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현재 유럽 복지국가의 富는 제 3세계 국가로부터의 착취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였던 그들의 자본주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장물이었다고 저는 결론 지었죠.
"콜럼버스가 우연히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인도의 향신료와 일본의 황금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유럽인들에 의한 신세계 아메리카의 약탈과 식민지화였다. 아즈택과 잉카의 막대한 금은의 약탈은 유럽의 통화유통량을 비약적으로 증가 시켰다. 맑스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부른 것의 실체가 바로 이 약탈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담배나 설탕 등 아메리카 산물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생기는 한편, 아메리카로 이주한 유럽인은 종래의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한 물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무한히 시장이 확대되었다. 시장의 거대한 수요를 생산하기 위해 카리브해 지역의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흑인들의 노예노동이 필요로 했다.
풍부한 자본, 무한히 확대된 시장, 싼 노동력이라는 자본주의가 성립되기 위한 조건이 이렇게 갖춰졌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제무역의 약탈을 통해서 생겨났고, 그 뒤에 유럽의 강력한 국가들이 존재했었고, 유럽의 국가들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무한한 자원과 싼 노동력을 약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답을 하자, 회사원님은 그럼 현재 유럽 복지국가들이 제 3 세계국가들을 수탈한 증거를 대라. 고 다시 따지셨죠.(질문 1)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복지이론의 원조격인 닐스 칼레비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의 정책위원인 최병천씨는 맑스이론을 재해석했죠.
우선은, 하부의 경제적 토대가 상부 구조(사상,예술,종교,국가등)를 규정짓는다는 맑스의 유물론보다 그람시의 헤게모니이론(상층부의 지적 도덕적 능력이 사회변화를 주도한다)을 선택했죠.
다음은,
“노동계급이 사회에 참여하게 될수록 마르크스가 말했던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게 되고 이윤은 더 이상 착취의 수단으로 작용하지 않게 된다... [이윤은] 특정한 조건하에서 착취를 위한 수단으로 전화된다. 이러한 조건을 바꾸면 이윤은 더 이상 착취적인 것이 아니다” -(『모색』, 154~155쪽)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칼레비는 ‘소유 일반’과 ‘부르주아적 소유’를 엄격히 구분했다. 요컨대, 노동자 및 중소 상공인에게 과도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부르주아적 소유’만이 공동체적 사회에 반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소유 일반의 폐지나 사적 소유의 폐지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에 대한 요구다.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부르주아적 소유란, 영원한 자연권의 신성하고 불가침적인 소유이자.... 사회로부터의 모든 참여를 배제하는 소유이다.” -(『논쟁』, 98쪽)
그런데 이러한 칼레비의 마르크스 해석은 현대적으로 해석할 때, 탁월한 분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맑스의 주저 『자본』은 상품 ⇒ 화폐 ⇒ 자본의 순서로 전개되는데 이에 대해 각각 상품관계, 화폐관계, 자본관계로 표현된다. 상품관계와 화폐관계는 ‘아직’ 자본이 아닌 것이다. 자본관계의 개념적 성립은 ‘노동력의 구매’가 이뤄지는 시점인데, 이것은 마르크스 자신이 상품과 화폐가 아닌, ‘지배관계’를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상이 닐스 칼레비가 맑스를 재해석한 주요 내용이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 저가 다시 반박을 하겠습니다.
회사원님은, 자본주의 형성과정의 범죄성을 인정하시는 지 우선 묻고 싶구요. 그게 아니라면 순진한 맑스처럼 자본주의가 시장이 진화한 사회진화론을 믿고 계신지요.
저는, 일단 회사원님이 (질문1)을 하셨던 관계로 자본주의 형성과정의 악마성을 인정한다고 믿고 그 질문에 답을 하겠습니다.
1,2 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간의 세력싸움이었죠.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은 제국주의가 아니었다고 반문하는 좌파들이 계실 것이라고 믿고 추가 설명을 드리죠. 물론,산업국가 후발주자이자 해군력이 약했던 소련이 제 3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완성하고 생산수단을 국가가 독점하고 공업화에 총력을 쏟습니다. 그 사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인민들은 국가의 노예로 전락하고, 결국은 사회주의 가치는 사라지고 국가독점 자본주의 형태가 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상으로 어쩔 수 없이 제 3 세계 국가를 침략 할 수 밖에 없는 경제적 동기가 탄생된 겁니다. 따라서, 소련 역시 태생적으로는 제국주의가 아니었지만, 결론으로 말하자면 제국주의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19세기에 걸쳐 20세기 초반까지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들의 자본주의를 위하여 침략했던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들 중 하나였던 거죠.
