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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최.최제우.면암.최부잣집.최시중 |
김진우의 족보이야기- (30) 경주 최씨 (慶州崔氏) |
뿌리공원에 조성된 경주최씨 조형물 전면/대전 중구 |
번영(繁榮)
현 광 덕(玄光德)
최(崔)자를 형상화하여 만든 것으로 산(山)자 모양으로 타오르는 성화이며 번창함을 상징한다.우측의 뾰족한5점은 새추자의 윗점과 우측4획을 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수많은 후손들의 힘을 하나의 큰○로 모아 번영과 화합과 단결을 나타내고 있다.
유래문지은이 문학박사 崔謹默 설치년도:1997. 8
뿌리공원에 조성된 경주최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뿌리공원에 새겨진 경주최씨 유래>
경주최씨는 최씨의 대종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유래를 지닌 씨족의 하나다. 최씨의 원조는 신라의 전신으로 경주에 자리잡은 사로국 6촌의 하나인 돌산고허촌 (突山高墟村)의 촌장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이시다. 신라를 세운 원훈(元勳)으로 법흥왕 3년에 충선공(忠宣公)으로 시호(諡號) 받았고 태종무열왕 3년에 문열왕 (文烈王)으로 추봉(追封)되셨으며 유리왕 9년에 최씨(崔氏)로 사성받았다. 이것이 성을 갖게 된 유래이다.
경주최씨의 시조는 소벌도리공의 24세손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선생이시다. 오늘날 거의 모든 최씨의 분파는 고운선생을 1세로 하는 경주최씨에 그 연원(淵源) 을 두고 있다.
고운 선생은 12세의 어린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에 합격하시고 그 후 여러 관직에 있으면서 많은 글을 지었는데 이 가운데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귀국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문란한 국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시무책 10여조의 개혁안을 제시하여 아찬에 올랐다. 그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실망하여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시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치셨다. 고운 선생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지성이요 한문학의 조종이며 절세의 명문으로 명성을 천하에 떨친 분이시다. 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과 그밖에 많은 명저를 남기셨다. 고려 현종때 내사령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어 문창후(文昌侯)에 추봉 되셨다. 경주 최씨는 시조 이래로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역사상 숱한 명현 학자 관인 장상을 배출하여 도덕문장(道德文章)과 절의훈벌(節義勳閥)이 찬연한 명문거족이 되었다. 경주최씨는 명가의 후예로서 높은 긍지를 가지고 오늘날에도 국가와 사회에 헌신 봉사하면서 조상의 빛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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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작가의 해설>
<경주이씨 중앙종친회> 임원 및 역대인물
경주최씨 중앙종친회는1957년 4월 16일 경주시 인왕동 소재 상서장 향사시 종친회 창립을 결의하고 그해 가을인 1957년 10월 19일 서울 신광여자고등학교 강당에서 총회를 개최 하여 회칙을 제정하고 사무실을 서울 중구 다동에 개설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이사를 한 후 1995년 6월 10일부터 2004년 10월 30일 까지 종로구 적선동 적선현대 빌딩에서 9년 동안 종회를 운영하다가 2004년 5월 1 일부터 종로구 청진동 청일옥 3층으로 이전하여 종사를 보다가 재개발로 인하여 2008년 5월 1일부터 종로구 경운동으로 이전했다
