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은 신라 문무왕 대에 활약한 밀교승려이다. 우리나라에 밀교가 들어와 자리잡는 데 명랑의 공헌이 컸다. 아울러 그는 밀교 특유의 문두루 비법을 써서 국난에 처한 신라를 구하기도 하였다. 신인종을 창시하여 독자적인 밀교 계보를 만들었는데, 고려조에 이르러서도 명랑의 제자들이 그 전통을 이었다.
삼국유사가 정리한 초기 한국의 밀교
밀교(密敎)는 현교(顯敎)에 대비되는 불교이다. 그들은 불교적 깨달음의 깊이가 10단계로 나뉜다고 말한다. 9단계까지는 일반적인 불교인 현교의 영역이요, 최상의 10단계는 현교가 미치지 못한 비밀스러운 경지이다. 밀교는 그 10단계에 놓인다. 그래서 밀교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우리나라 밀교 초기의 역사를 정리했다. 신주(神呪) 편에서다. 일연은 세 명의 승려에게 주목했다. 밀본(密本), 혜통(惠通), 명랑(明朗)이 그들이다. 하나 같이 신이하고 주술적인 힘으로 나쁜 귀신이나 용을 쫓아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소개된 사건은 밀본이 선덕여왕 덕만(德曼)의 병을 고친 것이다.
덕만이 어느 때 어떤 병에 걸렸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흥륜사에 법척(法惕)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불려 와서 병을 고치려 했으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 효험이 없었다. 밀본은 법척을 대신해 궁 안으로 초대되었다. 왕의 침실 바깥에 있으면서 [약사경(藥師經)]을 읽었다. 한 권 다 읽어갈 무렵, 가지고 있던 육환장이 날아 침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을 찔러 마당 아래로 거꾸러뜨렸다. 왕의 병도 곧 나았다.
밀본의 이마에서는 다섯 색깔의 신령스런 빛이 뿜어져 나와 보는 이들이 모두 놀랐다고, [삼국유사]는 쓰고 있다. 밀본은 승상 김양도(金良圖)가 어린 아이 때 걸렸던, 입이 막히고 몸이 굳어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병을 고쳤다. 그런가 하면 김유신의 인척인 수천(秀天) 또한 오랫동안 악질에 걸려 있다, 밀본의 도움으로 깨끗이 나았다. 이런 치료를 행할 때마다 매우 특이한 신통력으로 어줍지 않은 승려들을 물리치고 기적을 베풀었다.
혜통은 출가의 계기가 무척 감동적인 승려이다. 출신은 미미했던 듯하고,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 은천동 어귀에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다.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 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했다.
혜통은 중국에 들어가 밀교의 대표적인 승려인 무외(無畏) 삼장(三藏)의 제자가 되었다. 본격적인 밀교승으로서의 입문이었다. 무외 삼장은 선무외(善無畏) 삼장, 곧 중인도에서 태어나 716년에 당나라로 온 밀교의 시조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혜통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해가 665년이라 하였으므로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무외 삼장과 선무외 삼장은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혜통 또한 공주의 병을 고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혜통은 국사에 임명되었다. 신문왕이 등창에 걸렸을 때 혜통은 또 한 번 신이한 기적을 보였다. 왕을 살린 혜통이 왕에게 말하였다.
“폐하께서 전생에 재상의 신분이었을 때, 착한 사람 신충(信忠)을 잘못 봐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신충이 원망하며 폐하가 환생하실 때마다 보복하는 것이지요. 이제 이 등창도 신충이 빌미가 된 것입니다. 신충을 위해 절을 짓고 명복을 빌어서 풀어 주십시오.”([삼국유사]에서)
혜통의 이 같은 노력으로 신충의 원망이 풀렸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충은 향가의 하나인 [원가]를 지은 신충과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초기 밀교의 계보는 혜통보다 밀본이 먼저요 그 다음을 명랑이 이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무외를 제대로 배워와 속세를 두루 돌며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교화시킴은 물론, 운명을 보는 밝음으로 절을 지어 원망을 씻어주니, 밀교의 바람이 여기에서 크게 떨쳤다”고 평가하였다.
