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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방 TV가 빛나는 밤에… 원문보기 글쓴이: 나기름위를둥둥튀김인가봐
안티가 빛나는 밤에 (연이말2)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지우지마세요 |
1997년 5월 27일 아침 6시 40분 무렵
효고현 고베(神戶)시 수마(須磨)구 시립 토모가오카 중학교 직원이 학교의 정문을 열다가 사람의 머리가 절단된 채 교문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경찰의 조사결과 이 학교에서 서쪽 1km 떨어진 아파트에 사는 하세 쥰 군(타이노하타 초등학교 6학년, 당시 만 11세)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3시경, 쥰군이 사는 아파트 앞에 있는 통칭 「탱크산」에 있는 케이블 TV 송전기지(사방이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있고
입구는 쇠사슬로 잠겨있다)에서 쥰군의 몸이 발견되었다.
쥰군은 3일전인 24일 오후 1시 30분 무렵, 「근처의 할아버지 댁에 다녀올게요」하고 나간 뒤 행방불명 되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주택가 「수마 뉴 타운」에서는
2월 10일에 초등학교 6학년 소녀 2명이 머리를 쇠망치로 구타당해 큰 부상을 입었고,
3월 16일에는 초등학교 4학년 소녀가 역시 쇠망치로 머리를 맞고 1주일 후에 사망,
그 직후 초등학교 3학년 소녀가 날카로운 칼에 배를 찔려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연속해서 발생.
현지 주민은 공포와 불안에 떨었다.
교문앞에서 발견된 쥰군의 머리는 입에서부터 귀까지 찢어졌고 눈동자에는 X 자의 상처가 칼로 새겨져 있었다. 또한 찢어진 입에서 나온 A4용지에서는
자 게임의 시작입니다
미련한 경찰 여러분
나를 멈춰보라구
난 살인이 유쾌해서 견딜 수 없어
사람의 죽음을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어쩔 수 없어
더러운 채소같은 인간들에게 죽음의 제재를
수년간의 큰 원한에 유혈의 판결을
SHOOLL KILLER
학교살인마 사카키바라 세이토
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당시 발견된 협박장>
'사카키바라 세이토'의 2번째 메시지는 6월 4일 현지의 고베 신문사로 우송되어 왔다.
고베 신문사에
일전에 내가 외출을 했을 때 우연히 가게에 TV가 켜져 있어 그것을 보고 있던 참에 아나운서가 내 이름을 「귀신 장미(오니바라)」
라고 틀리게 읽는 것을 들었다.
사람의 이름을 틀리게 읽는 것은 더할나위 없이 사람을 우롱하는 행위이다.
종이 겉에 쓴 문자는 암호도 수수께끼도 허위도 아닌, 거짓없는 나의 본명이다.
내가 존재하게 된 순간부터 그 이름이 지어졌고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주변사항으로 인해 나에게는 국적이 없다.
지금까지 나 자신의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서 불린 적도 없다.
만일 내가 태어났을 때의 나 그대로인 채라면, 일부러 절단된 머리를 중학교 정문에 방치하는 등의 행동은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려고만 하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하게 살인을 즐기는 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적어도 당신들의 상상 속에서만이라도
내가 일부러 세상의 주목을 끈 것은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투명한 존재로 계속 되는 나를
실재하는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그것과 동시에 투명한 존재인 나를 생산한 의무교육과 의무교육을 낳은 사회로의 복수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단지 복수하는 것 뿐이라면 지금까지 떠맡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리는 것 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이 세계에서 단 한 명, 나와 같이 투명한 존재인 친구와 상담했다.
그러자 그는
「비참하지 않고 가치 있는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라면 당신의 취미이기도 하며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고 또 목적이기도 한
살인을 포함시켜 복수를 게임으로서 즐기고, 당신의 취미를 살인으로부터 복수로 바꿔 나가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고,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닌 당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서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말에 반응하듯이 나는 이번 살인 게임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내가 왜 살인을 좋아하는가는 알 수 없다.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는 자연의 섭리로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살인을 하고 있을 때만은 평소의 증오로부터 해방되고 평온함을 얻을 수가 있다.