최문환. 최복현. 최기철. 최동호. 최종환. 최태영. 최영철.최창규(전 서울대 교수.면암 최익현 후손)
이사장 최근덕(성균관장).최시중(중앙 종친회장.운영이사회 회장).최 염(중앙종친회 명예회장).최수인(성균관 부관장).최효종(청진실업회장).최영철(백산산업회장).최효석(정우개발회장).최성해(동양대총장).최병주(세계금선학회 창립회장).최덕규(가야농협 조합장).최우진(진등산업 대표).최상기(화숙공파 종친회장).최기선(최기선 세무회계사무소).최영진.최진석.최복희.최성해.최명회.최병주.최동전(푸른한국상임고문).최수인(사무총장).최진식(심팩 대표).최동규(CU 그룹 대표).최수부(광동제약 대표).최창호(경북지부장).최효석(경주최씨 경남종친회장.경남지부장)
최동필(경주최씨 총대종회 회장)
최수오.최권형.최한원.최남식.최용식.최병석.최신교.최원석(이상 고문)
최병원(수석부회장).최대영.최광석.최강석.최경락.최익달.최철주.최병훈.최병오.최석남.최병술(이상 부회장).최인규.최종문(감사).최문규(사무국장).최낙영(재무국장).최상원(홍보국장).최정묵.최두식.최종철.최학영.최병득.최현수.최교일.최희갑.최근식.최창섭.최윤길.최창석.최상호.최종락.최찬국.최준식.최대수.최예환.최성렬.최갑용.최석근.최종식.최종인.최준.최창식.최병희.최효달.최이락(이사)
<역대 회장>
초대 최용광(공군참모총장.주중대사).2대 최하영(심계원장.감사원장).3대최성원(조양사 사장).4대 최건우(사업가).5대 최영휘(신광학원 이사장).최하영(감사원장).최두고(1965~1971.회장 4회 연임.국회의원).최익명(종로구청장).최운지(국회의원).최영(1987~1995년.대구대학 이사장).최형우(내무장관).최해수.최재욱(국회의원).최종규(성균관 고문).최현우(동양대 이사장).최시중(2007년 11월22일 취임.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최창식(崔昌植:1892~1957)
독립운동가.언론인.서울 출생. 황성신문(皇城新聞) 후기의 소장기자(少壯記者)였고, 후에 오성학교(五星學校)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그 당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독립정신을 고취하다가 문제가 되어 금고 1년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3 ·1운동 때에는 서울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그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조직업무에 참여하고, 전원위원회 이사 ·내무위원장 ·법무총장 ·선거위원회 위원 ·국제연맹회제출안건작성 특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 해 11월 임시정부가 개편되면서 조소앙(趙素昻) 후임으로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었고, 이후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의 편집부장으로 있으면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제10대 임시의정원 의장, 1926년 국무위원, 1927년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이사로 선출되었다. 1930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42명 명단>-출처 경주최씨중앙종친회
성명 | 출생 | 자 字 | 급제년도 | 科 種 | 父 親 | 祖 父 | 曾 祖 | 高 祖 | 派 名 | 妻 父 |
01 崔 汭 | 1371 | 태조 02 1393 | 春場進 | 弘載 | 咸一 | 墠 | 仁祉 | 司成公 | 金寬毅 | |
02 崔有悰 | 13** | 태종 14 1414 | 親試乙 | 灝 | 弘載 | 咸一 | 墠 | 密直公 | 許稠 | |
03 崔孝孫 | 13** | " " | " | 添老 | 繼雲 | 濕 | 玄祐 | 和淑公 | 閔中理 | |
04 崔文孫 | 13** | " " | " | " | " | " | " | " | 李垠 | |
05 崔漢卿 | 14** | 彦甫 | 세종 26 1444 | 式年丙 | 文孫 | 添老 | 繼雲 | 濕 | " | 趙堉 |
06 崔 釘 | 14** | " 29 1447 | 親試丙 | 思溫 | 寅 | 尙濂 | 周 | " | ||
