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여행 인터넷 언론 ・ 1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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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라바니자·로자노 헤머·최정화 등 동시대 작가 3인 조명 7,000개 주방용품부터 생체 데이터까지 새로운 조형언어로 번역 |
[글.송미리내]미술관에서 밥을 먹고, 자신의 심장박동을 측정하며, 집에서 쓰던 주방용품을 기증한다. 과거라면 상상하기 어려웠던 이 풍경이 동시대 미술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작품으로 완성된다.
작가가 일방적으로 완성한 결과물을 감상하던 전통적인 관람 방식에서 벗어나, 관람자의 행동과 목소리, 선택과 응답이 작품의 일부가 되는 '참여형 예술'이 주목받고 있다. 번역회화의 관점에서 이는 작가의 경험이 아닌, 관람자의 삶과 행동을 새로운 조형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만남을 미술로 번역하다
태국계 미국 작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는 관람자와 작품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집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1992년 뉴욕 303 갤러리에서 시작된 그의 대표작 'Untitled (Free)'는 갤러리를 임시 주방으로 개조해 관람객에게 태국식 카레와 밥을 무료로 제공하는 파격적인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곳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캔버스나 완성된 조각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며 관계를 맺는 상황 자체가 작품이 된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그의 또 다른 작업 'Untitled 2002 (he promised)'에 대해 "관람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완전히 실현되는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티라바니자에게 번역의 대상은 특정한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만남' 그 자체다.
사진: 리크릿 티라바니자, 무제(빵도 재도 없다), 미슬람 미술관, 2025,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 발췌
라파엘 로자노 헤머, 신체 데이터를 조형언어로
멕시코계 캐나다 작가 라파엘 로자노 헤머(Rafael Lozano Hemmer)는 관람자의 참여를 기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그의 작업에서 관람자의 몸은 작품을 작동시키는 핵심 입력값이 된다. 심박수, 목소리, 움직임 등 생체 정보가 센서를 거쳐 빛과 소리, 영상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대표작 'Pulse' 시리즈는 관람객의 심장박동을 빛과 소리의 패턴으로 바꾼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허시혼미술관 측은 "수십만 명의 참가자들이 제공한 생체 정보와 심박 기록이 이전 참가자들의 기록과 결합해 거대한 실시간 아카이브를 구성했다"고 설명한다. 관람객의 목소리를 녹음해 빛으로 변환하는 'Voice Array' 역시 마찬가지다. 로자노 헤머의 작업에서 관람자의 몸은 일종의 붓이 되고, 데이터는 물감이 되어 새로운 시각적 구조를 완성한다.
사진: pulse_room_kanazawa_2025 작가홈페이지 발췌
최정화, 7000개의 일상 사물로 쌓아 올린 대중의 기억
한국 작가 최정화는 참여를 물리적인 사물의 집합으로 확장한다. 플라스틱 바구니, 주방용품 등 흔하고 버려진 소비재를 예술의 재료로 삼아 미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문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선보인 '민들레'는 대중이 기증한 약 7,000개의 주방용품으로 구성됐다. 각각의 물건에는 기증자의 이름이 새겨졌다. 개인의 일상과 기억이 깃든 사물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공공적 이미지로 번역된 것이다. 호주 퀸즐랜드미술관·현대미술관(QAGOMA)에서 소개된 'Mandala of Flowers' 역시 관람객이 직접 플라스틱 병뚜껑으로 만다라를 만드는 참여형 작업이다. 최정화에게 관람자는 작품의 재료를 직접 가져오고 조합하는 적극적인 생산자다.
사진: 최정화, 숲 성북구립미술관 2018 작가 홈페이지 발췌
관람자, 작품 밖 관찰자에서 내부의 생산자로
세 작가의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작품의 재료가 작가의 손을 떠나 관람자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과거 번역의 대상이 작가 개인의 감정과 기억이었다면, 이제는 관람자의 행동, 목소리, 응답이 새로운 조형언어로 번역된다.
작품은 누군가의 참여를 통해 비로소 작동하고, 수많은 사람의 흔적이 쌓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열린 구조로 진화했다. 관람자의 말과 행동이 작품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미술은 사람들의 경험을 다른 형태로 번역하는 거대한 장치가 된다.
관람자가 작품에 참여하며 남기는 것은 단순한 물질에 그치지 않는다. 오래 사용한 물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버려진 사물에는 각자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다면 버려진 물건의 기억은 어떻게 다시 예술로 번역될 수 있을까. 이어지는 번역회화 ⑨ 편에서는 버려진 재료가 새로운 조형언어로 되살아나는 순간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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