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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조선인에 대한 인상
1-1 조선인의 인상
제5장 국민 중에서
체격
한반도를 방문하고 온 사람들조차도 이나라 국민들의 체격에 관한 잘못된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행객이들이나 신문사 특파우너들은 조선 사람들의 키가 마치 평균인보다 훨씬 큰 것처럼 말하거나 기술하곤 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일본이나 중국을 방문하거나,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자그마한 키에 익숙해 있다가 비교적 킨 조선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는 자연히 조선 사람들이 확대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복장
둘째는 조선사람들의 복장 떄문이다. 조선사람들은 모두 축 늘어진 외투를 입고 있으며 그 외투가 대부분 흰 색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조선 사람들의 키를 거론할 꺠 방문객드링 저지른 오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모양
......그들의 머리는 길고 곧으며, 검고 거칠다. 거의 모두가 상ㅇ하는 회장이나 염료가 없었더라면 더럽고 황갈색의 색조를 띤 경향이 있다. 그러나 머리는 남녀 모두의 몸단장에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은 아낌없이 바른 기름과 흑색 혼합물에 의해 정교하게 감춰진다. 고수머리의 경향은 전혀 없으며, 며칠동안 머리를 땋아 노\ㅎ은 후에도 곱슬머리의 기미는 없다
-댕기 에피소드 : 머리모양때문에 남자를 여자로 착각한 경우
매우 일반적이고 그리고 정확한 보고에 의하면 거리에서 조선 여인들을 좀처럼 볼 수 없다고 한다. 미국에서처럼 자유롭고 빈번하게 나다닐 자유가 이들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밖에 나다니는 여인들은 어느 모로 보나 하층계급 이상의 여인들의 경우이다. 그러나 완벽한 여행자라면 총명함과 통찰력으로, 그 보고서가 사실무근임을 이 나라에 체류한 지 불과 몇 시간만에 발견하기도한다. 이러한 부류의 한 신사가 서울에 체류한 후 이틀째에 이에 관해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 말의 진실을 확인하였을 때, 진실이 아닌 것을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것 외에 그를 납득할 수 없었다........이것을 확인시키려고 우리 바로 앞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이 실수는 용서될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남자로서 길고 늘어진 옷을 입고 잇었는데 변발을 한채 뒤로 늘어뜨린 머리가 그들을 여자로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그 여자 같은 사람들이 머리를 항상 그런 모습으로 하고 있는 모습으로 하고 있는 미혼 총각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이 신사는 상당히 풀이 죽어 있었다. 성인, 혹은 같은말로 결혼한 남자는 머리 꼭대기에 상투를 튼다.
피부 및 얼굴형태
............조선사람들은 자신들의지리적 위치처럼, 체격에도 여러 모로 중국인과 일본인의 중간인 것 같다. 피부색은 일본인들처럼 검지도 않고 중국인들과 같은 거무튀튀한 황색도 아니다. 가끔씩 이나라에서 치부가 우중충한 갈색인 원주민들을 보게 된다. 이들중 대부분은 상당히 미인인데, 안색이 아름답기 때문에 분을 바를 경우 서구의 미인들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이 분은 쌀가루의 형태로 항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들은 화장품을 넉넉하게 바르며 효과도 좋다. 조선사람들은 끝이 치켜 올라간 눈과 튀어난 광대뼈, 그리고 결정적으로 납작한 코를 가지고 있어 몽골인종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체력
조선사람들은 그들이 풍기는 강한 외모처럼 강하지는 않다.
음식
그들의 주식은 주로 쌀이며, 식량이 부족할 때에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콩이나 기장으로 근근이 입에 풀칠할 정도이고 여름에는 소금도 없이 오이를 통째로 먹는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은 육식을 하는 민족이 지니는 근육의 유연성이나 밀도가 부족하다. 조선 사람들이 천성적으로 게르으랃도 비난받기 보다는 이해되어야 할 더 큰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평균적인 조선사람들의 주어진 시간 내에 최대한 이상으로 일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이미 여러곳에서 지적된 바 있다.
외모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중국인이나 일본인들과는 현저하게 다르다.
조선 사람들 사이에는 얼굴 모습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는데 그들의 복장이 같기 때문에 그러한 차이는 더욱 눈에 잘띈다.
사람을 구별하는 어려움은 일본이나 중국을 여행하는 낯선 사람들을 괴롭히지만 조선에서는 그렇지 않다.
몽골계 민족의 치켜올라간 눈꼬리가 여전하고 청동색 피부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피부색은 까무 잡잡한 황색으로 부터 아주 밝은 갈색까지 다양하다. 반듯한 매부리코가 있는가하면 콧구멍이 크고 넓적한 들창코도 있다. 비록 머리칼이 검기는 하지만 머리색을 내기 위해서는 검댕이와 기름을 자주 발라야 한다. 머리칼은 가는 철사줄처럼 뻣뻣한것부터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것까지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콧수염과 염소수염을 달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그러하듯이 잘 손질된 몇개의 머리털을 양자의 대용으로 이용하는가하면 많은 이들은 무성하고 질긴 턱수염을 기르고 있다. 하층민에게는 넓고 통통한 입이 흔하고 문벌가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입은 작지만 모자람이 없으며 얇고 잘생겼다.
눈은 미록 검지만 암갈색에서 담갈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광대뼈는 높이 솟아 있다. 눈두덩의 모양은 마치 유행을 따르기라도 한 것처럼 고상하고 이지적으로 생긴 경우가 많다. 귀는 작고 예쁘다. 일상적인 표정은 약간 당혹한듯 하면서도 활기에 차있다. 좋은 의미에서 볼때 그들의 외관은 힘이나 의지력보다는 재치있는 지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 사람들은 분명히 잘생긴 인종이다. 체격도 좋다. 남자의 평균키는 5피트 4.5인치이며 여성의 키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어울리지 않게 작다. 그들의 모습은 가장 추한 복식으로 과장되어 땅딸막하고 펑퍼짐하다. 남녀모든 계층 사람들은 손은 매우 작고 희고 멋있게 생겼다. 손톱은 아몬드 모양으로 깊게 다듬어져있다. 남자들은 아주 힘이 세어 짐꾼들은 100파운드 정도의 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이다. 양반들의 거만한 걸음걸이든 평민들이 일보로 가면서 걷는 보폭이 좁고 확고한 걸음 걸이든 간에 그들은 매우 잘 걷는다.
조선의 인종
조선 사람드르이 기원과 계통에 대해 명료하게 밝히기란 매우 어려우며 중국이나 조선의 어떤 문헌 또한 이 문제에 대해 적실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선 사람들에게 질문을 한다해도 그들은 자신들도 마찬가지로 전혀 아는 바가 없으며 그 유래를 망각한 지 이미 오래 되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종족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사실은 이에 광한 그들의 문헌이 부족하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들이 자신의 역사라고 믿고 있는 내용들은 매우 불충분하다.
조선 사람의 인상을 보면 중국인과는 다른 종족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조선 사람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더 크고 건장하며 대체로 활달한 인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두 민족에 비해 훨씬더 몽골이나 북아시아의 야만적인 유목민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토착적이라기보다는 북방계로 보이는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의 방랑과 투젱끝에 정착한 후로 점차 호전적이고 수렵 중심의 거친 습성이 평화롭고 농업과 상업을 추구하는 온건한 습성으로 바뀌어졌다는 면에서 그들은 서로 어느정도의 영향은 주고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나가사키에 표류한 많은조선사람들을 목격한 지볼트는 특히 종족간의 차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견해를 매우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기 때문에 빈약한 나의 견해를 밝히는 것 보다 그의 견해를 소개하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 생각된다.
조선 사람들은 일번인에 비해 체격이 더 크다. 그러나 대부분 5.5피트를 넘지 못하고 건장한 체구와 균형된 몸매를 가지고 있으며 활기차고 민첩하다. 그들의 용모는 일반적으로 몽골조그이 인상을 연상시킨다. 즉 넓고 거친 얼굴, 튀어나온 광대뼈, 튼튼한 턱, 넓적하고 찌그러진 듯한 콕부리와 코, 두터운 입술을 지닌 큰 입,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눈매, 검고 숱이 짙으며 때로는 적갈색을 띈 머리털, 짙은 누썹, 가는 수염, 적황색의 안색 등이 첫눈에 그들이 동북 아시아인임을 보여준다. 내가 목격한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조선 사람은 용모에서 분명히 두종족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 즉 조선 사람들의 콧부리가 치솟아 있는 반면에 콧 끝은 다소 쳐져 있어 그 용모가 코카서스족에 가깝다. 그러나 눈의 생김새는 유렵인에 가까운데, 이런 경우에는 광대뼈가 움푹 들어가고 몽골족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얼굴 측면의 뚜렷한 선이 나타난다. 용모가 코카서스 족에 가가워질 수록수염은 옅어지고 몽골족에서 수염이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조선 사람은 정수리가 약간 솟아오르고 이마는 비교적 반듯하며 전반적인 풍모가 고결해서 몽골이느이 소박한 인상과 크게 착각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지볼트의 "Nippon"참조
지볼트가 접촉했던 많은 조선 사람들의 용모가 몽골족의 특징을 지녔다는 사살의 원인이 무엇이었던가에 대해서는 그 해답이 쉽게 나올 수 있다. 일본의 해안에 표류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섬 도는 해안에 정착한 사공이나 어부였다. 한편 지볼트가 언급한 유형이 대체로 내륙형이긴 하지만 예외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들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상당한 수의 조선 사람들이 매우 준수하게 성장한 풍모를 보이고 있는 점으로 비춰 보아 역시 대다수가 지볼트가 말한 예외에 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두발
남자들의 두발 모양은 일본인들과 거의 비슷하나 다만 일본인들은 상투와 둘레를 밀어버리는데 반해 조선사람들은 머리를 깎지 않고 기른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두발 모양새는 일본인들처럼 깔끔하지 않고 매우 지저분해 보인다, 기혼자들은 독특한 모양의 상투를 튼다. 미혼자나 소년들은 가운데에서 머리를 두갈래로 땋아 허리 부근 까지 길게 늘어뜨린다. 이러한 모양새는 매우 여성적인 인상을 주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정숙한 여자들은 때대로 땋은 머리를 목위로 말아 올려 긴 비녀를 꽂는다. 조선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처럼 완전히 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은 두 민족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갈색이나 밤색 그리고 심지어 아마 빛의 머리섹도 가지고 있다. 모든 기혼 남자들은 턱수염과 구렛나루를 길렀으나 콧수염은 거의 기르지 않는다. 그들은 한가할때 감나히 앉아서 수염을 조심스럽게 어루 만진다 노인들 외에는 거의 수염을 가르지 않는 중국인들과는 달리 조선의 젊은이 들은 유럽의 멋쟁이들의 질투를 살 만큼 매우 독특한 짙고 긴 수염을 날리며 거리를 활보한다.