사람의 고통만이 나의 고통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이 종이에 쓴 문장을 대체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보통 이상의 집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 이름을 틀리게 읽거나 내 존재가 더럽혀지는 일은 참을 수 없다.
지금 현재 경찰의 움직임을 보면 어떻게 봐도 내심 귀찮아 하면서도 일부러 그것을 속이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나의 존재를 은폐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이 게임에 목숨을 걸고 있다.
잡히면 아마도 목이 매달리게 되겠지.
그러니까 경찰도 목숨을 걸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더 분노와 집념을 가지고 나를 추적해줘.
향후 한 번이라도 내 이름을 틀리게 읽거나 다시 실망시키는 일이 생긴다면 일주일간 세 개의 채소를 해치우겠습니다.
나를 아이 밖에 죽일 수 없는 유치한 범죄자라고 생각하면 큰 실수다.
― 나는 한 명의 인간을 두 번 죽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
PㆍS 머리 부분의 입에 넣어둔 편지 글자가 비 따위에 젖어 읽기 힘들 것 같아서 그것과 완전히 똑같은 내용의 편지도 함께 보냅니다.
(성명문을 싸고 있던 종이의 뒤에)
내 이름은 사카키바라 세이토
밤하늘을 볼 때 떠올리면 좋겠지
1300자에 달하는 글자수와 내용의 맥락을 볼 때 높은 교양을 가진 30세~40세 전후의 남성으로 추정되었다.(범죄자 프로파일러의 견해)
게다가 쥰군의 머리가 발견되던 27일 이른 아침, 검은색 세단 승용차(닛산 블루 버드)가 중학교 정문 앞에 정차하고 있던 것을 트럭 운전기사가 목격했고
정문 근처에서 검은 비닐 봉지를 가지고 배회하는 30세~40세의 남자를 주위의 노부인, 신문 배달부 등 다수가 목격했다.
그런데 수마 경찰서는 그때까지 보도되고 있던 범인과는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는 S(토모가오카 중학교 3학년, 당시 만 14세)를 6월 28일
체포했던 것이었다. 얄궂게도 S의 부모님은 자청해서 실종된 쥰군 수색을 돕고 있던 상황이었다.
S는 대기업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연구직의 부친과 모친, 남동생(당시 중학교 1학년)과 막내 동생(당시 초등학교 4학년)의 5인 가족이었다.
부모님의 예의범절은 엄격했는데 S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모친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받은 뒤 무슨 일이 생기는게 아닐까 할 정도로
심하게 계속 울었다고 한다. 의사에게서 「소아 노이로제」라고 진단을 받고 부모님은 가정교육 방침을 「방임주의」로 바꾸었다.
S가 초등학교 5학년 때 S를 가장 귀여워 해주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비정상인 행동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때를 경계로 죽음이라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주위의 고양이나 작은 새 등 작은 동물을 학대하거나 죽이는 것을 반복했다.
비정상적인 잔학성을 가진 S는 근처에서도 유명해서 친구들도 S를 무서워해 다들 멀어져 갔다고 한다.
수사 본부에서는 근처의 탐문수사결과 S를 용의자라고 단정했다.
(프로파일러의 의견은 신문과 TV뉴스에 나왔지만 경찰의 실제 용의자 선정결과는 언론에 흘리지 않았다.)
수사 본부는 S가 조사과정에서 「내가 쥰군의 살해와 2월, 3월의 소녀 상해를 저질렀다」라고 진술했기에 범인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러나 「진범은 따로 있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저널리스트, 대학교수, 범죄 전문가)이 있었다.
이것은 검은색 세단을 탄 남자나 검은 비닐 봉지를 가진 의심스러운 남자의 존재 때문이다.
또한 쥰군의 목을 놓아둔 상황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27일 아침 6시 40분 무렵, 중학교 직원이 학교 정문을 열었을 때 머리는 정문의 중앙에 놓여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현장검증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그런데 83세가 되는 노부인이 1시간전에 목격했을 때에는 「학교명이 쓰인 금속 플레이트 아래에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이 노부인을 포함한 다른 목격자들은 진짜 인간의 머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마네킹등을 이용한 악질적인 장난 정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았다).