명랑의 출가
신라 불교 초기의 밀교승은 역시 명랑이 대표적이다. 그는 신인종(神印宗)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삼국유사]에서는 ‘금광사(金光寺)의 본기’라고 출처를 대며 명랑의 출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스님은 신라에서 태어나 당나라에 들어가 불교를 배웠다. 돌아오는데 바다의 용이 불러서 용궁으로 들어가자, 용은 비법을 전수해 주고 황금 1천 냥을 보시했다. 땅 속을 걸어 자기 집 우물 밑으로 솟아 나왔다. 이에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이 준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꾸몄는데, 빛이 매우 특이했다. 그래서 금광사라 했다.”
출가승이 자기 집을 내놓는 전통은 이미 자장에게서도 보였다. 원효가 자기 집을 초개사(初開寺)라고 바꾼 일화도 궤를 같이 한다. 여기서는 더욱 특이한 일화를 가진 채 명랑의 집이 금광사로 바뀌었다. 금광사는 경주시 탑정동의 식혜곡 북쪽 기슭이라는 주장과, 나정과 남간사 터 사이라는 주장이 대립되어 있다. 용궁에 다녀온 일은 명랑에 앞서 밀본에게도 있었다. 명랑은 이름이고, 자는 국육(國育)이다. 신라의 사간 재량(才良)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 또는 법화낭(法華娘)이라고도 한다. 남간부인은 자장(慈藏)의 누이이다. 그들의 아버지 무림(茂林)은 진골이었고, 신라 17등급 가운데 세 번째에 해당하는 소판이었다. 이에 비해 명랑의 아버지가 사간이었다면 상당히 아래에 놓인다. 사간은 8등급인 사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3형제를 두었거니와, 큰아들은 국교(國敎) 대덕, 다음은 의안(義安) 대덕이고, 명랑은 막내였다. 형제 모두가 출가한 듯하다. 이 가운데 의안 대덕은 [삼국사기]에도 보인다. 문무왕 14년(674) 9월, 의안 법사를 대서성(大書省)에 임명하였다는 기록이다. 대서성은 진흥왕 때 설치되었는데, 절이나 불교 조직을 통괄하는 승려에게 내린 직책이었다.
명랑의 태몽은 어머니가 꾸었다. 어머니는 꿈속에서 푸른 빛깔의 구슬을 뱉었다. 전형적인 감정형(感精型) 시조신화와 닮았다. 주몽의 탄생처럼, 흔히 햇빛을 쪼이고 아이를 갖는 형태를 일광감정형(日光感精型)이라 하는데, 햇빛이 푸른 빛깔의 구슬로 바뀐 것이다.
출가한 명랑은 선덕여왕 원년인 632년,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두루 공부하고 3년 뒤인 635년에 돌아왔다. 선덕여왕 때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곤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632년 11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고 하였고, 635년에는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 신라왕에게 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하였다. 명랑은 신라 사신을 따라 들어갔다가 중국 사신을 따라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나라를 지킨 승려
신인종의 개창자이자 우리나라 밀교의 바탕을 만든 명랑이지만, 그는 신라를 구한 특별한 사건으로 더욱 기억된다. 먼저 [삼국유사]에서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총장(總章) 원년 무진년[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군을 이끌고 신라와 합쳐 고구려를 무찌른 다음, 나머지 군사를 백제에 남겨 두어 신라를 쳐서 무찌르려 하였다. 신라 사람이 이를 알고 군사를 내서 막았다. 고종이 이를 듣고 발끈 화를 내며, 설방(薛邦)에게 명령해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 하였다. 문무왕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며 스님에게 부탁하니, 비법을 써서 물리쳤다.”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명랑이 비법을 써서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위의 기록은 명랑의 전기를 쓰면서 일연이 정리한 바이지만, 보다 구체적인 정황은 [삼국유사]의 문무왕 법민 조에 자세하다.
