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나무가꾸기에 너무 열중해 있던 나머지 뒤에서 누군가가 나의 나무들을 칭찬하는 것조차 듣지 못했다.
그렇게 나무들을 한참 돌보다가 뒤로 돌아선 나는 왠 아가씨가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넘어질 뻔했다.
"뭐..뭐야!! 놀랐잖아!"
"죄..죄송해요."
난 잠시 당황해서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아무 죄도 없는 아가씨가 놀라서 죄송하다며 사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기도 해서, 다시 살며시 말을 건넸다.
"아..아니, 그보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요?"
"한..두어 시간 쯤 있었던 것 같아요. 아까 말을 걸었었는데.."
두어 시간 쯤 이라.
그럼 나는 이 아가씨를 두 시간정도 세워 놓은 셈이 돼었다.
절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 그랬소? 이거 미안하구만."
그러자 그 아가씨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무가 정말 예뻐서요, 저렇게 예쁜 나무는 처음 보네요. 다른 나무들보다 더 싱싱하고 푸르러요.
정말 신기하네요. 어떻게 이렇게 가꿀 수 있죠?"
"나무..? 여긴 순 나무 투성인데."
"저기, 저 나무들이요."
"아, 월계수들 말이군!"
.
.
.
.
.
.
.
아가씨의 이름은 피리아라고 했다. 피리아 울 콥트.
아까는 잘 몰랐는데 지금 다시 보니 이 아가씨, 굉장한 미인이었다.
탐스럽고 긴 금발에 바다같이 깊고 푸른 눈.
오똑한 콧날에 새하얀 피부.
보통의 아가씨들보다 키도 큰 편이었고 왠지 야무져 보이고,
내 딸처럼 잘 웃기도 했다.
보통 아가씨들이 갈망하는 그런 것을 모두 갖춘 아가씨였다.
"저 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더 크네요."
"원래 월계수라고는 저 나무 하나뿐이었으니."
"정말요?"
"후에 내가 저 나무 주위에 월계수 묘목을 심어 다 키운 것이지.
그리고 더 크네요 정도가 아니지 않소? 내가 보기엔 두어 배는 커 보이는데?"
"맞아요. 되게 많이 크네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나무지, 아마. 굉장히 오래 된 고목이라는데..무슨 전설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았는데.."
"전설이요?"
"오래 전에 듣긴 들었었는데, 기억이 잘 안나는구만."
"..아쉽네요."
"뭐, 나중에 아가씨를 또 만날 일이 있으면 그 땐 꼭 생각해서 들려주지.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않소?"
"네..?"
"월계수는 보통 15미터 정도 자란다오. 저렇게 큰 월계수도 있나 싶어서 말이오."
"그렇군요. 모르고 있었어요."
"뭐, 그런 나무니까 전설까지 붙어 있는 것이겠지만."
"그런데 정말 볼수록 멋있는 나무들이네요. 정말 잘 가꾸셨어요."
"내가 아무리 잘 가꾼들 태양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소? 다 저 태양 덕이라오."
"태양이요?"
"그렇다오. 내 나무들이 저렇게 푸르고 싱싱한 건 다 태양 덕이지.
난 말이오, 내 월계수와 저 태양은 뗄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한다오."
"흐음..그렇군요."
그리고 나서 아가씨는 혼자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작은 노랫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어 물어보았다.
"근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거요?"
그러자 아가씨는 멍하니 날 쳐다보다가 갑자기 당황한 기색으로 바뀌었다.
"아.........맞다."
. . .
장을 보다가 여기까지 흘러 오다니.
참 재미있는 아가씨가 아닌가. 한눈파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자주 딴 길로 새는 모양이었다.
아가씨가 떠나고 심심해진 나는 낮잠이라도 청할까 해서 나무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렇지만 다른 날보다 햇빛이 더 유난히 따가운지라.
그래서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한 나는 괜한 햇빛이 야속하게 생각되어 그 자리에서 짐을 꾸려
마을로 내려가 버렸다.
햇빛에게 감사하다가도 갑자기 야속하게 생각하다니, 나도 참 변덕쟁이가 아닌가.
그리고 며칠 뒤에,
평소와 마찬가지로 내 월계수들을 돌보러 이 곳으로 왔을 때- 난 다시 그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다.
"또 한눈이라도 판 거요, 아가씨?"
"아니에요! 그냥 이 나무들이 보고싶은 마음에 온 건데.."
