는 왼손으로 자기를 기리키며 말했다.
"엑셀."
그리곤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를 했다. 얼떨결에 나와 라이는 같이 인사를 했다. 이거 좀 쑥쓰러운데.
"아, 그리고 저쪽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노인네가 깅이에요."
엑셀은 깅을 힐끗 보더니 다시 나를 보았다. 역시 당신도 창피하죠?
"부적의 마도사."
음. 말을 무척 아끼시는군요.
"깅! 우린 언제 들어가요. 다른 팀은 모두 들어갔다구요."
이 노친네가 언제까지 차를 마시고 있을 거야. 빨리 들어가 봐야 하잖아.
"흠. 아이. 넌 내가 그냥 차를 마시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벌써 세 잔째 차를 마시고 있다. 그래도 꿋꿋이 서서 기다리고 있는 엑셀이 존경스럽다. 제발 이제 가자구.
그래도 세번째 잔은 금방 마시고 깅은 자리를 치웠다.
"자, 이제 시간도 된 것 같으니 출발하지. 아! 그쪽이 안내원인가 보군요. 전 깅입니다. 안녕하세요. 인사는 됐구요 자 출발하자."
자기 할 말만 다하는 구만. 어쨌든 이제야 출발하네.
"와아! 출발출발!"
"피카피카."
긴장감 없는 놈들이 두 명 있구나.
"특종특종."
그리고 또 한 명.
숲 속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느낀 것은 이질감이었다. 전혀 다른 느낌들. 눅눅하고 어둔운 느낌이 강하게 밀려왔다.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니?"
라이가 무서운지 내쪽으로 다가왔다.
"침묵의 기운."
조금은 음침한 엑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작은 소리였는데 숲에 목소리가 메아리 쳤다. 아까 설명을 들었지만 이 정도로 아무 소리가 없을지 몰랐다. 정말 침묵의 숲이라고 할 만했다.
"다 왔습니다."
에? 아무 것도 없는데? 엑셀이 멈춰 선 곳은 샛길 중간이었다. 특별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지금까지 온 길이랑 다 똑같잖아!!
"아무 것도 없는 그냥 길 중간이잖아요."
엑셀은 말없이 길가에 있는 작은 돌멩이를 발로 톡 찼다.
쿠구구궁.
엄청난 굉음이 귓가를 찢었다. 우악!
"자, 가죠."
얼레?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냥 아까 그 길로 엑셀이 걸어갔다. 그럼 방금 굉음은 뭐지?
"엑셀양. 혹 방금 진을 건드리지 않았나? 그런데 왜 아무런 변화가 없지?"
깅의 질문은 나도, 아마 우리 모두가(흠. 루리와 피카츄는 제외하는 게 낫겠는걸) 궁금해하는 것일 것이다.
"거울의 진"
거울의 진?
"에? 거울의 진이라고? 하지만 그 진은 상상에서만 가능한 이론적인 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지금 그 진이 여기 설치대어 있다는 것인가?"
엑셀은 아무말없이 길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손으로 툭 쳤다.
쿠구구구궁.
예의 굉음 소리가 들렸지만 역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거 요상하네.
"깅, 거울의 진이라는 게 대체 뭐에요?"
"거울의 진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거울처럼 반사하는 진이야. 빛을 반사시켜서 똑같이 보이게 하는 거지. 그러니까 아까 돌이나 나무를 건드린 지점이 바로 그 경계면이야. 돌이나 나무가 진의 전초석인데 건드림으로써 진을 잠시 멈추게 하는 거야. 그렇지 않았으면 우린 다시 반사된 길로 들어서서 출발점으로 돌아가게 되지."
그러니까 우리가 온 길을 반사시켜서 다시 그 길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아까 이 진은 이론상의 진이라고 하셨는데 왜 그러신 것이죠?"
"거울의 진은 말이야 마법사가 만든 진이 아니라네."