혹자는, 그것이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운동이나 제국주의 국가들의 민주주의 체제 때문이었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나라를 봐서도 전혀 아니죠. 그 이유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즉, 더이상 식민지 국가들을 정치적으로 압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그들의 속셈을 차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식미지로 가지고 있는 것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도 손해라고 판단한 때문입니다. 거기에 소련이 끼여들어 우리나라는 분단이 된겁니다.
제 3 세계 착취를 통한 세계무역이 완성된겁니다. 오히려, 더 이상 제 3 세계 인민들을 착취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으로 봐서도 손해라고 판단한 겁니다. 실제로, 그후 미국이 주도가 된 세계경제는 제 3 세계 각국의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을 합니다.
다음은, 닐스 칼레비의 주장에 반박을 하면서 최병천씨의 그람시 헤게모니이론의 문제점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물적 토대가 무엇인지 회사원님이 잘못 생각하시고 계시는 물적 토대에 대한 이야기와 현재 유럽 복지국가 자본주의의 착취와 그것으로 형성되는 물적 토대에 대한 것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최병천씨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잘못 이해하고 계신겁니다. 그람시가 맑스의 유물론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의 헤게모니 이론이 필요하다고 한 겁니다. 지적 도덕적 우위를 가진 상층부의 권력을 인정하고 그들과의 화해를 도모한 거죠. 즉, 상충부의 국가에 대한 희생과 그들의 경제적 부를 세금을 통해서 빼앗아 올 수 있는 명분을 만든 셈입니다. 이른바, '악어의 눈물'인 셈이죠.
악어가 눈물을 흘리느 것은 가난한 자들이 불쌍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하품을 하기 위해 턱을 크게 벌리다가 어쩔 수 없이 흘리게 된 눈물이라는 겁니다.
최병천씨는 무솔리니와 비슷합니다. 무솔리니야 말로 그람시의 이론을 잘못 이해해서 자신의 공산주의 이론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서 파시즘 국가를 만들고 말았죠. 그람시와 말로 맑스의 진정한 후계자인데,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엉터리로 이해하고 잇으니.....
닐스 칼레비는 노동자가 사회에 참여하게 되면 자본주의 사회는 소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윤도 착취가 아니라고 했구요. 이러니까 사민주의자들은 복지국가의 물적 토대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것을 기반으로 복지국가의 경제적 부를 형성할 수 있다고 판단한겁니다.
자본주의를 사회진화론으로 이해한 맑스도 문제지만, 인류 역사의 음모인 자본주의를 노동자의 사회참여로서 일방적으로 폐기할 수 있다고 한 칼레비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30대 초반에 요절한 천재라고 그러더군요. 그리고 그 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의 이론을 보강했죠.
그러나, 어린 칼레비는 자본주의 형성과정을 공부하지 못햇거나 애써 외면한 겁니다. 그가 어떤 과정에서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게 된 지는 모르겠지만, 노름에 빠져서 돈에 대해 지독한 연민에 빠져 있던 가난한 맑스와 오버랩 되는군요.
자본주의 형성과정은 같은 인류에 대한 동종에 대학 학살과 착추로서 일단은 반인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이윤을 위해서 다시 모든 생물들이 살고 있는 지구를 파괴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 후손들에 대한 배반으로 이야기 됩니다.
뿐만아니라, 자본주의는 극한의 경쟁으로 인한 사회의 제반 문제를 만들어냅니다.(이번에 스웨덴 극우주의자의 학살은 지독한 경쟁사회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런 사회문제의 원인은 경쟁과 착취입니다.
자본주의는 같은 인류에 대한 착취, 후손에 대한 착취, 다른 종들에 대한 착취를 넘어서
같은 사회의 노동자, 여성(노동, 임신, 양육, 가정 살림등), 이주민, 농민, 청소년, 아동, 가정, 자신의 몸(일 중동), 시간 (자신의 누려야 할 시간)등 모든 사회적 약자들과 진정으로 우리가 누려할 가치들에 대해서 착취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지점에서 진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담론이 탄생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여성,생태,평화,교육,아동,임신,육아,이주민 등등.....
회사원님, 그리고 최병천님/ 당신들이 이야기 하는 현재 우리나라의 물적 토대는 바로 이런 것들이 희생된 경제적 富입니다.
이것을 물적 토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썩어빠진 시궁창 위에 빌딩을 짓자는 이야기와 같은 겁니다.
그것은 달동네 사람들을 무시하고 재개발을 하는 한나라당 출신의 서울시장과 같은 겁니다.
진정, 물적 토대란, 富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들이 먹고 살아가는 경제적 시스템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경제(經濟)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입니다. 돈을 벌고 富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사람이 사는 방법과 삶의 가치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우선, 그것을 바로 잡는 곳에 진정한 좌파의 길이 있는 겁니다.
삶을 살아가는 방법의 차이에서 좌/우의 갈림길이 잇습니다.
경쟁을 할 것인가, 아니면 같이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