1시간 후인 6시 30분경 신문 배달원은 머리가 플레이트와는 반대로 정문으로 향하고 좌측에 놓여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 S의 증언으로는 처음에는 정문의 담 위에 머리를 놓아 두었지만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아 교문앞에 두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이 문의 높이가 약 2m인데 160cm인 S의 키로 4kg 무게의 머리를 담 위에 두었다가 다시 옮겼다는 것이 타당한가?
(S는 뛰거나 혹은 담위로 기어 올라간 적이 없다고 한다.)
또 당시의 신문이나 주간지에서 학교측의 체벌로 S가 학교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것이나 담임으로부터 「학교에 오지 말아라」라고
말했다는 등의 보도에 대해 학교측은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S가 속해있던 반 급우들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S를 향한 집단 괴롭힘의 징후도 없었다. (오히려 급우들이 S를 두려워하여 S의 말에 고분고분 잘 따르는 편이었다.)
그리고 고베 사건은 물증도, 범행 목격 증인도 없이 S의 자백만으로 범행이 인정되었으며 흉기의 종류와 칼날의 길이에 대해서도
실제와 S군의 자백이 엇갈렸다. 또한 사체의 훼손, 시반, 혈액, 음식물 소화상태로 보아 양손과 신발끈으로 목이 졸려 사망한후
급속하게 냉동된 것으로 보이나 S군의 상황으로는 사체를 보관할만한 냉동장치를 이용할 수 없었고 S군의 자백으로는
심한 몸싸움 뒤 죽였다고 되어 있으나 사체에서는 격투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경찰에서는 S군의 집에서 고무대야와 톱, 칼을 이용하여 사체를 절단했다고 발표하였지만 S군의 집 욕실, 고무대야, 톱, 칼에서는
루미놀반응(혈흔검사)이 나타나지 않았고 이 사실은 무시되었다.
부검결과 범인은 왼손잡이로 나타났으나 S군은 오른손잡이이며, 협박장의 필적도 S군의 필적과 다르다는 사실 역시 무시되었다.
※ 역주 : 기타 상세한 사항들이 많지만 내용이 너무 길기에 생략합니다.
그러나 체포때부터 계속 부모님의 면회를 거절하고 있던 S는 사건 발생 6년만에야 부모님과 면회를 하게 된다.
이 때 모친은 「정말로 네가 범인이야?」라고 묻자 「응, 내가 했어!」하며 쓰러져 울었다고 한다.
2004년 3월 10일, S(당시 21세)는 수용지의 관동 의료 소년원(도쿄도 후츄시)을 가퇴원했다. 2003년 3월에 의료 소년원으로부터 접수된
가퇴원 신청을 관동지방 갱생 보호 위원회가 「S는 깊게 반성하고 있어 재범의 가능성이 없다」고 인정했다.
※ 이것은 이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사건과 연결되게 됩니다. 2부에 계속.
3. 악마의 핏줄 2부 - 후쿠오카 미용사 토막 살해 사건
1994년 3월 3일 큐슈 구마모토현 도로변의 타마나 주차장 쓰레기 처리소에 뭔가 수상한 검은 비닐 봉투가 버려진 것을 환경 미화원이 발견했다.
내용물은 사람의 왼팔.
같은 날 후쿠오카현의 야마카와 주차장에서는 동일 인물의 것으로 보이는 오른팔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4일, 야마카와 주차장에서 회수한 쓰레기중 광고지에 싸여진 왼손목이 발견되었고, JR 구마모토역의 구내 사물함에서
복부가 도려내진 가슴과 허리가 발견되었다.
14일, 구마모토현 아소마치의 별장 근처에서 왼다리가 발견되었다.
후쿠오카ㆍ구마모토의 공동수사 결과 피해자는 후쿠오카시 츄오구 텐진쵸의 미용사 이와사키 마유미(당시 30세)로 판명되었다.
수사 본부는 일단 4일에 발견된 왼손목을 싸고 있던 광고지에 초점을 맞추고 조사하여 이 광고지의 발행 부수가 불과 1200부이며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 주변에만 배포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지역을 철저하게 탐문수사하자 피해자 마유미와 같은 미용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에다 후미코(당시 38세)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후미코는 마유미가 근무하고 있던 미용실의 경리 담당이었다.