"에? 스승님. 마법사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진을 만들 수 있죠? 진에는 마나가 들어가야 하는데요."
"일반적으론 그렇지만 이 진은 마나가 많이 소요되지 않는 진이야. 이 진은 적은 마나 대신에 엄청난 계산이 필요로 하지. 이 진을 만든 것은 수학자라네."
수학자?
"400년 전 꿈의 제국은 문명의 르네상스 시대였지. 음악, 미술, 조각 등 많은 예술 작품들이 만들어진 시대야. 그와 더불어 과학과 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지. 알다시피 마법이란 것은 과학과 수학의 지식도 많이 필요로 한다네. 좌표를 계산하거나 마나를 구동시킬 때 말이지. 그 당시 수학를 선도하는 사람이 있었네. 헤르자라는 수학자인데 그 때까지의 수학을 집대성하고 새로운 수학에의 길을 터놓았지. 그가 정리한 수학 중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는 확률의 도용이라네. 그는 수학의 확률로 많은 업적을 쌓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거울의 진의 설계이지. 거울의 진은 아까 말했듯이 빛을 반사시켜서 마치 거울처럼 보이게 하는 거지. 거기에는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반사시키기 위해 엄청난 확률 계산이 필요로 하지. 하지만 계산만 제대로 된다면 진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지. 적은 마나만 있어도 되고 거의 반영구적이야. 그리고 진을 깨뜨리는 법을 모르면 누구도 파해할 수가 없지."
"그런데 왜 이론적이란 거죠? 계산만 제대로 하면 되잖아요. 계산이 너무 어려운가요?"
"음. 계산이 어렵긴 하지만 뛰어난 마법사나 수학자들은 풀 수 있어. 하지만 문제는 그게 너무 계산적이라는 거지."
"오감."
앞서서 가던 엑셀의 말에 깅은 엑셀을 힐끗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사람의 다섯가지 감각을 무시한 거야. 사람에게는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이라는 오감이라는 것이 있지. 사람의 오감은 단독으로 보면 동물들보다는 뛰어난 것이 하나도 없지만 다섯가지를 모두 생각한다면 달라지지. 이 오감을 모두 뛰어넘을 수는 없는 거야. 사람은 사물을 판단할 때 오감을 전부 사용하지. 시각과 청각을 가장 많이 사용하긴 하지만 가장 속이기 쉬운 것도 바로 시각과 청각이지. 하지만 모든 사람의 오감을 속일 수는 없지. 그래서 이 거울의 진이 불가능 한거야."
사람의 오감이라.
"침묵의 숲."
엑셀의 말에 깅은 앞머리를 탁 쳤다.
"그렇군. 침묵의 숲. 그래 그래서 그랬군."
어이! 둘만 알지 말고 우리한테도 가르쳐 줘요∼
"그래. 침묵의 숲이 그 모든 걸 가려주는 거야. 거울의 길은 원래 시각을 속이기 위한 거니까 일단 시각은 접어두고, 미각도 여기서는 통용되지 않으니까 접어두세. 나머지 세 감각은 침묵의 숲이 원인이 되는 거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런 생명체도 없는 숲. 사람은 사물을 판단할 때 상대적으로 판단하지. 크기, 색깔, 모양 모두가 그렇지. 어느 것보다 크다, 어느 것보다 동그랗다, 어느 것보다 빨갛다 등등 항상 다른 것과 비교를 하지. 하지만 침묵의 숲에는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것이라곤 항상 똑같은 길, 똑같은 나무 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생물체도 없어. 그래서 청각과 후각이 무용지물이 되지. 그 다음은 촉각. 생명의 나무가 없어지면서 침묵의 숲에는 어눌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지. 그것이 촉각을 가려주지. 이거 굉장하군."
호! 엄청나군. 엄청난 것 같군. 엄청난 것일까? 엄청나겠지..
