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가는길
김은희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자연으로 돌아가, 손바닥만 하더라도 텃밭을 일구며 흙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다. 은퇴 후, 종일 햇살이 드는 마당 있는 아담하고 이쁜 집도 짓고 고추, 토마토, 가지 등을 가꾸며 살고 싶어 했다. 그런 기회가 내게도 찾아 와서 올 봄부터는 작지만 텃밭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어린 모종도 사다 심고, 물도 주며 정성껏 가꾸어 쑥쑥 자라 있는 채소들을 만나러 주말이 되면 텃밭으로 달려가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릴적 할머니 생각이 난다. 식전 댓바람부터 밭으로 나갈 채비로 분주한 할머니의 발걸음보다 한발씩 앞서 뛰던 강아지 메리는 눈치 빠르게 벌써부터 앞서서 꼬리를 살랑인다. 어림없이 할머니의 허공 주먹질에 시무룩 아쉬운듯 뒤 돌아보며 양철 대문 사이로 돌아 들어간다. 동트기전 밭으로 들어 갈때면, 은밀히 깔린 안개 속 논뚝길을 걷는 할머니의 잰걸음에 놀라 깬 논 가생이 풀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일렁일렁 속 꼬쟁이를 간지르며 축축하게 적시어 놓는다.
할머니의 앞밭에는 늘 원두막이 있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이종사촌 언니가 놀러 오면, 흐릿한 달빛에 더듬더듬 밭으로 간다. 흔들리는 등불을 켜 놓고 미리 쳐 놓은 모기장 안에 누워서 밤늦도록 언니의 서울이야기를 듣는 것도 참 신기했다. 그 밭에서 할머니는 늘 해를 등에 지고서 쪼그려 앉아, 이랑 사이를 넘나들며 하루사이에 한뼘씩이나 쑥쑥 자라 있는 잡풀들을 호미끝으로 콕콕 찍어 말끔히 제거하신다. 겨우 허리를 펴고 제법 자라 올라온 열무도 솎고, 찬바람에 주렁주렁 보라빛 가지를 골라 따신다. 제법 따가워진 해를 피해 원두막 아래 그늘에서 떡잎과 흙을 털어 골라 담아 해거름 전 서둘러 집으로 가신다.
나른한 오후 엄마의 치맛자락만 붙들고 칭얼거리듯 무료하게 있던 나는 반가운 할머니의 기척소리에 얼른 뒤안으로 달려간다. 펌프 손잡를 두손으로 꽉 잡아 체중을 실어 누르고 물 한바가지 붓고서, 있는 힘껏 뻑뻑 펌프질을 하여 시원한 물을 뽑아 올린다. 내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하얀 물줄기가 마구 쏟아진다. 그사이 할머니는 눅눅한 윗적삼을 벗어 놓고 등목 할 채비를 끝내셨다. 미끄러운 샘 바닥에 두 팔을 짚고 엎드려 계신 할머니의 등에 땅속 깊숙히에서 뽑아 올린 차가운 물을 손바닥으로 등에 한번 쓱 문질러 준 후, 한바가지 부으면 으흐흐 차가움에 움찔 절로 몸을 떠신다. 나도 할머니처럼 고함을 지르며 덩달아 몸을 턴다.
부엌에서는 엄마의 밥짓는 연기가 굴뚝으로 힘차게 피어오르고, 이미 서쪽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뒷동산 자락 맨 꼭대기를 삼켜 버리고 있다. 할머니는 그 사이 풀맥인 까슬한 적삼으로 갈아 입으시고, 장독대로 향하신다. 그 앞에는 장닭의 벼슬을 닮은 맨드라미가 나란히 한여름 뙤약볕 아래 고고하게 자신을 뽐내고 서 있다. 담장을 타고 뻗어 올라가는 호박 덩쿨을 잡아당겨 까슬한 호박잎을 따서 부뚜막에 펼치고 소금에 묻어 둔 자반고등어를 꺼내 호박잎으로 겹겹이 감싼후, 지푸라기로 묶어 시뻘건 아궁이 속에 밀어 넣으신다. 초록의 호박잎은 시뻘건 불길 속에서 자신을 불사르고 있다. 불이 괄아서인지 금새 숯덩이처럼 되버리니, 할머니는 부주깽이를 이용해서 살살 달래듯 한쪽옆으로 밀어 익숙하게 속을 익히신다. 방금 무친 열무 겉절이는 제일 큰 접시에 담아 상에 올리고, 그옆에 투박한 뚝배기 속의 된장찌개는 한가득 거품을 사방으로 튕기면서 요란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아궁이에서 꺼낸 겉이 시꺼멓게 탄 고등어를 겉잎을 벗기니 맨 안쪽에는 아직도 초록색을 띤 호박잎 위에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는 뽀얀살의 고등어가 군침을 돌게 한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햇살은, 채소들을 어루만지는 시간이 길어짐으로 자라는 속도가 매주 마다 놀랍도록 다르다. 일주일이 지나 가보니 열무가 맥없이 자라 있다. 더위를 못이겨 상태는 별로 좋지 않고 비소식도 없으니 온김에 내가 할수 있는 건 물이라도 듬뿍 주고 가야겠다. 옆에 있는 아욱은 그 와중에도 잘 크고 있다. 한 고쿠리 가득 뜯어서 윗집 형님네도, 같은 성당 다니는 친구도, 다행히 나눔을 할 사람들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집에 와서 알맞은 봉지에 담아 윗층으로 올라가 현관문 손잡이에 걸어두고 간단히 휴대폰에 메세지를 남겼다. 나도 할머니의 손맛이 생각나서 오늘 저녁에는 텃밭에서 갓 솎아 온 어린 열무에 된장찌개 한냄비 끓이고 목요장터에서 사온 싱싱한 자반고등어 한손 구워 봐야겠다.
벌써부터 내년에 심을 씨앗과 모종들을 빼곡히 적어본다. 제법 이쁘게 가꾸어지고 있는 우리 텃밭은 아직 어설프지만 점점 할머니의 밭을 닮아 가고 있는 듯하다. 길이 되어 주신 할머니와 엄마를 꼭 닮은 작은 텃밭, 그 밭을 오늘 가고 있다. 나의 두 딸들에게도 그 길이 텃밭으로 가는 길은 아니여도 때때로 함께 걷고 싶은 그 길위의 친구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