"나참, 아가씨도 나같이 어지간히 할 일도 없나 보오."
"헤헷..그러게 말이에요."
보아하니..
정말 영락없이 놀러 온 기색이었다.
따가운 햇빛을 대비한 모자에, 간편한 옷차림. 그리고 옆에 놓여진 바구니 안에는 아마
먹을 것이 들어있지 않을까.
나도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지 싶어 아가씨와 어울려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이런 저런 이야기나 하면서.
한참을 이야기하다보니 어느덧, 이야깃거리도 바닥이 나 버렸고
나는 아무 말 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차에 그 아가씨가-
"월계수는 태양이 꼭 필요하다고 하셨었죠?"
..하고 묻길래 나는 얼른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럼 월계수는 밤엔 태양을 기다리고 있겠네요?"
이 질문에 피식 웃음이 났다.
대충 뭐, 그렇다고 대꾸했다.
천진난만하게 나무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나, 이런 대책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나.
정말 순수한 아가씨임에 틀림없었다.
"그럼 저에겐 지금은 밤이겠군요."
아가씨는 난데없이 이런 못 알아들을 말을 했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아가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월계수처럼 태양을 기다리고 있거든요."
.
.
.
.
.
.
.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 아가씨는 연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말하던 태양은 그녀의 연인임에 틀림없었다.
후에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그냥 갑자기 얼만큼 기다렸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궁금한 것은 그 때, 풀지 못하면 화병이 나는 성격인지라.
혹시 물어보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무례를 무릅쓰고 물어봐 보았다.
"그 아가씨 연인 말이오. 오랫동안 기다렸소?"
"음..아마 한 이백년 쯤?"
나는 당연히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당연한 것이었다. 누가 정말로 이백년을 기다렸다고 이해 할 것인가.
보기에도 이제야 갓 스물 정도 되었을 법한 아가씬데.
그리고 그녀는 그 후로 올 때마다 나에게 자신의 연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항상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아가씨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연인은 꽤나 심술 궂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래, 언제쯤 돌아 온다는 말도 없었소?"
"음.....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르겠네요."
"뭐요?"
"죽었다고 해야 맞는 걸까요? 여하튼,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이 말을 들은 난 괜한 것을 물어보았다 싶어 급히 사과를 하였으나,
그녀는 방긋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괜찮아요, 그 사람이 기다리라고 했는걸요. 그러니까 기다리려구요.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제 마음이 갸륵해서 돌아 올지도 모르잖아요?"
밤이 되면 월계수는 태양이 그리워 돌아와 달라고 수백번, 수천번 기도를 한다.
그렇게 아침이 되면 항상 태양이 돌아 왔으므로,
자기 자신도 이렇게 기다리면 꼭 돌아올 것이라고.
나는 뭐라고 위로의 말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자,
또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
-_-;원래 이렇게 쓰려고 한게 아니라,
제로스의 독백으로 하려고 했는데.
쿨럭; 빗나가도 굉장히 많이 빗나갔군요.
그리고, 제피랍니다 제피!! 제로스의 이름은 언급도 되어있지 않긴 하지만-_-;
아래 있는 단편 [석류]의 후속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듯 하여요=_=;
[석류]에서 200년 뒤 이야기 쯤 될까요=_=;
첫댓글 200년이라.. 석류 쓰신지가 어제인데.. 하루라는 시간에 200년이 흐르다니..
-_-;보다 빠른 스토리의 전개를 위해. 사실 석류 써놓기는 저번주엔가 써놨을걸요-_-;;; 월계수는 약 3일 전엔가 써 놨었고. 방금, 단편 하나를 또 끝내놓았죠-_-;;;
아,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에로스와 프쉬케 이야기, 생각하고 있었다죠=_=; 아프로디테를 제라스로 해서 시집살이를 겪는 피리아양을 그릴..-_-;........잘 써지면 올릴께요! 아, 그런데 많이는 아니고, 신화 사용한 건 석류랑 월계수밖에=_=;;
으음, 그런데 눈치채셨군요. 월계수-_-;;; 거기에 '해'까지 강조했으니; 아폴론과 다프네 이야기라죠-_-;;;;;;;하지만 이번 신화는 배경으로만 사용했다는 ㅇ_ㅇ
아아..답변이 늦어서 죄송해요 .. 이런 좋은 작품에...감격~
감사합니다 제로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