07 崔 鎭 | 14** | 세조 02 1456 | 式年丁 | " | " | " | " | " | 金貞老 | |
08 崔敬止 | 14** | 和甫 | " 06 1460 | 別試乙 | 有悰 | 灝 | 弘載 | 咸一 | 密直公 | 蔡潭 |
09 崔 涐 | 14** | " " | 平別乙 | 尙泂 | 汔 | 海雲 | 有慶 | 佐尹公 | 李賀霖 | |
10 崔 灌 | 1437 | 灌之 | 성종 05 1474 | 式年魁 | 潤玉 | 有溫 | 邇 | 瑞雲 | 和淑公 | 黃季粹 |
11 崔 瀜 | 14** | " 06 1475 | 親試乙 | " | " | " | " | " | 權季 | |
12 崔敬止 | 14** | 和甫 | " 07 1476 | 重試乙 | 有悰 | 灝 | 弘載 | 咸一 | 密直公 | 蔡潭 |
13 崔淑生 | 1457 | 子眞 | " 23 1492 | 式年乙 | 鐵重 | 渚 | 有良 | 邇 | 和淑公 | 朴安阜 |
14 崔 曇 | 14** | 子龍 | 중종 16 1521 | 別試丙 | 讓孫 | 江 | 子雲 | 有慶 | 杜老公 | 李延慶 |
15 崔景弘 | 1493 | 䝘翁 | " 23 1528 | 式年丙 | 淑生 | 鐵重 | 渚 | 有良 | 和淑公 | 韓亨允 |
16 崔松季 | 15** | 子喬 | 명종04 1549 | " | 亨漢 | 永源 | 仲濟 | 忠烈公 | 文士元 | |
17 崔應虛 | 1572 | 控辰 | 선조 36 1603 | 式年乙 | 碗 | 彦邦 | 秀俊 | 灌 | 和淑公 | 李喜 |
18 崔夢亮 | 1579 | 啓明 | 광해09 1617 | 謁聖丙 | 確 | 安世 | 潾 | 光門 | 觀稼亭 | 李忠誠 |
19 崔時煥 | 1596 | 文若 | 인조 02 1624 | 增廣丙 | 克讓 | 龜齢 | 悅 | 景弘 | 和淑公 | 李福男 |
20 崔時遇 | 1597 | 亨叔 | " 08 1630 | 式年丙 | 克諧 | " | " | " | " | |
21 崔鎭南 | 1626 | 子重 | 효종 05 1654 | 式年丙 | 東岦 | 認 | 宗沃 | 海 | 匡靖公 | 李仁培 |
22 崔商翼 | 1631 | 成伯 | 현종 01 1660 | 增廣丙 | 淳 | 夢說 | 確 | 安世 | 觀稼亭 | 李元弼 |
23 崔重泰 | 1656 | 重汝 | 숙종 12 1686 | 別試丙 | 商翼 | 淳 | 夢說 | 確 | " | 沈若溟 |
24 崔慶湜 | 1660 | 汝善 | " 25 1699 | 式年乙 | 鎭南 | 東岦 | 認 | 宗沃 | 匡靖公 | 權宇亨 |
25 崔命相 | 1676 | 子亮 | 경종 02 1722 | 謁聖丙 | 重泰 | 商翼 | 淳 | 夢說 | 觀稼亭 | 沈延耉 |
26 崔鎭夏 | 1735 | 영조 50 1774 | 式年丙 | 卽 | 聖徵 | 錫향 | 忠烈公 | |||
27 崔起謙 | 1729 | 敦甫 | 정조 07 1783 | 增廣丙 | 潮 | 邦益 | 泰濟 | 左尹公 | 金錫璘 | |
28 崔 璧 | 1762 | 輝遠 | " " | 式年魁 | 宗燮 | 慶聃 | 夏基 | 國禎 | 司成公 | 李道 |
29 崔致翼 | 1759 | 汝初 | " 14 1790 | 增廣丙 | 起謙 | 澣 | 邦益 | 泰濟 | 左尹公 | |
30 崔啓運 | 1764 | 聖晦 | " 16 1792 | 式年丙 | 柱宸 | 逹賢 | 南鵬 | 昌佐 | 司成公 | 李基仁 |
31 崔仁簡 | 1762 | 義甫 | " 19 1795 | " | 之鴻 | 近天 | 元泰 | " | ||
32 崔廷鎭 | 1769 | 儒瑞 | 순조 03 1803 | 別試丙 | 興璧 | 師錫 | 壽崗 | 慶源 | 匡靖公 | 金極範 |
33 崔道彬 | 1760 | " 04 1804 | 式年乙 | 秀坤 | 斗瞻 | 致柏 | ||||
34 崔崗鎭 | 1787 | " 28 1828 | 式年丙 | 極昊 | 德崙 | 致蕃 | ||||
35 崔斗錫 | 1800 | 헌종 03 1837 | " | 瑋 | 宗燮 | 慶聃 | 夏基 | 司成公 | ||
36 崔鶴昇 | 1817 | 聲彦 | 청종 02 1851 | 庭試乙 | 潤坤 | 昌文 | 格天 | |||
37 崔益鉉 | 1833 | 贊謙 | " 06 1855 | " 丙 | 岱 | 克敬 | 光肇 | 成默 | 和淑公 | 韓必裕 |
38 崔應珏 | 1846 | 고종 03 1866 | 平 乙 | 胤皓 | ||||||
39 崔德明 | 1844 | " " | " 丙 | 義臣 | ||||||
40 崔龍三 | 1840 | " 19 1882 | 增廣丙 | |||||||
41 崔翼瑞 | 1857 | " 24 1887 | 應試丙 | 德明 | 義臣 | |||||
42 崔鉉弼 | 1860 | 義吉 | " 28 1891 | " | 夏壽 | 世龍 | 濟元 | 珹 | 司成公 | 朱永吉 |
경주최씨(慶州崔氏)
신라 3최 문창후 최치원 후손 우리나라 최씨의 대종
