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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좋은 시 다시 읽기
비유적 형상화를 통해 바라본 삶의 방향성
백애송
현대사회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다양한 정보와 지식이 넘쳐나고, 어느새 인공지능이 일상생활에서 상용화되기 시작하였다. 과학기술과 문명은 점점 발전하고 있지만, 인간의 행복지수는 빠른 속도로 높아지지 않는다. 더욱이 현대사회는 읽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읽고 생각하는 대신 시각을 통해 보고 남은 잔상을 소비해 버리는 데 그치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올바른 인간의 삶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것이 당대를 대변하는 문학이 아닌가 한다. 문학은 자신의 내부 심리에 대해 보여주기도 하지만, 당대의 사회문화적 현실과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과 다른 점도 바로 이러한 당대 현실을 보여주는 생각하는 힘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독서나 명상과 같이 고요한 시간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심리적으로 더욱더 발전하기 위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에 여기에서는 삶의 면면을 통찰하여 비유적으로 보여주어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시편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책처럼
삼십 세엔 삶을 그만둬도 괜찮겠다
생각한 적 있었지
삼십 세
아이들 낳아 키우고
사십 세
아이들 돌보고 세상을 살고
오십 세
육신이 망가져 버린
남편과 씨름하며 보냈네
육십 세
더 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
걸음 서툰 아이처럼
산다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열어논 창문으로 도둑이 넘어오듯
언제든 슬그머니 그 순간이 오거든
애쓰지 않아
하늘이 흐리면 비가 내리고
절기 따라 얼굴 다른 꽃이 피고
아기의 웃음에 세상이 자지러지듯
거스를 수 없는 게 세월이란 걸
이 나이에 비로소 알게 되었네
뭐 괜찮아
그거라도 알게 됐으면
*
잉게보르크 바흐만(1926-1973). 오스트리아 시인. 소설 『삼십 세』 발표
― 한경희, 「육십 세」 전문
이 시는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 세』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삼십 세』는 시인이자 철학가인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첫 산문집으로 삼십 세를 주제로 하고 있다. 시 속 화자인 시인 역시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 세』를 읽으며 그때는 “삼십 세엔 삶을 그만둬도 괜찮겠다” 생각하였다. 삼십 세에는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사십 세에는 커가는 아이들을 돌보며 살아가고, 오십 세에는 열심히 삶을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육신이 망가져 버린 남편과 씨름하며 보냈다.
육십 세에는 더 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걸음 서툰 아이처럼/ 산다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열어논 창문으로 도둑이 넘어오듯/ 언제든 슬그머니 그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육십 즈음이 되니 시 속 화자인 시인은 “애쓰지 않아”도 흘러가는 세상의 이치에 대해 비로소 깨닫게 된다. “하늘이 흐리면 비가 내리고” 계절마다 서로 다른 꽃들이 피어나고, “거스를 수 없는 게 세월”이라는 것을 육십 세가 되어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거라도 알게 됐으”니 괜찮다고 말한다.
시 속의 삶은 언뜻 보면 평범한 것처럼 보이지만, 요즘처럼 복잡다단한 사회에서는 사실 이같이 평범하게 사는 것이 더 어렵다. 더욱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사회에서 자신은 뒤처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삶의 이치를 이미 터득하였다. 과도기를 지나 시행착오를 거친 일상생활의 소소한 것들이 오히려 더 귀하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거스를 수 없는 게 세월이란 걸” 시인은 아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스스로 사색하며 끝을 맺을 줄 알고, 좋은 일에는 기뻐할 줄 알며, 힘든 일에는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것이다. 감동도 받고 좌절도 해보고, 정답을 찾지 못해 절망도 해보고, 상대를 통해 나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때에 따라서는 일이 잘 풀리기도 하지만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다.
전직신청서를 보낸 후
12층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꽃그림 바탕화면 모니터 위에
나비가 날아와 앉는다
높은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나비도 도시에 익숙해져
승강기를 타고 올라온 걸까
생화 한 송이 없는 공간
자리 잡은 나비
어찌 살아가야 하나
날개가 점점 처져 내려간다
어린 딸아이가 떠오른다
나비를 보여주고 싶어
높은 아파트들과 아스팔트 위
달리는 자동차만 보이는 공간
처진 어깨로 살아온 날들
꽃밭에서 자라야 할 아이들이
활짝 꽃웃음을 피위야 할 아이들이
늘 학원 뺑뺑이에 시달려
집으로 들어오는 모양이
꽃밭을 찾지 못해 말라가는
나비를 닮아 있다
바탕화면 꽃그림처럼
자리에 박혀있는 난
꽃을 키우는 곳을 찾아가려
자리를 정리한다
― 오광석, 「나비」 전문
화자의 사무실은 어느 도시의 12층에 있다. 도시 빌딩 숲 사이 높은 건물에 나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꽃그림 바탕화면 모니터 위에/ 나비가 날아와” 앉아 있다. 도대체 나비는 12층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화자는 어느새 “나비도 도시에 익숙해져/ 승강기를 타고 올라온” 것이라 생각한다. “생화 한 송이 없는 공간”에 거처를 잡은 나비는 어찌 살아야 할까. 점점 처져 내려가는 나비의 날개를 바라보다 화자인 시인은 어린 딸아이를 떠올린다.
