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산 사람 잡는 분묘기지권
취득하고자 하는 토지에 묘지가 있다면 아마도 무서운 생각이 들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땅이라는 생각에 쉽게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묘지는 토지 중에서도 이른바 명당자리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좋은 자리에 들어서기 때문에 취득하려는 토지 규모가 협소할수록 묘지가 토지 및 토지이용가치에 미치는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다.
사실 토지에 묘지가 있는 경우 묘지 설치자가 자진하여 묘지를 이전하지 않는 한 함부로 묘지를 이전하거나 개장할 수 없다. 묘지를 이전 또는 개장하기 위해서는 묘지 설치자 내지 승계인(자손)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어떤 대가(금전적 보상 또는 대체 명당자리 등)도 없이 묘지를 이전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토지가 제3자에게 이전됐다고 해서 반드시 묘지를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건물을 위한 법정지상권 개념과 유사한 묘지를 위한 분묘기지권이 성립할 수 있기 때문에 묘지 설치자 또는 승계인 입장에서도 그리 급할 것이 없다.
분묘기지권은 타인의 토지에 분묘를 설치한 자가 그 분묘를 소유하기 위하여 분묘의 기지부분인 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로서 관습으로 인정된 지상권과 유사한 물권을 일컫는다. 다만 지상권은 지료청구권을 수반함과 달리 분묘기지권은 원칙적으로 사용대가가 무상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분묘기지권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봉분 등 외부에서 분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추고 있어야 하고, 평장되어 있거나 암장되어 있어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외형을 갖추고 있지 아니한 경우에는 분묘기지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분묘기지권의 존속기간은 당사자간 기간 약정이 없고 분묘 설치자 또는 승계인이 분묘의 수호와 봉사를 계속하는 한 영구적으로 존속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2000년 1월 12일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이 장사 등에 관한 법률로 전부 개정되고 2001년 1월 13일 시행되면서 시행일 이후 설치되는 분묘는 그 존속기간이 30년으로 제한된다. 설치기간이 지난 분묘는 그 연고자가 시장ㆍ군수ㆍ구청장 또는 법인묘지의 설치ㆍ관리를 허가받은 자에게 그 설치기간을 1회에 한하여 30년 연장할 것을 신청할 수 있으므로 총 60년의 존속기간이 인정되는 셈이다.
즉 묘지가 있는 토지를 매수한 경우 평생 또는 최장 60년간 분묘기지권이 성립해 토지 취득 후 개발을 염두에 뒀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 계획을 실현시키려면 그만한 대가가 따름은 기술한 바와 같다.
그러나 토지에 묘지가 있다고 해서 모두 분묘기지권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분묘기지권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토지 소유자의 승낙을 얻어 설치한 분묘이거나 토지 소유자의 승낙이 없이 분묘를 설치하고 20년간 평온, 공연하게 점유하여 시효취득을 한 경우 또는 자기 소유의 토지에 분묘를 설치한 자가 분묘에 관하여 별도 특약 없이 토지만 타인에게 처분한 때에 한하여 성립한다.
따라서 위의 세 가지 경우를 제외한 분묘, 즉 토지 소유자, 묘지 설치자 또는 연고자의 승낙 없이 해당 토지나 해당 묘지에 설치한 분묘(무단설치분묘 또는 불법분묘)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 개장할 수가 있다. 불법분묘 중 연고자를 알 수 있는 경우에는 3개월 이상의 기간을 정하여 그 뜻을 해당 분묘의 설치자 또는 연고자에게 알려야 한다. 연고자를 알 수 없으면 그 뜻을 공고하여야 하며, 공고기간 종료 후에도 분묘의 연고자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화장한 후에 유골을 일정 기간 봉안하였다가 처리하여야 하고, 이 사실을 관할 시장 등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유골의 봉안은 10년 동안 해야 하고, 봉안기간이 끝난 때에는 그 유골을 일정한 장소에 집단으로 매장하거나 자연장하면 된다.
통보 및 공고방법은 분묘의 연고자를 알고 있는 경우에는 묘지 또는 분묘의 위치 및 장소, 개장 후 안치 장소 및 기간, 공설묘지 또는 사설묘지 설치자의 성명ㆍ주소 및 연락방법, 기타 개장에 필요한 사항 등을 문서로 표시하여 연고자에게 알리면 된다. 반면에 분묘의 연고자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중앙일간신문을 포함한 둘 이상의 일간신문에 공고하거나 관할 시ㆍ도 또는 시ㆍ군ㆍ구 인터넷 홈페이지와 하나 이상의 일간신문에 공고하되, 두 번째 공고는 첫 번째 공고일로부터 40일이 지난 후에 해야 한다.
불법분묘 외 연고자가 없는 무연분묘(無緣墳墓)의 경우에도 개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무연분묘란 보건복지부장관, 시ㆍ도지사 또는 시장ㆍ군수ㆍ구청장이 묘지 등 수급계획의 수립 또는 무연분묘의 정리 등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일정한 기간 및 구역을 정하여 실시하는 일제조사 결과 연고가 없는 묘지로 드러난 묘지를 말한다.
시ㆍ도지사 또는 시장ㆍ군수ㆍ구청장은 무연분묘에 매장된 시신이나 유골을 화장하여 봉안할 수 있는데 화장하여 봉안하기 2개월 전에 묘지 또는 분묘의 위치 및 장소, 개장 후 안치 장소 및 기간, 연락처, 열람 등 개장에 필요한 사항 등을 불법분묘와 같은 방법으로 공지하여야 한다.
분묘기지권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는 또 있다.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한 주거지역ㆍ상업지역 및 공업지역, 한강ㆍ낙동강ㆍ금강ㆍ영산강ㆍ섬진강 수계 물 관리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한 수변구역, 군사시설보호법 규정에 의해 설정된 군사시설보호구역 및 군사기밀보호법 규정에 의해 설정된 군사보호구역(국방부장관의 인정 또는 관할부대장의 승인하에 설치 가능)에는 원칙적으로 분묘설치가 제한되는 지역으로 분묘기지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이렇듯 토지(임야, 전, 답 및 과수원 등)에 분묘가 있으나 분묘기지권이 성립하지 않는 것도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 분묘가 있는 토지는 가급적 취득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제법 규모가 있는 토지 한쪽 귀퉁이에 묘지가 있어 토지 사용에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분묘기지권이 성립하지 않아 묘지를 개장하거나 이장할 수는 토지로서 입지가 좋아 욕심이 나는 물건이라면 무조건 피할 것만은 아닌 듯하다.