최승로.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2대 교주 최시형
한말의 의병장 최익현.최부잣집
우리나라 최씨(崔氏)의 원조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의 6촌(斯盧六村) 중에서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후에 사량부로 개편됨)의 소벌도리(蘇伐都利)로 그는 하늘에서 형산(兄山)으로 내려 왔다고 한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기원전 57년경 유민들이 여러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서기 32년(신라 3대 유리왕 9년) 봄에 6촌을 6부로 개정하고
알천 양산촌장 알평에게는 이씨(李氏)를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에게는 최씨(崔氏)를(삼국유사에는 소벌도리가 정씨(鄭氏)의 조상으로 되어있으며 진주소씨도 소벌도리가 조상으로 되어있음),
무산 대수촌장 구례마에게는 손씨(孫氏)를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에게는 정씨(鄭氏)를 금산가리촌장 지타에게는 배씨(裵氏)를 명활산 고야촌장에게는 설씨(薛氏)의 성(姓)을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으며,삼국유사에는 6부의 촌장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최씨(崔氏)의 실질적인 시조는 소벌도리의 24세손으로 신라말기의 석학(碩學)이자 대문장가이며 한문학의 종조(宗祖)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주축으로 하여그의 선대(先代) 및 후대에서 우리나라 최씨(崔氏)가 분파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수성최씨.충주최씨는 제외)
문헌에는 우리나라 최씨(崔氏)는 총 387 본으로 나타나는데 모두 세거하는 지명이며 시조가 분명히 확인된 것은 43본(本)이다.
신라시대에 웅기한 전통의 명문 최씨(崔氏)는 신라에서 최치원.최승우.최언위 등 이른바 "신라 3최"가 천재들로 똑같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 명성을 떨쳤으며 특히 문창후 최치원 같은 석학은 동방의 명현(名賢)으로 추앙받아 왔다.
최승우(崔承祐)는 신라말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6두품출신 중 최언위.최치원과 함께 3최로 불린 천재로 당나라에 건너가 서기 893년 빈공과에 급제하고 관직을 역임하다 귀국하여 후백제 견훤의 일급참모로 활동하였다.
3최의 한사람인 최언위<崔彦 :시호 문영,서기 868(경문왕8)~944(고려 혜종1)>는 신라말 고려초에 활동한 인물로 최치원의 4촌 동생이다.
최언위는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정2품 벼슬) 최 항의 할아버지로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하여 나머지 2최와함께 명성을 떨친인물로 당나라에 들어가 예부시랑(禮部侍郞:정4품 차관) 설정규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고려사(高麗史)에 전하는 그때의 일화를 보면,
발해의 재상 오소도는 당나라에 왔다가 과거급제자 명단에 아들인 오광찬이 최언위의 이름 아래에 있는 것을 보고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고 한다.
"제가 옛전에 입조하여 과거에 급제할 때 이름이 이동의 윗자리에 있었으니 이번에도 저의 아들 오광찬을 최언위의 윗자리에 올려달라"며 순위조작을 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최언위의 학식이 월등했기 때문에 오소도의 청을 묵살했다.
당나라의 관직에 있던 최언위가 고국 신라로 돌아온 것은 42살 때로 이 무렵 한반도는 궁예.견훤 등이 쇠퇴하던 천년사직 신라를 압박하며 각축전을 벌이던 때였다. 귀국한 최언위는 신라에서 집사성 시랑, 서서원 학사 등의 벼슬을 했다.
그러나 이미 신라에 마음이 떠나 있던 최언위는 왕건이 고려를 창건하자 가족을 데리고 투항해 요직을 두루 거치며 평장사(平章事:정2품 벼슬)까지 오르게 된다. 그는 인재가 부족했던 고려 창건 초기에 왕건을 도와 학술분야에서 큰 기여를 했다.