시 속 정황으로 보아 딸아이는 학교가 끝나면 여러 학원을 다녀온 뒤 귀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높은 아파트들과 아스팔트 위/ 달리는 자동차만 보이는 공간”에서 “처진 어깨로 살아”가는 도시의 아이들. 이 도시의 아이들 속에 시인의 딸아이도 있다. 과거의 아이들은 골목을 누비며 뛰어노는 것으로 제 소임을 다하였다. 특별한 장난감이 없어도 골목에는 아이들의 소리가 담을 넘나들었다. 현대사회 아이들은 집 밖에서 노는 것보다 집 안에서 노는 것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밖에 나가 뛰어놀지 않아도 핸드폰이나 태블릿을 손에 들고 충분히 놀이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꽃밭에서 자라야 할 아이들이/ 활짝 꽃웃음을 피위야 할 아이들이/ 늘 학원 뺑뺑이에 시달려/ 집으로 들어오는 모양이/ 꽃밭을 찾지 못해 말라가는/ 나비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바탕화면 꽃그림처럼/ 자리에 박혀”있던 시인은 “꽃을 키우는 곳을 찾아가려/ 자리를 정리한다”. 꽃을 키우는 곳에는 벌과 나비가 있기 때문이다. 전직 신청서를 보냈다는 것으로 보아 화자인 시인은 현재 가족과 떨어져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시인이 이제 곧 ‘꽃’을 키울 수 있는, 즉, ‘딸아이’를 직접 볼 수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생명이 없는 꽃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삭막한 곳보다, 직접 꽃을 키우고 애정을 줄 수 있는 따뜻한 곳으로 향하는 날이 멀지 않았으리라.
묵묵히 서 있는 주방 한쪽의 냉장고
잉태되어 가슴에 품고 산 세월 모질게 억누르고
고립의 선을 여닫이로 겨우 이어온
양문형 두 문짝
숨쉬기도 버거운 불룩한 뱃속에
포화상태로 냉기를 감싸 안은
배고픔을 위해 있는 재료들 안에서
숨쉬기를 빼앗기고 숙성된 자아도 접어둔 채
토막 난 생각들이 질식되어 만신창이로 굴러져
끈적한 핏줄이 뇌 속을 파고든다.
온갖 부패를 차단이라도 시키듯
용쓰며 발악하고 나온 처연한 울음소리 외면하고
양수 터진 시간 이후 탯줄 끊긴 세상 밖에서는
눈 뜨기가 무섭게 짓눌려진 목의 거센 무게
관자놀이 선연히 튀어나온 애착이 두드러졌어도
붉게 핏기선 붉은 자국이 비닐봉지 속에 얼려있는
이름 짓는 것조차 사치였던
작은 세포의 근심덩어리
주방에 우두커니 서 있는 양문형 냉장고
뒤죽박죽 어지러운 세상이라도
발버둥 쳐서라도 이어가고픈 목숨줄 앞에
마음도 빙하에 꽁꽁 얼리고 싶은
대형 棺
― 김일용, 「보관保棺」 전문
위의 시에는 냉장고와 어지러운 세상이 오버랩되어 있다. 냉장고 없는 인간의 삶은 생각할 수 없다. 집집마다 냉장고가 구비되어 있고, 냉장고 안에는 온갖 종류의 다양한 음식들이 보관되어 있다. 가득 차 있는 음식물들은 집집마다 서로 다른, 그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며 각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러한 냉장고는 여러 가지 음식이 보관하기에 생명의 저장고에 비유되기도 한다. 인간의 생명이 냉장고 속 음식을 통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 속의 냉장고는 생명의 유지와 함께 생명이 멈춰진 관棺의 의미도 함의하고 있다.