후미코는 3월 2일부터 4일까지 후쿠오카시에서 렌트카를 빌려 큐슈 도로를 주행하던 모습이 CCTV에 녹화되었고 수거된 통행권에서
후미코의 지문이 발견되어 3월 15일 사체유기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처음에 후미코는 계속해서 범행을 부인했지만 후미코의 핸드백에서 마유미의 수첩, 시계가 나오자 수사본부는 이 점을 집중 추구하였다.
결국 3월 28일, 후미코는 「마유미의 살해를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혼자서 옮기기 위해서 사체를 절단」한 것을 자백했다.
4월 5일, 후미코는 살인 용의로 재체포되었다.
후미코는 1978년에 결혼, 1989년에는 미용실 경리 담당으로 근무하다가 이 미용실를 자주 이용하던 세무사 A씨와 친해져 불륜 관계를 유지했다.
피해자 마유미는 1990년에 같은 미용실에서 미용사로 일하게 되었는데 미인이면서도 성격이 싹싹해 손님들 사이에서 상당히 유명해졌다.
후미코는 아름다운 A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A씨와 마유미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근거없이 일방적으로 의심을 하게 된다.
심부름 센터에 뒷조사 의뢰를 했지만 A씨와 마유미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하지만 의혹과 질투심은 점점 더 자라나서 마유미를 죽이려는 생각까지 발전했다.
1994년 2월 27일 오전 11시 마유미는 다니던 미용실을 그만두고 다른 곳로 직장을 옮기기 위해 후미코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사소한 시비가 이윽고 거친 말다툼이 되었고 결국 후미코는 식칼로 마유미를 살해했다.
사체의 처리가 곤란해진 후미코는 톱과 식칼로 시체를 토막내고 렌트카를 빌려 큐슈의 주차장, 별장등에 유기했다.
후미코는 범행 후 『다음은 네 차례다』라고 쓰인 협박장을 만들어 그것을 A에게 보이고 자신도 표적이 된 것을 가장하는 등
용의주도한 모습을 보였다.
1999년 11년 9월 3일, 최고재판소는 후미코의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 16년』을 확정 판결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세간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범'의 존재이다.
공범의 존재가 덮여버린 첫번째 이유는 범인 에다 후미코가 체포되자마자 이 공범이 자살해버렸기 때문이고,
두번째 이유는 이 공범의 아버지가 후쿠오카에서 아주 유명한 S외과 병원의 원장으로서 조상대대로 이 지역의 정치와 경제에
크게 영향을 끼쳐온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사건은 이미 종결되었고, 기왕에 죽은 사람이니 더 들춰봤자 뭘 하겠냐 이런식.
공범의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부친에게서 S외과 병원을 이어받고 원장으로 취임하여 슬하에 첫째 아들(장남), 둘째 딸(장녀),
셋째 아들(차남) 이렇게 셋을 두었다.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의술을 배운 장남과 차남은 의사가 되어 S외과 병원으로 들어가 가업을 계승하였고 장녀는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차남은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 심리적인 불안 때문에 병원을 그만두고 근처에서 화원을 열었다.
(일설에는 의료사고, 장기밀매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아예 처음부터 의학쪽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흔히 화원이라고 하면 꽃, 꽃이라고 하면 장미, 장미라고 하면 남성 동성애자를 떠올리는데 이 차남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 역주 - 이것은 일본에 널리 퍼져 있는 대표적인 편견중 하나이며 저는 성적소수자나 장애인에 대해 어떠한 편견도 갖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차남은 평소 자주 다니던 미용실의 점장(男)과 사이가 가까워지다가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에다 후미코는 같은 미용실에서 일하던 미용사 이와사키 마유미(女)와 연인 관계였는데, 후미코와 차남은 같은 성적소수자라는 점 때문에
쉽게 친해져서 속마음을 털어놓는 친구로 지냈다. (앞서 나온 세무사 A씨는 실존인물이지만 사실 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어느날 후미코는 연인인 마유미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어 크게 화를 낸다.
상대는 미용실의 점장이며 차남의 연인인 바로 그 남자.