태조 왕건은 최언위를 태자 사부(師傅:태자를 가르치던 스승)로 임명하고 문필에 관한 임무를 맡겼으며 궁원의 편액과 이름은 거의 모두 최언위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최언위의 큰아들 최광윤은 진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거란의 포로가 되었다고 하며,이유원의 기록에 따르면 최광윤도 진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거란 조정은 최광윤을 중용하였고 심지어 거란의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하기까지 했다.
이때 최광윤은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려 한다는 기밀을 고려 쪽에 전해주기도 했다.
둘째 최행귀도 오월국에 유학해 그 나라의 고위직에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고려로 돌아와 광종의 총애를 받기도 했지만 권력투쟁에 휘말려 사형을 당하게 된다.
셋째 최광원도 벼슬을 했는데 그 아들이 고려초의 명신인 최 항으로 고려 성종 때 20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출세가도를 달렸고 특히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지공거로 있으면서 뛰어난 인재들을 공정하게 선발해 목종으로부터도 큰 총애를 받았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와 정부(情夫) 김치양이 꾸민 반란음모를 사전에 알아내 현종을 맞아들임으로써 반란을 좌절시킨 사건이다. 현종은 최 항을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다.
경주최씨(慶州崔氏)는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문창후)을 시조로 받든다.
최치원은 서기 857년(신라 헌안왕 원년) 신라의 서울인 경주 사량부(沙梁部)에서 출생하였다.
신라6두품출신으로 당에 건너가 18세에 외국인을 상대로 보던 빈공과에
장원급제한 천재 문창후 최치원 초상 |
그의 세계(世系)는 너무 오래 전이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부친(父親)의 이름은 최견일(崔肩逸)이며 신라 원성왕의 원찰(願刹)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운은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12세의 어린 나이로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10년 안에 학문(學文)의 대가(大家)를 이루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아버지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들여 학문에 열중하였다
서기 874년(경문왕 14년.당 희종) 당나라에 유학한지 5년만인 나이 18세되던 해 과거에 급제한 후 2년간 낙양등지로 돌아 다니며 부(賦)와 시(詩)를 짓고 다니다가(작품은 전하지 않고 기록에만 남아 있슴), 876년 2년뒤(서기876년) 선주(宣州:지금의 중국 양주) 지방의 표수현위(漂水縣 尉)라는 지방관으로 관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관리로서의 능력도 비범하여 승무랑(承務郞:종8품 하(下) 문관의 품계)으로 시어사(侍御史:어사대의 종5품 벼슬)를 지내고 내봉공(내무와 백관에 관한 사무를보던 고려때의 상서도성에 해당함)에 올랐으며 비범한 문재(文才)로도 명성을 떨쳤다.
그는 궁궐에 언제라도 출입할 수 있는 자금어대(紫金魚袋:당나라때 금과 은을 장식한 물고기 모양의 부신(符新)으로 좌.우 두쪽으로 나뉘어 왼쪽은 궁중에 두고 오른쪽은 몸에 지니는 것으로 벼슬과 성명을 새기어 궁궐에 출입할때 맞추는것)를 황제로부터 하사받기에 이른다.
서기 875년 산동지방에서 일어난 '황소의 난' 때 관군의 총지휘관인 병마도통(兵馬都統) 고 변(高 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황소의 토벌에 나가 그가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벼슬할 때 황소를 치기 위하여 지은 격문.계원필경에 실려 있음)은 절세의 명문(名文)으로 당 천하에 문명을 떨쳤으며 이 격문을 본 황소가 놀라서 의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최치원은 제도행영 병마도총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으면서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되어 공사간에 지은 글이 만 여수에 달했다고 하며 신라에 귀국하여 이글들 중 정선하여 모아 그 유명한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지어 헌강왕에게 바쳤다.
그는 당나라에 벼슬에 있으면서도 기울져가는 고국(신라)을 구하고 부모님을 뵙고 싶은 마음을 시(詩)로 달래며 공무 중 여가를 이용해 다섯 권의 중산복궤집(中山覆
集)을 엮어 훗날 고국의 왕에게 올렸다. 그가 고국을 그리며 읖은 시(詩)는 다음과 같다.
창 밖에는 밤이 깊도록 비가 내리고 (窓外三苦雨)
등불 아래 이 마음은 고국을 달리네 (燈前萬里心)
가을바람에 시를 읊는데 (秋風惟苦吟)
세상에 내마음을 아는 이 없네 (世路少知音)
서기 884년(헌강왕10년) 나이 28세 때 그가 귀국할 뜻을 당나라 희종(僖宗)이 알고 사신(使臣)에 임명하여 조서(詔書 :임금의 명령을 적은 문서)를 가지고 귀국하게 했다.