냉장고는 늘 그 자리에서 모든 것들을 담아내기에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이런 냉장고의 세월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리라. 시 속에 등장하는 양문형 냉장고 역시 묵묵히 서서 주방의 한쪽을 지키고 있다. 냉장고는 그동안 “잉태되어 가슴에 품고 산 세월 모질게 억누르고/ 고립의 선을 여닫이로 겨우 이어”왔다. 냉장고의 “숨쉬기도 버거운 불룩한 뱃속에”는 “숨쉬기를 빼앗기고 숙성된 자아도 접어둔 채/ 토막 난 생각들이 질식되어 만신창이로” 담겨 있다. 그 안에는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이름 짓는 것조차 사치였던/ 작은 세포의 근심덩어리”도 있다. 냉장고는 그동안 “온갖 부패를 차단이라도 시키듯/ 용쓰며 발악하고 나온 처연한 울음소리 외면하고” 제 안의 것을 온전히 품어내며 살아왔다. “양수 터진 시간 이후 탯줄 끊긴 세상 밖에서는/ 눈 뜨기가 무섭게 짓눌려진 목의 거센 무게”가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냉장고 속에는 지금 당장 먹어도 좋을 싱싱한 야채와 채소들도 있지만, 언제 넣어두었는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음식들도 담겨 있다. 이에 시인은 냉장고를 대형 관棺에 비유한다. 관棺은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담는 궤를 뜻한다. 냉장고가 죽은 음식물을 담고 있는 커다란 관棺이 된 셈이다. 냉장고 속 오래된 음식은 생명이 숨 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시체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원래의 냉장고라는 의미라면 음식을 맡아서 보관保管하는 용도여야 하지만, 이 시에서는 음식물을 지키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대형 관棺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원래의 보관保管 용도를 넘어, 뒤죽박죽 너무 많은 것들을 담아내고자 하는 것에 대한 질책이기도 하다.
악성이다
손 쓸 수 없이 퍼진 세포가 까맣게 박혀있다
울컥 느닷없이 여명餘命에
정 떼기로 작정하신
엄마, 여명麗命이 무색하다
알알이 박힌 서사에
속속들이 베인 눈물을
어떻게 풀어내고 달래 드려야 하나
기저귀 발진처럼 쓰린 기억을
욕창처럼 불쑥이는 설움을 자분자분 닦아내며
충분해요
사생명야死生命也 기유야단지상其有夜旦之常 천야天也 인지유소부득여人之有所不得與 개물지정야皆物之精也, 용 비늘처럼 일어서는 기도
살아지고
사라지지만
살아가요 아직은
― 이령, 「용과」 전문
이 시는 용과와 어머니의 삶이 중첩되어 있다. 용과는 열대 과일로 선인장 속 식물의 열매이다. 멕시코가 원산지이며 껍질은 붉은색이나 반으로 가르면 하얀 과육에 까만 씨가 가득 박혀 있다. 가지에 열린 모습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용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반으로 자르면 보이는 용과의 까만 씨처럼 엄마의 몸 속에도 “손 쓸 수 없이 퍼진 세포가 까맣게 박혀있다”. 악성인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여명餘命에 “정 떼기로 작정하신” 엄마의 삶은 “여명麗命이 무색하다”. 평소 정정하셨던 엄마는 아마 누구보다도 딸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하였을 것이다. 가야 하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딸과의 정을 떼기 위해 몸부림치는 엄마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인의 심정을 어찌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시인은 “알알이 박힌” 엄마의 서사를, 그 속에 “베인 눈물을/ 어떻게 풀어내고 달래 드려야” 할지 고민이다. “기저귀 발진처럼 쓰린 기억을/ 욕창처럼 불쑥이는 설움을 자분자분 닦아내며” 시인은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사생명야死生命也 기유야단지상其有夜旦之常 천야天也 인지유소부득여人之有所不得與 개물지정야皆物之精也”는 송나라 사상가인 장자莊子의 말이다. 이는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고, 낮과 밤이 순환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라는 의미이다. 즉 사람의 힘으로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의 유한한 삶 역시 인간의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 비늘처럼 엄마가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는 시인의 간절함이 이루어지길 바라본다. 그러다보면 삶이 “살아지고” 또 언젠가는 “사라지”기도 하겠지만, 아직은 살아갈 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경희 시인의 「육십 세」, 오광석 시인의 「나비」, 김일용 시인의 「보관保棺」, 이령 시인의 「용과」를 살펴보았다. 한경희 시인은 「육십 세」를 통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단상을 보여주었고, 오광석 시인은 「나비」 속에 등장하는 딸아이의 모습을 통해 빌딩 숲 사이의 각박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일용 시인은 「보관保棺」에서 음식을 가득 담은 냉장고를 관棺의 이미지에 비유하여 보여주었고, 이령 시인은 「용과」에서 용과에 투사된 엄마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들 시에는 비유를 통해 인간이 나아가야 할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다. 그럼에도 시가 있기에 정서를 감응시킬 수 있고, 각박한 현실에서 삶의 여유를 찾을 수 있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올곧은 길을 가기 위한 걸음걸음이 여기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