결국 후미코는 마유미와 언쟁을 벌이다 식칼로 마유미를 살해하게 된다.
범행 장소는 차남의 아파트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 때문에 차남과 후미코가 사전에 공모를 하여 살해를 저질렀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어쨌든 차남과 후미코가 함께 마유미의 사체를 절단하고 각지에 유기한 것은 확실한 사실로 보인다.
그리고 앞에서는 복부가 도려내어졌다고 완곡하게 표현하였지만 실제로는 임신한 마유미에 대한 후미코의 분노 때문에 자궁이 도려내어지고
성기부위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4.
경찰이 후미코를 체포하자 차남은 곧바로 미국으로 도주하였다가 그곳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아버지는 이 일로 크게 충격을 받았으나 곧 냉정을 되찾고 친분이 있는 지역유지, 언론관계자, 국회의원들에게 로비를 벌여
차남의 관련 사실을 파묻어 버렸다.
이들중 각종 비리에 연루된 사람들이 아주 많으며 대표적으로 국회의원 A와 D는 시모노세키시 예산 의혹, 공금유용 의혹,
선거 위반 의혹, 케이에코중고교 부정 의혹, 분뇨 처리 담합 의혹, 홋카이도 묘원 의혹에 휩싸여 있는 실정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도 아버지와 장남은 변함없이 병원 운영을 계속(장남은 부원장으로 취임)하였으나 심리적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장녀는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다.
그리고 3년후 장녀의 아들 S는 고베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되고, 장남의 아들(초등학생)은 여동생(유아)을 아파트 베란다밖으로
던져버려서 여동생이 사망하게 된다.
고베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S는 원래 『초등학교 5학년 때 S를 가장 귀여워 해주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비정상인 행동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하였으나 실제 할머니는 그 이전에 돌아가셨으며 할머니 운운하는 것은 자살한 삼촌을
은폐하기 위한 엉터리 보도로 생각된다. (이것 역시 지역유지, 언론관계자, 국회의원에 대한 로비의 결과로 보인다.)
'악마의 핏줄 1부' 를 보면 S군이 과연 진범인가에 대한 몇가지 의혹들이 나와 있는데, S군과 함께 범행을 저지른 공범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대부분의 의문이 해소된다.
이 공범의 정체와 관련하여 다양한 가정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그 공범이 바로 S외과 병원 원장의 차남, 즉 S군의 삼촌』이라는 것이다.
(차남의 키워드 중 하나는 '장미'이고 일본어로 '바라'라고 읽는다. 그리고 이것은 사카키'바라' 세이토와 연결된다.)
자살로 죽어버린 차남이 어떻게 3년 뒤 사건의 공범이 될 수 있을까?
차남의 죽음과 연관된 것들이 대부분 비밀과 의혹에 싸여 있는 등 여러가지 정황 증거가 있긴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다음의 사실이다.
차남의 사망 증명서 서명란에는 다름아닌 아버지 S원장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덧붙임 - 위 이야기는 여러가지 수사결과, 언론보도, 가설들의 종합이므로 맞지 않는 내용이 있을 수 있으며, 또 다른 진실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 이것은 이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고 또다시 다른 사건과 연결되게 됩니다. 3부에 계속.
4. 악마의 핏줄 3부 - 큐슈 의대 전쟁포로 생체실험, 인육사건
※ 끔찍한 사건이니 심신노약자, 임산부, 어린이는 보지 마세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1945년 5월, 일본을 공습하던 초대형 폭격기 B29 한대가 불시착했다.
큐슈 지구를 관할하던 서부 군사령부는 탑승원이었던 윌리엄 프레드릭 소령을 포함한 12명을 포로로 잡고
재판 없이 12명의 탑승원중 8명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큐슈 대학 제일의 이시야마 외과 교수와 큐슈 대학 외과 출신의 군사관들은 『생체실험』을 서부 군사령부에 제안하여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큐슈 대학 의학부는 사형이 선고된 포로 8명을 서부 군사령부로부터 인수했다.
이동된 수용지가 병원임을 깨닫자 8명의 미군 포로들은 사형의 공포에서 벗어나 안도했으며 그중에는 웃는 얼굴로 의사들을 향해
「Thank You」라고 말하는 포로도 있었다고 한다.