깅의 설명을 들으며 몇 번의 굉음을 들었더니 어느덧 커다란 나무 밑에 도달했다.
"생명의 나무."
엑셀의 가리킨 곳에는 정말 엄청나게 큰 나무가 서 있었다. 내가 특훈을 한다고 자르던 나무의 거의 다섯 배는 됨직한 진짜 엄청나게 큰 나무였다. 그 끝은 하늘을 찌르고 그 뿌리는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저렇게 큰 나무가 왜 밖에선 보이지 않았지?
엑셀은 생명의 나무로 다가가 나무 등걸의 한 부분을 만졌다. 그러자 생명의 나무 밑둥으로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검은 구멍이 뻥 뚫렸다.
"안으로."
엑셀의 몸이 어두운 굴속으로 사라졌다.
"어이! 햇불을 가지고 가야지. 이런, 제이야 불을 밝혀라."
그럴 필요가 없지.
"멋쟁이 장갑, 불을 밝혀라."
내 빨간 장갑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화이어!
"와아! 불이다. 손에서 불! 타올라라."
"피카비!"
"아이 언니 괜찮아요?"
"괜찮아! 이건 불꽃의 숨결이란 장갑이야. 횃불 대신 사용하기 좋지."
난 기세 좋게 앞장서서 들어갔다. 동굴 안은 사람 하나가 딱 들어갈 정도로 그 높이가 낮았는데, 여기저기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앞서 들어갔던 엑셀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잠깐 보더니 뒤돌아 서서 다시 걸어갔다. 너무 음침해.
"내참, 거인의 정수 불꽃의 숨결을 고작 횃불로 이용하는 놈이 있다니,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모두 자빠지겠군."
"불꽃의 숨결을 아세요?"
"그럼 그 유명한 장갑을 모른다서야, 하지만 이름치고는 너무 수수한데."
이름?
"이름이 뭔데요. 불꽃의 숨결이 이름이 아닌가요?"
"불꽃의 숨결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장갑이 고대 거인의 심장의 가죽으로 만들어져서야. 거인들은 불꽃의 힘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어. 불꽃의 힘은 엄청 강해서 신조차 그들을 어쩌지 못했다고 하지. 하지만 그들은 호전적인 그리고 독립적인 존재들이었어. 몇 백년 동안 그들은 서로 싸웠지. 그들은 정정당당한 결투를 숭배했어. 하늘이 울고 땅이 요동을 쳤다고 하지. 그리고 거인의 모습을 더이상 볼 수 없었지. 마지막 거인이 죽으면서 그는 자신들이 살았다는 것을 남기려고 장갑을 하나 만들었어. 자신의 심장을 꺼내서 말이야. 거인들의 불꽃의 힘이 담긴 장갑이 탄생했지. 그래서 불꽃의 숨결이라고 부르는 거야. 하지만 그 장갑은 이성을 가지고 있어서 주인으로 인정한 사람이 아니면 인정을 하지 않는데. 그리고 문제가 하나 있는데 성격이 괴팍하다는 거지."
그러니까 이름이 뭐냐구요?
"그 장갑의 이름은 말이지, 밤하늘에 찬란히 빛나는 멋쟁이 장갑이라네."
뭐?
"저 다시 한 번만."
"험. 밤하늘에 찬란히 빛나는 멋쟁이 장갑이라구 한다니까."
그런, 그런 유치찬란한 이름이라니. 도대체 누가 지은 거야!!
순간 장갑에서 시퍼런 불꽃이 피어오른 것 같았다. 그런 이름이었냐? 장갑이 순간 기뻐한 것 같은데...
"끝 그리고 시작."
엑셀이 발을 멈추고 우리를 돌아보았다. 엑셀이 발을 멈춘 곳으로 다가가 손을 휘둘러 살펴보니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
"세 군데에서 소리가 들려요. 뭔가 소리치는 소리도 들리고 날카로운 쇳소리도 들리는 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