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다
요한복음 14장 1~4절에 “너희의 마음이 당황하지 아니하도록 하여라 너희는 하나님을 믿으며(believe in) 또한 나도 믿어라. 나의 아버지의 집에 거처들이 많은지라 내가 장소를 준비하였기에 가고. 내가 장소를 준비하였다면 다시 오겠으며 내가 너희를 받아들일 것이니,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기 위해서고(you may be also). 내가 떠나가는 곳에 너희가 그 길을 알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근심하다”로 번역된 단어(타랏소)는 “당황하다”를 뜻하는데 “걱정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요 14:1). “걱정”이라는 한국어는 “안심이 되지 않아 속을 태움”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이 당황하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우리의 마음은 괴롭게 되거나 걱정하지(trouble)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또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걱정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생각을 안 하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이 내 머릿속에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낙관주의 철학이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말도 틀린 말입니다. 이 철학의 신봉자들은 인류가 좋은 방향으로 점점 진보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지고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심리학적 방법을 써서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철학과 종교를 가지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불교 같은 경우에는 벽 보고 명상하여 고뇌를 끊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쾌활한 젊은이들은 인생을 너무 두려워하여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그들은 인생을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면 암울하니까 아무 생각 안 하고 그냥 사람들 만나 술 먹고 웃고 떠들며 사는 젊은이들은 걱정이 없느냐? 걱정이 있는 것이며 걱정이 있으므로 생각하며 살아가기 싫은 것입니다. 생각하면 두려우니까, ‘생각 없이 웃고 즐기면서 살자’ 그러는 것입니다.
불교는 여러 차례 환생함으로써 우주 속에 흡수된다고 가르칩니다. 불교에 중들은 고기 안 먹습니다. 사람이 나쁜 일을 하며 살다가 죽으면 동물로도 태어나는데 할아버지가 태어난 돼지를 먹을 수도 있잖습니까?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참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근본적인 원인의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학의 맹점이 증세는 없애 주는데 건강을 주지는 않는 것입니다. 감기에 걸려 감기약을 먹으면 열과 콧물과 기침을 멈추게 만들어 주지만 그 약은 그런 증세를 없애 준 것이지 건강하게 만들어 준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문제에도 그 증세만을 없애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증세가 없어짐이 아니라 건강에 있어야만 합니다. 걱정하는 증세를 없애기 위해 근본적인 영적 문제를 해결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근본적인 영적 문제의 해결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들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이런저런 유형의 마약들과 같이 고통만 없애줍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통과 걱정 등은 부산물일 뿐이고 죄에 따른 결과인데 결과에 앞선 근본적인 원인을 바로잡아야 결과도 바로잡히게 됩니다.
모든 슬픔과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은 죄고 죄를 해결하여야만 하는데, 죄의 해결 방법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과 사이가 좋아지는 때 하나님과 평화롭고 나 자신과도 평화로워 마음에 평화가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만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빛 안에 거하시며 그 영광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편재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에 많은 일이 일어나나, 모든 일은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신 약속을 생각해 보십시오.
전쟁이나 질병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등이 다 나에게 유익합니다. 그 모든 일은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게 될 것이니 좋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삶이 순조로울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기가 너무 쉬운 것입니다. 그러다가 삶에 슬픈 일이 닥칠 때 다시 하나님을 찾고 붙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가까이 이끄시기 위해 벌하시기도 합니다. 따라서 슬픔과 고통조차도 결국에는 우리를 좋은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그 아들 예수님도 믿어야 합니다. 이슬람교도는 하나님을 믿으나 주 예수 크리스트를 믿지 않는 것인데,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고 예수 크리스트를 믿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우리와는 전혀 다른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평안을 얻는 법에 있어 본질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운 일들이 갑자기 닥치게 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습니까? 마음의 평안을 알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그 길과 그 진리와 그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7절에 “나는 그 길과 그 진리와 그 생명이니, 아무도 나를 통하여서가 아니라면 그 아버지를 향하여 오지 아니하노라. 만일 너희가 나를 알았으면 그리고 나의 아버지도 너희가 알았을 것이라 지금에서부터 너희가 그를 알고 너희가 보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I am ~”, 여섯 번째 “나는 ~이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나는 생명의 떡이다”고 두 번째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였고, 세 번째는 “나는 양들의 문이다”고 네 번째는 “나는 좋은 목자이다”였고, 다섯 번째가 “나는 부활과 생명이다”였고 오늘은 여섯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그 길과 그 진리와 그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바로 예수님의 아버지 집에 있는 거처들로 가는 길이십니다. 우리는 “그 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갑니다.