큐슈 대학 의학부의 이시야마 교수를 포함하여 토리스 타로 교수, 히라오 켄이치 조교수 외과 의사, S교수, 의학생, 간호사 등 50여명이 동원되어
미군 포로를 수술실로 연행하여 산 채로 간, 심장등의 기관을 없애거나 혈액 대용으로 바닷물 주사가 가능한가 아닌가 등의 실험을 했다.
이 때 이시야마 교수는 수술대를 둘러싼 제자들에게 「심장은 자르는 것도 꿰매는 것도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해부와 실험이 종료된 후 제거된 심장이나 간등의 내장 기관과 근육, 피부등은 그대로 잘게 썰려져 회가 되거나 불로 조리되어
육군 장교 집회소 연회에 제공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군 총사령부는 행방불명 된 40명 이상의 미군포로의 조사를 실시했다.
일본군은 미국에 의한 히로시마 원자폭탄 공격으로 인해 미군포로 8명이 사망했다고 보고를 올렸지만 이에 의문을 품은
총사령부 법무국의 알버트 카펜터 대령은 5개월간에 걸쳐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산채로 해부, 생체실험을 하고 있던 사실을 밝혀내 같은 대학 의학부의 이시야마 교수, 토리스 교수, 히라오 조교수, 수간호사 츠츠이 시즈코,
재판 없이 8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서부 군사령관 요코야마 이사무 중장, 인육을 먹은 호리우치 키요신 소장등 29명을 기소했다.
1946년 7월, 이시야마 교수는 후쿠오카 도테쵸 형무소에서 「모든 것은 군부의 명령.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제자와 간호사들의 석방을 요청하며 목을 매고 자살했다.
※ 역주 - 하지만 이시야마 교수는 731부대(일명 마루타부대)의 설립과 운영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왔으며
731부대의 의사들로부터 생체실험 결과물들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기에 일말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1948년 8월 27일, 요코하마의 점령군 제8군 군사법정은 미군 포로에 대해 생체해부 실험을 실시한 큐슈 대학 의학부 관계자, 군부 관계자등
14명중 5명에게 교수형, 4명에게 종신형을 판결했다.
재판에서는 토리스, 히로, 요코야마등 5명에게 교수형, 츠츠이등 4명에게 종신형, 인육을 먹은 호리우치등은 5명은 무죄로 했다.
1950년 재심 감형으로 사형수는 교수형을 면하고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용케 형을 면한 S교수는 큐슈 의대에서 물러나 그동안의 경험ㆍ지식(생체실험 포함)으로 S외과 병원을 설립하고 얼마 후 아들에게 원장직을 물려준다.
이것으로 이 엄청난 집안의 이야기는 끝입니다.
이 S교수의 부친과 조부도 몇몇 사건을 일으킨 것이 있긴 한데 워낙 옛날 일이라 자료도 부정확하고 대부분 뜬소문격이라 아주 짧은 내용 뿐이네요.
그럼 S교수의 조부부터 시작하여 이 집안에서 일으킨 사건ㆍ사고들을 짧게 요약하고 마치겠습니다.
사실상 조부가 이 집안의 시조는 아니지만 그냥 편의를 위해 1대로 표기합니다.
1대 - S교수의 조부(부락민 집단학살? 불확실)
2대 - S교수의 부친(게이샤 잔혹 살해? 불확실)
3대 - S교수(미군포로 생체실험, 731부대와 연관)
4대 - S교수의 아들(수술중 사망사고, 정치 비자금등 다양하지만 이 집안에서 이정도로는 약발도 안먹힘)
5대 - 차남(후쿠오카 미용사 토막 살해 사건)
6대 - 장남의 아들(여동생을 아파트 베란다 밖으로 내던져 여동생 사망)
장녀의 아들 S군(고베 연쇄살인 사건)
※ 일제강점기에 목숨을 잃은 강제 징용자, 강제 징병자, 위안부 할머니, 독립운동가분들과 731부대의 희생양이 되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출처 -내문서
첫댓글 스쿨스펠링틀렷자너.....ㅠㅠ무습다근데
가관이다 가관이야... 진짜 악마의 피가 흐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