신라에 돌아온 최치원은 시독(侍讀:황태자궁.홍문관 등의 벼슬로 학사의 아래 시강) 겸 한림학사(翰林學士:문신중에서 뽑힌 뛰어난 학자로 한림원에서 왕의 조서를 짓는 일을 맡은 종3품이나 정4품 벼슬), 병부시랑(兵部侍郞:신라때 집사성과 병부의 벼슬로 위계는 아찬에서 나마(奈麻)까지 임.정4품 벼슬),
서서감 지사(瑞書監知事:지서서감(知瑞書監)이라고 하는데 이는 신라 하대에 문한기구인 서서원(瑞書院)에 설치된 관직으로 장관급으로 추정된다고 함. 삼국사기에는 관직이 '서서랑'만 나오며 금석문이나 기타자료에는 서서원학사.지서서감 으로 나온다)가 되었으나,
외직을 원하여 천령.부성 등지의 태수(太守:신라때의 지방관.위계는 사지(舍知)로 부터 중아찬 까지에 이르렀음)를 역임하고 아찬(阿飡.일길찬이라고 함.신라 17관등 중 여섯째 등급)에 이르렀으나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을 느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산림(山林)과 강.해변을 거닐며 그곳에 정자(亭子)를 짓고 송죽(松竹)을 벗삼아 풍월(風月)에 심취하였다.
그가 자주 찾은 곳은 경주 남산, 강주(剛州):지금의 의성)의 빙산(氷山),합천(陜川)의 청량사,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합포현(合浦縣 :현 창원)의 별서(別墅),동래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하여 그의 발차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당시의 사회적 실현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은사퇴의 길을 택했다.
마침내 진성여왕 재위 11년 조카인 효공왕에게 양위를 하자 최치원은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문헌 동유록(東儒錄)에 의하면, 최치원이 가야산에 들어간때가 40세쯤인 서기 896년이라고하며,동국문묘(東國文廟) 18현(賢) 연보(年譜)에는 42세때인 서기 898년(나이 42세)이라고 전한다.그러나 만년에 모형(母兄)인 승(僧)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갔지만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기록에 없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鸞郞碑 序文)은 신라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운 최치원은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내사문하성의 종1품 정승)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공자를 모시는 사당)에 배향되고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는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葆光塔碑),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는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석순응전(釋順應傳),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이 있다.
부산해운대의 지명유래가 된 바위에 음각된 최치원의 글씨 해운대(海雲臺) |
경주최씨는 특히 신라 말에 명성을 떨쳤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고려 성종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종1품 정승으로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였음)을 지낸
최승로(崔承老: 927~989년.시호 문정 文貞)는 신라의 6두품출신 최은함(崔殷含)의 아들로 유학자.문신이다. 935년(태조18년) 경순왕이 신라를 고려에 손국할 때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왔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글을 잘 지었다. 12세 때 원봉성(元鳳省) 학사(學士:고려때 문신가운데 뛰어난 학자로서 수문전.한림원등의 종3품.정4품벼슬))가 되어 학문 연구에 진력했다.982년(성종1년) 왕명으로 시무책(時務策:당장에 시급한 정책)28조를 올려 나라의 전반적인 면에 걸친 폐단의 시정과 새로운 제도의 제정을 건의하여 고려 왕조의 기초 작업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불교 세력의 지나친 횡포와 그로 인한 국가 재정의 손실을 지적하여 이를 시정케 했다. 서기 983년(성종 2년)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 부총리)로서 지제고(知制誥:과거시험관)를 겸임하였고 988년(성종7)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종1품 정승)에 올라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다.
현종 때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 등의 정2품 재상반열),최 항(崔沆),충숙왕때의 최 해(崔瀣),명종 때의 최여해(崔汝諧) 등은 명성을 떨쳤던 인물들이다.
경주최씨의 세계(世系)는 최치원 후대에서 26파로 나뉘는데 그 중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광정공파(匡靖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사성공파(司成公派).화숙공파(和淑公派).충렬공파(忠烈公派) 등 6대파가 주축을 이룬다.