평균 이상의 신장과(중국과 일본에 비교..) 힘든 일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체력을 지닌 한국인들은 우수한 종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신면으로 시선을 돌리면 우리는 다른 면을 보게 된다. 우수한 체력에 비해 정신력은 그에 못미치는데, 그들은 분명 최상의 자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마치 너울처럼 심한 무기력증에 빠져있다. 동방인 몽고계와 남방인들의 교접에 의해 생겨난 탓으로 한국 민족 또한 너무나 다른 두 개체간 잡종 혈통에 가해지는 조기 절멸의 생물학적 법칙의 가혹한 운명을 피할 길이 없는 것 같다. 육체적으로는 아닐지 모르나 지금 한국인들은 정신적으로 쇠잔한 상태이다. 서양의 침투에 마지막으로 굴복한 동양의 보루로서 30세기 이상을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왔고, 비옥한 산하를 점령하려는 탐욕스러운 이웃 약탈자들의 침략대상으로 끊임없는 전쟁을 겪어야 했던 한국은 지금 그 국민들과 함께 비참하고 황량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단순한 신체검사를 어떤 나쁜 주술을 행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 주민들로 인해 불행하게도 내가 수집한 자료들은 그 결과를 연구에 이용하기에는 너무 적었다.............라면서 검사할건 다 했더라구요-_-
첫인상
언더우드
조선에 처음 당도해 보면 이곳의 산이 훼손되고 황폐하다는 사실에 대해 중압감을 느끼며...
1-2 조선인의 성품
인상 및 정서
-여자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극도로 겸손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얼굴표정은 우울하고 무겁고 침침하다. 일본인들은항상 즐거운 쾌활함이 있고 유쾌한 생기가 돈다......그러나 조선 여인들에게는 이러한 활기참과 쾌활함, 그리고 생기 같은 것이 부족하다. 이들으 인생은 심각하고 진지하다. 그러므로 우울함이 조선 여인들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남자
그러나 조선 남자들의 경우는 다르다. ....식사시중을 드는 소년은 돗자리가 깔려 있는 문지방을 넘을때마다 힐끗 훔쳐보고는 그 계략을 생각하면서 미소짓거나 낄낄거린다. ....농담한 사람은 그것을 생각하면서 2-3일 동안 간헐적으로 웃었다.
-일반국민들 사이에는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조금치도 없는 것 같다. 중국인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호칭을 우리는 조선에서 듣지 못했다. 양귀(洋鬼)라는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조선 사람들과 교제를 하는 동안 외국인 이라는 이유로 모욕적인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일반 대중은 우리를 우어ㅜㄹ한 힘과 능력을 가진 것으로 존경한다.
-고위 공직자들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 있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그것인데 전자는 일보니 태책한 방향을 반대하고 후자는 그것을 지지한다. 전자 중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조선의 발전을 저지하고자 한다.
-이 나라의 대중들은 경솔하게 믿는 경향이 심하고 성질도 급하다. 이들은 외국인의 방식과 하는 일에 대하여 매우 호기시밍 많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보고서는 그것이 아무리 불합히 하더라고 국민들의 귀에 쉽게 받아들여진다.
-조선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독특한 특징은 호기심이다. 한반도에서 이러한 특징은 결고 배타적으로 여성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호기심에 더 감염되지 않았는지의 여부는 의심스럽다......불편하지는 않지만 모두 선량한 천성을 가진 여남은 명 이상의 군중들이 외국인의 뒤를 따른다. 모든 동작을 지켜보며 이러쿵저러쿵 하며 , 우리가 말을 하려고 하면 고맙다거나 알아들었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다.
-조선사람들의 또다른 특징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다. 그들의 열성적인 애국심은 스위스에 못지않다.
-여행자들은 종종 조선 사람들의 어린애 같은 천진스러움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그들이 어린애를 다루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아첨에 약하다. 조선 사람들에게 '당신은 훌류안 사람'이라고 말해 보라. 그러면 당신이 그에게 원하는 것을 그는 확실히 줄 것이다. 외국인들이 처음 정착했을때 조서사람들은 자신들이 흥미를 끄는 것은 무엇이든지 물어보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아편이나 담배와 같은 중국인의 사회악은 이 나라에서 극히 드물다.
-조선사람들은 청결의 문제에서는 많은 비난을 받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경구를 배운다. 외국인들은 조선에서는 가장 깨긋하다는 사람이 그가 본 가장 더러운 사람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가 뜻하고자 하는 것은 조선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더러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조선사람들은 우리가 홑이불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밝은 색의 면직의 옷을 즐겨입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복은 쉽게 더렵혀진다. 깨끗하게 세탁한 옷을 입고 아침에 집을 나선 사람이 밤에 돌아올 떄는 옷이 창피할 정도가 된다.
-조선사람들은 가정적이며 일반적으로 순수하다. 순수함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그들은 이웃인 일본보다 훨씬 높다.
조선사람들은 외국인들 부끄러워하소 의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조선 사람들이 소설 속의 아랍인 처럼 믿을만 하고 친정하다는 사실을 항상 발견했다. 건강에 좋은 기후에도 불구하고 조선에는 질병이 많다. 장질부사와 발진티프스는 풍토병이 되었으며 천연두는 너무 보편화되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접촉성 눈병은 서뇩사들로 하여금 본국에서 일생 동안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실습과 기술의 기회를 주고 있다. 언제인가는 콜레라가 태풍처럼 중국으로부터 휩쓸고 지나갔다. 이와 같이 조선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찾아와 도움을 청할 떄면 우리는 다른 일을 제쳐 두고 도와주었다.
조선을 잠정적으로 점령했던 시기에 조선에서는 사치 금지령이 수없이 선포되었는데 이 법규에서 사려깊은 법 초안 작성자들은 조선사람들의 지위에 따라 식사할 떄의 그릇 수와 입을 옷의 수와 종류를 규정했으며 담뱃대의 길이가 12인치를 넘지못하도록 금지했다. 조선사람들은 영국겨회의 교구위원회36인치 길이의 담뱃대를 좋아했다. 또한 동물을 끌고 다니는 고삐의 길이가 3피트를 넘지 못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어리석은 규정들의 바탕에는 기보적인 뜻이 있었지만 이것들을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규제하는 것 이상의 득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들은 어느 심각한 정치실수보다 더 대중의 감정으 날카롭게 만들고 적대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국민성
매우 오랫동안 예의가 강조되어 온 조선사람들은 그러한 환경에서만 자라왔기 때문에 위와 같은 특성을 뚜렷이 나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뿐 아니라 옛날의 조선은 예의 범절에 큰 비중을 두었다.
-호기심
오락이 매우 적고 자칫하면 게을러지기 쉬운 관계로 일을 적게하여 한가하게 허송세월을 살아온 나라의 사람들은 자연히 무언가 새롭고 재미나는 것을 보고 듣고 싶어하는 욕심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좀 이상한 것이면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마련이다.
조선사람들은 매우 치절한 사람들이다.
부담이 되는 손님대접
조선사람들은 비교적 낯선 사람도 초대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조선의 부자들에게 부담이 된다. 그리고 누구나 번창하면 이전에는 본 적도 없는 친척들이 함께 끼여 살러 오고 심지어는 친구들까지도 데리고 온다. 그러나 이런 일에는 그만한 보상이 있다. 왜냐하면 ㅇ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찾아오느 집은 번성하든가 또는 조정에 세력이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번창하는 집의 식객들은 그 집안의 운이 기우어진다는 소문이 퍼지면 곧 그 집을 떠난다. 왜냐하면 어떤 원수되는 사람이 조정에서 한떼의 무리가 그 집을 감싸고 있나는 사실을 겅공적으로 모략하게 되면 그 집주인의 체포령이 내려지고 자칫하다가는 식객들도 주인과 교유관계고 화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무리가 그 집에 머물러 있는 한 운명의 여신이 그에게 미소를 던지고 있다는 좋은 표시가 된다.
내면, 능력
정신적으로 조선 사람들은 많은 재능을 타고났는데 특히 스코틀랜드의 말로 "영리하고 눈치빠른(gleg at the uptak)"재능을 가지고 있다. 외국인 교사들은 그들이 정신적인 치밀성과 빠른 인식능력, 빠른 외국어 습득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들은 일본인보다 휠씬 좋은 억양으로 더 유창하게 말한다. 그들은 의심, 교활함, 비진실성 등의 통속적인 악덕을 가지고 잇다. 사람들 간에 신뢰가 없다.
성품
이제 거틍로 드러나는 그들의 일반적인 성격을 살펴보면 조선 사람들의 품행은 이웃나라 사람보다 훨씬 좋다. 그들은 대체로 개방적이며 정직하다. 하층민이라 하더라도 성실하고 낙천적이기 때문에 우호적이고 쾌활한 대인 관계를 유지한다. 그들은 매우 정직하고 신뢰가 깊기 대문에 일다 ㄴ상대방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기만 하면 설사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어린아이 처럼 그의 말을 단번에 믿어버린다. 나는 곳곳에서 받은 우정어린 대접을 진심으로 찬탄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접촉했던 고관드르이 태도에는 분명히 겸양과 친근함은 서려 있으면서도 솔직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공적인 입장에 있는 미묘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와 반대로 모든 일반인들은 좀처럼 접촉한 적이 없는 우리드르이 이국적인 모습에 대한 선입경이 사라지자 호의적이고 시느이 있는 태도를 보였다.