오늘날 다원주의가 모든 진리의 판단 기준으로 평가되는 때입니다. “다원주의(多元主義)”는 “다(多)”가 “많다”, “원(元)”은 “으뜸”을 뜻하는데 “으뜸”이 되는 “근본”이 “많다”라는 “주의”가 한자어로 “다원주의”입니다. 다원주의가 주장하는 바는 곧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 많다는 것입니다.
높은 산이 있는데 어느 길로 오르든지 간에 꼭대기에만 오르면 되듯이 동쪽이든지 서쪽이든지 남쪽이든지 북쪽이든지 정상에만 오르면 되듯이 하나님도 어느 길로 오르든지 간에 하나님께만 오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천주교든지 불교든지 힌두교든지 하나님께만 오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그 길이다”라고 오직 한 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그 길”이라는 말씀은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그 길”이라는 뜻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으면 아버지를 향하여 올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종교는 뭐라고 말합니까? 마리아를 통하여 갈 수 있다고 말하며, 부처를 통하여 갈 수 있으며 마호메트를 통하여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다원주의를 믿는 사람들은 크리스트교가 독선적이라고 말하는데 크리스트교가 오직 예수님을 통해 구원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능력(power)을 벗어나는 길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예수님 외에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만 사람의 죄를 속바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주신 분이십니다. 마리아나 석가모니 부처나 마호메트는 자기 목숨을 주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아버지를 향하여 가는 “그 길”이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아버지께 가는 길을 가능하게 하시는 “그 길”이신데,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의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그 길”을 여셨습니다.
사람은 “그 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 아버지를 향하여 갑니다. “그 길”은 값없이 걸을 수 있는 유일한(the) 길이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몰두하여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영생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중요한 목적은 내세의 삶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내세(來世)”라는 한자어는 “올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앞으로 올 세상이 있습니다. 그 세상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앞으로의 내세는 영원하며 지금 세상의 선택에 따라 내세가 결정됩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주지하여야만 하는 사항이 내세에서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승의 너머에 존재하는 저승의 삶을 준비하여야만 합니다.
죽음에 관한 생각이 절망, 공포 그리고 생소함과 같은 느낌을 줍니까? 내세, 죽음, 죽음 너머 있는 삶 등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어떠합니까?
저승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예전에 천주교는 ‘연옥’이라는 중간지대를 만들어 놓고 돈을 거두었는데 헌금을 많이 바치면 조상들이 연옥에 있다가 천국 간다고 헌금을 걷어서 큰 성당들을 지금도 유적으로 남아 있는 성당들을 만들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간은 없고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이요 믿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UN은 프리메이슨의 종교라 하는 뉴에이지 오컬트를 세계에 보급하고 과학과 철학과 종교를 뉴에이지 안에 통합하는 일을 활발히 하였습니다. 1945년에 UN이 세워졌으며 1948년에 세계교회협의회가 세워졌습니다. 프리메이슨은 WCC를 통하여 종교 다원주의를 퍼트려 온 것입니다.
WCC 총회가 몇 년마다 개최되는데 지난번에는 부산에서 개최되었고, 천주교와 우리가 하나가 되자 그러면서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절에 ‘예수님 탄생을 축하합니다.’ 절에 현수막 붙이고, 석가탄신일에 교회에서 ‘부처님 오신 날 축하합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목사가 절에서 말씀 전하고 중이 교회에서 말씀 전하고, 그렇게 합니다.
석가를 믿고 마호메트를 믿고 어떤 길을 통하든 하나님께 이르면 되지 그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만 “그 길”이십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타락하여 WCC에 가입한 교단들이 많다는 것인데 감리교는 물론이고 장로교 중에서 기장, 기독교장로회는 말할 것도 없고 예장에서도 통합 측, 통합이 어디냐고 하면 장로교신학대학교 측입니다. 예장 통합도 여기에 가입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회복하고 부흥하기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세계 복음주의 동맹이 합력하면서 종교 다원주의는 득세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 믿으면 하나가 되지만, 철과 모래가 어떻게 하나가 됩니까? 그것을 뭉친다고 뭉쳐질 것입니까? 뭉쳐지지 않습니다. 모래가 변해서 철이 돼야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길이라는 주장은 악마의 거짓이며, 거짓말쟁이 악마의 거짓말에 속으면 그 영혼이 죽고 멸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께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뿐이십니다. 다른 길은 없고, 천하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하고 오직 그 길이신 예수님만을 붙들고서 살며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는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며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