경주최씨 가문의 역사에 기록된 현달한 인물 중 사성공(司成公) 최 눌(崔汭)의 후손인 최제우(崔濟愚)는 동학(東學)의 창시자로 유명하고 동학의 제2대 교주가 된 최시형(崔時亨)은 최종수(崔宗秀)의 아들이다.
그리고 한말의 거유(巨儒)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단식으로 일생을 마친 최익현(崔益鉉)이 경주최씨이며,경주시 교동(校洞)에는 '최부자'로 이름난 최 준(崔浚)의 집이 있는데 이 최부잣집은 12대 만석(萬石)꾼 10대 진사(進士)로 유명하다.
<경주 최부자집>은 조선조 중기에서 말기까지 300여년동안 12대 만석꾼과 10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낸 가문으로, 벼슬과 재물에 대한 욕망보다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다.
12대 만석꾼 마지막 최부자 최 준(崔浚)은 일제강점기에 회사를 차리고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가들의 자금을 대주었으며 해방이 되자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 감사의 인사차 경주까지 찾아왔었다고 한다.
그는 후학을 위해 대구에 대구대학을 설립 사재를 육영사업에 희사하였다.
최 준의 종손(宗孫)인 최 염(崔炎)은 현재 경주최씨중앙종친회 명예회장으로 있으면서 조상들이 실천해온 <참부자>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지난 2009년 경상북도에서는 <대한민국 노불레스오블리주의 대명사 경주최부자집이 들려주는 300년부의 비밀>을 제작.배포했다.
경주 최씨는 모두 26파로 나뉘어졌는데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최 청).광정공파(匡靖公派:최 당).정랑공파(正郞公派:최 호).사성공파(司成公派:최 눌).화숙공파(和淑公派:최현우).충렬공파(忠烈公派:최광위) 등 6개파가 주축을 이룬다.
경주최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문관을 뽑기위하여 보던 과거로 초시.복시.전시 3단계로 나뉘었음)에 42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음)에 89명,사마시에(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166명,
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기 위하여 보던 과거)에 86명,의과에 54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15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시험)에 14명,주학에 203명 등 모두 66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경주최씨는
1985년에는 210,154가구에 인구는 876,732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304,722가구에 인구는 976,820명으로 나타나
우리나라 최씨(崔氏)인구의 45%로 조사되었다.
<역사탐구>
계원필경(桂苑筆耕)
신라말기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인 문창후 최치원의 시문집. 활자본. 20권 4책.
계원(桂苑)은 "계수나무 동산"이라는 뜻으로 "학자나 문인이 모인 곳"을 말하며 필경(筆耕)은 붓으로 밭을 갈다라는 뜻으로 "글을 짓는다"를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라고 한다.
서기 886년 최치원의 나이 30살이 되던 해에 당에 있을 때 만든 작품중에서 우수한 것을 간추렸으며 분량은 20권으로 되어있다.
저자는 일찍이 당나라에서 벼슬하였는데 879년(신라 헌강왕 5) 당의 황소의 난 때에는 제도행영병마도통 고변의 종사관으로 표장.서계.격문 등 많은 명문을 지었으며 885년 귀국하였다. 이외에 저서로 사산비명(四山碑銘).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전한다.
계원필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문집으로 고려와 조선의 과거시험에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여러 번 인용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 제대로 된 완역본이 없으며 중국 신당서에도 계원필경에 대한 기록이 있고 현재 15~16개의 다른 종이 전해지고 있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토황소격문은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서 벼슬하며 소금밀매업자 황소(黃巢)를 치기 위하여 지은 격문(檄文)이다.
중국에서 '황소의 난' 이 일어나자 881년(헌강왕 7)최치원은 그 토벌총사령관인 고 변(高騈)의 휘하에 종군하였는데 황소가 이 격문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뛰어난 명문이었다고 하며,그의 시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에 실려 전한다.