절도 있고 민활한 걸음걸이를 보면 조선사람들은 중국인들처럼 동작이 유연하고 활달해보이며 일본인들에 비해 더욱 활기가 넘치며 도전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일본인에 비해 우월하지만 예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관습면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하층계급에 비해서도 떨어진다. 늘 엄숙한 행동과 푸무이를 보여야 할 상류층과 관리들 또한 공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해야 할 때에는 체면을 차리지 않고 야만적인 기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결례를 범한다.
한국인들이 신봉하는 여러가지의 상이한 의식들은 서로가 상충되ㅣ만 그들의 내부적인 면에서는 아무런 적의를 느끼지 않고 오힐 수세기에 걸쳐 서로가 익숙해지는 동안에 하나의 종교적인 혼성물을 이루었으며, 한국인들은 이러한 혼성물 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요소를 취하면서도 그 나머지에 대해 아무런 멸시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다. ...
2 의식주
2-1 의
백의민족
어느 산성 위에 올라가 바라보면 서울은 낡은 집들이 한산하게 들어서 있고 그 사이로 몇그루의 나무들이 홀로 또는 덤불속에 산재해 있어서 상류 계급의 주택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거리와 골목은 회색 바탕에 드리운 흰 리본처럼 한계가 분명하다. 왜냐하면 흰색은 조선의 국색인 동히게 조선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주들이 입는 옷의 색깔이기 때문에 이들 상주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거리의 색갈은 온통 흰빛을 띠고 있다.
조선은 자신을 백의민좃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조선은 황해와 동해 사이에 뻗어 있는 시베리아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기후는 우리의 북부,중부 기후와 비슷하다.......겨울에는 매일 느낄수 없을 정도로 차츰차츰 날씨가 추워져 도시의 큰 강은 마침내 우마차의 도로가 얼음을 횡단하여 연장될 만큼 동결된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미풍이 정오가 되어서야 안개를 몰아낼 때까지 아침은 계속된다. 이것이 이 나라를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주위환경은 깨끗하지 모샇면서 모든 사람들이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옷을 입을때도 마찬가지이지만 흰옷을 입는데는 이유가 있다. 흰색은 상복의 색깔이며 상복을 입는 기간은 3년이기 떄문에 인간의 보통 수명으로 어느 일정한 기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상주가 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또한 왕실의 누가 사망하면 전국민이 3년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 그러므로 번번히 닥쳐오는 이런날에 대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아예 흰 상복을 입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복식
조선 사람들의 복장은 매우 간소하낟, 남자들은 짧은 저고리와 통이 넓은 바지를 입는데 이바지는 보통 다리를 낣고 헐렁하게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대개 발목근처인 버선 위에서 댓님으로 붙잡아 맨다. 중국인들처럼 저고리 위에 큰 두루마기를 입는 일은 매우 드물지만 상류계급에서는 이를 볼 수 있는 일이다. 두루마기를 입을 때에는 무명이나 명주를 꼬아서 만든 띠로 허리 둘레를 잡아 맨다. 하층민들은 이 허리디를 저고리 밑에서 바지위에 매는데 이 허리띠에는 담배쌈지, 담뱃대, 부채따위를 달아맨다. 남성복이든 여성복이든 옷감은 대개 흰천이다. 드물게 밝고 푸른 색상의 저고리를 볼 수도 있지만 바지 색상이 그런 경우는 없다.
반면에 어린이들은 가지각색의 옷을 입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즐겨입는 색상은 밝은 푸른 색이나 진홍색이며 번드르르하거나 검정 색상을 입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다수의 조선 사람들이 입는 의복의 소재는 손으로 짜서 다소 곱게 표백한 무명 천이다. 조선 사람들이 못감을 만들어 낼 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흔한 소재는 성글게 짠 능직 무명이다.
조선에서는 모직 제품은 제조되지 않으며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다. 저고리와 두루마기의 소메는 통이 넓어서 귀족들은 2피트 가량이나 늘어 뜨리고 있으며 주머니는 달려있지 않다. 농민들이 버선을 신는 경우는 먀우 드물며 대개는 짚을 두툼하게 엮어서 만든 일종의 샌들처럼 생긴 짚신으로 발을 싸서 덮는다. 이 짚신은 발가락 사이와 발꿈치에서 삼으로 만든 끈으로 동여매돌고 되어 있으며 걷기에 매우 편리하다. 도시에서도 이 짚신은 흔하게 볼 수 있으며 아울러 흰 무명으로 만든 보통의 신도 많이 신는다.
상류층은 중국식 모양의 신을 신으며 특히 중대한 행사에 참여할 때에는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천으로 만든 장화를 신는다. 귀족과 고관 대작들만이 비단옷을 입으며 그들은 그 위에 보라새그 진황색, 청색, 갈색, 등의 다양한 색상의 저고리를 걸쳐 입는다. 이 비단은 특별히 조선 시장에 내놓기 위해 중국에서 제조되었다. 그러나 소비는 극히 제한되어 있어서 연건 백필을 넘지 않으며 북쪽국경에서 열리는 물물교환 시장에서만 거래된다.
동복은 하복과 별다를 바 없이 흰 색상이며 보다 질기고 뻣뻣한 양피를 누벼서 저고리를 만든다. 동절기에는 보통의복을 두세겹씩 껴 입었다가 날씨가 풀리면 하나씩 벗는다. 야생 동물이 자주 출몰하는 북부지방에서는 겨울에 주로 모피로 제작한 의복을 입는다.
여성복도 남성복처럼 단순하며 흰 색상이다. 여성복은 통이 넓은 바지와 짧은 저고리로 구성되며 그위에 길고 품이 큰 겉옷을 입고 허리 둘레를 동여맨다. 귀부인들은 갖가지 색상의 비단옷을 입지만 대개는 흰 무명옷을 입는다.
한국인들은 누구나 흰옷을 입고 있으며 따라서 다른 어느 민족보다 더 세심한 청결함이 필요한데 왜 한국인들이 굳이 희옷을 입는지 알수가 없다...한편 한국인들이 흰옷을 입게 된 또하나 이유는 여인들에게 계속해서 빨래거리를 끊이지 않게 하여 긴수다를 늘어 놓을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함이라고 추측하는 의견도 잇다. 사실 한국 여인들은 그들의 일에 그다지 신경을 쏟지 않는다.
사진 자료
의 p.29 26 27 112 185
2.의상
한국인은 깨끗한 의복을 입는다. 그래서 예컨대 중국의 지부(芝罘)와 비교한다면 조선은 낙원과 같다. …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지나칠 정도로 깨끗한 의복으로 자주 갈아입는다.-92
흰색이 널리 통용되는 색깔이지만, 밝은 빛깔도 특히 젊은 층에 널리 퍼져있다. … 여성의 복장은 남성의 복장과 다소 다르지만, 희고 느슨하며 헐렁하고 몹시 방해가 되어 적절치 않다는 점에서는 둘이 모두 똑같으며 이처럼 바쁘고 더러운 세상에는 부적합하다.-30
2.의상
프랑스 여행가 듀크로끄가 1904년 발간한 <애처롭고 부드러운 조선> 중
“ 조선인들은 흰 옷을 즐겨 입는다. 이것은 동심 어린 조선인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이다. 서울 거리는 어디를 가나 이러한 밝은 흰색 옷으로 인해 항상 축제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조선인들도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만약 그들에게 흰 옷을 입지 못하게 한다면 쾌활함도 그만큼 반감될 것으로 보인다. ”-33
미국인 앤거스 해밀턴 1910년 발간 <조선>
“ 바지 저고리는 물론 양말까지도 흰색으로 걸치고 천천히 활보하는 조선인들의 흰색 물결은 뭔가 매력적인 감흥을 준다.”
서울의 의상은 비교적 화려한편이었다는데.. 넣을까 말까..
2-2 식
쌀
쌀은 조선의 주식으로서 소금이나 기타 양념이 필요없이 아무것도 바르지 ㅇ낳은 채로 먹는다. 콩류와 밀가루로 만든 국수도 많이 먹는다. 식사는 방바닥에서 몇 인치 높은 밥상 위에 올려놓고 먹는다. 식단에는 쌀,콩,또는 국수 외에도 국물,생선, 고기, 그리고 조미료가 있다. 그러나 야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금에 절인 배투와 둥근 무이다. 이들 야채는 무미한 쌀밥에 필요한 염분을 공급한다.
김치
소금에 절인 야채를 김치라고 한다. 김치는 고춧가루,굴,기름 그리고 마늘로 무친 배추와 무를 기초재료로 하여 만드는데 이 모든것을 소금불레 담그고 약 2개월동안 발효시킨다. 이 혼합체는 성분이 140가지나 되며 이것들을 배럴 크기의 독인 '광'안에 저장한데. 다 익은 김치는 아삭아삭하며, 마늘을 넟지 않고 만든 깈치는 담백한 맛이 있다. 나는 이 김치를 즐겨 먹는 몇 사람 안되는 외국인 중의 한 사람으로 보인다. 나는 매년 겨울철에 먹으려고 마늘을 빼고 김치를 담갔다. 그렇게 하면 역한 냄새가 없다. 김치 자체의 냄새는 강하고 독특하다. .....그들은 그 냄새를 좋아핮리 몰라도 나는 견디 수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어떤 사람이 마늘을 빼고 만든 이 김치의 맛을 보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나는 첫입에 그 맛에 사로잡혔다. 아직도 종종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 즐겁기만 하다.