전쟁의 개요는 위와 같다. 당나라의 고종은 신라 사람으로 당나라에 와 있던 김인문 등을 불러 꾸짖었다. 당나라 군사를 청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는, 이제 도리어 자신들을 해치니 무슨 까닭이냐는 것이다. 고종은 인문 등을 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그리고 설방에게 군사 50만 명을 내주었다.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한편 당나라에 공부하러 온 의상은 옥중의 인문 등을 만났다. 당나라의 침공계획은 그렇게 의상을 통해 본국에 알려졌다.
문무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방어책을 물었다. 각간인 김천존(金天尊)은 명랑이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하여 왔으니 그에게 맡기자고 했다. 명랑은 ‘낭산 남쪽 기슭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이곳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하고 도량을 열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신유림은 신라가 정한 절터 가운데 으뜸인 곳이었다. 사천왕은 부처를 수호하는 신이다. 불교의 힘을 빌린 방어책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절을 지을 여유조차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신라 국경에 들어와 바다 위를 순회하고 있었다. 왕은 다시 명랑을 불렀다. 이 때 명랑에게서 나온 절묘한 방책이 임시로 절을 짓는 것이었다. 색칠한 비단을 가지고 절을 꾸미고, 풀을 가지고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를 맡은 신상을 만들어 세웠다. 그리고 유가종(瑜珈宗)의 뛰어난 승려 열두 명을 두었는데, 명랑은 이들과 함께 문두루(文豆婁)의 비법을 썼다. 유가종은 밀교의 하나이다. 그리고 문두루도 밀교에서 행하는 비법이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가 아직 접전을 하기 전이었다. 갑자기 바람과 물결이 거세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되었다. 이 같은 싸움은 한번만이 아니었다. 3년 뒤인 671년에도, 당나라에서 다시 조헌(趙憲)이 장수가 되어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을 때, 다시 한 번 이 비법을 베풀었다. 효과는 전과 마찬가지였다.
당나라와의 전쟁이 진정된 다음 신라는 정식으로 절을 세웠다. 지금은 터만 남은 사천왕사이다. 이 절 바로 위에 선덕여왕의 묘가 있다. 자신이 도솔천 아래 묻힐 것이라 예언한 바 있는 바로 그 묘이다. 아울러 당나라에서 일련의 사태를 이상하게 여기고 악붕귀라는 사신을 보낸 사건 또한 이로 인해 벌어졌다.
명랑의 후손들
일연은 명랑의 전기 끝에 그 후손들의 뒷이야기를 적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울 무렵, 소란을 피우는 해적을 광학(廣學)과 대연(大緣) 등에게 부탁하여 비법으로 물리친 일이 있었다. 이들이 명랑의 계통을 이은 사람들이다. 태조는 현성사(現聖寺)를 짓고, 이들 종파 곧 신인종이 지낼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명랑이 개창하여 안함(안함), 혜통(혜통), 융천사(융천사) 등의 대표적인 승려가 속한 신인종은 광학과 대연에 이르러서도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인종의 활약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은 광학과 대연에 대해 붙인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이 기록이 돌백사(堗白寺) 주첩(柱貼)의 주각(注脚)에 실린 것이라 했다. 주첩은 상급 관청에 오르내리는 공문서를 말한다.
“경주 호장 거천(巨川)의 어머니는 아지녀(阿之女)이다. 그 어머니는 명주녀(明珠女)이고, 그 어머니 적리녀(積利女)의 아들 광학과 대연 형제 두 사람은 모두 신인종에 들어갔다. 931년, 태조를 따라 서울로 가 왕을 모시고 향불을 피우며 수행했다. 그 노고에 상을 내리고, 두 사람 부모의 기일보(忌日寶)를 돌백사에 주었는데, 전답 몇 결(結)이다.”
돌백사가 지금 어디인지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광학과 대연은 줄곧 태조를 모시며 활약했고, 그 공으로 태조는 다시 전답을 주며 격려했던 것이다. 보(寶)는 신라 이래 절이나 학교 그리고 지방관청이 주관하는 고리대금업이었다. 여기서 얻는 이자로 각종 공공사업의 자금에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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