격황소서(檄黃巢書-역적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내용의 일부
광명 2년 7월 8일에 제도도통검교태위 모(某)는 황소에게 고하노니
廣明二年七月八日 諸道都統檢校太尉某官 告黃巢
(광명2년 7월8일 제도 도통 검교태위 모관 고 황소)
무릇 정도를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夫守正修常曰道臨危制變曰權 (부수정수상도임위제변왈권) 지혜 있는 자는 시기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르는 데서 패하는 법이다. 비록 백년의 수명에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하기 어려우나 모든 일은 마음으로써 그 옳고 그른 것을 이루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智者成之於順時 愚者敗之於逆理 然則雖百年繫命 (지자성지어순시 우자패지어역리 연즉수백년계명) 生死難期 而萬事主心 是非可辨 (생사난기 이만사주심 시비가변) 내가 왕사로서 말하면 정벌함은 있으나 싸우지는 않고 군정(軍政)은 먼저 은혜를 베풀고 주살하는 것은 뒤로 한다. 今我以王師則有征無戰 軍政則先惠後誅 (금아이왕사즉유정무전 군정칙선혜후주) --------------------------------------------------------
최익현(崔益鉉·1833.12.5~1906년 11월5일.면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2.5~1906년 11월5일.조선말기의 문신.을사조약에 저항한 의병장.오른쪽)은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6월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 쓰시마로 끌려가 단식투쟁 끝에 그해 12월 30일 귀천했다. 쓰시마로 끌려갈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은 올곧은 선비의 기개를 생생히 전해준다. (출처=『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눈빛, 2005)
면암은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33년 경기도 포천군 가범리 에서 최 대(崔岱)의 둘재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字)는 찬겸(贊謙)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초명(初名)을 최기남(崔奇男)이라고 하였다.
면암은 집안이 가난하여 4세때 단양(丹陽)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지방으로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다. 14세때에 부친의 명에 따라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華西)이항로 (李恒老)의 문인이 되어 우국애민(憂國愛民)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 받아 그것을 위국여가적(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23세 때에 명경과(明經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화서 이항로 계열의 위정척사였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구현을 이상으로 하였다.
철종때인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사헌부.사간원.성균관등의 청환직에 근무했다. 그는 언관 벼슬에 주로 있으면서 일찌감치 조선조 사림의 최대 미덕인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다.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는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반대하여 관직을 빼앗기기도 했다.
어려서 아버지의 도움으로 즉위한 고종이 성인이 되면서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여기에는 부인인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 척족 세력들이 가담했다.
대원군을 비판했던 최익현은 동부승지로 기용되어 반 흥선대원군파의 첨병에 서게된다. 서원을 철폐한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는 등 그를 공격하여 결국 대원군을 실각시켰다. 그는 임금의 아버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위리안치되는 형벌을 받았으나 이는 실권을 잡은 민씨 세력의 형식적인 처벌이었다.
그러나 최익현은 곧 외국과의 통상을 논의하기 시작한 민씨 정권과도 곧 마찰을 빚었다.일본과의 통상 조약 체결을 극렬 반대하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된 것이다.
이후로 통상 확대와 여러 외세의 유입이 계속되면서 최익현은 이에 결사 저항하는 위정척사론의 거두로 활동하게 된다.1894년 발생한 동학혁명과 그해 친일 정권 성립과 함께 단행된 갑오개혁에 크게 반발했고, 이듬해을미사변 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조직했다가 체포되었다.
이 당시 그가 상소를 올리며 적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라는 말은 강제적 단발령에 목숨을 걸고 반발했던 당시 유학자들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는 구절이다.
1905년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등과 함께 정읍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단식을 하는 등 끝까지 저항하다가 4개월 만에 순절했다.묘소는 논산시 상월면 도로변에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예산군 관음리로 옮겨졌다.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 사진은 조선 말기의 거유(巨儒)이며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1833∼1906)의 묘앞에 있는 비명이다. 1907년에는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의 국도 변에 무덤을 만들었으나 참배객이 많자 일제가 1910년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옮겼다. 묘의 왼편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묘의 앞에는 석상이 놓여 있으며 좌우에는 석주가 있다. 묘의 입구에는 이선근이 글을 짓고 김기승이 글씨를 쓴 "춘추대의비"가 화강 석재의 대좌와 이수, 오석의 비신 등 3개의 돌로 세워져 있다.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1855년(철종 6년)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태안과 순창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항일운동을 벌이다 유배지 대마도에서 순절하였다. <면암 최선생 익현지묘.배위는 정부인 청주한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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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
(2009년 대한민국 성공기업인 선정).
(2009년 올해를 빛낸 '장한한국인상' (문화)수상)
이메일 sewoora@naver.com 블로그.카페 blog.naver.com/sewoora.cafe.naver.com/sallija<한국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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