음식
조선 사람들의 생활 양식은 매우 단촐하고 소박하다. 그들은 훌륭한 식사를 먹을 기회를 만나면 어느 모로나 절제를 하지 않지만 그들의 식사는 간단하다. 그들의 주된 영양원은 쌀이며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말린 뒤에 끓여서 밥으로 만들어 야채, 생성, 조류, 돼지 고기들의 반찬을 곁들여 먹는다. 일본처럼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소가 귀하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거의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조선의 요리 종류는 중국처럼 풍부하지만 조리법이 그다지 우수하지는 않다. 메밀, 수수, 옥수수 등의 곡물이 조리의 주 원료이며 특히 목수수는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먹는다.
조선 삶들은 중국인처럼 식봉을 쓰지 않고 나무나 흙을 빚어 만든 숟가락과 두 갈래의 젓가락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식사를 한다. 그들은 중국인들처럼 식기를 집적 입에 대고 음식물을 되도록 빨리 식봉으로 끌어 넣는 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숟가락으로 음식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기 때문에 식사하는 모습이 중국보다는 훨씬 우아하고 아름답다.
조선의 술은 수수등의 곡식을 빚어 만들며 중국의 사케(sake)와 비슷하며 맛이 없고 탄 냄새를 풍긴다. 일본인들처럼 그들은 독주를 즐기며 식사 때에도 폭음을 한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조선 사람들은 틈만 나면 술자리를 만들며 매우 무절제하다.
3.식생활
한국인이 즐기는 것은 소금과 후추 종류이다. 한국인은 고추의 일종인 칠레 소스와 칠레 간장, 오이에 혼합되어 있는 소금과 붉은 후추 그리고 야채국을 즐긴다. 이 나라의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하는 일반 외국인은 짧은 시간 내에 음식을 먹은 다음 그의 입을 벌려 찬 공기를 들이마시고 난폭하게 부채질을 한다. 그의 눈에 고인 눈물과 일반적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담백한 쌀밥과 배추김치와 국과 콩과 간장 대신에 타고 있는 숯불을 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식생활
헤세 바르텍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
“ 선교사의 말에 따르면 먹는 데는 조선 사람으 당할 민족이 없을 거라고 한다. 일본인들도 조선인들이 세배는 더 먹는다고 한다. 나는 비슷한 수의 조선인, 일본인과 중국인이 거주하는 제물포 지역에서 이러한 장면을 실제로 수차례나 목격할 수 있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은 식사 때가 되어야 먹지만 조선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먹는 편이었다. 엄청난 양의 밥을, QKfrks 고추를 재료로 만든 김치와 함께 단숨에 먹어치운다.”-198
비숍
“그들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미각의 즐거움을 위해서 먹는다. 이러한 쾌락을 위한 단편은 내가 몇 차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극성스런 한국의 어머니들은 그의 어린 자식에게 밥을 먹일 때 선 위치에서 더 이상 먹일 수 없으면 띠를 둘러 아이를 둘러업은 채로 다시 먹이고 가끔 위를 넙쩍한 숟가락으로 토닥거려가며 억지로 밀어 넣을 수 있는 한 먹인다. 한국의 성인 남자들은 한번에 꺼억하고 트림을 뱉어 내고는 배들 두드리는 것으로 만족스런 포만에 이르렀다는 것을 과시한다. 한 번 요리할 때 Tm이는 상당한 양의 쌀은 일꾼들의 끼니였고, 그 외에도 그저 그렇게 입맛에 맞는 다른 요리들도 있다. 그 중에는 무친 가지, 콩, 다소 역겨운 냄새가 나는 토속장, 김치, 시디신 장아찌류, 해초, 자반 고기, 소금에 절인 해초를 밀가루 반죽에 묻혀 튀긴 요리 등등이 있었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단지 하루 두 끼의 식사로 만족해야했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세끼나 네 끼를 들었다.”-·199
한 프랑스 선교사가 남긴 기록.. 개고기... 출처 불분명..-199
한 미국 외교관의 기록.. 출처 불분명 -200
알렌 <조선풍물>
“소금에 절인 야채인 김치는 배추와 무를 기본 재료로 하여 고추, 굴, 마늘 등 약140여 종의 양념을 집어넣을 수 있다고 하며, 드럼통만한 크기의 독에 약 2개월간 숙성시킨다. 어느 날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온 집안에서 이전에 맡아 보지 못했던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즉시 냄새를 내보내기 위해 창문부터 열게 한 후 살펴보니 흔히 볼 수 있는 조그만 항아리에서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내던져 버리라고 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환자가 놓아두고 간 것으로, 가장 정성을 들여 만든 잘 익은 김치가 담긴 상급의 김칫독이었다.”-164
2-3 주
위생
조선에는 위생시성이 없는 것이 큰 특징이다. 아일랜드 태생의 서울 주재 영국 공사조단(N.J. Jordan)은 언제인가 조선의 가옥들은 아일랜드의 소작인 집보다 더 평안라고 깨끗하며 위생적인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조선의 가옥도 아일랜드의 가옥처럼 돼지와 달ㄷ을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지만 불행히도 대문이나 문의 주된 장식물로서는 다음해 밭과 논갈이 할때 대비하여 퇴비를 만들려고 오물과 쓰레기를 버리는 지저분한 시궁창 구멍이 있다.
냄새
농한기에는 과 밭으로 보내는 퇴비의 큰 짐뭉치를 등 양쪽에 싣고 가는 황소와 당나귀의 계속되는 행렬로 도로에는 악취가 풍긴다.............조선사람들은 오랜 경험으로 이런 냄새에 익숙하다. 그러나 기들은 사방 8피트의 침실에서 이 해로운 공기를 어떻게 호흡하며 이 작은 방에 부를 때고 6내지 8명이 한 방에서 잠을 자고 생명을 유지해 나갈수 있는지 놀라운 일이다. 이런 방에 들어가려고 문을 여는 순간 확 끼치는 냄새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으며, 이럴 때면 백인들은 누구든지 바깥 일기가 아무리 나빠도 숨이 막혀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한국의 집들은 대부분 움막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로드 쿠르존은 그의 저서 “극동의 문제”에서 집들은 나무와 진흙, 종이의 잡동사니라고 말하였는데, 명쾌하지는 못하지만 분명 사실에 충분히 부합하는 정의를 내린 것이다. 나무는 집의 골격을 형성하고 진흙으로는 벽을 만드며 종이는 거의 모든 다른것들을 꾸미는데 사용된다. 종이로 바닥을 깔고 벽과 천장을 바르며 종이로 된 틀로 lfdy한 만큼 방의 내부 공간을 구분하기도 하는데, 종이가 창문의 유리를 대신하고 문짝을 만드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 한국의 집들을 구성하는 자재들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지붕을 이을때 사용하는 짚인데, 부잣집들과 관고서의 건물들에는 점토로 구운 기와가 사용된다.
한국집의 또다른 특징은 ‘온돌’이라는 것으로 동양에서 유일하게 한국인들만이 이것으로 난방문제를 훌륭하고 독창적으로 해결하였다. 한국 의 집들은 땅밑에 기초공사를 하지 않고 지면 위에 그대로 건설하므로 바닥이 지면보다 약간 높아서 ‘온돌’이라고 부르는 그 사이 공간에 나무나 짚을 때어 바닥을 덮히고 집 전체를 따뜻하게 한다. 주 p. 53
조선의 가옥들과 생활양식
여행 중 내가 접하여 본 여솬들의 방 구조는 한결같았다. 농가의 벽들은 나무 기둥과 나뭇가지로 짜여져 잇었고, 거기에 진흙을 발라 놓았다. 창문과 문들도 나무 틀로 되어있었는데 격자 모양의 문에 종이를 발랐으며, 극히 드물지만 문에 2에서 3인치 정도의 작은 유리조각을 붙여놓은 경우도 있었다.
이들 농가에는 천장이 없어서 기울어진 지붕이 뤈히 내다보였다. 지붕은 가늘고 뾰족하게 조여진 서까래로 만들어져 있었다. 서까래 사이마다 잘게 자른 짚을 넣어 함께 반죽한 진흙이 발려 있었다.바닥에는 짚과 돌 등을 석은 점토로 온돌을 놓았고, 그 위에 질긴 가죽 돗자리를 깔았다. 가끔은 가죽 돗자리 대신 두꺼운 기름동이를 깔아 놓은 경우도 있었다. 농가의 방바닥에는 보통 돗자리가 깔려 있는데 그 위에 요, 밥상, 걸상 등이 놓여 있고, 한쪽 구석에는 목침이 굴러다녔다.
주인집의 안방에는 나무로된 장롱이 놓여 있었다. 밤에는 천장에 매달아 둔 나무 막대기에 옷을 걸어 두었다. 방 한구석에 있는 커다란 상자에 갓을 넣어 두었고, 방바닥에는 등잔을 놓는 등잔걸이나 놋쇠로 된 촛대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종종 등잔기름을 구할 수 없어서 접시에 식물성 기름을 적신 심지를 놓고 태우기도 하였다.
또한 거의 모든 농가마다 문 앞에 자그마한 댓돌이 놓여져 있는데, 방에 들어가기 전 그곳에 신발을 벗어두었다.
바깥에는 난방을 하기 위해서 돌을 쌓아 굴뚝을 만들어 놓았다. 연기는 굴뚝을 통하여 거리나 마당으로 피어나가게 되어 있었다. 아궁이는 마당 쪽에 두었는데, 그 위에는 음식을 하거나 말에게 줄 여물을 쑤는 평평한 무쇠솥이 얹혀있었다.
반면 관리들의 집은 일반 농가보다 더 높고 넓었으며, 지붕도 기와로 이었고,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또한 돌로 기반을 세운 경우가 많았고, 터도 넓었으며 난간이 둘러져 있었다. 이 간 아래에는 아궁이와 외부로 연기를 빼는 구멍이 있었는데 집이 클 때에는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돌러 굴뚝을 내었다.
외벽에도 문을 두 개씩 내었고, 방바닥에는 항상 내구성이 뛰어난 기름종이를 발랐다. 안쪽 벽은 문을 걷어둘 깨 사용되는데, 경첩을 단 천장들보에 고정시켜서 마루 위의 천장으로 올려 걸어둔다. 또한 창문과 문은 몸을 숙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크게 만들어져 있었다.
부업은 보통 방과 함께 나란히 딸려 있었다. 하지만 부엌 바닥은 따뜻하지 않았다. 부업이 방보다 더 낮았기 때문이었다. 부엌 안쪽에는 아궁이 두개에 음식을 만드는 솥들이 걸려있었고, 한쪽 벽에는 도기나 유기그릇을 얹어놓은 선반들이 있었다.
주
까를로 로제티 <꼬레아 꼬레아니>
“한국의 가옥들은 한결같이 나지막한 단층이며 2층으로 된 서민의 집은 찾아볼 수 dqjt다. 한국 가옥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동양에서는 오로지 그들만이 고안해낸 온돌이라는 난방장치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인데, 실제로 아주 훌륭하고 독창적인 것이다. 한국의 집은 땅을 파고 기초공사를 하는게 아니라 지면 위에 그냥 짓기 때문에 방바닥이 지면보다 약간 높아 온돌이라고 부르는 공간 사이에 나무나 짚등을 때어 바닥을 덥이면 방안 전체가 훈훈해 진다.”
.. -166
대부분 출처를 잘 몰겠다. 듀끄로끄는 그냥 <애처롭고 부드러운 조선>이라는 책에서 그랬다고 할까..
듀끄로끄
“조선인들은 거의가 초가집에서 살고 있으며 기와집은 200호 중 한 집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물다. 이러한 조선인들이 서양보다도 먼저 난방장치를 활용해 왔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방바닥 밑으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더운 연기가 지나면서 충붆나 열기를 만들어 내는데 설치 방법도 간단하다. 이렇게 기막힌 난방법을 세계 속에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3 관혼상제
3-1 관
성인이 되는 것
소년은 누구나 조만간에 결혼을 향 하지만 소년이 약혼하게 되면 더 이상 처녀들처럼 머리를 등뒤에 길게 늘어뜨릴 필요가 없다. 외국인으로서는 미혼 남녀들이 이렇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약혼하면 소년은 그들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상투를 튼다. .......머리 위에 자랑스러운 상투를 곧바로 세우면 그떄부터 이 젊은이는 어른 대접을 받게 되며, 어른다워질 수록 존경심은 높아진다.
동양민족들에게는 절대적인 괜례로 여인들이 철저한 침묵으로 일관해야 하는 날은 결혼식날이다. 한구긴들은 대개 아주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는데 결혼을 하는 남자의 평균 나이는 15살, 여자는 12살이다. 하층계급에서는 대개 더 나이가 들어서 혼인하기도 하나 양반들 사이에서는 12살의 신랑과 8살의 신부도 그리 드문 경우가 아니다. 하지만 이 혼인들이 실제로 부부의 동거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며 신랑의 부모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나이가 되면 실질적인 부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혼인에서 그 사실에 대해 가장 관심없어 보이며 또한 의견이 바로 무시되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신랑과 신부이다. 다른 계약과 마찬가지로 혼인 또한 항상 중매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중매인은 어떤 여인의 집에 가서 그 여인의 부모에게 그들의 딸에게 맞을 것 같은 젊은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뒤 남자의 집에 가서 되풀이 한다.
3-2 혼
결혼
조선의 젊은 남자는 기쁨의 동반자는 슬픔의 공유자를 고르지 않으며 젊은 여자는 남편의 선택에 어떠한 발언권도 없다. ....약혼은 아버지가 처리하는 문제이다. .........계약결혼의 방식은 가정을 불행하게 반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이들 주으이 몇가지 사례를 연구해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외국의 가정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내와 함꼐 우리를 방문한 나의 조선어 선생은 지나칠 정도로 어린 약혼녀를 좋아하는듯 했다. 길을 지나가다 보면 두손으로 어린이와 놀아 주고 애정과 사랑을 담은 모든 표시로 아이들을 안아주는 것을 보면서 사랑은 조선 사람의 가정에서 강력한 요소라고 단언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혼은 놀라울 정도로 쉽지만 흔하지는 않다. 남편이 아내에게 떠나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혼은 충분하며 그것으로 이혼이 성립된다.
사랑
결혼한 부부 또는 방금 결혼하려는 남녀가 서로 상대방을 향해 품는 감정에 있어서 미국인들이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감정을 정답게 표현하는 것을 아시아인들은 수치로 알지는 않지만, 상스럽게 여긴다.......결혼은 많이 하지만 남자측에서는 실제로 처녀으 신원을 모르며 여자들은 총각을 좀처럼 만날 수 없기 때문에 결혼은 집안 어른과 중매쟁이에 의해 주선된다.
정혼
정혼이 이루어지면 양가에서는 서로 여러차례방문한다. 그러나 이 방문은 어른들의 방문이지 젊은 사람들 사이의 방문은 아니다. 이 기간 중에 신부집에서는 혼수를 신중히 준비한다. 이 비용은 부모의 능력과 결혼 계약의 조건에 좌우된다. 방문을 할 경우 긴부는 표범의 가죽을 꼰대기에 씌운 잘 말폐된 가마를 타고 가며, 신랑이 이런 심부름을 할 때에는 화려하게 성장한 말을 타고 한다. 물론 신부나 신랑의 여행에는 각각사회적 지위에 따라 상당수의 비복들이 수행한다.
그러나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결혼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은 남자라면 누구나가 받는 관습적인 존경을 받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얼닁 나라 소년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어져도 머리를 등뒤에 길게 땋아 늘어뜨리고 댕기를 하며, 심지어는 아이들도 그런 사람에게는 반말을 한다. 나는 길가에서 종종 이러 가엾은 사람을 한두 사람 만나곤 했다. 이들은 매우 외롭고 사고무친한듯 했다. 아마 이들은 방이 죽어서 파혼했거나 ,심한 수난이 겹쳐 나이가 많아도 다시 약혼을 하지 못하고 불은이 계속되어 성인이 도리 수가 ㅇ벗었을 것이며, 마침내는 그들의 무덤을 항상 푸르게 해줄 아들을 낳을 가망이 없다는 슬픔에 싸여 인생행로에서 항상 소년을 면치 못하는 곤란한 처지에 놓인다.
결혼 풍습
조선 사름은 결혼 할때까지 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저 하찮은 '애송이'와 같은 존재일 뿐이다. 결혼식이란 '존경'과 '어른'으로의 입문이요, 사회적인 위계 속으로 뛰어들어감을 의미한다. 젊은이는 긴머리 가운데에 가르마를 타고 끝 부분에 댕기를 땋는가 하면 짧은 외투에 중띠를 둘러 입고 다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면 흡사 계집애로 오해 받다가 , 결혼 의식중의 하나인 맞절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된다. 그의 머리털은 잘려나가고 머리르 감쌋던 긴 머리카락은 자랑스런 '상투'로 변하는 것이다. 그는 망건을 쓰게 되고 그때부터는 그것을 쓰지 않은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그는 검은 갓을 쓰고 긴 도포를 입는다. 그의 어색한 자태는 위엄있는 거드른으로 변하게 된다. 그의 사내의 친구들은 그의 손아래 존재가 되고 그의 이름뒤에는 '씨'자가 붙어 다닌다. 그에게 말할 때는 경어를 써야만 한다. 한마디로 무명의 존재(nobody)에서 유명의 존재(somebody)로 변하는 것이다.
여자는 결혼으로써 운명이 명백히 결정된다. 조선에서 여성의 독신이란 불교에서나 찾아 볼 수 있고 거기에서조차도 독신이 거룩함의 명망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7세부터 아버지의 견고한 굴레에 갇혀 살아오던 소녀가 17세가 되면 시대의 엄한 담장 속에서 갇혀 살게 된다. 그것이 '관습'이다. 그러한 습속이 고난을 가져오리라는 것은 우리 서구인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젊은 남녀가 서로의 배필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더말할 나위가 없다. 아들이 20세가 되어도 결혼하지 못하면 그의 아버지는 게으르다는 말을 듣는다. 남자의 혼인 여령은 보통 17-18세이다. 마땅한 배필을 남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신부의 부모가 하게 되면 신부는 어린애로써 혼례를 치룰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16세가 될때까지 부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
...이때부터 태어날때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이 떨어지고 이제는 아무개의 아내, 혹은 아무개의 엄마로 통한다. 남편이 그를 부를때에는 "여보"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여기를 보라"는 뜻인데 이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관계를 잘 나타내 준다.
결혼의 조건들은 양가에서 논의되며 결코 개인적으로 논의되지 않는다. 중매인은 혼인이 결정될때까지 분주히 뛰어다니며 상대방의 지참금에 대한 힘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 뒤에 부모들이 각자의 자식들에게 우리들의 아이들에게 “자!내일 소풍을 가자꾸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간단하게 결혼날짜를 알려준다. 정해진 날짜가 되면 성장을 하고 백마탄 신랑은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노란 종이로 된 큰 양산을 쓰고 기수와 하인들, 하녀들의 무리를 앞세우고 그때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신부의 집으로 향한다. 그 첫 번째 만남의 순간에 신부와 신랑이 얼마나 놀랐을 것인지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항상 실망하는 쪽은 신부이다. 왜냐하면 신랑은 신부가 어떤 이유로든 r의 이상에 맞지 않을 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에게 적합한 여자를 찾을때까지 두 번째, 세 번째, 또는 네 번째 부인을 구할 수 잇기 때문이다. 반면 여자는 이런 방법이 없으며 옛날에는 법으로 그리고 지금은 법이 없어졌지만 어쩌면 법보다 더 가혹할 수 있는 관례로 과부의 재혼을 금하기 때문에 일찍 과부 신세가 되어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한편 신부의 집에는 가엾은 처녀가 이 중요한 행사에 즈음하여 커다란 우화적 행상을 수놓은 비단옷을 걸쳐입고 얼굴에는 하얗게 분칠을 하고 입술과 이마에는 조그만 빨간점을 붙힌 채 장래의 남편을 기다리며 초점없는 눈으로 조금의 움직임 없이 수줍게 서있다.(조낸 불쌍하다)
신부는 홀로 남아잇는 동안에도 께속 엄격한 침묵을 지켜야만 하는데 이와 관련된 우화가 하나 잇다 (p. 111)
우화를 넣을까 말까, 특이한 예이긴 한데..
조선 여인은 마침내 결혼을 하는데 그것은 편안스럽게 결혼식날 참석하는 것과 같은 즐거움에서가 아니다. 얼굴에 연지 곤지를 찍고, 눈은 차양으로 가리고, 마치 목각 인형처럼 이리 돌고 저리 돌고, 썼다 앉았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밀렸다 끌렸다 하며 딱딱한 예식을 마치기까지 그렇게 한다. -87
조혼
조상의 숭배는 급속히 뒤따라오는 자식들에게 조혼을 강요하고 있다. 왜냐 하면 바로 이들은 죽은 장게 제사를 바치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10세나 때로는 그보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간의 결혼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조차 없다. 사랑이 결혼에 어떤 의미를 준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가당찮은 일인가? 거기에는 불행한 가정, 축첩, 무책임한 양친, 20명의 가족들이 두세칸의 좁은 방에서 장애물 경주를 하듯, 말할수 없을 만큼 비참하게 생활한다.-64
3-3 상
장례식
일반적으로 장례식은 야간에 행해지며, 서울의 양쪽에 있는 두 문의 어느 한쪽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간다. 흔히 이런 경우에는 가정 형편 이상으로 돈을 쓰게 된다. 지위가 놓고돈이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매장의 길일을 택하느라고 장례식이 몇달씩 늦어지는 경우가 있다. 가족의 묘지가 정해지지 않은 경우에는 적당한 묘소를 선택하느라고 바쁘다. 이런 경우에 장례행렬은 상여와 흰 천으로 씌운 가마에 탄 백의의 유족들, 곡을 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 말을 타든가 걸어가는 남녀들, 그리고 붉은 초롱을 든 많은 사람들로 호화롭게 구성된다.
행렬이 서울의 문을 향해 행진해 가는 동안이나 성문을 빠져나간 후 조객들은 마지못해 소리높여 호곡한다. 물론 가난하 사람들은 훨씬 간소하게 장례를 지내야 한다. 먼 성묘길에 드는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그들의 묘지는 될 수 있는대로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써야 한다. 서울 주변에 있는 벌거숭이 산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무덤이 많이 있어 마치 심하게 얽은 사람의 얼굴과 같다.
상
프랑스 여행 주간지 <주르날 데 브와야지>
발레 기자의 목격담.
"구슬픈 만가를 부르며 상여가 마을과 연고지를 거쳐 묘지로 떠나기 전에 상가 지붕 위에서 죽은 이의 옷을 흔들며 주문을 외치는 남자 무당 박수의 모습" - 삽화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라고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외쳐대는 비통한 곡소리가 잠시 멈추면서 망혼을 위한 첫 예식이 무당들에 의해 진행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남자 무당이 죽은 이의 옷을 가지고 지붕 위로 올라가는 것인데, 그 위치는 죽은 혼과 접하기 쉽다고 생각되고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관이 놓여 있는 바로 위쪽이다. 그는 이미 싸늘해진 시신 주변에서 갈 곳을 잃고 맴도는 망혼과 접하기 위해 신들린 못짓과 기이한 주문을 외쳐대며 망혼 속의 악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이 의식이 끝나면 다시 곡을 하고 무당에게 제물을 바치는데, 이 모든 절차에는 죽은 혼의 명복을 비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다."
"죽은 이와의 숙명적인 이별을 대하는 한국인들은'사지(死者)에 대한 마지막 보답이 담긴 무한한 사랑'을 이렇게 표출하고 있다"-260
장례
장례는 혼례와 마찬가지로 뱔다른 제식 없이 치러진다. 시신은 평범한 목관에 넣으며 대개는 그런 관도 없이 삼배로 포장하여 매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양자간에 신분의 고하를 나타내는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시신과 어떤 종류의 장신구도 함께 매장하지는 않기 때문에 무덤 속에 귀중품이 묻혀있으리라는 추측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산기슭이나 언덕 같은 곳이 묘지로서 가장 적당하다. 때대로 뼈들을 추려 새로 묻기도 한다. 화장은 거의 보기 드물며 상류계급에서만 행해진다. 일반적으로 망자의 친족들은 상복을 입지 않으며 부모에 대해서만 엄격하게 지킨다. 상주는 상복을 입고 얼굴의 전면을 덮어서 가리는 포선을 쓰고 일정한 기간동안 일종의 은둔자로 행동하며 다른 어떤 사람들에 의해 방해받지 ㅇ낳도록 외부와의 연락을 단절한다
3-4 제
무덤과 건초더미
우리들은 한때 서로 비슷한 산등성이들이 한눈에 보이는 남경에서 산 적이 있었다. 모든 산등성이는 많은 중국인들의 최후의 안식처라는 것을 나타내는 작고 풀이 무성한 무덤이 꽉 들어 차 잇었다. 어느 날 나의 아내는 우리들이 남경에 도착할 대부터 이제까지 무덤 위에쌓여 잇는 건초더미를 왜 중국인들이 치우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시골 태생이었기 때문에 그 건초가 그저 단순한 건초인줄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있는 것처엄 단순한 건초더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차마 말해 줄 수 없었다.
3년 동안에 거렻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가장은 밥, 떡, 고기, 만두, 대추, 밤, 호도, 감, 꿀 과자, 기름부침개와 같은 음식물 등을 빈소의 제대 앞에 바친다. 이때쯤 남자의 영혼이 천국으로부터 내려와 그 향기로움을 마시고 난 뒤 다시 되돌아간다. 비천하고 보잘것 없는 여자의 영혼은 거기에 ㅇ참여하지 못한다. 3개월 동안 계속 비탄의 슬픔 소리가 난 뒤 침묵의 제의가 이어진다. 그러한 장면은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번번이 볼 수 있다. 3년 동안 그 제대에 상식을 올리고 나면, 위패를 사당으로 옮김과 동시에 상례가 끝나게 된다. 한 사당에는 동시에 3대만을 모실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제위가 나타나면 증조 할아버지의 위패를 꺼내어 매장하게 된다....
한 해에 네댓새 동안의 특별한 날에는 무덤에서 이른아침 제사를 ㅗㅇㄹ리게 되는데,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이웃 사람은 생활 영역을 침해받게 되며 매우 소란한 내림굿을 겪는다. 고인의 영역을 침해하다가는 법적으로 된서리를 맞는다. 이를테면 길다란 공장을 맞거나 칼을 씌우거나 죽을 고초를 겪으며, 문중사이에 피나는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도 흔히 있다. 고인의 영면永眠을 위해서 무덤을 잘 보살피는데, 잡초를 뽑고 손질하는 일이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만일 그것을 잘못 처리한다면, 건강과 부와 행복이 뒤바뀌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64
4 가정생활
가족 생활
가족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집단이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 그들이 식사하기 위해 둘러앉을 식탁도 없고, 책이나 음악, 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을 잔치도, 가정도 그리고 일요일에 교회에서 함께 앉을 가족석이나 온 가족이 참석할 야유회 등 그 어느 것도 없다. 주인도 혼자서 식사하고 아내도 혼자 식사하며, 자녀들도 각각 떨어져서 홀로 식사한다.-88
4-1 가장
가부장제
중국에서와 같이 조선에서도 큰형은 희망과 자랑이었고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가 가족의 가장이 된다. 가정의 어린 구성원들은 모든 일에서
그에게 복종하도록 가르침을 받으며 일생동안 형의 다음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가족의 어린 구성원들에게 형벌을 가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둘쨰 아들이 셋째보다는 우월하며 계속 그렇게 내려가다 보면 막내는 부러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가족에서 아버지는 높고 숭고한 지배자이다. 오륜에서는 그가 그의 자손들로부터 거의 신과도 같이 존경받아야 한다고 되어있다. 그는 왕보다도 위대하다. 그가 말하는 것이 곧 법이요, 그가 행하는 것은 존경받아야 하며 누구나 그에 따라야 한다...-84
4-2 여성
여성의 지위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조선의 아녀자들이 생활면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왕비는 왕과 마찬가지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매우 많은 것이 왕비의 뜨셍 따라 행해진다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왕비의 어의가 있는 자리에서 공공정책을 논할 때 왕비는 자기가 발언하는 동안 왕은 조용히 있으라고 요구하고 발 뒤에서 관리의 실수를 질책하는 모습을 본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들이 길에서 여자에게 말할때는 항상 공손하다. .....길을 가다 보면 남편이 그가 사랑하는 상대자에 대한 끝없는 존경의 표시로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름으로 그의 아내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마냥 즐거워 한다. 여성의 지위르 보여주느니 또다른 사실이 있다. 남자 인들은 자기를 고용하고 있는 외국인들로 부터 으레 하대를 받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낙네가 참모나 유모는 정중한 칭호를 듣기를 기대하며 그렇지 않을때는 저항을 느낀다.
여성들의 은군 생활로 미루어 볼 대 그들은 이 나라의 정치, 경제 및 사회 생활에서 거의 할 이링 없다고 여겨질 지도 모른다. 아마도 해외에 알려진 그러한 인상은 틀림이 없다. 여성들은 또한 집안에서도 하찮은 존재라고 외국인들은 생가했다. 그들은 교육제도에서도 아무런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때때로 개화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조선의 소설이나 이야기 속에서 그러한 인물들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이 극히 예외적인 존재이거나 그들의 관계는 불가사의한 것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나타내 주는 것이다.
처녀가 결혼을 하면서 자기 부모들의 처분대로 한다는 점은 그가 거의 독자성을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며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하거나 버림받을 수 있다는사실은 그를 가련한 존재로 보이게 만든다. 여성의 지위가 외국인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그렇게 열악하지는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는 허다하다. 나는 여성이 존경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밝힌 바 있다. 남편과 자녀들은 그에게 말할때 예의바르고 정중한 용어를 사용한다. 사업문제에 대해 자신의 부인과 상의하는 것은 남성들의 습관이며 여성의 선천적인 섬세함은 종종 여유 자금을 사용할 때 나타난다.
...조선에서의 여성의 노동은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동일한 방향으로 행해지고 있다. 여성은 부엌일과 세착일에느 ㄴ여왕같은 존재이다. 그는 재봉사이자 재단사이며 남편의 계급장을 명주실로 수놓음으로써 자기 존재의 단조로움에 변화를 주고 있다. (이 단락만 제8장 여성의 지위 중에서)
'여자의 무기' 에피소드-_-
이 나라에서 좋지 못한 일들의 하나는 복수결혼, 즉 쉬운말로 첩을 둔다는 것이다. 다른 여자를 가족에 끌어들인다는 것은 설령 별거한다해도 심각한 질투와 증오를 일으킬 것은 뻔한 일이다. 어쩌다가 방문객이 오면 대접상 다듬이질을 멈춘다. 이때 그는 김서방이 첩을 두고 있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게 되면 김서방 마누라는 이웃이 다들리도록 큰 소리로 그를 꾸짖으며 너무 화가나서 자기 머리카락을 한 줌이나 뽑는다. 김서방은 자기의 약점이 널리 알려진 것을 고민한 나머지 그 여자의 조상 이름을 들먹거리며 욕을 하게 됨고 마누라는 다듬이 방망이를 쥐어잡고 죽도록(조선사람들이 쓰는 '죽도록'이라는 말은 '기절할정도록'라는 뜻이다) 남편을 때려준다.
중국과 조선의 여자들은 천대를 받고 있다. 참을성도 많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에 아방글 받다가 반항할때 그들의 분노는 상상하기조차 무섭다. 그렇게 되면 다듬잇방망이가 무시할 수 없는 무기가 되고 남성도 그 방망이를 무서워한다.
기생
기생들은 평민 출신이다. 딸을 많이 둔 가난한 사람은 달들중에서 특별히 용모가 예쁜 딸 하나를 나라에 바치면 그 여자는 나라에서 음악과 무용 그리고 손님을 접대하는 교육을 받는다. 그는 좋은 집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살 수도 있으며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 장차 훌륭하게 될 만한 사람을 정복하거나 벼슬하고 부유한 사람의 첩이 되기를 기대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남자와 자유로이 어울릴 수 있는 여인들에 대해 부유층이나 벼슬아치들은 굳이 도덕관념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합친 남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어머니의 혈통을 따지면 순수한 소작인의 자손이지만 때떄로 그들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정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보다 더 지체가 높아지는 수가 있다. 정실의 아들에게만 가능한 모든 영광을 차지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국사의 중요한 요직에 오를 수도 있다.
여성의 역할
게일
“결혼한 조선 여성은 남편, 시부모 등 가족들 뒷바라지로 하루 하루를 정신없이 보낸다.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현실을 거부할 권리나 기회가 한국 여성들에게 부여되어 있지 앟기 때문에 한국 여인들은 더욱 불행해진다는 것이다.”-218
“한국의 농촌 여성들은 가족의 모든 의복을 만들고 모든 식사를 준비하고, 무거운 공이와 절구로 쌀을 탈곡하고 찧고, 무거운 짐을 시장까지 머리에 이고 나르며, 또한 물을 긷고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나가 밭일을 한다. 그들은 일찍 일어나고 자정이 넘어서야 휴식하며, 틈날 때마다 실을 뽑고 베를 짠다. 대개 많은 아이들을 갖는데 아이들을 세살까지 젖을 떼지 못한다........ 상류사회에서는 절대적 격리가 하나의 규범이 된다. 부녀자들은 자신의 안마당과 집을 가지며 남자들의 집에서는 어떠한 창문도 그곳을 향해서는 안 된다. 방문객은 절대로 가족 중의 여성에게 눈짓을 보낼 수 없다. ..... 여성들은 어떠한 지적 교육도 받지 않고 모든 계층에서 열등한 지위를 갖는다. 어떤 종류의 이원적인 철학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남성들이 생각하는 자연은 여성이 열등한 존재로서 남성에 부속된 상태이다.”
여성의 위치
여성들은 격리되어 있으며 열등한 위치에 있다
조선의 여성은 속박속에서 살아왔다. 그들은 열등함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결혼 할때 애정을 기대하지 않으며 관습을 깨뜨린다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는 것같다. 그들은 말없이 <현모양처>의 법칙을 따른다. 고분고분하지 못한다든지 화를 내거나 추문을 불러일으키는 여자는 모진 매를 맞게 되고 상민의 여자로 전락한다. 그러나 상류층에서는 관습상 남편이 아내를 때릴 수 없고 그의 유일한 치료책은 이혼인데, 재혼이 쉽지 않기 때문에 남자는 자신의 운명으로 체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여자가 남편을 괴롭히고 가정을 파괴하는 것으로 모자라 부정한 짓을 저지르면 남편은 그 여자를 관청에 데려가 심하게 매질을 하고 노비의 아내로 삼게 할 수 있다.
가정에서의 여자의 은둔은 결혼 후에도 그대로 이어지며 중상류층의 가정일 경우 그정도는 극심하다. 그들은 밀폐도니 가마를 타지 않고는 대낮에 외출할 수 없다. 밤에는 여자 한 명과 초롱을 든 계집종 한명을 대동하고 장옷을 머리에 두르고서야 여자는 여자 친구를 방문할 수 가 있는데 남펴느이 허락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남편은 아내의 외출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 조사해보기도 한다.
조선의 여인이 어머니가 되면 그의 지위가 좀 나아진다. 계집애는 노년에 부모를 봉양할 수 없고 제사를 모실 수 없기 때문에 사내아이 만큼 환영받지는 못하지만 동양의 다른 나라에서처럼 여자가 남아돈다든지 달갑지 않은 존재는 아니다. 여아의 출생은 그렇지 못하지만 첫아들을 낳는것은 경사스러운일이다.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면 여자는 아무개의 엄마로 불린다.
농촌의 여성들에게는 즐거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고된일을 며느리에게 전가할 때까지 꾸준히 일만 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서른 살에 이미 쉰살로 보이며 마흔 살에는 거의 이가 빠진다. 개인적인 몸치장 마저도 인생의 초반에 사라져 버린다. 삶의 일상적인 생활을 벗어나면 그는 땅과 공기를 사람들에게 예측하게 하는 귀신을 생각하는 일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 조선에서는 여성의 지위를 한마디로 평가하기란 정말로 어렵다. 상류계급의 여자는 무조건 숨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불벼느이 규칙이다. 여자는 그들의 뜰과 방에 숨어 있다. 어떤 남자의 방도 그 여자 쪽으로 창문을 내어서는 안되며 어떤 방문객도 그들에게 눈길을 주어서는 안된다. 그들의 안부를 묻는 것은 예의에 크게 벗어나는 짓이며, 마치 그집에 여자가 없는 듯이 처신하는 것이 손님의 도리이다. 여자는 교육을 받아서는 안되며 어떤 계급의 여성은 매우 낮은 등급의 여성으로 취급된다. 남자를 우대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다. 남자들은 음양이라는 이원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계급에서나 여자는 열등한 존재이다. "청년입문(Youth's Primer)", "사기(Historical Summaries), 소학 등의 책은 학교에서 사내아이들에게 이러한 의식을 가르치며 사내들은 그의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한때부터 매일 같이 남존여비의 사상을 배운다.
지금의 왕조는 500년전 사회적으로 매우 타락되었을때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을 은둔시키는 제도를 도입했다. 어느 조선 사람이 존스(Hevert Jones)씨에게 말했던 것처럼 아마도 남자들이 아네를 불신해서 가 아니라 남자들이 서로 불신하기 때문에 여성을 은둔 시키는 제도가 지속되어 왔을 것이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해도 도시와 상류의 부도덕성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가장 미천한 계급을 제외한 모든 젊은 여자들과 나이 먹은 여자들은 법의 힘보다 더 강력한 관습에 따라서 집 안채에 격리 되어있다. 상류계급이나 중류계급의 여자들이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밤에 나가며 남의 집을 방문할 때에는 엄격하게 밀폐된 가마를 타고 외출한다. 천한 계급의 여자들은 어떤일이 있을 때만 밖에 나간다.
딸들은 아버지에 의해 처형되며 아내는 남편에 의해서 살해된다. 달레(C. dallet)의 말에 의하면 여자는 우발적이든 계획적이든 낯선 남자가 손을 만지면 자살을 했다. 따라서 그런일이 생기면 몸종은 재빨리 마님을 구출하기위해 마님이 불길에 빠지는 순간 그 혼란 통에 어떤 남자가 구해줄 가치도 없는 자신의 몸에 손이 닿은 것이라고 변명한다. 조선의 여행지 어느곳에서도 나는 여자들이 그의 어머니의 방에서 무심하게 시간을 보내는 모슴을 제외하고서는 여섯살 이상의 소녀를 본 적이 없다. 여성의 재주가 사회에 기여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나라에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여성들이 이러한 사회구조 아래에서 초조해하거나 괴로워하거나 혹은 유럽여자들이 즐기는 자유를 갈망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은둔은 몇백년에 걸친 관습이다. 그들이 자유를 그리워 한다는 것은 모험이며 그들은 유용한 가재도구이기 때문에 엄격한 보호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의 관습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다그쳐 물었더니 한 지식인 여성은 "당신네 남편들은 당신들을 돌보지 않는군요"라고 대답했다.
소녀들을 위한 토착적인 학교는 없다. 비록 상류 계급의 여성들이 한글을 배운다고 해도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1000명중에 2명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러한 철학은 대체로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다. 귀신을 중시하는 미신, 남자들만의 교육, 문맹, 낮은 법적관리, 그리고 냉혹한 관습은 세계의 미개한 나라에서차람 문명화된 조선의 여성들의 지위를 더욱 낮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로나 조선의 여성들은 음모가로 태어나서, 특히 자녀들의 결혼문제에서 어머니와 시어머니로서의 엄격한 권세를 행사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여자들의 권리는 거의 없으며 그들의 삶은 법보다도 관습에 더 의존한다.
여성의 지위
일부다처제는 조선에서 보편화된 제도이며 여자의 운명은 중국의 아녀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조선의 특별한 혼례의식은 알려진 바가 없다. 남자와 여자의 아버지나 친척간에 돈이 오고가면 남자는 여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올 수 있으며 그를 상품이나 물건처럼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다.
도시와 비교적 큰지방에서는 여자가 대낮에 다니는 것이 미풍양속에 크게 위반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하루 종일 처소를 떠날 수 없다.
한국 여인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하다. 한번 아버지의 집에서 나와 남편의 집으로 온 여인은 아주 노예가 되어버린다. 그것도 남편의 하녀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하녀까지 되는 것이다. 한국의 시어머니의 권한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진정으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시어머니는 집안의 여왕이다. 한국의 많은 민담은 시어머니들을 나쁜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곧 법이 되는데, 살아있는 동안 그녀의 최고 즐거움이며 진짜 본분은 불쌍하고 가련한 며느리의 삶을 고달프게 하는 것 분으로 보일 정도이가. 일반적으로 며느리는 자신 또한 곧 시어머니가 되고 아들의 장래의 부인에게 복수하려는 희망에 위안을 받아 매우 끈기있게 참아낸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 혼인이 그렇게 어린 나이에 행해지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실제로 혼인을 독촉하는 것은 빨리 시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어머니들이기 ㄸ문이다.
세상의 어느나라에도 한국에서처럼 엄격하게 여인들의 생활을 격리시키는 곳은 없다. 양반층의 여인이건 중류층의 여인이건 간에 집에서 나가는 일이 결코 없으며 할 수 없이 외출해야 할때는 반드시 완전히 차단된 가마를 이용해야 했다.길에서 볼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여인들은 최하류층의 사람들이며 이들 또한 대체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서울 여인들의 얼굴 가리는 것은 머리에서부터 덮어 씌운 초록색 비단외투로서 비록 소매 자락이 달려있기는 하나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입지는 않는다. 한편 도시 주변 농촌의 여인들은 이러한 외투 대신에 흰 앞치마로 얼굴을 가리기도 한다. 이것이 한국 여인의 의복 중 가장 신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창적이며 어느 한국의 의상에도 결코 뒤치지 않는다.
한편 가슴을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인들은 모두 예외없이 최하층계급인 칠반에 속하는 사람들인데, 지금은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거리에서 이들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양반계층과 직업적인 미녀가 되고자하는 기생들은 가슴을 드러내는 일이 결코 ㅇ벗으며 오히려 속옷의 넓은 윗단으로 ㄱ가슴을 조여몸의 곡선을 압착함으로서 가능한 한 평평한 몸매를 만든다. 이로써 미에 대한 개념은 각 민족들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밀로의 비너스같은 아름다운 몸매는 적어도 한국인들에게는 아무런 미적 만족을 주지 못할 것이다.
한국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겨ㅑㄲ는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젊은 소년들을 여자로 착각하는 것이다. 거리의 군중들 사이에 여자들은 전무하다는 것, 거리에서 볼 수 없는 몇몇 안되는 여자들은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또 얼굴과 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여인들은 시선을 끌만한 매력이 전혀 ㅇ벗ㄷ다는 사실 등이 한둗 청년들의 여성스러운 복자으 그들의 어깨 뒤로 땋아내린 머리다발, 가지런하고 우아한 이목구비 등과 합쳐져 방문객을 속아 넘어가게 한다.(꺅>_<)
여성의 역할
여성은 사회에서 유용한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물질적인 이해가 여성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87
4-3 노인
노인공경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은 중국 문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가정 생활에서 중국의 풍습이 강하게 나타나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에서 노인이 매우 공대받는 모습을 보고싶어 했다. 조선사람들 사이에서 백발은 영광의 표시이며 대머리는 지혜의 상징이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며, 노인을 향한 젊은이읭 예절은 서양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서울풍물지 -G.W. 길모어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비망록 - W.F. 샌즈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 이사벨라 베숍 지음
금단의 나라 조선 - 오페르트 지음
꼬레아 꼬레아니
내가 본 조선, 조선인
J.S.게일 <전환기의 조선>
헐버트
파란눈에 비친 하얀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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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본넘들이 올리는사진들보면 가슴을 들어내고 찍힌 사진들을 보았는데 왜 그런애기들은 외국인들에기에선 안보이는건가요... 합성사진인가.. 아들낳은 아줌마들은 젓가슴내놓고 다닌다는데 .. 진실은 무엇일지.
당연히 합성이죠. 진실이고 뭐고 저놈들은 습성이 날조인 애들인데 뭘 그런 의심을
다큐에서 본것인데 그사진들은 엽서에 들어가는 사진들이더군요. 그당시에는 영국이나 프랑스에서처럼 식민지의 사진들을 엽서로 만들어 파는 일들이 많았는데 일본역시 한국을 미개한 식민지로 찍어서 엽서로 판매했던것들 이었습니다. 흠..다큐제목이 기억이 가물가물한것이 원통..ㅠㅠ
일본의 개략?
다 읽고보니 내용에 나옵니다. 확실히 다음과 같이 모두 한번 읽어보세요. 4-2마지막 부분입니다. 한편 가슴을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인들은 모두 예외없이 최하층계급인 칠반(?)에 속하는 사람들인데, 지금은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거리에서 이들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양반계층과 직업적인 미녀가 되고자하는 기생들은 가슴을 드러내는 일이 결코 없으며 오히려 속옷의 넓은 윗단으로 가슴을 조여 몸의 곡선을 압착함으로서 가능한 한 평평한 몸매를 만든다. ... 거리에서 볼 수 없는 몇몇 안되는 여자들은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또 얼굴과 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여인들은 시선을 끌만한 매력이 전혀 없다는
제가 아는 한 아들 낳은 아줌마들이 젖가슴 내놓고 다닌다는 말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할머니께서 절대 젖가슴 내놓고 다니는 일 없었다고 하던데요 .
외모는 놀라울 정도로 가장 가까운 이웃인 중국인이나 일본인들과는 현저하게 다르다.일본이나 중국을 여행하는 낯선 사람들을 괴롭히지만 조선에서는 그렇지 않다.성품은 성실,낙천적,개방적,정직,쾌활 등등<---100년전에 제대로 보셨네 ㅋㅋ
가슴 내놓은 사진은 서양인과 일본인들이 연출한 사진이죠. 당시 서양인들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성들의 가슴 사진을 찍어 우표로 만들곤 했는데 여성의 가슴에 대한 성적 감흥을 느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제가 들은 얘기로 아프리카 여성 원주민들의 가슴 내민 모습에도 성적 감흥을 느꼈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찾아보면 일본 여자가 가슴을 내민 사진도 있습니다. 일본인들이야 뭐 말로 안해도 당연한거고...
글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어 있네요. 최하층계급인 칠반에 속하는 여인들이라는군요.
출처는?
의견이 일관적이지 않고 분분하네요. 여러 전기들을 열거해놓은 건가요?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때 시국이 굉장히 불안정했고 일제의 침탈 아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가 우울할 수밖에 없었죠. 외국인들은 그것을 보지 못햇군요....
제가..패션디자인을 전공했는데요..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보면..한국여성의 한복 저고리 길이로 패션유행이 있었던걸로 기억되네요..일본인들이 올린 동영상에 보시면 가슴이 나와있는 사진들이 대부분인데요 그게 아마 1900년도될거에요..한복 저고리의 길이가 제일 짧았던 시절이였습니다..저고리길이의 유행변천의 한부분이였다고 배운것 같네요^^ㅋ 아마..동영상에 올라온 사진들은...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서민들의 유행의 한부분이였던..-_-민망한복이 맞을거에요;; 졸업한지 너무 오래되서.. 틀린설명이라도..너그러이..이해를해주세요;; 수업시간에 듣고 민망했던 기억이 제게 남아있네요 헙;;
당시 서구인들의 편견도 엿볼수(외외로 많이보이는 엉터리 분석들) 있고, 나름 당시 일본 중국과의 차이도 찾아볼수 있어서 나름 중요한 자료인것 같네요.
여행자들은 종종 조선 사람들의 어린애 같은 천진스러움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그들이 어린애를 다루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아첨에 약하다. 조선 사람들에게 '당신은 훌류안 사람'이라고 말해 보라. 그러면 당신이 그에게 원하는 것을 그는 확실히 줄 것이다. <- 이건 현재도 같은 거네요. 범죄저지른 외국인 불체자를 측은하게 바라보고 무조건 감싸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죠. 불쌍한 표정짓는다고 불쌍한게 아닌데도 말이죠. 아마도 모든 인간은 선한 품성이 있다는 우리민족의 믿음때문일겁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철자들은 왜 엉망입니까? 맞춤법 안맞는게 너무 많군요.. -. -;
소금에 절인 야채를 김치라고 한다. 김치는 고춧가루,굴,기름 그리고 마늘로 무친 배추와 무를 기초재료로 하여 만드는데 <- 조선말 일제시대 이전 시기에는 적어도 고추를 사용한 김치가 보편화 되어 있었음을 알수 있네요. 조선중기에는 고추의 사용이 극히 적었다는데(실고추만 일부 올리는정도), 조선중후반 이삼백년사이에 김치에서 고추의 사용이 급속도로 늘어났나봅니다.
한국인이 즐기는 것은 소금과 후추 종류이다. 한국인은 고추의 일종인 칠레 소스(고추장?)와 칠레 간장(고추장물?), 오이에 혼합되어 있는 소금과 붉은 후추(고추가루?) 그리고 야채국을 즐긴다. 이 나라의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하는 일반 외국인은 짧은 시간 내에 음식을 먹은 다음 그의 입을 벌려 찬 공기를 들이마시고 난폭하게 부채질을 한다. 그의 눈에 고인 눈물과 일반적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담백한 쌀밥과 배추김치와 국과 콩과 간장 대신에 타고 있는 숯불을 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 그 당시도 매운 음식을 즐겼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